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이덕주 교수)가 주최하고 양화진문화원이 후원하는 이만열 교수의 한국기독교 역사강좌(해방 이후 한국교회사) 세 번째 시간이 18일 양화진문화원 사회봉사관에서 진행됐다.
이번 강의에서는 지난 강의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북한정권하의 기독교’와 ‘6.25전쟁과 교회’를 주제로 강의가 진행됐다.
이만열 교수는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해 군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종교를 탄압해온 소련의 정책에 북한교회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소련군정과 김일성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제정된 헌법 제14조에서도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북한에 있는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주력들은 중농, 부농, 지주 혹은 자본가 계층이 많았다.”면서 “사회주의 혁명과정에 청산의 대상이 됐던 이들은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북한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월남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내 가장 큰 기독교 정당이었던 조선민주당은 찬탁결정을 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대거 탈당을 하고 우파 지도자들이 대거 남하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후에 임시인민위원회가 선거일을 일요일로 정함에 따라 사회주의국가 건립을 추진하던 세력과 교회가 집단적으로 크게 충돌했다."면서 “북한지역 5도연합노회는 일요일로 지정된 선거의 부당성을 밝히고 선거 불참 의지를 재차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5도연합노회의 결정에 당황했지만 당시 전체 인구의 약 2~3%에 불과했던 기독교인의 수로 인해 5도연합노회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미미했고 인민위원회 선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면서 “선거 직후 김일성은 친정부적인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북조선기독교도련명(조기련)을 조직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기련이 공식적으로 결성된 1946년 11월 이후 북한의 교회들은 친사회주의적인 교회와 사회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교회로 양분됐다.”며 “사회주의 정권이 세워지는 상황에서 어느 쪽이 힘을 가질 것인가는 자명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당시 북한 내에 20만 정도의 기독교인 중에서 85,118명이 조기련 회원이었다.”면서 “일제강점기 부흥사로 활약했던 김익두 목사가 1949년 조기련 총회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개신교회들을 이끌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성도들은 가짜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면서 “그러나 그 가짜라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또한 과연 그것을 사람이 판단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든다. 나는 '북한의 성도들은 가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꺼 같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6.25 전쟁 당시 남한교회와 북한교회의 상황을 언급했다. 그는 “1950년 피난하지 않고 사역지를 지키던 다수의 선교사와 한국 교역자들이 인민군에 의해 체포되어 납북됐다.”면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일부 교회, 황해도 일부 지역에서는 집단 학살도 발생했다.”고 말했다. 특히 “황해도 신천지역은 전쟁기간 중 가장 많이 학살당한 곳으로 기독교인을 포함해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전세의 변화에 따라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살육이 자행됐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북한에서는 신천에 박물관을 만들어 당시 몇 십 명이 채 되지 않는 해리슨 부대가 40일 동안 주둔하면서 35,000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북한을 방문해 신천박물관에 갔을 때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단순 계산을 하더라도 해리슨 부대는 하루에 700명씩 죽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6.25 전쟁은 1953년 멈추었지만 그로인한 정신적 대립은 분단의 고착화, 남북간의 상호비방과 위협, 냉전적 제도와 문화의 발전 등의 형태로 남았다고 말하면서 “이 문제는 지금도 우리 민족의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은 남한교회에게 있어 위기 속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하면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혼을 위로하고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해야할 이유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남한의 교회들은 국가 안보를 위한 반공적 신앙과 개인의 생존을 위한 현세구복적인 신앙을 강조”하게 됐다고 말하면서 “반공주의는 전쟁 이후 남한교회의 정서를 지배하고 기독교인들의 신앙체계에까지 스며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1951년 여름 휴전 문제가 논의되자 전쟁 승리를 통해 통일하겠다는 한국교회의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하면서 “서울 기독교인들은 탑골공원에서 7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북진통일기원대회를 개최하고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린 구국기독신도대회에서는 1만여 명이나 참석했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평화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이때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우리가 고민하고 생각해보아야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북한교회는 6.25 전쟁 중 전쟁수행을 도우며 전승을 기원했다.”면서 “1950년 8월 13일에는 북한 전역에서 전승기도회가 열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6.25 전쟁 이후 북한에는 교회형태의 신앙생활이 사라지고 가정교회가 등장“했다고 말하면서 ”서로 통할 수 있는 몇 사람이 사사로이 모여 눈물의 기도를 하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교회들의 반응과 구호단체의 활동상을 언급하면서 “당시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한국 상황과 세계 질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UN이 움직이게 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공산권인 동유럽과 중국의 교회는 WCC의 성명을 비판하고 미국을 비난하는 등 6.25 전쟁에 대한 공산권 교회의 견해를 대변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남한 인구의 절반이 구호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외국 정부 및 민간단체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됐다고 말하면서 “외국의 민간원조 단체들은 대부분 유럽과 북미의 교회 및 기독교구호단체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호품 분배 과정에서 교회가 다툼의 장이 되기도 하고 “많은 한국인이 미국을 일종의 구세주 국가로 여기게 되면서 외국원조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한국교회가 친미적인 태도를 가지는데 기여하는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6.25 전쟁이후 새로운 형태의 교리와 제의가 등장했다면서 “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전도관)이 대표적인 집단”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친기독교적인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교회와 정부의 유착이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고 말하면서 "이승만이 명예장로로 있던 감리교에서는 공개적으로 지지의사를 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글에 대한 댓글 ...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아모스
13/04/06 [23:21]
기독교적 신심을 김일성숭배의 도구로 악용했지요.
허허 참...
북한의 실정을 왜 빼놓고 말하나?
13/04/10 [17:58]
북에서는 예수를 믿는 모습이 적발되는 즉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는 거 말 그대로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은 다 아는데 뭘 말하고 싶은거야?
이 사람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네
wertee
13/04/13 [18:56]
북한에 대한 명백한 기독교탄압 증거가 너무 많은데 무슨 의도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간첩에게 뇌물 먹엇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기독교의 주요 인사라니 정말 두렵다.
기가막힌다
엘리샤
13/04/15 [13:04]
하나님 두려운줄 모르고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하는군..... 잠깐 있다 사라질 안개같은 인생에 영원을 팔았네여.
이만열 이 자 좌빨 본색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구나!
진리사랑
13/04/19 [21:23]
이만열, 손봉호 같은 자들은 종북좌익(공산주의) 무리들과 교류하는 한통속 좌익들입니다. 복음 진리를 모르는, 성령은 없는 좌익 가짜 기독교인들은 교회개혁으로 위장하여 교회와 나라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으로 정의의 일꾼으로 가장하여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