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BC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하였다고 합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으로 475년(문주왕 1)까지의 도읍지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전라북도 익산(益山), 충청남도 직산(稷山), 경기도 광주(廣州) 등 여러 주장이 있으나 광주설이 가장 유력하다.
1982년 김성호(金聖昊)는 백제의 건국관계사를 연구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지금의 위치가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笠場面) 호당리(虎堂里)의 위례성지(慰禮城址)라고 발표하였다.
하북위례성은 비류 · 온조집단 등이 첫 근거지로 했던 곳이다. 그러나 위례성이 도읍지로서의 명칭인지 또는 성읍국가로서의 국호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위례'란 명칭이 성책에 특징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조선 후기의 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즉 '위례'란 방언에 광곽(匡郭)의 사방을 둘러친 것을 '위리(圍謙)'라고 하는데, '위례'와 '위리'는 그 말소리가 비슷하며, 또 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축토하여 광곽(匡郭)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위례'라고 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성곽사의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수긍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무릇 지명이 생겨나는 속성 가운데는 지형지물의 상징적인 특징을 따서 이름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위례성이 성책의 특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초기의 도읍지인 위례성은 '위례국' 또는 '위례성'으로써 성읍국가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북의 위례는 부여씨(夫餘氏) 남하 이래 오랫동안 기초를 다지어 오던 곳으로, 필경 거기를 중심으로 일국을 개창하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국호는 그 지명에 의하여 위례라고 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하북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 종래에 위례성이 충청남도 직산에 있다는 직산설과 그것이 한강 북안에 위치한다는 이른바 한강이북설이 있어 왔다. 또 한강이북설에는 다시 삼각산 동록설과 세검정일대설이 제기되어 있다.
즉 조선시대의 관찬지리지들은 위례성을 충청도 직산현이라 하였다. 그 절대위치는 직산현 성거산 북쪽 5리쯤에 있고, 토축으로 된 성인데 그 둘레는 1,690척, 고 8척, 성내에 우물(井)이 1개이며 지금은 반이상이 무너졌다고『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기록하고 있다. 직산현의 군명이 본래 위례성이었다는 것이며, 온조가 남하하여 이곳에 도읍하였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러한 직산설의 시원을 따져 보면 현존 문헌으로서는 『삼국유사』 왕력, 제1, 백제 온조왕조에 '위례성에 도읍했다. 어떤 말로는 사천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직산이다'라고 한 것이 최고(最古)라 하겠다. 이러한 고려시대 이래의 인식을 배경으로 한, 이를테면 위례성에 대한 조선시대 전반기의 일반적인 인식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은 직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연유하여 직산현에는 세종 11년(1429) 7월 백제 온조왕묘(溫祚王廟)가 세워졌으며, 임진왜란으로 왕묘가 불타 없어지기까지 춘추로 치제가 계속되어 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일부 지리학자들은 직산설을 부인하고 위례성은 한강 이북에 존재한다는 이설을 제기하였다. 가령,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疆界考)』에서 상당히 인용 비판되고 있는 『빈일쇄록(賓日鎖錄)』(참봉 이만승 저)과 『목옹지지(木翁地志)』(목옹 李泳著) 등은 한강이북설의 제창자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설은 고려 이래 전통적이며 지배적인 직산설의 인식자들에게 크게 비판되었을 뿐이었으며, 그 인식을 바꾸어 놓지는 못하였다. 특히 이들이 당대의 쟁쟁한 학자였던 유형원(柳馨遠), 신경준(申景濬) 등에게 크게 비판됨으로써 재고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영조 38∼헌종 2, 1762∼1836)에 이르러 직산설의 인식 수정은 확연해지는 것이었다. 즉 첫 도읍지인 위례성은 직산이 아니라, 한강북안임을 명쾌하게 논증하였고, 그 절대위치는 혜화문 밖 10리 남짓한 지점인 삼각산동록(三角山東麓)의 한양동(漢陽洞)이 그곳이라 하였다. 그 증거로는 옛성(古城)의 흔적이 있으며, 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켜 한양고현(漢陽古縣)이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의 성이란 다만 나무울타리를 하고(樹柵) 흙을 쌓았기(築土) 때문에 흔적은 있지만 돌(石)은 없다고 했다. 정약용의 견해는 조선 말기의 지리 · 지도학자인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64)에게 이어졌으며 그 후의 학자들도(일본인 포함) 위례성이 한강 이북에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한강이북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약용 · 김정호 등의 삼각산 동록설(東麓說)은 최근에 이르러 그 견해를 수정하여 백제 초기 위례성은 세검동일대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게 되었다. 아무튼 위례성(하북)에 대해 종래에 절대위치를 놓고 이설이 있어 왔고, 또 분명한 위치가 정립되어 있지는 않지만, 한강북안에 있었다는 점과, 그것이 삼각산동록이니 세검동일대에 비정되고 있는 점으로 보면 지금의 서울특별시 권내, 또는 가까운 주변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의심없는 일이라 하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위례성'이 성책의 특징에서 연유되는 것이라면 세검동 일대에 비정되는 것은 도저히 수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하남위례성으로의 천도는 『삼국사기』에서 온조 14년(B.C. 5) 7월이라 하였고,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종래로부터 경기도 광주설이 있어 왔다. 혹 전북 익산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현재에는 광주설이 유력한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광주설은 초기의 도읍지였던 하북에서 하남으로 옮긴 위례성간의 관련이 문헌 기록과 그 지리적 형세가 부합되고, 또 유적과 유물로서도 고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약용은 온조왕 13년(B.C. 6)에 쌓은 하남의 위례성은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앞에서 말한 바 『삼국유사』에서‘병진년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이다’라고 한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것 역시 고려시대로부터의 전통적 지배적 인식 위에 근거를 둔 것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관찬지리지와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들은 물론 지금까지에도 광주설에는 이론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절대위치의 성책 · 유적에 대해서는 조사 · 연구된 것은 별로 없다.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들은 『삼국사기』에서의 도읍지로서의 입지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즉 '북으로 한수를 둘렀다'고 한 것은 지금의 서울 강동구 하일동 · 암사동을 두르고 있는 두미강(斗尾江, 度迷津)을 가리키는 것이며, '동으로 고악(高岳)에 거(據)했다'고 한 것은 지금의 창우리(현 하남시)에 위치하는 검단산을 가리킨다고 했다. 즉 검단산은 광주고읍의 진산이었으며 숭산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한편 '남으로 비옥한 땅을 바라본다'고 한 것은 서울 강남구 탄천(숯내)을 끼고 펼쳐진 평야를(서광주평야라고도 함), 혹은 둔골제(屯骨堤)를 가리키는 것이며, '서쪽으로 대해(大海)가 가로막았다'는 것은 경기도 고양군의 행주목(幸州牧)을 가리킨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다소의 부회적인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삼국사기』의 백제 도읍지를 설명한 지리적 조건과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한강 남쪽 지역에서 근년 삼국시대의 고적발굴을 통하여 문헌기록의 신뢰도를 한층 깊게 해주고 있다. 가령, 석촌동의 적석총발굴(1974 · 75 · 76)이라든가 가락동의 백제고분 발굴(1963) 풍납리토성의 발굴(1963) 등을 통하여 초기백제의 묘제는 고구려계통이었다는 사실과 또 이 고분이 지닌 전통성 · 보수성으로 미루어 고구려의 유민이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고적의 대부분이 한산을 기점으로 4㎞ 내외의 한강연안의 낮은 구릉이라는 점이 한층 주목되며, 고적 자체 뿐 아니라 출토된 유물은 백제 초기의 귀중한 문화적 소산임에 틀림없다. 또 이들이 남한산 서쪽 지역이라는 점과 조선시대의 지명 유존과 서로 부합되는 점은 특히 유의될 점이다. 한편 위례성(하남)은 광주군 동부면 춘궁리(현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성이 그것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온조는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면서는 더욱 큰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국호도 십제에서 백제로 하는 등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의 체제를 정비해 나가고 있었다. 천도한 해인 온조왕 14년(B.C. 5) 백제는 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도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마한과의 국경 획정을 통고하고 있다. 이 때의 백제의 강역은 북으로 패하(浿河, 지금 예성강), 남으로 웅천(熊川, 지금의 금강), 서쪽으로 대해(지금의 황해), 동으로 주양(走壤, 지금의 춘천)에 이르고 있는데, 당시의 강역 획정은 어디까지나 백제측의 일방적인 통고로 보이며, 상호간에 공인된 국경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 같이 토착사회에의 침식은 마침내 온조왕 26 · 27년(A.D. 7∼8)에 마한왕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로써 백제국은 금강 이북의 영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되었고, 고대 통일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의 이동이 온조 14년(B.C. 5)이 아니라, 책계왕 원년(286) 이후 비류왕 24년(327)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하남으로 이동하기 이전의 국호는 '위례'였을 것이고, 이동한 후로는 '백제'라고 하였는데 이동하게 된 동기에 대한 기사―'국가의 동쪽에 말갈이 있어서 경계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적다'(온조왕 13년조)―가 책계 · 분서왕 양대에 북방의 낙랑 · 맥인(貊人, 말갈)들의 공격을 받아 두 왕이 살해된 사실을 두고 한 것이 아닌가고 추측한 데서 연유하는 견해이다. 또 이러한 사건의 발생으로 북방의 위협을 피해서 강남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조왕 13년의 기사는 비류왕 초년쯤에 내려가 있어야 할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논고에 대해 그것은 기록의 성질상 닿지 않는 무용의 합리화라는 평을 받기도 할 만큼 10세대 가까운 연간의 백제기(百濟紀)를 허구화시킨 근거없는 논리라 할 것이다.
백제국은 토착사회에의 정복과정을 통하여 고대국가로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한강 연안에 정착하였다는 사실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강유역이 한반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위치뿐 아니라, 한강이 구시대에 있어서 천연적인 교통수단을 제공해 주고 일단 유사시에는 성벽과 같은 군사 요새지가 되는 때문이다. 온조집단이 이와 같은 주요 지역에 근거하면서 한족사회에서 통합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한 것은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온조집단은 남하하기 전 졸본부여에서 이미 고구려의 고대국가형성의 정복과정을 경험한 자들이었고 또 선진적인 철기 기마민이었다. 서울지방은 백제국의 발상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한반도 중심부인 한강 연안에 위례성이란 왕도를 두고 강력한 정치세력을 구축하여 앞으로 약 5세기 동안 정치 활동 무대의 중심을 서울지방에 두고 있었다.
풍납토성 유물 발굴 이후 많은 학자들은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김용만 선생님께서는 하남시를 더 유력하게 보고 계십니다. 풍납토성의 둘레가 왕성이라 하기엔 너무 작고 한강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하남 위례성을 방어하는 외성으로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풍납토성 역시 백제 왕성과
첫댓글 풍납토성이 백제의 초기수도 아닌가요?
풍납토성 유물 발굴 이후 많은 학자들은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김용만 선생님께서는 하남시를 더 유력하게 보고 계십니다. 풍납토성의 둘레가 왕성이라 하기엔 너무 작고 한강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하남 위례성을 방어하는 외성으로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풍납토성 역시 백제 왕성과
분명히 관련이 있으며 지금의 서울 석촌동, 방이동 등에 있는 백제 고분 등 유적 등을 생각할 때 위례성의 위치가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라 하더라도 서울은 수도의 영역에 들어가고 따라서 서울은 6백년 고도가 아닌 2천년 고도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