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는 7살때 늦봄에 5살먹은 이모님과 외할머니를 따라서 두암에서 부안촌으로 이사를 오셨고
우리 아버님은 1899.12.22일 부안촌에서 태어나셔서 돌아가실 때가지 83년간 부안촌에서 살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자기가 태어난 고창 부안면 사창에서 6살때 추석이 지난후 소성면 두암으로 이사를 갔드랍니다
외할머니는 자기가 나고자란 정든사창을 눈물을 흘면서 어린두딸을 데리고 떠나왔드랍니다
이유는 새끼들은 (딸들이라도 자식은) 애비 그늘에서 키워야한다는 옛날 어른들의 가르침에서 였답니다
그시절에는 집이나 논밭을사던지 이사할때는 거으가다 점쟁이한테 점을하던 시절이었기에 면소재지인
알미장터의 용하다는 점쟁이 한테가서 점을하고 택일을 받았드랍니다
점쟁이는 이사갈날자와 시간을 가르쳐주면서 당장아버지 옆으로가지말고 아버지집 남쪽에서 해(설)를
넘기고 봄에나 아버지가사는 춘수리 동쪽으로 이사를 가라고 하드랍니다
그래서 춘수리 남쪽인 두암으로 임시방편으로 이사를 하였답니다
이사하기 전부터 살림살이 괴짝들 (작은가구들) 쌀 간장 고추장 여러그릇 농기구등을 사창에서 두암으로
두구루마가 (소달구지) 먼져갔는데 일꾼들이 마당가운데에 비가안맞게 짚으로 잘단도리를 해놨드랍니다
그리고 두암에서 살면서 춘수리의 동쪽인 부안촌에 쌀세짝반을주고 집을사놓고 (16평짜리 초가집 그곳에서
우리5남매가 태어나고 자랐음) 논800평과 밭400평도 사놓은후 이듬해 늦봄에 이사를 왔드랍니다
두암에서는 중돼지 한마리와 닭도 두마리를잡고 떡도하고 술도넉넉하게 준비하여서 인근마을인 쑥댕이와
봉양 사람들까지 잘대접을 하였드랍니다
두암마을에서는 이희학 소성면장님네 부자인 큰각시가 (본처) 이사왔다고 아주좋아들 하였드랍니다
두암에서 설을지내고 봄이되면서 외할머니는 이사와서먹을 채소등을 가꾸시느라 무척이나 바쁘셨드랍니다
외할머니가 부안촌으로 일을하러 가셨을때는 우리어머니는 이모를 데리고 서당공부를 함께하는 두살더먹은
부잣집인 김순이남매네 친구집에서 밥을얻어먹고 잠을자면 저녁에 외할머니가 데리러 오셨드랍니다
7살 어린중정에도 (마음) 아버지가 작은각시를 얻었으니 어머니가 어디로 도망가버리면 어린동생을 데리고
사창 일꾼네 집에가서 어떻게살까를 걱정을 하면서 친구집에서 잠을잤드랍니다
두살덜먹은 이모는 아무런 철이없어서 저녁밥만 먹으면 잠을자게 보듬어 달라고 울면서 볶아대드랍니다
늦봄에 부안촌으로 이사를오니 부안촌 사람들은 봉하나 잡았다는듯 두암서보다는 무엇든지 음식도 배는더
장만해야 한다고하면서 돼지도 큰놈으로잡고 떡도 찰쌀떡은두말 모떡은한말을 해야한다고 하면서 부안촌
사람들은 춘수리나 등거물 사람들보다 술도겁나게 잘먹는다고 해쌋드랍니다
사창에서 옛날일꾼 세사람이 이삿일을 도와주러 왔는데 부안촌 사람들은 두암사람들 안같고 솔차니 억시고
(드세고) 면장알기를 동내구장으로 취급하고 있었으며 술도고래들 이라고 하드랍니다
그때 7살이든 우리어머니가 이모를데리고 사창일꾼들 셋이서 모시밭과 서쪽샘옆 넘서밭일을 하는걸 구경가서
보았는데 땀을흘리면서 번개같이 일을아주 잘하드랍니다
우리어머니는 평생동안 그렇게 일을잘하는 사람들을 본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창일꾼들은 해마다 봄에는 대바구니에 뚜겅을덮고 병아리 여남마리와 (10여마리) 취나물등 산나물들을
가지고와서 일도며칠씩 해주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창일꾼들은 갈때마다 어머니와 이모를 한번씩 보듬어 보고난후 눈물을훔치고 전송허는 외할머니도
눈물을 닦는것을 보았드랍니다
우리어머니는 부안촌으로 이사온후 부터는 외할머니가 새벽부터 논과밭으로 다니면서 부지런하게
일을하는걸 보고는 어디로 도망가는 걱정을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어머니 아버지에대한 고마움 그리움 그리고 그분들의 인생이 그분들이 수백번씩 건너다녔던 띠받머리의
그냇물처럼 흘러가버리면서 안타깝고 슬펏던일 억울했던일 즐거웠던일등을 이정도에서 줄이겠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이남은 여러가지 못다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우리 아버지가 20대청년 시절에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던 처작은 아버지의 꼬임에 빠져서 전재산을잃고
죽고싶도록 괴로웠던일 그일때문에 평생을 어머니한테 구박을 받으면서 평생을 쥐어서 살으셨던일
그렇게 사랑했던 그렇게 소중했던 그렇게 희망이든 4살먹은 해만이가 죽어버렸을때의 슬프디 슬펏던일
(글을쓰면서 제일로 눈물을 많이흘린 일본놈 군가도 잘부르던 그렇게 영리했던 해만이의추억 이었네요)
초등학교를 졸업시킨 큰딸을 농중다니는 (정읍농고) 사위에게 (유동열) 시집보내얻었던 자랑스러웠던일
당신의 4형제들 자식중에서 처음으로 큰아들을 (오해방) 정읍중학교에 입학시키고 날마다 즐거웠던일
6.25때 아버지는 빨치산들에게 두암낭갓에서 (산이름) 두들겨맞고 어머니는 춘수리에서 빨치산놈의 새끼가
쇠몽둥이같은 총으로 갈빗대가 부러지도록 가슴팍을 두번이나 사정없이 찔러대서 숨도못쉬고 기절했던일
큰어미소와 새끼소를 (논1800평값) 그놈들한테 빼앗기고나서 몇달간을 울면서 절망했던일
큰아들이 눈이한질씩 (사람의키만큼) 온다는 강원도 양구에서 첫휴가 왔을때 겨울인데도 장갑도없이 산속에서
나무를하다 온손등이 다긁혀서 검은상처 투성이인 손을둘이서 한쪽씩잡고서 말없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안타깝고 애절하고 그리운모습
큰아들이 큰딸금선이를 낳았을때 음력2월 이기에 산모는 따뜻해야 한다고 하루종일 며느리 방에다 아끼고
아끼던 장작으로 불을때 주시던 시아버지의 한없는사랑
작은아들이 정근이를 낳았을때 딸만넷을낳은 큰며느리가 짠하고 어려워서 내놓고는 축하도 못하시던일
어머니는 (43세) 아버지는 (49세) 에낳은 막내아들인 제가월남 전쟁터에간지 한달만에야 아시고 근한달을
굶다싶이 하셨다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식에대한 한없는 사랑과 안타까움 그리고 가여운정
(월남에 간다는 이야기를 작은형님께만 이야기하면서 절데로 말하지말라고 약속했었는데 깨졌음)
언제든지 몸조심하고 다치지말고 건강하게 잘있다가 와야헌다이 (큰형님의 애절한 편지두장)
그놈들이 (베트공) 소대장을 제일로먼저 쏴죽인다는디 어찌야쓰까이 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는 우리어머니
(어머니가 춘수리 친정집에 갔다가 연동외숙모와 이야기중 크게우는 소리를들은 초등동창 유필례가 2014년
늦봄에 북한산 영봉에서 오해봉씨가 월남에서 죽었드라면 이좋은곳을 못와봤을것 이여이했음 유필례는
외가인 이상영네집 아랫집에서 살았음 동창이고 외갓집동생인 이상영은 십자성부대로 월남에 다녀왔음)
38살에 홀로된 작은딸을 수십년간 죽을때까지 밤에잠을 자다가도 걱정하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애절한사랑
눈둘 원불교 교당에간다고 큰아들한테 얻어내는용돈 읍내에사는 작은아들 작은며느리 대전큰딸 익산해금형님
전방에서 군생활하는내가 1년에 한두번씩 만날때마다 500-1000원씩 용돈을드리면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것까지
다뺏어서 압다지 (부모님께서 사용하시던 낡은목재가구) 구석에 잘보관 했드랍니다 (그때 500원은 퍽큰돈 이었음)
그래고 눈둘 교당이 파하면 산속길로 용산 산속의 작은딸네집에가서 작은딸손에 그돈을 쥐어주고 왔드랍니다
어머니는 너가부지도 (너의아버지도) 아까그돈 이리주소이하면 두말도안허고 다내논다이 (다준다이) 하면서
한번도 싫은기색을 안히서 (안해서) 고맙다이 (고맙단다) 하셨습니다
73세의 어머니 79세의 아버지께서는 처음으로 광주에서 제주도가는 비행기를 타보시고 좋아하시든모습
제주도가 꽃나무도많고 폭포도겁나그만이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를 구경한후) 밥이고 우동이고 음석들이 (음식)
참말로 맛있네이 만덕할머니가 살던집이 (그무렵 KBS 인기드라마) 어딘가 못가봐서 서운하네이 글씨말여이
하면서 어디에서든 여러사람들을 웃게하시던 한복을입으신 그초라한 모습이 지금은 아련하고 그립기만 하답니다
우리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의령남씨) 작은것한테 34살에 서방을 뺏겨서 아들을 못나본것
오가덜집 기둥이던 큰집조카가 (오해완 1923년생) 공산당한테 죄도없이 잡혀가서 불에타서 죽어버린것
이복동생의 외아들이 (이무영 1938년생) 중학교 3학년때 신태인으로 돈을갖고 가다가 강도당하고 죽어버린것
작은사위가 43세에 억지로 (전기감전) 죽어버린것이 3가짓일이 질로 (제일로) 안타깝고 절통하다고 (분한것)
하셨으며 범적굴 절에갈때마다 극락왕생하라고 다리가 아프게 절을하면서 부처님께 불공드린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1987.7.6일 양력 8.29일) 2주쯤전날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면서도 내손을잡으시고 늬성들은 (형)
못믿으니 막둥이늬가 늬생전에는 꼭해마다 손이없는 사창 우리외할머니 우리외할아버지 산소에 밥냄새와
술냄새를 꼭맞혀 드려라이 하시기에 그려 향도피워드리고 떡이랑 과일도 잘대접할께이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힘을주어 내손을 꼭잡으시면서 그려이 꼭 그러소이 (그래라) 라고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인 그유언을 봄가을로 거의잘지키다가 2015년 봄에 이종형님의 (故이상선 1944년생)
제안으로 (화장과 이장비용 80만원도 상선형님이 부담) 외증조부모님을 사창산소에서 화장한후 우리 뒷동내인
새내이모님네 선산에 잘모셨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고향마을 부안촌에서 평생을 살면서 앞으로는 꽃두레산 방장산 뒤로는 두승산을
쳐다보시면서 묵묵히 계절과 시절에 순응하시면서 농사만 지으시면서 한평생을 고생만하시고 살으셨습니다
맛있는것도 좋은옷도 새끼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참고또침고 견디셨습니다
그리하다가 결국은 하늘나라로 떠나가셨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내앞산인 입암산과 방장산은 한번도 못올라가 보시고 어머니는 두승산을 대여섯번정도
(절에가느라) 아버지는 젊었을때 서당촌 큰고모부님을 따라서 두승산 말봉에한번 올라가봤다고 하셨습니다
1899년생과 1905년생인 두분께서는 82세 동짓달에 6년사이로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83세봄과 여름에 영원한
여행길에 드셨답니다
슬하에 딸(오초순 1927년생) 아들(오해방 36년생) 아들(오해팔 39년생) 딸(오초자 41년생) 아들(오해봉 47년생)
5남매를 두었으나 저희는 모두가 못해드린것이 더많았던 불효자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부모님 산소에가서 성묘를 드리면서 절을할때마다 죄송하고 못해드린것들만 생각이나서 언제나
죄스럽고 안타까운 회한만 떠오른답니다
부모님의 산소에가서는 비가오는 날이나 눈이오는 날이나 무릅꿇고 3번씩 절을할때는 언제나 목이메인답니다
저는 1999;12.22. 아버님탄신 100주년 봉행추모행사때 나는 형님들과 누나들께도 우리 부모님 산소에서는
절을3번씩 해드리자고 하였습니다
2000 몇백년전에 멀리인도에서 전파되었다는 남의나라종교인 부처님께도 3배를 드리는데 우리는 부모님께
효도도 제대로 못해드렸으니 절이라도 3번씩 해드리자고 했더니 절실한 불교신자인 큰누나 제일먼저 좋다고
하시면서 찬성을하자 큰형님 작은형님 작은누나도 쾌히 동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저는 우리부모님께는 절을3번을 하고있답니다
그후 큰형님과 작은형님께 물어봤드니 잊어버리고 2번씩만 했다고 하셨으나 누나들은 내가시킨데로 3번씩
했다고 하셨습니다
산을좋아하는 저는 한달에한번씩 2007년여름 덕유산에서 이영진님 공용철님과함께 함께만든 녹두산악회
회원들과 지리산이나 덕유산등 남쪽산에서 하룻밤씩 야영을하고 돌아올때는 언제나 고향마을뒷산 부모님의
산소에 텐트를치고 통상 4박5일간 길게는 11박12일간 산소에서 먹고자면서 내장산 입암산 방장산 선운산
두승산 무등산등을 올라가보고 집으로 간답니다
이글을 2006.4.2.(음) 저의 회갑때 책으로 출간하려고 했으나 저의 큰형님께서는 어머니와 배가다른 여러외가
친척들과도 옛일은 묻어두고 잊어버리고 서로왕래도 잘하고 우애하면서 잘지내는데 그만두는게 좋겠다고
하셔서 일단은 접었답니다
(형님들과 누나들께 궁금한것들을 문의드리면서 여러자료를 구하다보니 큰형님께서 우려하셨습니다)
그후에 작은형님과 작은누나의 응원과 우리형제들 에게는 어머니와같은 줄포외숙모님의 간절했던 유언과
외가를 대표로한 옹상길 이종형님의 묵시적인 응원으로 저의졸필이 세상으로 나오는것 같습니다
선후가 안맞고 시대의 흐름 종교 정치성향등 각자의생각이 다르드라도 이글을읽는 후손들에게
사람사는 도리와 효도
그리고 형제간 친척간의 우애와사랑
이웃과 사회에 대한배려
자기발전을 위함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이렇게 슬프고 답답하고 애닯고 가엾고 골이깊었든 섭섭했던 일등으로 엮어진 고난속의 여러일들이
어우러진 글이지만 각자의 인생과 서로의삶에 보탬이 되었면 좋겠습니다
사람에게 황금같은 청년시절은 (男 女 모두에게) 흐르는 강물처럼 빠르게 바다로 (늙는것) 흘러가 버린답니다
그리고 세월은 나를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지 안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