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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죽으나 주의 것 롬14:6-9(p,258)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어떤 글에 보니, 80살 노인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잠자는 데 26년, 일하는 데 23년, 밥 먹는 데 6년, 양치하는데 3년, 화를 낸 시간은 3년, 하루 10번 웃었다 생각하고 웃은 시간은 88일 밖에 되지 않더라 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을 들여다보면, 먹고 자고 일하고, 이 3가지의 반복이라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짐승처럼 단지 먹고 자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것이 다를뿐 사람마다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하는 것을 본문 말씀을 상고(詳考)하시므로,저와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번 재 점검도 하시고, 다짐도 하시며, 기도의 제목을 세우실 수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1. 먼저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아멘
(1). 6절 말씀에서 첫째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라"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다른 날보다 특별히 중하게 생각하는 날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당연히 주일을 중하게 여깁니다. 개인적으로는 입학하는 날, 졸업하는 날, 결혼하는 날이라든지, 생일날이라든지..., 분명 다른날과는 중요한 날이 분명합니다.
어떤 한 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목적이 주님을 위하여서 그렇게 하라 말씀하였습니다.
(2). 6절 말씀에서 둘째는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먹고 마실 수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감사드릴 일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먹어야 합니까? 단지 죽지 않기 위하여 먹고 마셔야 합니까? 그것은 짐승도 마찬가집입니다.
성도는 주를 위하여 먹고 마셔야 합니다.
청도는 소싸움 경기장이 있을 정도로 청도소싸움하면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청도소싸움경기장은 1만명이 앉아서 관람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붕이 개폐식으로 되어 있었어 지붕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청도 소싸움대회가 열렸습니다. 소싸움대회 때는 120마리 이상의 싸움소가 청도를 찾아옵니다.
싸움소는 일반소와는 먹는 것이 다릅니다. 싸움소는 힘이 좋아야 하므로 일반 소와는 다르게 영양가가 많은 좋은 것을 먹입니다. 소의 여물에다 콩·보리·좁쌀·쌀겨·보리죽·호박·낙지·미꾸라지·보신탕·인삼·녹용 등을 자주 먹입니다.
싸움에 나가기 전에는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이나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 같은 보약(補藥)도 먹입니다. 싸울 때 상대 소와 부닥칠 때 아픔을 덜어주려고 진통제(鎭痛劑)나 두통약(頭痛藥)도 먹입니다.
싸움소는 왜 이렇게 잘 먹입니까? 그것은 주인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똑같이 먹고 마시며 살아갑니다. 요즘에는 몸에 좋다고하면 많이들 챙겨 먹습니다.
건강하게 백수를 넘기려고 먹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것도 주를 위하여 먹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먹습니다. 비타민을 먹는 것도 커피를 한잔 마셔도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먹습니다. 이렇게 먹을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도록 합시다.
(3). 6절 말씀에서 세 번째는 첫째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먹지 않는다는 말은 우상의 제물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에 그것이 꺼림직하여 먹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럴 경우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는 것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 기도를하는 것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되어야 합니다.
수술을 앞두고도 금식을 병원에서 시킵니다. 어쩔수 없는 금식이지만 이럴 때에도 단순히 수술을 위한 금식으로만 생각지 마시고 기도하라고 주신 기회로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금식이 되도록 한다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2. 7절과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7절 말씀은 사는 목적을 말씀합니다.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도 있기는 있습니다. 되는대로 사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없습니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시비걸고 싶으면 시비를 걸고..., 짐승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작동하지 않게되면 인간도 동물이 됩니다.
성적인 욕망이 생기면 친딸도 성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2년 동안이나 아버지에게 수없이 성폭력을 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 여자는 스스로 목숨을 끝었습니다.
삶의 목적이 있다할지라도 사람마다 삶의 목적이 다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로 있었을때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병든자들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잘 가르치고 싶은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단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를 위하여 삽니까? 누구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까?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 성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의 종으로 있던 저와 여러분을 피값으로 사셨습니다.
옛날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노예는 한번 노예로 팔리면 일생동안 노예입니다. 아무 소유권도 없습니다. 그의 재주, 그의 능력, 그가 버는 돈도 전부 주인의 것입니다. 심지어 노예가 자식을 낳게되면 그 자식들도 주인의 것입니다.
노예가 가진 것..., 노예의 목숨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우리들도 본래는 종이었습니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이 물건이 값진 것인가? 아니면 보잘 것 없는 것인가?는 물건을 값을 보면 알게 됩니다.
시계를 두고보면 다이소 같은 곳에 가면 이쁜 시계들이 최하 5천원짜리부터 수두룩 합니다.
어떤 연예인이 차고 있는 시계가 5천만원을 짜리라는 것을 인터넷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5천원짜리 시계나 5천만원 짜리 시계나 저의 눈으로 볼때는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격을 들어보니 가치의 차이가 하늘과 땅차이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죄의 종에서 놓여나도록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그 값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려 대속하여 죽으심으로 흘리신 피를 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행20:28)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다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누구의 종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이 나를 종으로 삼으시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다면 기분이 나쁠수도 있지만, 우리는 본래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를 짓게되면서부터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롬6:16절 말씀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하였습니다.
죄는 배우지 않아도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고싶지 않아도 죄는 짓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죄의 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은 자기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주인이 시키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았을때는 내가 원하여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죄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으로 한평생 살게되면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죄의 종으로 살았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이제 우리는 의의종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믿게되었습니다.
이또한 나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이 시키는대로 하게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무조건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의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의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주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이 바로 나를 죄의 종에서 피값을 치루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레서 저와 여러분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어떤 주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예수를 잘 믿는 분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얼마나 예수를 잘 믿었던지 설거지하는 시간도 도저히 낭비할 수 없다 하여 싱크대 앞에 성경구절을 붙여 놓고 암송하면서 설거지를 했습니다. 이 날도 설거지를 하면서 싱크대 앞에 붙인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이 날의 성경 구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녀는 설거지를 하면서 이 구절을 암송하다보니 갑자기 '내가 지금하고 있는 설거지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성경 구절을 외우고, 전도하고 교회일 하는 것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설거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되며, 그럴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부인은 너무 기뻤습니다.
집에서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밥을 하는 모든 허드렛일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습니다. 방바닥을 닦으면서도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방을 닦았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모든 생활 중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출 때 거기서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에는 주인 없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흘러가는 강(江)도 주인이 있습니다. 큰 강은 국가하천이라는 팻말이 강이 흘러가는 여러곳에 분명히 세워져 있습니다.
큰 산도 주인이 있습니다. 국립공원 혹은 도립공원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 팻말이 없어도 주인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도 주의 것이며 죽어도 주의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 다 맡기고 살으시기를 바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의 주인이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합시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