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배 金春培 (1906 ~ 1942)】 "정의부 가입, 군자금 모집, 일본주재소 습격"
1906년 2월 29일 전북 전주군(全州郡) 삼례면(參禮面) 삼례리(參禮里)에서 김창언(金昌彦)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김상배(金相培·金尙培)·김길동(金吉同)·정춘산(鄭春山)·한중(韓仲海)이다. 부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상업에 종사하였다. 17살 때 중국 천보산 동불사(銅佛寺)에서 한 살 아래 전명숙(全明淑)과 결혼하여 아들 김종수(金鍾洙)을 낳았다.
8살 되던 해 고향의 사립학교인 영신학교(永新學校)에 입학해 약 4년간 수학하고 졸업하였다. 1919년 봄 숙부인 김계홍(金啓弘)을 따라 가족 모두가 북간도 옌지현(延吉縣) 린하(鱗河)로 이주하였다. 이어 허룽현(和龍縣) 천보산(天寶山) 부근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다니며 공부하였다. 신흥학교 시절, 간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간부였던 학교 교사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사상을 함양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정의부(正義府) 대원 김태열(金泰烈)의 권유를 받아 정의부에 가입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11월 24일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성립된 독립군단이었다. 서·북간도의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는 1920년 10월부터 약 7〜8개월간 일제 침략자들에 의해 경신참변(간도참변)이란 처참한 만행을 당하였다. 경신참변 이후 남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통합운동을 벌여 1922년 8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고, 그 뒤를 이어 더욱 확대된 통합군단으로 성립된 것이 정의부였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의 광활한 지역을 관할지역으로 해 그 안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산업·교육·노동·사법 등과 관련된 자치활동을 펼치는 한편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한 군정부 성격의 단체였다.
하얼빈 이남에 위치한 북간도지역 역시 정의부 관할 지역인데 본부가 있는 류허현과는 거리가 너무 떨어졌기 때문에 모연대(募捐隊) 또는 암살대(暗殺隊) 등을 설치해 한인을 보호하는 동시에 독립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모연대는 허룽현(제1모연대), 옌지현(제2모연대), 왕칭현(제3모연대) 등에 설치되었다. 암살대는 중동선(中東線)지방(제1구), 혼춘(琿春)·왕칭현지방(제2구), 허룽·옌지·안도현(安圖縣)지방(제3구), 안도·화뎬현(樺甸縣)지방(제4구) 등에 설치되었다.
정의부에 가입 후 얼마 되지 않아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으로 가 군자금 모집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다. 그 결과, 모집된 군자금으로 정의부 의용군 군복을 만들기 위한 면포(綿布)를 구입하여 유격대장 어희영(漁熙永)에게 보냈다. 이러한 활동 탓에 일제 경찰의 감시를 당하던 중, 1926년 집에 들렀다가 신분을 속이고 접근한 일제의 천보산 경찰에 붙잡혔다. 이어 간도영사관 경찰대에 의해 청진지방법원으로 인계되어 징역 6년을 받고 청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중 생활 2년째인 1928년 11월 탈옥을 시도하였다. 양복 작업장에서 노역을 하던 중, 10cm가 안 되는 작은 칼을 목면에 싸서 항문에 찔러 넣고 작업이 끝나자 감방으로 간 뒤, 그 칼로 감옥 바닥을 파내 탈옥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붙잡히자 형량이 1년 10월 가중되어 8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 중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과 같은 감방에 지내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34년 5월 만기 출소하자, 옥중에서 배운 기술로 잠시 양복점에 취직하였고 10월 2일 홀로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의 경찰주재소 무기고를 습격하였다. 이때 권총 2정, 38식 기병총 5정, 30식 보병총 1정, 엽총 1정, 실탄 800발을 탈취하였다. 이중 권총 2정과 사용할 실탄만 소지하고, 나머지는 신창리 최원순(崔元淳)의 집 마루 밑과 신창교회 벽장에 숨겼다. 이틀 후 양화면(陽化面) 후호리(後胡里)에 있는 어업조합을 습격해 36원을 탈취하였다. 일제는 함경남도 경찰대와 국경수비대, 자경단·소방서원까지 총동원하여 16개 반으로 수사진을 조직해 수색하였다. 이러한 추격에도 북청군 평산면(坪山面)·청해면(靑海面)·거산면(居山面)·후창면(厚昌面) 등으로 이동하며 일제의 수사망을 피하였다. 이동 중 자경단을 붙잡은 뒤 앞세워 중국집으로 가 호떡과 계란을 가져 오도록 해서 먹기도 하였고, 6명의 자경단을 위협해 콩밭의 콩줄기를 꺾어 와 굽도록 한 뒤 배를 채우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추격하는 경찰대와 총격전을 벌여 순사부장 기노시타(木下)에게 총을 발사해 어깨와 갈비뼈를 관통시키는 중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또 그를 덮치는 순사를 오히려 역공격하여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히고 추격을 따돌리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을 펼친 19일째인 10월 20일 새벽 신창역장(新昌驛長) 김형로(金炯魯)의 집에 들어가 그를 데리고 역으로 이동해 270원을 수금하였다. 이어 역장의 아내를 데리고 부부처럼 가장해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행 기차를 탄 이유는 고향 전주로 가기 위함이었다. 전주의 부호들에게서 3만원의 군자금을 마련하여 간도 지역에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한 공동체를 만들어 항일 무장활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차가 신북청역에 다다르기 전 차내를 순시하던 사복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다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되기 전까지인 19일 동안 일제가 검거를 위해 2만 명의 경찰·국경수비대 등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경비도 2만원이 넘게 사용할 정도로 신출귀몰함을 보였다. 이 사건 이후 ‘희대의 권총청년 김춘배’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함흥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를 취하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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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배 무기징역 구형 보도 기사(『매일신보』 1934. 11. 21)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