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과 최동원을 가르켜 우리는 흔히 '불세출(不世出)의 명투수'라는 표현을 씁니다. 좀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요즘말로 따지면 '넘사벽'의 기량을 가진 선수라는 찬사겠지요. 최근 몇년 새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분이라면 이 두 투수의 활약을 그저 '설화'처럼 전해 들은 것이 전부겠지만, 최동원과 선동열은 역대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퍼포먼스로 그라운드를 장악한 한국 프로야구의 두 기둥입니다.
(박찬호를 빼고 저 두 사람만 기둥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래 본문에 나옵니다)
야구인들은 최동원이나 선동열같은 투수에게 '에이스'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그라운드의 황제, 팀의 모든 운명을 자기 어깨에 짊어진 고독한 싸움꾼. 경기시작 벨이 울릴때부터, 마지막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를때까지 혼자서 마운드를 지키는 태산같은 수호신.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터치' 속 우에스기나 'H2'의 히로처럼, 100개든 200개든, 9회든 10회든 간에 혼자서 상대를 모두 쓰러트리는 불사신 철완. 그런 투수를 에이스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은 공을 좀 잘 던지고 삼진을 많이 잡는다고 얻을 수 있는 영예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에이스는 바로 그런 투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이스라는 명징한 이름표는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로테이션에서 첫번째 나오는 투수.
지금 한국프로야구 각 팀에서 제일 잘 던지는 8명
재작년에 어떤 구단에서 1번선발이었던 아무개.
1년에 가장 많은 선발등판을 한 투수
이런 선수들을 전부 에이스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요.
적어도, 그런 영광스런 이름이 어울리는 투수라면, 거기에 맞는 '격'을 갖춰야 됩니다.
혼자서 그 경기를 온전히 책임지는 존재
자기가 던지는 공만으로 팀을 완전히 격상시키는 힘을 가진 투수.
타자가 치는 것을 구경하는 것 보다 자기가 던지는걸 구경하는 것이 더 재밌어지게 만드는 선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번의 승리를 챙기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최동원
15이닝을 완투하고도 이틀쉬면 또 나와 던지며 소속팀을 사상 최강으로 만들던 전성기 선동열처럼
혼자서 팀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생각하는 그런 에이스는 2000년대 들어오면서 계보가 완전히 끊겼습니다.
정민철의 불꽃같던 8년, 그리고 이상훈과 김상진의 잠실 맞대결이 제 기억속 마지막 에이스 싸움입니다.
말하자면, 불세출의 에이스란 이제 과거의 잔상이 됐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금 시대 투수들의 기량이 예전보다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윤성환도, 윤석민도, 송승준과 나이트도 모두 훌륭한 기량을 가진 첫번째 선발투수니까요.
다만,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됐고, 불펜과 마무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현대식 분업야구가 정착된 덕이지요.
이제 야구인들은, 선발투수가 9회까지 던지는 것이 (승리를 위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발투수가 3회에 맥없이 나가 떨어져도, 정현욱-권혁-정인욱-안지만-오승환이 1이닝씩 막는게 선진(?)야구니까요.
그 와중에, 제가 멸종됐던 에이스의 부활을 명징하게 목격한 장면이 있습니다.
2006년 4월 12일 잠실. 1회 선두타자 안재만에게 2-3에서 151Km직구를 던지던 모습
2010년 5월 11일 청주. 9회 둘째타자 이병규에게 148-149-147Km직구를 던진다음 133Km체인지업을 던지던 모습
2012년 10월 4일 대전. 연장 10회에 등판해 129번째 공을 152Km직구로 꽂던 모습
아시겠지만, 모두 류현진이 던진 공입니다.
첫번째는 데뷔전 첫타석 그 긴장되던 순간에 풀카운트에서 삼진을 잡던 공이고
두번째는 한경기 최다탈삼진 기록을 세운 날, 전타석에 홈런을 친 작은 이병규에게 17번째 삼진을 잡던 공이며
세번째는 올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어떻게든 1승을 더 올려보려고 연장 10회에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공입니다.
30년 전에 화질 나쁜 TV로만 보던 전설속 대 투수의 아련한 풍경이 거기 있었습니다.
초특급 고교생이 주인공인 흑백판 일본 만화책에서 보던 뜨거운 그림이 거기 있었습니다.
수비의 도움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 듯, 마치 내가 던지는 공만으로 이 경기의 운명을 좌우하겠다는 거만한 투수처럼
그야말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진짜 [에이스] 말입니다.
에이스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투수가 '수비'한다고 생각하고 타자가 '공격'한다고 믿지만
저런 투수들은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했습니다.
강철같은 어깨로 경기 내내 묵직한 공을 던져 타자들을 위협했고
타자들은 얇디 얇은 방망이로 스트라이크존을 지켜내기 급급해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수비'했습니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공을 보지 못한 팬이라도
야생마 이상훈의 오만한 얼굴과 자신만만한 제스처를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류현진이 던지는 공을 보신 분이라면, [투수가 공격한다]는 제 말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은 그 공이 빠른직구냐 아니냐, 몸쪽이냐 바깥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운드에서 쏘아진 그 공이, 관중들을 얼마나 몰입하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명제를 확인하게 하는,
[점수가 안 나야 진짜 재밌는 야구다]라는 일부 마니아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게 하는 그런 공
이런 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던져대던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투수
그런 투수가 이제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거꾸로 쓴 그 투수에게 한마디 전하고자 합니다.
"저 투수에게 반드시 안타를 쳐내라"고 응원하지 않고
"꼭 저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라"고 응원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응원팀의 공격보다 수비가 더 재밌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 수비가, 사실은 공격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게 해 줘서 너무 믿음직스러웠습니다.
당신이 뛰던 한화는 오랫동안 힘없는 꼴찌였지만
그래도 당신이 마운드에 서 있는 날에는, 이글스가 KBO에서 가장 강력한 팀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지금껏 더 많은 승리를 안겨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그만큼 당신이 군계일학 빛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도, 이글스의 환경 아니었을까 하는 이기적인 위로를 건네봅니다.
야구의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
최동원과 선동열의 '그것'을 물려받은 유일한 투수
그러니까, 이 시대 유일한 진짜 에이스.
류현진의 뒷모습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99번은, 늘 당신의 것입니다.
첫댓글 읽고난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가득한 에이스 고별사였습니다.. ㅜㅜ
너무 잘읽고 갑니다!!
저도 소름과전율이 쫙 ㅜ ㅜ 그의 앞날이 다 빤짝빤짝빛나길 바랄게요!!!!!
엘지전 17번째 삼진은 큰 이병규 아닌가여?
1번선발님의 글은 언제봐도 훈훈해요..
짠~ 하네요.
태클은 아니지만 본문에서 한경기 최다 탈삼진 17번째는 작은 이병규가 아니고 마지막 아웃카운트 대타로 나온 큰 이병규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아쉽지만 보내줘야 겠네요... 우리 에이스 7년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
'대한민국 최고 에이스가 우리팀에 있다'란 자부심에 '메이져리그에이스가 우리팀에 있었다' 라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게 가서도 최고가 되길 바랍니다. 가는 순간까지 바라기만 하네요.
25년전쯤 해태와 선동열선수를보며 야구를 알고 아구팬이된뒤 박찬호의 활약을 보고 마음속으로 박찬호선수와 LA다저스가 이기길 간절히 바래왔는데 이제 한화 아니 대한민국의 에이스 류현진 선수가 10여년전 박찬호형님이 호령하던던 마운드에서 다시뛸 모습을 상상하니 내년이 기다려지네요 내년엔 찬호형님 때문에 LA다저스의 팬이었던 사람들이 다시금 팬으로 돌아와 응원해줄겁니다 한화와 다저스 둘다 응원하려면 바쁘겠네요ㅎㅎ
내년 시즌에 류현진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그 빈자리를 FA등을 통해서 잘 메우길 기대합니다. 내년 용병 한자리를 투수로 잘 데려오길 기대할께요~~
승승장구하길 빌어봅니다. 이글스의 에이스여 비상하시길... 아무에게나 에에스의 칭호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제 꿈을 꿨습니다...생전 처음 야구 꿈을 꿨는데..류현진 선수가 메이져리그 선발 등판하는(다저스였던듯..ㅋ) 모습을 봤어요..첫 공을 던질때 긴장한 탓에 오른발을 움직여서 보크 선언을 받았고..이후 3타자를 땅볼 삼진2로 잡더군요..ㅎㅎ..이런 꿈을 꿀줄이야..꿈이었지만..뭔가 짠한 느낌이 일어나서도 가시지가 않았습니다...메이져로 가는 기대감보다 한화를 떠나는 아쉬움이 더 컷나봅니다..
점점우리곁을떠난다는것이현실로다가오는거같아슬프네요하지만내년메이저마운드에서볼수있어흥분되네요.그동안고생많았어요
감동이에요
캬 글에 취하는것 같네요
멎지네요
너무 좋은글 다시한번 읽고 갑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현진이 볼일이 없겠지요? 연말에 빼고는...^^
이제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그런투수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화이팅 입니다...
투수가 공격한다...... 멋진 표현이네요.
절 야구에 빠지게 한 장본인... 우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던 에이스... 류현진...
정말 잘됐으면 좋겠고 1번선발님 처럼 수비 보는 재미가 있었죠... 유일하게... 참 아쉬워요 ㅠㅠ
메이져 리그 가서 잘했음 좋겠고... 훗날 다시 한화 이글스에 돌아와서 은퇴를 했으면 좋겠어요...
멋집니다
글 정말 감동이네요ㅠ.ㅜ. 불멸의 에이스 우리 현진이... 이글스에서는 불운한 에이스였지만 다져스에 가서는 박찬호의 최다승을 깨주었으면 좋겠네요.. 등번호 99번...이글스의 또하나의 영구결번이 탄생하길......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ㅠㅠ
글 정말 감동입니다...ㅠ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치고, 한화로 복귀해서,
99번은 영구결번이 되길 바래요 현진선수
감동이다ㅜㅜㅜ 가슴이 먹먹해지네요ㅜㅜ
뭉클하네요ㅜ_ㅜ 현진선수 더 멋진선수가되어서 돌아오길 ^^*
현진이도 이글스도 더 많이 성장하길 바래요 ㅠㅠ 둘다 화이팅입니다!!!
ㅠ.ㅠ 최하위 팀을 응원하면서 한 번도 기죽지 않게 해 주었던 우리 에이스 앞 날에 찬란한 빛만 비추길... 기원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ㅠ.ㅠ
좋은글 감사합니다. 류현진이 서 있을 땐 제일 강팀이었다는 표현 감동입니다^^
멋진 글입니다 많이 공감도 가구요ㅎ
공감합니다. 류현진 등판하는 한화경기는 공격보다는 수비가 기다려졌었습니다. 그가 어떤 역투를 펼칠지 언제나 기다려졌으니깐요
류현진이 아이들에게 한말이 새삼 생각나네요....수비 믿지마...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2000년대에 에이스라고 말할 만한 투수는 이글스의 류현진선수랑 삼성의 배영수선수뿐이었다고 보네요..
그래도 당신이 마운드에 서 있는 날에는, 이글스가 KBO에서 가장 강력한 팀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마운드에 오르는 날은 이글스는 최강의 팀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보내야 합니다...그러나 마음속에는 영원한 이글스의 에이스로 남을겁니다. 류현진선수 그동안 너무 즐거웠습니다...
류현진은 감동을 주는 선수였습니다. 신난다, 짜릿하다라는 느낌 외에 뭉클하고 짠하고 뭔가 태산같은 기분을 느꼈지요. 1번선발님은 참... 이런 글을 쓰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