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박찬호,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계약
2001년 12월 21일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을 결정했다. 2001년 12월 21일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박찬호 선수가 아메리칸리그의 레인저스와 5년간 옵션 포함, 7100만 달러(한화 약 923억원)의 조건으로 입단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박찬호는 12월 23일 텍사스주 알링턴시의 레인저스 구장에서 입단식을 갖고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등번호는 다저스 시절과 똑같은 61번. 박찬호의 계약 조건은 공식적으로 5년간 6500만달러로 발표됐지만 박의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에 따르면 600만달러의 옵션이 있어 실질적인 총 연봉은 5년간 7100만달러, 평균 1420만달러로 밝혀졌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2001년 시즌 73승89패를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꼴찌로 전락했다. 팀 홈런(246개) 1위, 팀 타율(0.275) 3위의 공격력을 보유했으면서도 팀 방어율 최하위(5.71)를 기록한 허약한 마운드가 문제였다. 자연히 투수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여 2001년 스토브리그 기간 중 데이브 버바, 존 로커, 제이 포웰, 토드 반 포펠 등을 무더기로 받아들여 전력 보강을 꾀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땅한 에이스가 없었고, 결국 다저스와의 재계약을 조건으로 배수진을 친 박찬호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1991년] 소련 11개공화국,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 소련 공식 소멸
소련을 구성해 온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등 11개 공화국 지도자들이 1991년 12월 21일 카자흐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에서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협정에 서명하고 새로운 국가 형태를 공식 탄생시킴으로써 74년동안 이어져 온 소련이 공식 소멸됐다.
CIS 공동 창설자라는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한 각국의 지도자들은 CIS 창설 협정의 부속 의정서, 가맹국간의 국경 불가침과 민족 자결을 규정한 알마아타 선언, 핵무기의 통일 관리에 관한 협정, 러시아를 UN에서의 소련의 계승자로 하는 성명 등 6개 문서에 조인했다.
독립국가연합은 1993년 10월 그루지야가 가입함으로써 12개 공화국으로 확대됐다. 몇 차례의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1995년 2월 10일의 알마아타 정상회담에서는 집단안보체제의 구축에 합의하고, 상호협력 협정을 채택했다. 1996년 1월 19일의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는, 러시아 공산당이 제기한 소련 부활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경제통합에서는 군사·정치 통합의 흐름을 강조했다.
CIS의 조직은 최고협의기구인 국가원수평의회(정상회담)와 그 산하에 총리협의체 그리고 가맹국의 해당 장관들로 구성되어 실무를 담당하는 각료위원회로 구성돼 있다. 정상회담은 연 2회 이상 개최하고, 협력체제의 효율적 확립을 위하여 6개월 임기의 순회의장제를 도입했다. 총리협의체는 연 2회, 각료위원회는 연 4회 이상 열도록 돼 있다. /조선
[1979년] 최규하(崔圭夏) 제10대 대통령 취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헌법 제48조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취임해 10월 27일 새벽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의 대의원 2천5백60명중 2천5백49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의원 8백27명의 추천을 받은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비상계엄령을 해제했다.
단독으로 입후보한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찬성 2천4백 65표, 무효 84표로 대통령에 당선, 1979년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조선
[1968년] 경인고속도로, 경수고속도로 개통. 다섯 곳에서 끊은 테이프
1968년 12월 21일은 대한민국 수송혁명의 문이 열리던 날이다.
서울~인천 고속도로(23.4Km, 가좌 인터체인지까지)와 서울~수원 고속도로(31.3Km, 신갈 인터체인지 까지)가 한꺼번에 개통된 것이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도 같은 피나는 노력의 대가로 얻어진 경사였다.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많았었다. 장비가 없고 기술이 없고 재원이 달렸다. 무경험에서 오는 갖가지 시행착오와 사회적 잡음 등이 항상 이 사업을 괴롭혔다. 숱한 어려움을 오직 ‘하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슬기로운 신념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오늘 <전국 1일 생활권화>의 서막을 열기에 이른 것이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소재 당중국민학교의 교정에서 열린 개통식의 광경은 당시의 신문들이 큼직큼직한 활자를 사용하여 다투어 보도했다.
‘뻗어가는 고속도로, 삼천리는 이웃된다.’라는 플래카드가 크게 나붙은 개통식장에 시민들의 축하 인파가 어울어지고 박정희대통령 부처와 삼부요인, 그리고 다수의 주한외교사절이 단상에서 자리를 잡자 경축 일색의 후끈한 분위기가 이날의 쌀쌀한 기온을 가볍게 날려 버렸다.
헬리곱터가 경축비행을 하는 맑은 하늘에 오색풍선이 화려하게 떠오르고, 조국 번영의 탄탄대로를 축하하는 감격적인 팡파르가 드높이 울렸다.
이 역사적 순간의 감격을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즉흥 연설로 표현했다.
“근대 산업국가에 있어 도로의 혁명 없이 산업의 혁명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도로의 근대화 없이 산업의 근대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경인고속도로만 하더라도 과거 서울~인천간의 50분 소요시간을 불과 18분으로 단축시킨 것은 혁명적인 사실이며, 더구나 이 고속도로가 앞으로 완공될 인천 제2 도크와 연결되는 날 경인간의 수송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 연변의 산업도시가 획기적으로 발전될 것이 예견 됩니다.
서울~부산간의 고속도로가 70년말 까지는 4시간의 거리로 연결될 것이며 이 연변에 새로운 산업발전이 이룩되면 이는 우리 경제개발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특히 이 공사에서 자랑스러운 것은 두 고속도로를 모두 우리기술과 자본으로 세계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이룩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 길을 달리면서, 이 길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어떠한 산업이 발달되고 이 연도에 어떠한 새로운 산업이 발달될 것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서 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이 길에는 우리들 세대뿐만 아니라 후세에 우리 후손이 시속 1백Km라는 빠른 속도로서 주야로 이 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나라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흐믓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건설 유공자들에게 훈장과 표창장이 수여되었다. 서울~인천 고속도로 건설공사사무소장의 중임을 다한 한유록씨는 최고의 영예인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박정희대통령은 이날 다섯 군데에서 개통 테이프를 끊고 오색풍선을 날렸다.
먼저 서울~인천간 고속도로의 입구에서 첫 테이프를 끊고 단숨에 가좌인터체인지까지 시주, 그곳에서 테이프를 끊어 경인선을 개통시켰다. 서울~수원 고속도로에는 서울 동작동에 있는 이수교·양재동 톨게이트 신갈인터체인지에서 각각 개통 테이프를 끊었다.
이틀 전에 발족한 고속도로순찰대 소속 순찰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울~수원간을 질주 할 때에는 공군기 두 대가 오색 연막을 하늘에 내뿜으며 축하비행, 축제 무드를 한층 고조시키기도 했다. 박정희대통령은 도로 노면에 샴페인을 산주(散酒)하여 자손만대에 이어질 이 고속도로의 앞날을 축복했다. /Google
[1963년] 광원 123명 서독에 첫 파견
← 1960년대 서독에 파견된 광부들이 송금해 온 달러는 경제개발의 밑거름이 됐다.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일할 우리나라 광부 123명이 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났다. 광부들 얼굴에는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약속한 월급은 162달러50센트(기본급). 1인당 GNP가 87달러(62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실업률이 8.1%(63년)에 달하고, 200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기업이 54개(61년)밖에 안 돼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원파견은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분명 돌파구였다. 중졸 이상의 학력과 20세 이상 30세 미만 그리고 탄광근무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었는데, 몰려든 지원자가 2874명이었다. 8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한 사람은 367명.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20%나 됐다. 합격자는 20일간의 탄광훈련, 20일간의 독일어강습을 거친 후 다시 서독 현지에서 3개월의 적응훈련을 받아야 했다.
힘들게 작업장을 배정받았지만 작업도 간단치 않았다. 지하 1000미터에서 뿜어나오는 30도의 지열과 50킬로그램이나 되는 작업도구로 3년 뒤 고국으로 돌아올 때는 대부분 한번 이상 골절상을 경험했다. 우려했던 탄광사고도 이듬해 11월부터 발생하기 시작, 돌에 깔려 죽거나 탄차에 부딪혀 현장에서 죽는 사고들이 일어났다.
1964년 12월 차관을 구하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인 광원과 1964년 11월부터 파견된 간호사를 찾아 위로의 말을 하다가 “조국이 가난해서…”라는 대목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때는 장내가 온통 울음바다로 변하기도 했다. 이렇게 파견된 광부는 1978년 서독정부가 광부수입을 중단할 때까지 줄잡아 7800명이나 됐다./조선
[1961년]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형
← 민족일보사 사장 겸 발행인이었던 조용수 사형집행 직전 모습
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이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을 옹호하는 사설 등을 발간한 혐의로 1961년 12월 21일 사형됐다. 1961년 `반공이 국시`임을 내세운 5.16군사쿠데타 세력은, 통일과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언론활동을 벌이던 민족일보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적용해 민족일보에는 폐간을, 조용수 사장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
민족일보는 4.19혁명의 기운속에서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조국통일을 절규하며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기치아래 1961년 2월 창간됐었다.
조씨의 사형선고에 국제신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 국내 언론인, 문인 등이 나서 구명운동을 펼쳤지만 결국 조씨는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민족일보 사건은 지금까지도 조작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는 대표적 사건가운데 하나이다./조선
[1958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
← 샤를 드골 장군, 자유 프랑스 운동 지도자(1942)
1944년 파리에 귀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1945∼1946년 총리 ·국방장관, 1947년 프랑스국민연합(RPF)을 조직, 1951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1953년 RPF를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4공화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다시 정계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그 해 6월 총리가 되었고, 9월 28일 헌법개정 국민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제5공화정을 발족시켰고, 10월 그를 지지하는 신공화국연합(UNR)을 결성, 11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1년 1월 알제리민족자결정책, 1962년 4월 알제리의 독립을 국민투표로 가결하여 7년이 넘는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하였다. /naver
[1954년] 미국의 테니스 선수 에버트(Evert, Chris) 출생
← 에버트
1954. 12. 21 ∼
본명은 Christine Marie Evert. 1970년대 중반과 후반에 테니스계를 주도했고, 1980년대 후반기까지 우수한 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에버트는 강력한 발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특히 테니스 지도자인 아버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에 익힌 양손 백핸드로 유명하다. 그녀는 1970년 소규모 대회에서 15세의 나이로 랭킹 1위인 마거릿 코트를 이겼다. 1971년 미국 선수권대회의 준결승에 오른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1972년까지 아마추어 선수생활을 했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프로 선수로서 900만 달러 이상의 상금을 벌어들였다. 에버트는 1975~78년 미국 오픈 선수권대회 여자단식을 석권하여, 헬렌 헐 제이콥스(1932~35) 이후 미국 오픈 선수권을 4연패한 최초의 여성선수가 되었다. 1980, 1982년에도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또한 윔블던 대회 단식(1974,1976,1981), 프랑스 오픈 선수권대회 단식(1974,1975,1979,1980,1983,1985,1986),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선수권대회 단식(1982, 1984) 등에서도 우승했다. 1979~87년 동료 프로 테니스 선수인 존 로이드와 결혼생활을 했다. 1989년 미국 오픈 선수권대회 준준결승에서 패한 후 은퇴했다. /브리태니커
[1953년] 오펜하이머(Oppenheimer, Julius Robert), 군 보안 보고서 발표되어 기소당함
← 오펜하이머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레오 실라르드는 미국정부에 대해, 나치가 먼저 핵폭탄을 제조한다면 이는 전인류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는 천연 우라늄에서 우라늄-235(235U)를 분리시키는 공정과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 질량을 결정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8월 미국 육군은 핵에너지를 군사적 목적에 도입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의 물리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조직할 책임을 맡게 되었고, 이 연구계획은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임무 수행을 위해 연구소를 설립했고 이를 관장했다. 1943년 그는 어린시절을 보냈던 기숙학교가 있던 뉴멕시코 샌타페이 근처의 로스앨러모스 고원을 연구소 부지로 선정했다.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1942년 오펜하이머는 군 보안요원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은 그와 친분관계에 있는 친구 몇 명이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혐의와 더불어 정점에 달했다. 한 친구는 이 사건으로 캘리포니아대학교의 교직에서 쫓겨났다. 1954년 안보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들의 조사 가운데 자신의 기여부분은 거짓말투성이라고 진술했다. 독일이 항복한 후 탁월한 로스앨러모스 과학자들의 공동 노력의 성과는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앨러머고도에서 있었던 최초의 핵폭발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같은 해 10월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직책을 사임했다. 1945년에는 프린스턴대학교 부설 고등연구소 소장이었다가 원자력위원회 일반자문회의(General Advisory Committee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의장(1947~52)으로 재직중이던 1949년 10월에는 수소폭탄 개발계획에 반대했다.
1953년 12월 21일 그에 관한 적대적인 내용을 담은 군 보안 보고서가 발표되어 과거 공산주의 활동 경력, 소련 간첩 명단 제출의 지연, 수소폭탄 제조 반대 등과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기소당했다. 보안 청문회는 오펜하이머의 모반혐의가 무죄임을 발표했으나 그의 군 기밀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켰다. 그결과 원자력위원회와의 계약이 취소되었다. 미국과학자동맹(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은 그의 기소를 반대하며 즉각적인 변론에 나섰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적 발견으로 야기된 도덕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애써 시도하다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과학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사상을 정립하는 데에 바쳤다. 냉전이 쇠퇴해가던 1963년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원자력위원회의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를 복권시켰다. 1966년 프린스턴을 퇴직한 오펜하이머는 다음 해에 후두암으로 죽었다.
[193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상영
1937년 12월 21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가 로스앤젤레서의 케세이 서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백 5십만불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용으로 만들어진 이 만화영화는 지금까지도 영화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아름다운 왕비가 아기를 가졌다. 왕비는 창 밖의 하얀 눈을 보면서 뱃속의 아이가 눈처럼 하얀 피부에 사과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장미빛 뺨을 지닌 아름다운 공주이기를 빌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드디어 왕비는 예쁜 공주를 낳았고 그녀를 백설공주라 불렀다.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백설공주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지만 안타깝게도 왕비가 돌아가시고 새로 들어온 계모가 여왕이 되자 혹독한 시달림을 받았다. 백설공주의 계모인 여왕에게는 신비로운 마술 거울이 있었는데, 여왕이 매일 아침, "거울아 거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지?"라고 물으면, "여왕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여왕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왕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마술 거울에게 질문을 던지자, 마술 거울은 뜻밖의 대답을 들려준다. '여왕님도 아름다우시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백설공주입니다'라고.
[1898년] 퀴리 부부(Marie Curie, Pierre Curie), 라듐 발견
← 마리 퀴리
1898년 12월 21일 마리 퀴리(Curie, Marie)가 남편 피에르 퀴리(Curie, Pierre)와 함께 방사선 방출 물질인 라듐을 발견했다. 마리 퀴리는 방사능(radioactivity)의 발견과 순수 라듐의 분리 성공으로 1903년과 1911년 각각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했다.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었고 1918년 퀴리 부부의 딸 이렌도 합류했다. 이 연구소는 곧 핵물리학과 화학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H. 베크렐이 처음 발견하고 마리 퀴리가 명명한 '방사능'과 그녀가 남편과 함께 발견한 라듐 등 방사성 원소들은 이후 핵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오늘날 암 치료에서 석유 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방사능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경우 체르노빌 사건과 같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방사능 폐기물의 처리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879년] 소련의 정치가 스탈린(Stalin, Iosif) 출생
스탈린
1879. 12 .21 ~ 1953. 3. 5
← 스탈린(1950)
"서기장인 스탈린 동무는 자신의 손에 무제한적인 권력을 집중시켜 놓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언제나 충분한 주의력을 가지고 그러한 권한을 잘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블리디미르 일리치 레닌, <유서>에서
스탈린은 1922~53년 공산당 서기장과 1941~53년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낸 소련의 독재정치가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분열되자 보다 호전적인 볼셰비키에 가담해 지도자인 레닌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말년의 레닌은 스탈린을 불신해 자신이 남긴 유서에서 그를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 사후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해 그의 경쟁자들을 모두 숙청할 수 있었다. 강력한 경쟁자였던 레온 트로츠키를 몰아냈고 자신과 함께 삼두체제를 이끌었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도 제거했다. 테러와 전체주의가 결합된 그의 독재체제하에서 1,000만 명이 넘는 농민이 굶어 죽었으며, 군대가 와해될 정도로 많은 장교들이 숙청당했다. 한편, 선진공업국에 비해 크게 낙후되었던 소련의 공업은 스탈린 통치 시기에 크게 발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업 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강력한 군산복합체를 추진한 결과 소련은 제2의 핵 강대국으로 냉전시대의 한 축을 이룰 수 있었다. /브리태니커
[1878년] 그리스도교 전도회, 구세군으로 개칭
← 윌리엄 부스
구세군(救世軍, Salvation Army)은 1865년 7월 2일 런던에서 당시 감리교(監理敎)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하였다. '그리스도교 전도회(Christian Mission)'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路蒡)전도를 한 데서 시작하였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하였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하여 부스가 초대 대장이 되었다. /naver
[1860년] 미국의 여성 시온주의 조직인 <하다사>의 창설자 졸드(Szold, Henrietta) 출생
1860. 12. 21 ~ 1945. 2. 13
미국의 여성 시온주의 조직인 하다사(Hadassah : 히브리어로 부림의 여주인공 '에스더'를 뜻함)의 창설자.
랍비의 딸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891년 볼티모어에 러시아 유대인 이주민을 위해 최초로 야간학교를 세웠다. 1888년 미국 유대인 출판협회를 창설하고 1916년까지 이 협회의 편집장과 작가 및 유대 고전의 번역자로 일했다. 1912년 부림절(Purim)에 졸드는 뜻을 같이하는 여성 동료들과 함께 하다사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1916년 팔레스타인에 대규모 의료 센터를 세우고 그곳에 정착했으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시온주의자 조직의 집행부 임원으로 선출되어 보건 및 교육부를 관할했다. 졸드는 어린이복지 및 아동문제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레만 하옐레드(Lemaan ha-Yeled : 졸드 재단의 전신)를 설립했다. 1933년에는 나치에 희생된 젊은이들을 구제하고 이들을 이스라엘에 거주시키는 범세계적 운동인 ‘청년 알리야’(Youth Aliyah)의 책임자가 되었다. 하다사는 후에 미국에서 교육 및 시민 프로그램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브리태니커
[1820년]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李昰應) 출생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구(球)이며, 아들이 조선 제26대 왕 고종이다.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 유사당상·사복시제조·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 후사(後嗣)가 없는 철종의 유고시에 대비하여 조대비(趙大妃)와 가까이 지냈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흥선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조대비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안동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권 후 김병기(金炳冀)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포섭하면서 양반지배층 내부에 존재하는 각 당파에 관직을 안배하여 세력균형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나갔다. 이와 함께 세도정권기를 거치면서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종친(宗親)과 선파인(璿派人) 등 왕족을 집중적으로 발탁하여 재정·군사·경찰 등 권력의 핵심부분에 등용했다. 총명하고 재주 있는 중인계층을 선발하여 각 조(曹)에 집리(執吏)로 배치하고, 의정부에는 팔도도집리(八道都執吏)를 배속시켰다. 제도면에서는 권력체제의 골간인 중앙정치기구 개편에 착수했다. 1864년 1월 세도문벌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는 장으로 활용되던 비변사의 기구를 축소하여 중외(中外)의 군국사무(軍國事務)만을 관장하게 했다. 대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조두순(趙斗淳)과 같이 삼정문란(三政紊亂)을 수습해갈 수 있는 인물과 홍순목(洪淳穆) 같은 친대원군계 인물로 의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 3월에는 정부와 비변사를 합치고 비국(備局)을 정부의 한 부서로 만들었으며, 1868년 축소된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사무를 전담할 군령기관으로 삼군부(三軍府)를 복설(復設)했다. 또한 훈련도감을 정비하여 세도문벌의 군사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정지시키고 실질적인 군영으로 재건했으며, 국왕의 친위병인 용호영(龍虎營)도 정비하여 병조판서가 통할하게 했다. 또한 〈대전회통 大典會通〉·〈양전편고 兩銓便攷〉·〈육전조례 六典條例〉를 편찬 간행하는 등 법전 및 운영규칙을 정비했다. 한편, 유교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이단사상을 탄압하여,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를 처형하고 천주교도를 박해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사업을 했으며,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하는 한편 재원 마련을 위해 원납전(願納錢) 징수, 결두전(結頭錢) 부가, 성문세(城門稅) 부과, 당백전(當百錢) 주조 등을 했다. 이어 종묘·종친부·6조 이하의 각 관서와 도성까지 수축함으로써 한양의 면모를 일신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 양반들의 세력확장의 기반이자 각종 경제적 폐단의 온상이었던 서원 정리에 나섰다. 1864년 8월 서원 보유 토지의 면세를 축소하고 소속노비의 신분을 변정(辨正)하여 군포 수입을 늘렸으며, 이듬해 3월에는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1868년 서원에 정원 이외로 끼어든 자를 골라내고 서원 전결에 세금을 내도록 했으며, 수령이 서원의 장이 되어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이어 1871년 3월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하더라도 1인 1원(院) 이외로 첩설(疊設)한 것은 모두 철폐하게 하여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버렸다. 서원의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후일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대원군은 1862년(철종 13)에 발생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하고 삼정을 개혁함으로써 농민의 불만을 수습하려 했다. 우선 전정(田政)에서는 조세지의 확보를 위해 진전(陳田)이나 누세결(漏稅結)을 색출했으며, 문제가 많은 일부 지역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여 새로운 양안(量案)을 만들고 수세결도 늘렸다. 군정(軍政)에서는 전주민에게 균일하게 세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했다. 호포제는 양반도 호포세를 내는 것으로 양반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시행됨으로써 상민은 부담액이 줄었고 신분적 평등의식도 고취되었다. 환곡문제는 1862년 삼정이정책에서 결정되었던 파환귀결(罷還歸結)이라는 근본적 개혁안을 채택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허류곡(虛留穀) 120여 만 석을 탕감하고 재정확보의 차원에서 호조별비곡(戶曹別備穀)·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 등 새로운 환곡을 마련했다. 환곡의 운영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일부 사창제(社倉制)를 도입하여 관리들의 간여를 금지하고 민간에게 운영을 맡겼으나, 고리대화한 환곡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될 수 없었다. 그밖에 국가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포량미(砲粮米)를 신설하고, 도성의 문세(門稅)를 징수했으며, 궁방(宮房)이나 포구 주위의 유력자들이 불법으로 부과하던 각종 사세(私稅)를 혁파하고 이를 중앙정부의 재정에 편입시켰다. 또한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에 소요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고 청나라 화폐인 청국소전(淸國小錢)을 강제로 유통시켰는데, 이는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상민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호의 무단(武斷)을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궁방전(宮房田)도 세금을 내게 했다. 또 민폐가 많던 도장(導掌)·궁차(宮差)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는 등 궁방에 대한 억제정책도 시행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는 한편,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철저하게 했다. 또한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1866년 8월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병인양요를 겪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외국인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1868년 4월 E.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침입하여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이어 가동(伽洞)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써 대원군의 외국인 배척사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정부가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그해 5월 철수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더욱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사에 자주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도를 봉쇄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하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대원군 축출을 추진했다. 이에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를 계기로 11월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되었는데,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즉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는 등 반개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은 민씨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이어 바오딩부[保定府]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홍장(李鴻章)의 밀의에 의해 1885년 8월 서울로 돌아왔는데, 운현궁에 반감금상태로 있었다. 1894년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민씨정권을 무너뜨린 후, 그를 앞세우고 개화파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만들어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그때 그는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펴다가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그후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주도한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함께 궁성으로 들어가 고종을 만나고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이 궁성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친러파 정권이 들어서자 대원군은 다시 양주로 은거했다.
대원군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그는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조선사회는 더욱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더욱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1620년]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 미국 도착
← 필머스 항에 체류하고 있는 메이플라워호의 그림
102명의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Mayflower]가 1620년 12월 21일 미국 메사추세츠 연안에 도착했다. 9월 16일 영국의 항구도시 플리머스를 출발했던 이들 이주민들은 미국에 도착해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도착지를 플리머스로 명명했다.
이들 중 남자들은 상륙하기 전 선실에 모여 자주적 식민지 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를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한다는 내용의 '메이플라워 서약서'를 체결했다.
102명의 청교도인들 가운데 35명은 그보다 얼마전 본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레이덴으로 이주했던 청교도 급진파로서 이들은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풍요로운 삶을 찾아 대서양을 건너 신세계를 찾은 것이다. /조선
[1375년] 이탈리아 소설가 보카치오(Boccaccio, Giovanni) 사망
← 보카치오
1313 ~ 1375. 12. 21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3대 인문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보카치오가 1375년 12월 21일 사망했다. 단테의 '신곡'에 비해 '인곡(人曲)'이라 불리는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는 1313년에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체르탈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단테를 존경해서 '단테전'을 집필하기도 했고, 성 스테파노 디 바디아 성당에서 단테의 '신곡'을 강의하기도 했다.
'데카메론'은 1348년에서 1353년에 걸쳐 집필된 단편소설집이다. 1348년 피렌체에서 괴질 페스트가 만연하여 수만 명의 시민이 죽어가자, 이 참담한 광경을 배경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교외의 화려한 별장으로 피난해 10일 동안 계속 매일 열 명의 남녀가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꾸며 '데카메론'을 썼다. 이 소설을 '10일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100편의 이야기는, 인간생활에서 일어나는 우스운 이야기로부터 도덕적인 훈화,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의 수도자들에 대한 풍자, 그리고 사랑의 기쁨과 슬픔 등 아주 다채롭다. /조선
[69년] 제9대 로마제국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즉위
(영)Vespasian. 정식 이름은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본명은 Titus Flavius Vespasianus.
← 베스파시아누스, 오스티아에서 발견된 흉상, 로마에 있는 Museo Nazionale Romano 소장
AD 9. 11. 17(?) 라티움 리에티~79. 6. 24.
로마의 황제(69~79 재위).
비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내전에서 승리해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가 되었다. 그는 재정을 개혁하고 제국의 통치를 공고히 하여 정치를 안정시켰으며 로마의 대규모 건축공사를 추진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 또한 에퀴테스 계층에 속했으나 원로원에 들어간 오빠가 1명 있었다. 초기 시절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형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그늘에 가려 지냈다. 그의 형은 출세를 거듭해 48년경 도나우 지역의 중요한 지휘권을 맡았으며 네로 치세에는 수년 동안 황실 근위대장을 지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형을 따라 원로원에 들어가기 전에 많이 망설였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출세는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크레타에서 콰이스토르(재무관)를 지낸 뒤 그는 큰아들 티투스가 태어난 해인 39년 법이 정한 가장 이른 나이에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 칼리굴라(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환심을 샀으며 다음 황제 클라우디우스 때는 해방노예 출신의 권력자 나르키수스의 후원을 받았다. 43년 브리튼 침공에 참가한 메드웨이 강의 도하(渡河)에서 뛰어난 공훈을 세운 뒤 그는 선봉부대의 좌익을 맡아 아일오브와이트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멀리 데번까지 여러 부족을 정복했으며 20개가 넘는 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이같은 공적으로 그는 개선식을 치렀고 2가지 성직에 임명되었으며 51년에는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그러나 54년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으로 권력을 잃게 된 나르키수스가 자살하자 이후 한동안 아무런 직책도 얻지 못했다. 63년경 그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엄격한 재정 운영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샀으며, 한번은 지나가던 중에 사람들이 그에게 순무를 던진 일도 있었다. 그가 개인적 치부를 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으나 이후 평생 동안 그에게는 탐욕스런 인물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66년 가을에는 네로를 수행하고 그리스로 갔다가 황제의 예술 공연중에 잠든 실수를 범했으나 67년 2월 별 탈 없이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유대는 그 전 해에 로마군이 2차례나 대참패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유대에는 이전에 군단급 병력이 주둔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지휘관 임명은 이례적인 조치였다. 그는 대규모 보조병력과 함께 3개 군단의 병력을 할당받았다. 이같은 조치의 이면에는 그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인물이라는 고려도 작용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장수였지만 하층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네로의 통치에 도전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네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같은 판단이 확실히 옳았다. 그는 67, 68년 2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68년 6월 네로가 죽자 그는 이내 전투를 중단했다.
그가 전투를 중단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며 이와 함께 아들 티투스를 중개자로 삼아 인접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와 모종의 의견 조정을 했다. 두 지휘관 사이에 무슨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후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은 이미 권력 장악을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표면에 내세운 주장은 유대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새 황제 갈바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형식은 타당한 것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정치적 고려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결국 갈바를 인정하기로 했다. 갈바의 귀족 혈통은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베스파시아누스 같은 사회적 지위로서는 감히 맞서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머물러 있었고 다음 겨울에 갈바에게 보내는 축하 사절로 티투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티투스는 도중에 코린트에서 갈바의 살해 소식(69. 1. 15)을 듣고 그 길로 돌아왔다. 이제 이탈리아는 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주요한 제위 경쟁자들인 오토와 비텔리우스는 모두 베스파시아누스가 한 번 맞서볼 만한 인물들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후 취한 행동은 정확한 시기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확실한 것은 오토가 패배해 자살한 4월 16일 직후 그가 지지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7월 1일 사전에 꾸민 계획에 따라 이집트의 2개 군단이 그를 황제로 선포했으며 며칠 후 시리아와 유대의 군단들이 그뒤를 이었다. 이후 제국의 도처에서 같은 반응이 있었던 것은 결코 사전계획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군사혁명이 비텔리우스의 실정(失政)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비텔리우스는 겨우 7월 중순에야 로마에 도착했음).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는 한여름에 유대인들을 상대로 단기간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무키아누스가 이끄는 원정군을 디라키움(두라초)으로 파견해 그곳에서 함대와 합류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로마에 대한 곡물 보급을 중단시켰다. 8월중 도나우 지역 군대가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그 지역 군단 지휘관의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5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해 크레모나 부근에서 비텔리우스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크레모나 시를 약탈했다. 이어서 안토니우스는 계속 승리의 행진을 벌이면서 남하해 12월 20일 로마에 입성했으며 비텔리우스는 이때 자기 군대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의 처형을 막지 못했다. 사비누스는 소병력을 이끌고 카피톨(주피터 신전)을 점령하도록 파견되었다가 그곳에서 비텔리우스 부대의 습격을 받고 처형당했다. 안토니우스의 침략과 파괴적 행동만 없었더라면 베스파시아누스가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믿기 어렵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가 신속하게 로마로 건너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안토니우스에게 최후의 불운이었다.
12월 21일 원로원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지위를 공식 승인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군사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군대가 그를 황제로 선포한 7월 1일을 자신의 통치의 기점으로 꼽았다. 그럼으로써 이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전임자들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도 받지 못했던 많은 권한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갈바·오토·비텔리우스에게도 비슷한 권한이 주어졌는지 또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후임자들에게도 그같은 권한이 계승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권한 규정 법령을 보면 명백한 독재권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조항이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법령보다도 그에게 더 중요했던 문제는 자신의 치외법권적 권능(auctoritas)을 인정받고 벼락출세한 자기 가문의 위신을 높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등극을 예고하는 신성한 징조들을 주의깊게 퍼뜨렸으며 자기 이름의 앞뒤에 여러 호칭을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재위중 두 해를 제외하고 매년 짧은 기간에 콘술(집정관) 직책을 겸임했으며 두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를 콘술 자리에 여러 번 앉혔다. 재위기간 내내 자기 아들들이 차례로 제위를 계승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티투스는 아들이 없었음). 이같은 제위 세습문제를 놓고 그는 76년에 처형당한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같이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원로원 의원들과 다투었던 것 같다. 그러나 헬비디우스와 그 동료들은 70년 초반에 이미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에 관한 전면적인 염려를 토로한 일이 있었다.
70년 10월경 베스파시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돌아왔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자금을 마련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그는 황실의 토지를 투기꾼들에게 팔아넘기는 한편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이집트인들의 원성을 샀다. 이어서 그는 국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제국의 재정수입이 약 3배 정도 더 필요하다고 선포하고 자신의 귀환을 전후해 재정조달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속주의 세금을 때로는 2배까지 늘렸으며 그리스어권의 여러 속주와 도시에 부여했던 면세권을 취소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공유지를 무단점유자들에게서 다시 빼앗고 각양각색의 세금을 신설했으며 이산(離散)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는 세금까지 로마 국고로 돌리도록 했다. 이같은 조치는 네로가 재정을 탕진하고 내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줄곧 베스파시아누스의 탐욕을 비난했다. 그러나 70년의 상황에서는 어떤 황제라도 그같은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모은 공공자금의 규모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그 자금으로 그는 로마 포룸(광장)과 평화의 신전을 지었으며 네로의 '황금궁전' 터 위에 콜로세움 공사를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카피톨 신전의 복구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위기간 내내 일관되게 '흔들리는 국가를 먼저 안정시키고 다음에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확고한 방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토목공사와 가난한 친구들을 돕는 데 많은 돈을 썼음에도 그는 공공자금의 상당한 잉여분을 자기 후계자들에게 남겨주었던 것 같다.
이같은 안정화 시책의 일환으로 군사문제에도 관심을 돌렸다. 첫번째 과제는 68~69년 내란 이후 흐트러진 군기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귀환 이전에 무키아누스는 비텔리우스가 크게 늘렸던 황실 근위대 병력을 대략 이전 수준으로 감축했으며 변경에 배치된 군단을 재편해 비텔리우스 편에서 싸웠던 군사들을 위험성이 있는 지역에서 이동시켜 놓았다. 동방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티투스는 70년 8월 예루살렘을 점령해 유대 전쟁을 사실상 종결지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라인란트에서 일어난 반란도 베스파시아누스의 사촌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스가 진압했다. 그리고 몇몇 변경에서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독일 남부에서는 아그리데쿠마테스를 합병해 바젤에서 라인 강을 경계로 형성된 요각지대(凹角地帶)를 차단했다. 브리튼에서는 더욱 중요한 진공(進攻)이 이루어져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간티아 왕국이 속주에 통합되었다. 웨일스 지역은 완전히 평정되었으며 78년 그나이우스 아그리콜라 장군이 7년 동안 총독 통치를 실시해 로마군을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로 진출시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위 초기에 아들들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가 귀환하기 전 수개월 간 오만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했으며 이 때문에 그후 내내 철저하게 하위 직책에 머무르도록 조치당했다. 티투스도 유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의 군대가 자신들을 이탈리아로 데려가줄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위험요인을 안고 있었으나 그는 결국 혼자서 돌아왔다. 티투스는 독자적인 개선식을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에 실질적인 동반자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 콘술이 되었으며 친위대의 사령관 직책까지 맡았다.
73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켄소르(감찰관)가 되었다. 이 직책을 맡고서 그들은 속주의 지방행정을 광범위하게 재편한 것으로 짐작되며 앞서 말한 세제개혁도 이때 실시되었다. 그들은 스페인 전역에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곧 스페인의 모든 도시 행정관들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것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제국의 재정수입도 늘어났다. 또한 그밖에 다른 곳에서도 로마 시민권이 폭넓게 부여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아울러 그들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속주까지 망라해 로마 원로원에 많은 새 의원을 뽑아들였다.
원로원과의 관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초기의 수개월 간 불화가 있었지만 이후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말년에 원로원 활동을 시작한 역사가 타키투스가 보기에 그는 '역대 황제 중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해간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위험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자들에게는 무자비한 태도를 취했다.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와 연루된 '철학자들'이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했으며, 78년에는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가 처형당했다. 이 인물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활동 초기부터 가장 유능한 지원자였으나 티투스와 유대인 공주 베레니케 사이의 관계를 겨냥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여긴 도발행동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흉상을 통해 잘 알려진 투박하고 고집센 외모에 걸맞게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즐겨 회상하던 비천한 출신성분 특유의 무뚝뚝하고 때로 거칠기까지 한 기풍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러한 기풍은 고된 일을 감당해내는 그의 대단한 능력, 일상생활의 소박함과 더불어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당대 귀족계급의 모범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기민하고 빈틈없는 야심가였다. 출발부터 재빠르게 강한 세력기반을 쌓았으며 초기의 관직 임명은 대부분 친족관계나 과거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이루어졌다. 통치정책은 합리적이기는 했지만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 같은 후기의 황제들과 비교해볼 때 별반 두드러진 독창성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이 보기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종식시켜 제국의 붕괴를 막은 인물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주화에 '팍스'(평화)라는 글자가 기본문양으로 쓰인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임종 때 그는 "아, 나는 신이 되는 것 같다"(Vae, puto deus fio)고 말했으며 죽은 후에 즉시 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플라비아 도미틸라라는 여인과 결혼해 아들 티투스·도미티아누스, 딸 플라비아 도미틸라(이후 신으로 모셔짐)를 낳았다. 부인과 딸은 모두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으며 이후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처제 안토니아의 해방노예였던 예전의 정부 카이니스를 데리고 살았으나 그녀 또한 그보다 먼저 죽었다.
그밖에
2001년 투안쿠 사예드 시라주딘, 말레이시아 국왕으로 선출
2001년 언론인 송건호씨 별세
1999년 유럽연합, 중국에 인권개선과 사형제도 폐지 촉구
1999년 통일농구 북한 방문단, 서울도착
1991년 아제르바이잔 독립
1991년 투르크메니스탄,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그루지야,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우크라이나,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몰도바 독립
1991년 카자흐스탄,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우즈베키스탄,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아르메니아 독립
1991년 벨로루시 독립
1988년 팬암기 영국 상공에서 폭발. 269명 사망
1983년 문교부, 학원사태 제적생 복교허용
1983년 일본, 보이지않는 미사일 개발에 착수
1981년 중국, 광개토대왕비를 1급 보물로 선정
1980년 미국 극작가 마르크스 코널리 사망
1977년 소련, 에너지광선무기 개발
1975년 아랍게릴라, 빈 소재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를 습격, 각국 대표 수십명 인질 난동
1974년 중앙일보와 TBC 합병(주식회사 중앙일보 동양방송으로 상호변경)
1972년 동-서독 관계정상화 기본조약 조인
1971년 유엔 사무총장에 쿠르트 발트하임 선출
1970년 백두진 제19대 국무총리 취임
1968 미국 아폴로8호 발사
1967년 박정희 대통령 호주방문,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1965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29세의 청년 곽태영으로부터 피습
1962년 미국-영국, NATO 핵군 창설 합의
1961년 케네디, 맥밀란 버뮤다서 회담. 베를린전략 합의
1961년 최인규 곽영주 임화수 등 사형 집행
1961년 모이세 촘베, 통일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콩고 분열에 종지부
1954년 미국의 테니스선수 크리스 에버트 출생
1951년 중국, UN 휴전안 거부
1946년 일본 남해도 시코쿠해역에서 진도 8.0의 진도 발생 1,400명 사망 실종, 가옥피해 13,000여 호
1937년 미국의 영화배우 제인 폰다 출생
1918년 유엔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 출생
1917년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 출생
1917년 프랑스 모단느서 군용차 탈선, 550명 사망
1917년 무용수 에글레프스키 출생
1913년 낱말맞추기(crossword puzzle) 뉴욕 월드지에 첫 등장
1906년 영국, 노동쟁의법 제정
1905년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조선통감으로 임명
1892년 미국의 프로 골프선수 월터 헤이건 출생
1890년 미국의 유전학자 조셉 멀러 출생
1885년 한일, 부산구설해저전선 조관속약(條款續約) 체결
1872년 미국 소설가 알버트 터휸 출생
1860년 미국 여성 이온주의 조직 하다사의 창설자 햄머스 졸드 출생
1795년 독일 역사학자 랑케 출생
1431년 유효통, 약용식물 정리한 ‘향약채집월령’ 편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