일본은 17세기 초부터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엄격한 쇄국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 함대가 일본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일본인들의 서양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1854년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라는 젊은 사무라이는 친구 한 명과 함께 페리 제독의 기함인 포우하탄 호까지 작은 배를 타고 가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페리 제독은 이들의 용기에 감동했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에도 막부의 허락 없이 나라 밖으로 나가면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페리 제독은 이들의 불법행위를 도와주다가 미국과 일본의 조약 체결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판단하에 승선을 거절했습니다. 두 사람은 하선 즉시 체포되어 에도로 이송된 후 가택연금 되었다가 나중에 참수되었습니다.
미 해군 함대가 일본에 출몰했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갓 성인이 되었습니다. 요시다 쇼인만큼 훌륭한 가문의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요시다와 달리 서양으로 가는 길을 신중하고 단계적으로 밟아갔습니다.
후쿠자와는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데지마라는 인공섬으로 건너가 네덜란드어를 배웠습니다. 이후 일본이 네덜란드에 주문해서 건조한 간린마루(咸臨丸) 호에 승선하여 장교를 보필하는 업무를 맡게 됩니다. 1860년 2월에 간린마루 호는 막부의 명령을 받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까지 항해하는 최초의 외교 원정에 나서게 됩니다.
후쿠자와는 함께 승선했던 미국인 장교에게 속성으로 영어를 배웠고 프랑스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유럽 등으로 원정을 거듭하면서 서양의 다양한 지식과 문화를 흡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걸어다니는 안테나’라고 불렸을 정도로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열정적으로 배움에 임했습니다.
후쿠자와는 과학이나 기술에 관한 내용은 책으로 공부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문제들은 책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현지 사람들로부터 직접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을 만나면 수많은 질문을 하고 그들이 답변한 것을 꼼꼼히 노트에 받아 적었습니다.
후쿠자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지나가는 미국인에게 조지 워싱턴의 후손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물었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답변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이라면 쇼군의 가족이 사는 곳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국인들은 초대 대통령의 가족과 후손에 대한 공경심이 왜 이렇게 부족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죠.
영국에서는 서로를 적이라고 부르며 의회에서 험악하게 싸우던 정치인들이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 함께 식사하고 차를 마시는 광경도 후쿠자와의 눈에는 특이하게 보였습니다.
후쿠자와가 서양을 여행하면서 배우고 느낀 내용들을 종합한 책이 ‘서양사정(西洋事情)’인데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이 일본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1867년부터 한 가지 주제를 다룬 잡지처럼 원고가 완성될 때마다 한 권의 얇은 책으로 출간된 서양사정은 187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1867년부터 1870년까지 일본의 독자들은 미국 여학교의 일상,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 캘리포니아의 교도소, 전신국 직원들이 하는 일 등 서양의 소소한 지식들을 열심히 읽고 흡수했습니다.
후쿠자와는 서양 문명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막부의 통치자들에게 일본의 근대화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유용하고, 실용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가치 있는 지식의 대부분이 서양의 지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책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이 일본의 본질을 더럽히는 불결한 의견이고 일본의 사회적 결속력과 막부에 대한 충성심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주장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후쿠자와는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해가 진 뒤에는 외출을 삼갔습니다. 숨어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글을 쓰고, 사전을 편찬하고, 게이오대학(慶應義熟大學)를 설립하면서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1901년 독신이었던 후쿠자와가 홀로 66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일본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막부는 권력을 잃었고, 공식적인 사무라이는 더 이상 없었으며, 일본은 대외적으로 거의 완전히 개방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후쿠자와의 비전이 불과 30여년만에 일본을 봉건주의 국가에서 유럽 열강과 대등한 수준의 서구화된 국가로 변모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문명국으로 발전할 능력이 되지 않는 국가와 민족이라면 철저하게 버리고 일본만이라도 개화의 대열에 들어서야 한다”는 후쿠자와의 탈아론(脫亞論)은 주변 국가들에 엄청난 역사적 상처를 안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산업연구원 명예연구위원, (사)지역산업입지연구원 원장 홍진기 드림
첫댓글 좋은글에 머물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