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소재 선교장은 효령대군 11세손으로 가선대부를 지낸 이내번(李乃蕃1703~1781)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300년을 이어온 집이다. 이 집은 장(莊)자가 들어가는 민간주택이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서울에도 이화장이나 혜화장, 경교장 등이 있었지만 무늬만 장급이지, 실질적인 규모에 있어서는 선교장과 비교할 수 없다. 명실상부한 장원의 격조를 지니고 있는 집은 선교장 뿐이다.
우선 건축규모부터 다른 집들과 차원이 다르다. 민간주택의 한계인 99칸을 훌쩍 뛰어 넘어 120여 칸이 넘는 웅장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대문을 중심으로 한일자의 형태로 쭉 펼쳐져 있는 행랑채만 해도 총 23칸에 방이 20개이다. 방1개에 4~5명이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100명 가까운 사람이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이다. 좌우 길이가 60여m에 달하는 한일자 형태 행랑채의 위용은 방문객을 압도한다. 거기에다가 작은 사랑채는 6칸 겹집으로 되어 있다. 30명 정도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이다. 가장 고급손님들이 묵는 큰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방이 3개에다 대청마루가 6칸이나 되고, 대청마루보다 약간 높은 누마루가 4칸이나 된다.
▲ 귀한 손님들이 묵는 큰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김창종기자
선교장에 이처럼 방이 많았던 이유는 부자집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한 숙박시설이었다는게 후손들의 증언이다. 대관령 넘어 관동지역은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선경이라 일컬어졌다. 금강산, 설악산, 경포대에다가 영랑 선인이 놀았다는 영랑호까지 끼고 있어서 전국에서 많은 유람객들이 몰려왔다. 이 유람객들은 대부분 관동의 첫째가는 부자집인 선교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였다. 관동의 제일 가는 호텔로 여겼던 것이다. 물론 공짜였다. 역대 선교장 주인들도 손님들의 무전취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6.?25때 폭격으로 소실됐지만, 이 집에는 1인용 7첩 반상 그릇이 300인용 가량 보관돼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손님을 접대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열화당’이라는 사랑채의 당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선교장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담론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생을 사는 의미와 보람이 바로 즐거운 대화에 있다는 독특한 철학을 가졌던 것이다
대접도 후하고 경치도 일품이다 보니 손님들이 선교장에 오면 몇 달이고 떠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야박하게 면전에 대놓고 떠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과객이 지나치게 오래 머문다 싶으면 간접적으로 그 의사표시를 했다. 과객의 밥상을 차릴 때 국그릇과 밥그릇을 바꾸어 놓거나, 간장종지 놓는 위치와 김치 놓는 위치를 바꾸어 놓는 방법이었다. 손님 상차림에도 반찬그릇 놓는 위치가 각기 정해져 있었던 법도의 시대였으므로, 국그릇의 위치변동은 이제 그만 떠나주시라는 간접적인 의사표시로 인식되었다. 위치가 바뀐 밥상을 받은 과객은 아무 말도 않고 다음날 곧바로 보따리를 싸서 떠나곤 하였다.
선교장은 학자와 예술가들의 산실(産室)이었다. 권력이나 금력이 아닌 ‘열화’(悅話)에다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두었던 선교장 주인들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패트런(Patron) 역을 자청했다. 14세기 유럽의 르네상스 배후에는 화가와 조각가, 음악가들을 후원한 메디치 가(家)가 있었듯이, 선교장은 당대 조선의 화가와 음악가, 시인들을 키워낸 관동 지역 고급 문화의 산실이었다.
조선 헌종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조인영(趙寅永), 구한말 소론의 8천재 가운데 하나였던 정만조(鄭萬朝), 대원군으로부터 천재소리를 들었던 서예가 소남(小南) 이희수(李喜秀), 전국 사찰에 수많은 현판글씨를 남긴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중국 원세개의 옥새를 새겼던 김태석(金台錫), 당시 영동 제일의 화가로 평가받았던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 등이 선교장과 인연이 깊었던 인물들이다. 이들 서예가와 화가들이 남긴 각종 책자들과 화첩들이 10톤 트럭으로 한 트럭분 가량 선교장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해강과 차강은 여기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고, 가난한 예술가였던 그들의 생계를 선교장에서 도맡아 해결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선교장 주인들이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할 때마다 신랑?신부에게 줄 선물로 들고 간 것이 해강의 글씨와 차강의 그림이었다고 할만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선교장의 전성기 주인이었던 이근우(李根宇?1877~1938)는 거문고를 특히 좋아했다. 전국의 거문고 명인들이 선교장의 활래정에 초대받아서 두툼한 사례비를 받으며 몇 달씩 묵어가곤 하였다. 활래정은 연꽃밭 속의 정자였지만 온돌 시설을 갖춰서 겨울에도 손님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때 연주했던 거문고 악보들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근우는 출판에도 남다른 관심이 깊어서 사랑채인 열화당에다 활자인쇄 시설을 갖추고 문집과 족보를 찍었으며, 1910년대 부터는 각지의 명사들에게 보내는 연하장을 직접 인쇄하여 돌리기도 했다.
현재 출판사 열화당 사장인 이기웅(62)씨도 선교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집 후손이다. 출판사 이름을 ‘열화당’으로 짓고, 돈도 되지 않는 고급스런 미술 출판을 고집하는 배경에는 선교장 사랑채인 열화당의 인문정신(人文精神)을 계승한다는 의지가 한몫하고 있다.
활래정
창덕궁 비원의 부용정과 더불어 조선시대 정자중 가장 멋들어진 곳이라 봅니다,



첫댓글
훌륭한 자료, 음악, 글, 너무나도 좋습니다 

감하고 쉬어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