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20) 세계를 놀라게 한 독립군 3대 승리의 시작
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시가, 부자촌이던 일본인 거주지로 보여진다. 니항에는 고려인 거주지, 중국인 거주지, 시베리아 원주민 거주지 등등이 있었다.
휴전기간 3일 동안
니항의 일본군과 파르티잔 사이에 평화를 위해, 여러 조건들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트리피츤과 파르티잔들은 평화 조건을 논의할 때 놀라운 외교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비교를 위해 일본군의 몇 가지 요구 조건과 이에 대한 파르티잔들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일본군 : (츠니르라흐 요새에서) 항복한 포병과 그들의 무기를 일본군 사령부에 넘겨라.
파르티잔 : 일본 측의 중립 준수 선언 제1항(극동에서 일본 군대의 중립 준수에 관한 시라미즈 중장의 선언을 의미합니다. - 저자 스말야크) 및 국제 치외법령에 의거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군 : 도시에 들어오는 붉은 군대의 수를 제한합니다.
파르티잔 : (극동에서 일본 군대의 중립 준수에 관한 시라미즈 중장의 선언) 선언문의 같은 단락에 근거하여,
우리 군대가 소비에트의 노동자 농민 군대, 즉 질서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중앙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의 군대라는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일본군 : 일본인과 러시아인을 포함한 모든 포로를 석방하십시오.
파르티잔 : 우리는 상대방이 공격하지 않는 한 항상 국제법을 준수합니다.
일본군 : 어떤 순서로 도시에 들어가려고 하며, 어떤 형태의 새로운 도시 정부를 만들고 싶습니까?
파르티잔 : 소비에트 권력이 만들어졌습니다. 도시 진입 절차는 협상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이라고 말했다.
파르티잔들의 확고한 입장은 결국 일본 측이 파르티잔들이 제안한 평화 조약의 조건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일본군과 파트티잔들의 평화조약 내용
1920년 2월 28일, 츠니르라흐(Чныррах) 요새에서 아래와 같은 조건으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 시라미즈 중장의 중립 선언을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주둔 일본 사령부가 무조건적으로 이행.
(2) 니콜라예프스크 시내 백파군대의 완전한 무장 해제와 모든 무기와 장비의 인도 (무기 인도 장소는 파르티잔들이 추가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3) 우리가 시내에 들어와 우리의 초소로 교체할 때까지의 모든 초소는 일본군이 점유해야 합니다.
(4) 일본군은 앞에 작성한 사항이 충족되면 모든 경비 업무는 우리 군부대에 넘겨주고 파르티잔이 지시하는 장소부지에 머물러야만 한다.
일본군 주둔 부지 문제는 일본군과 우리 사령부가 공동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전선의 붉은 군대 대표는
또한 첨부된 니항 주둔 일본 사령부의 조건 이행에 대한, 응답으로 니항 일본군 사령부가 제안한 요구 사항을 이행할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 합의를 정확하고 불가침하게 이행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상 일본군과 파르티잔 부대의 협정 내용)
1920년 2월 29일 니항 해방 (니콜라예프스크 해방)
1920년 2월 29일 아침,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의 주민들은 도시에 진입하는 파르티잔 붉은 군대를 엄숙하게 환영했습니다.
1920년 니항 사건 당시의 파르티잔들, 아무르강에는 얼음에 갇힌 여러척의 선박들이 보인다.
1920. 2. 29. 일경 아무르강 강변에서 열린 파르티잔 환영식.
박일리야 장군이 지휘하던 200여명의 고려인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 독립군 3대 승리의 시작
과거 독립운동사에서는 1920년 니항 사건(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1920년도 일어난 3가지 독립군의 큰 승리로 봤습니다.
1920년 초의 니항사건은
전 세계언론과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 내의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역시 온갖 선전을 하다가 안되니, A.Y.구트만 등의 친일파들까지 앞세워 각종 책자까지 발행했었다.)
그러다 보니, 박일리야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 부대가 1921년 자유시참변 이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 참가했던 독립군들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1920년 2월 29일 발생한 니항 해방은
당시 7만에서 ~ 13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시베리아와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으로부터
'사할린주'라는 한반도 육지면적과 비슷한 크기며 자원의 보고였던 지역을
한순간에 일제 침략자와 백파 악당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킨 대사건으로
한 때 수억 사람들이 불렀던 ‘스파스크 폭풍우의 밤’
전세계 제국주의 식민지 국가 독립운동 세력과 압제와 폭력에 맞섰던 아나키스트를 비롯한 온갖 혁명세력의 축전이 전 세계로부터 쏟아졌으며
유명한 음악에다가 일부 유격대의 노래가
“스파스카 폭풍우의 밤.......” 등으로 가사까지 지어 부르며,
(스파스카는 오늘날 연해주 스파스크-달리니(Спасск-Дальний)시의 과거 명칭으로, 스파스크의 명칭은 여러차례 변경되었다.)
오늘날까지 프랑스, 이탈리아, 남아메리카, 독일, 유고슬라비아, 베트남,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 일본?, 0한 등까지 최소 수억에서 수십억명이 한번쯤 들어본 음악이 되겠습니다.
중국에서는 아직도...부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ㅎㅎ
문제는 0한인데...
1945년 분단이후 이곳의 지도자로 부상한 김일성은 하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거주한 적이 있었고, 그 노래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남로당의 박헌영 등은 1920년 니항 사건, 1921년 6월의 자유시 사건에 관련된 이르쿠츠크파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김낙현(김이노껜지), 이지택(독립유공자), 최호림(독립유공자)’ 과는
직접적인 큰 관련도 없었습니다.
다만 권력투쟁중 ‘종파주의자’라는 누명까지 썼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한국 공산주의자 간의 파벌 투쟁도 또한 얼마나 심했는지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해방과 관련될 수 있는 노래는 냉전시대 남한에서는 당연히 금지곡이었고, (형법,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으로 금지)
1920년 니항 사건을 다루면
러시아에서 일어났다는 특성상 공산권과도 약간 관련되기 때문에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 비해서 언급이 많을 수가 없었습니다.
니항 인근 츠니르라흐 요새의 근래 모습
니항 인근 마가 마을
니콜라예프스크 인근 마가 마을
1919년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
첫댓글 파르티잔들의 확고한 입장이 일본 측에 제안한 평화 조약의 조건에 동의하도록 만들었군요 과거 독립운동사에서 니항사건이 3가지 독립군의 큰 승리로 봤군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계적으로는 청산리전투보다 더 유명한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