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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율기(律己)편, 제4조 병객(屛客)[지방 관청에서 책객(册客:지방 수령이 문서나 회계 따위를 맡기기 위하여 데리고 다니는 사람.) 및 겸인(傔人:청(廳)지기. 양반(兩班)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 등 객인(客人:손님)과 외부로부터의 청탁을 물리친다는 뜻],
오늘은 두 번째 꼭지, ‘무릇 본 고을 백성과 이웃 고을 사람들을 인접(引接[들어오게 하여 면접(面接)함])해서는 안 된다. 무릇 관부(官府)는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를 읽어본다.
목민심서 율기(律己) 제4조 병객(屛客)
2. 무릇 본 고을 백성과 이웃 고을 사람들을 인접(引接)해서는 안 된다. 무릇 관부(官府)는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
요즈음 풍속에 이른바 존문(存問)(주1)하는 법이 있다. 토호(土豪)와 간민(奸民)이 조정의 고관들과 결탁하여, 수령이 부임 인사를 드리는 날에 조정의 고관들이 존문을 부탁하고 일에 따라 두호(斗護) - 곧 비호(庇護)의 뜻이다. - 해 주도록 한다.
옛날에 참판(參判) 유의(柳誼)(주2)가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을 때 무릇 존문의 부탁은 하나도 시행하지 않았다. 내가 공에게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다고 하니 공은, “주상께서 이미 홍주 백성을 나 목신(牧臣)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보존하고 비호하도록 하셨으니 조정에 있는 고관들의 부탁이 중하다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중할 수야 있겠소. 만일 내가 한 사람만을 붙잡고 존문하면서 치우치게 두호하면, 이는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한 사람의 사사로운 명령을 받드는 것이니 어찌 그렇게 하겠소.” 하였다. 나는 유공(柳公)의 말에 깊이 감복하여 다시 더 논란하지 못하였다.
대저 존문은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들어주어야 할 경우에는 모름지기 부임 후 석 달이 지난 뒤에 서서히 그 사람의 행적을 살펴서, 위력으로 횡포를 부리거나 간사한 행동이 없는 사람이라면 존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단(禮單)(주3) 끝에는 쓰기를, “모름지기 와서 회사(回謝)하지 말라.” 하라.
문리(門吏) - 예방(禮房)의 승발(承發)(주4) 등. - 들을 엄중히 단속하여 약속하기를,
“무릇 읍내 유생(儒生)들 중에 학궁(學宮)의 현 재임(齋任)이나 새로 존문을 받은 자라 하더라도 통자(通刺)(주5)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하라.
조정에서 벼슬살다가 퇴관(退官)한 자는 비록 쇠잔한 음관(蔭官)이나 시원찮은 무관(武官)이라 하더라도 불가불 맨 먼저 존문해야 할 것이니, 이는 귀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뜻(주6)에서인 것이다. 그들 중에 혹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거절해서는 안 된다. 서로 만나는 날 약속하기를, “정의가 두텁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예는 한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귀공과 약속하고자 합니다. 의논할 일이 있으면 내가 가서 서로 만날 것이요 모임이 있을 때는 초청하여 서로 만나도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담대멸명(澹臺滅明)이 언(偃)의 사실(私室)을 방문한 적이 없었고(주7) 방공(龐公)이 성부(城府)로 들어온 적이 없었으니(주8), 비록 섭섭한 듯하더라도 길이 좋게 지내기 바랍니다.” 하라.
그리고 문리(門吏)에게 이런 약속을 단단히 일러 주어야 한다.
고을 안에 반드시 문사(文士)라 칭하는 자들이 과시(科詩)나 과부(科賦)(주9)로 수령과 교분을 맺고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 농간을 부리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을 인접(引接)해서는 안 된다. 또 풍수(風水)ㆍ두수(斗數)(주10)ㆍ간상(看相)(주11)ㆍ추명(推命)(주12)ㆍ복서(卜筮)(주13)ㆍ파자(破字)(주14) 등 가지가지 요괴(妖怪)하고 허탄(虛誕)한 술책을 가진 자가 수령과 인연을 맺어, 작게는 정사를 문란하게 하고 크게는 화를 취하게 되니 천리 밖으로 물리쳐서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오직 의원(醫員)만은 물리치기가 어렵다. 자신이 의술을 모르고 그 사람은 의술에 정통하니 때때로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충분히 삼가서 보수를 후하게 주고 입을 열어 청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윤옹귀(尹翁歸)(주15)가 동양 태수(東陽太守)가 되었을 때 우정국(于定國)(주16)이 고을 유생 두 사람을 부탁하고자 하여 그들을 후당(後堂)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우정국이 윤옹귀와 종일토록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고을 유생들을 보이지 않았다. 윤옹귀가 돌아간 뒤에 우정국이 그 두 유생에게 말하기를,
“이 현명한 분에게 사정(私情)으로 부탁할 수 없었다.” 하였다.
《남사(南史)》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謝覽)(주17)이 오흥 태수(吳興太守)가 되었을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주18) 황목지(黃睦之)의 집이 오정(烏程)에 있었는데 자제들이 횡포를 부렸다. 사람이 고을에 도착하기 전에 황목지의 자제가 맞이하여 알현(謁見)하려 하였는데(주19), 사람은 그들을 쫓아 버렸다.”
설 문청(薛文淸)(주20)의 《독서록(讀書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선비들은 본디 예(禮)로써 접해야 하지만 혹 글이나 글씨를 빌어서 그것으로 진취하는 매개를 삼으니, 한번 친하게 대하면 그 술책에 빠지는 수가 있다. 이런 부류들을 잘 살펴서 끊어 버린다면 또한 마음을 맑게 하고 일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 한봉(鄭漢奉)은 이렇게 말하였다.
“벼슬살이할 때에는 이색적인 인물과는 서로 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무축(巫祝)이나 이온(尼媼)(주21) 같은 부류들 뿐만 아니라 공예(工藝)를 다루는 사람들도 필요할 때만 쓰고 오래 머물러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들과 너무 친해지면 이목(耳目)을 가리우고 시비(是非)를 농간하기도 한다. 방관(房琯)(주22)이 재상이 되었을 때 한 금공(琴工) 황정란(黃庭蘭)이 문하에 출입하면서 의지하고 그른 짓을 하여 드디어 재상의 사업에 흠이 되었으니, 이런 것들을 깊이 살피지 않아서 되겠는가.”
[역주]
[주-D001] 존문(存問) : 고을 수령이 그 지방의 찾아볼만한 사람을 인사로 방문하는 일을 말한다.
[주-D002] 유의(柳誼) : 1734~? 조선 문신. 자는 의지(誼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승지ㆍ병조 참판ㆍ홍주 목사를 지냈다.
[주-D003] 예단(禮單) : 예물(禮物)을 기재한 목록.
[주-D004] 승발(承發) : 지방 관아의 이서(吏胥) 밑에서 잡무에 종사하던 사람이다.
[주-D005] 통자(通刺) : 명함을 통하는 일, 또는 들이는 일이다.
[주-D006] 귀한 …… 뜻 :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을 귀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7] 담대멸명(澹臺滅明)이 …… 없었고 : 춘추(春秋) 때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었더니 공자(孔子)가 “네가 사람을 얻었느냐?” 하고 물었다. 자유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이 있으니……공사(公事)가 아니면 언(偃)의 집에 이른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論語 雍也》 담대멸명의 자는 자우(子羽)이다. 자유의 성은 언(言), 이름은 언(偃)이다. 공자의 제자로 예(禮)를 익혔으며, 오중문학(吳中文學)의 비조(鼻祖)이다.
[주-D008] 방공(龐公)이 …… 없었으니 : 후한(後漢) 방덕공(龐德公)의 고사이다. 방덕공은 양양(襄陽) 사람으로 현산(峴山)의 남쪽에 살았으며, 성시(城市)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유표(劉表)가 자주 초청하였는데도 끝까지 오지 않았다. 제갈량(諸葛亮)이 매양 그에게 나아가 상(床) 아래에서 절하였다. 《尙友錄 一》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
[주-D009] 과시(科詩)나 과부(科賦) : 과거 때 짓는 시(詩)와 부(賦)이다.
[주-D010] 두수(斗數) : 추명(推命)과 같은 뜻이다.
[주-D011] 간상(看相) : 사람의 상을 보고 운명을 판단하는 것이다.
[주-D012] 추명(推命) : 사주(四柱)를 가지고 사람의 운명을 추정하는 것이다.
[주-D013] 복서(卜筮) :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이다.
[주-D014] 파자(破字) : 한자(漢字)를 집계하여 자획(字劃)을 풀어 길흉을 점치는 일을 가리킨다.
[주-D015] 윤옹귀(尹翁歸) :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으로 자는 자황(子況)이다. 벼슬은 동해 태수(東海太守)ㆍ우부풍(右扶風)을 지냈는데, 청렴하기로 소문이 났다. 아래 기사는 윤옹귀가 동해 태수로 임명되어 동해(東海) 사람인 정위(廷尉) 우정국(于定國)에게 인사차 들렀을 때의 일이다. 《漢書 卷76 尹翁歸傳》 원문의 ‘東陽’은 《한서(漢書)》에는 ‘東海’로 되어 있다.
[주-D016] 우정국(于定國) : 한(漢)나라 선제(宣帝)ㆍ원제(元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倩), 시호는 안후(安侯)이다. 정위(廷尉)로 있을 적에 공평하였고,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거쳐 승상(丞相)에 이르렀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주-D017] 사람(謝覽) : 남조(南朝) 양 무제(梁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경척(景滌)이다. 제(齊)나라 때 제(齊)의 전당공주(錢塘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고 양 무제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오흥 태수(吳興太守)로 나갔다. 청렴하기로 소문이 났다. 《南史 卷20 謝弘微列傳 謝覽》 《梁書 卷15 謝胐列傳 謝覽》
[주-D018] 중서사인(中書舍人) : 조고(詔誥)와 제칙(制勅)을 맡은 중서성(中書省)에 속한 벼슬. 처음에는 통사(通事)ㆍ통사사인(通事舍人) 또는 사인통사(舍人通事)라 불리어졌으나 뒤에 중서사인으로 불리었다.
[주-D019] 황목지의 …… 하였는데 : 원문의 ‘睦之弟謁’은 《남사(南史)》에는 ‘睦之子弟迎覽’으로 되어 있고, 《양서(梁書)》에는 ‘睦之子弟來迎’으로 되어 있으며, 손리장본(巽里藏本) 목민심서에는 ‘睦之弟迎謁’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남사》와 《양서》에 의해 자제로 번역하였다.
[주-D020] 설 문청(薛文淸) : 명(明)나라 영종(英宗)ㆍ경제(景帝) 때 문신이며 학자. 이름은 선(瑄), 자는 덕온(德溫), 호는 경헌(敬軒), 시호가 문청(文淸)이다. 벼슬은 예부우시랑 겸 한림원학사(禮部右侍郞兼翰林院學士)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독서록(讀書錄)》ㆍ《종정명언(從政名言)》ㆍ《설문청집(薛文淸集)》이 있다. 《明史 卷282 儒林列傳 薛瑄》 《明儒學案 卷7》
[주-D021] 무축(巫祝)이나 이온(尼媼) : 무축(巫祝)은 귀신을 숭배하는 자로 무당, 이(尼)는 승녀(僧女), 온(媼)은 방물장수.
[주-D022] 방관(房琯) : 당(唐)나라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대종(代宗) 때 사람으로 자는 차율(次律)이다. 벼슬은 이부 상서(吏部尙書)ㆍ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예부(禮部)ㆍ형부(刑部)의 상서(尙書) 등을 지냈다. 《唐書 卷139 房琯列傳》 《舊唐書 卷111 房琯列傳》
凡邑人及鄰邑之人。不可引接。大凡官府之中。宜肅肅淸淸。
今俗有所謂存問之法。土豪奸民。締結朝貴。辭朝之日。朝貴囑其存問。隨事斗護。卽庇護之意。
昔柳參判誼牧洪州時。凡存問之託。一不施行。余言其太拘。柳公曰。主上旣以洪州之民。全付我牧臣。使之存恤。使之庇護。朝貴之託雖重。何以踰是。若我偏執一人。偏問而偏護之。則是違君之命。以奉私令。余何敢焉。余深服其言。不能復難。大抵存問。不可輕也。
〇若有不得不聽施者。須於上官三月之外。徐察其人之所爲。無武斷奸詐之行者。乃可存問。其禮單之末。書之曰。須勿來謝。
〇嚴飭門吏。禮房承發等。 約曰。凡邑子雖時任學宮及新受存問者。無敢通刺。如其有犯。汝則有罪。
〇朝官退居者。雖殘蔭冷武。不可不首先存問。貴貴之義也。其或來見者。不宜拒絶。相見之日。約曰。意非不厚。禮欲有防。我與公約。欲有議則就之。可與相見。欲有會則速之。可與相見。如其不然。澹臺未嘗至偃室。龎公未嘗入城府。雖若惆悵。永以爲好。因飭門吏。告以此約。
〇邑中必有稱之曰。文士者。以科詩科賦。締結官長。因緣作奸者。不可引接。又如風水斗數。看相推命。卜筮破字。種種妖誕之術。皆能締結官長。小則亂政。大則取禍。宜斥絶千里。毋近影嚮。
〇唯醫者難斥。我不知醫。彼若精通。不得不以時招延。然宜十分審愼。厚酬其勞。不許開口干囑。
尹翁歸爲東陽太守。于定國欲屬託邑子兩人。令坐後堂待見。定國與翁歸語。終日不見其邑子。旣去。定國謂邑子曰。此賢不可干以私。
南史。謝覽爲吳興太守。時中書舍人黃睦之家居烏程。子弟專橫。覽未到郡。睦之弟謁。覽逐去之。
嶭文淸讀書錄曰。儒士固當禮接。或假文辭字畫以媒進。一與款洽。卽墮術中。若此之類。能審察疏絶。亦淸心省事之一助也。
鄭漢奉云。當官不接異色人最好。不止巫祝尼媼。至工藝之人。用之以時。不宜久留。與之親狎。皆能變易聽聞。簸弄是非。房琯爲相。因一琴工黃庭蘭出入門下。依倚爲非。遂爲相業之玷。若此之類。可不深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