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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10대뉴스 1949년 국내 10대 뉴스
겨울비(오덕희) 추천 0 조회 45 14.08.13 10: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49년 국내 10대 뉴스  
언더우드 박사부인 피살

1949년 3월 17일 연희대 명예총장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엘터여사가 자택에서 복면을 한 괴한들이 쏜 총탄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숨졌다. 엘터여사는 이날 연희대 교수부인 20여 명을 초청해 파티를 열고 있었다. 연희대학생이며 민주학련위원장인 김석준 등 범인 6명은 사건발생 5일만에 모두 검거됐다. 이들은 "파티에 참가한 모윤숙 여사를 향해 쏜 총탄이 빗나가 엘터여사가 맞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실은 한미우호관계를 깨뜨리렸던 것이 이들의 의도였다. 장례식은 연희대학교장으로 치러졌다.

죽령터널 열차사고

1949년 8월 18일 오후 6시25분 경 서울발 안동행 중앙선 제505열차가 죽령터널 속에서 원인모를 사고로 정차했다. 이 사고로 승객 3백80여 명 중 48명이 연기에 질식해 사망하고 64명은 중태에 빠졌다. 마침 선로감시반이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긴급연락했으나 사고발생 2시간30분만에 겨우 구조작업이 시작돼 인명피해가 크게 늘어났다. 사고원인은 제3번 객차 후미와 제4번 객차 머리부분 사이에 기관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단양과 죽령 사이에 있는 이 터널은 그 길이가 6km나 돼 기차가 통과하는데 만 약15분이나 걸리는 남한 최장의 터널이다. 그런데 사고 이틀전인 8월 16일 죽령역에 공산 무장게릴라들이 나타나 안동발 제천행 열차 7량을 탈취하여 터널로 끌고 들어가 불태운 사건이 발생해 그 일대에 경찰이 수색전을 펼치고 있었다.

첫 전국인구조사 실시

1949년 8월 18일 오후 6시25분 경 서울발 안동행 중앙선 제505열차가 죽령터널 속에서 원인모를 사고로 정차했다. 이 사고로 승객 3백80여 명 중 48명이 연기에 질식해 사망하고 64명은 중태에 빠졌다. 마침 선로감시반이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긴급연락했으나 사고발생 2시간30분만에 겨우 구조작업이 시작돼 인명피해가 크게 늘어났다. 사고원인은 제3번 객차 후미와 제4번 객차 머리부분 사이에 기관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단양과 죽령 사이에 있는 이 터널은 그 길이가 6km나 돼 기차가 통과하는데 만 약15분이나 걸리는 남한 최장의 터널이다. 그런데 사고 이틀전인 8월 16일 죽령역에 공산 무장게릴라들이 나타나 안동발 제천행 열차 7량을 탈취하여 터널로 끌고 들어가 불태운 사건이 발생해 그 일대에 경찰이 수색전을 펼치고 있었다.

임영신 상공장관 독직사건으로 기소

임영신 상공장관과 비서 등 18명이 독직사건에 연루돼 배임, 증뢰, 수뢰, 사기, 횡령 등으로 1949년 5월 28일 기소됐다. 정부 감찰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임장관은 1948년 총선에 출마해 생긴 선거빚을 갚기위해 1.상공부 산하 대구메리야쓰공장의 면사를 담보로 3백만원을 융자받고, 공장공금 2백44만원을 유용했으며 2.이승만 대통령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상공부 각 국장들과 국영기업체에 각각 5천만원, 5백95만원을 모금토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장관 등 9명은 무죄판결을 받았고 나머지 9명은 집행유예판결을 받았다. 임장관은 6월 스스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주한미군 전면철수 발표

1949년 5월 28일 미국무성이 주한 미군가운데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미군을 6월말까지 모두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철수발표는 유엔총회 결의(1947.11.14)와 소련군의 북한철수 발표(1948.12.26)에 따른 조치였지만 실제는 미국의 對극동정책의 일환에 따라 결정된 일이었다. 미국은 이듬해 1월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선언'을 발표해 정책변화를 기정사실화했고, 4월에 체결된 태평양조약에서도 "아시아 대륙에서 발생한 분쟁에 대해 미국은 군사적 관여를 배제할 것"이라는 항목을 삽입해 이를 뒷받침했다.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했고 1년 후 한반도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

1949년 5월 20일 검찰은 이문원, 최태규 등 국회 소장파 의원 6명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온 증거를 포착해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19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안'을 긴급동의했으며 1948년 12월 하순경에는 제헌국회 개원 이전에 체결한 각종 한미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국회의원 62명의 연서로 외군군철수촉구 건의안을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했으며 1949년 2월에는 '남북평화통일방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수사가 확대됨에 따라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노일환 배중혁 의원 등이 잇따라 잡히는 등 관련 국회의원이 13명으로 늘어났다. 노일환 이문원은 징역 10년, 김약수 박윤원은 징역 8년, 박옥주 김병회 장욱중 황윤호는 징역 6년, 최태규 이구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등은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들은 1950년 2월 1일 징역3년에서 10년까지 모두 실형선고를 받아 수감 중 한국전쟁을 맞아 북한군에 잡혀갔다.

농지개혁법 공포

1949년 6월 21일 남한에서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북한이 1946년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토지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농민운동의 고양, 북한의 토지개혁에 자극받은 바가 컸다. 당초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유상분배'안이 집중 논의됐으나 좌익세력의 약화와 농민운동의 분열-쇠퇴에 따라 '유상분배' 토지개혁안이 거의 확정됐다. 국회는 농림부가 작성해 국회에 제출한 '농지개혁법안'과 국회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농지개혁법안'을 비교검토한 끝에 보상과 상환액은 각각 평년작의 15할 및 12할 5푼, 보상과 상환은 5년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을 1949년 4월 28일 통과시켰다. 재정상의 이유로 정부가 보상액을 일치시켜줄 것을 국회에 요구했으나 국회는 이를 거부하고 이날 공포했다. 그러나 지주층의 광범위한 소작지 방매행위로 불완전한 농지개혁이 돼버렸다. 그러나 이 농지개혁도 시행에 들어갈 즈음 발발한 6·25로 일시 중단되었고 더구나 관계서류가 없어진 탓에 대상농지가 축소되었다.

김구 피살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낮 12시30분 백범 김구 선생이 서울 서대문 경교장(현재 강북삼성병원) 2층 거실에서 권총으로 피살됐다. 범인은 백범이 당수로 있는 한독당 당원이자 포병사령부 연락장교였던 32세의 안두희 소위였다. 수사당국은 '안이 평소 한독당과 백범의 정치노선이 나라를 망친다고 믿고 있던 중 이날 백범과 언쟁 끝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한독당은 범행에 정치적 배후가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김구 선생은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이봉창 열사의 일왕 저격,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 투척 등 크고 작은 항일 투쟁의 배후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했고, 북한으로 건너가 김일성과 소득없는 정치 회담을 열었지만 그의 관심은 언제나 조국해방과 조국통일 뿐이었다.

경찰, 반민특위 습격사건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쯤 윤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중부서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80여명이 남대문로 2가에 있는 반민특위 청사 앞에 도착, 삼엄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출근길의 특위 조사관들을 연행, 무기를 압수한 뒤 청사에 난입했다. 경찰은 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찢었다. 직원 주소록 경비전화 자동차 4대 등도 압수했다. 반민특위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1948년 10월 23일 발족했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 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이승만도 반민특위가 눈에 가시였다. 이승만은 노덕술, 최연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했다. 이 사건은 그날로 뜨거운 정치문제가 됐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약화돼 결국 석달 후인 1949년 9월 22일 와해됐다.

육탄 10용사 사건

1949년 5월 4일 새벽 3시경 북한 인민군 2천여 명이 개성시 인근의 아군 산악초소를 기습점령했으나 아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격퇴됐다. 아군 10여 명은 폭탄을 휴대하고 적진에 돌입, 자폭함으로써 아군고지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무훈을 세웠다. 18연대 소속 서궁덕 상사 등 용사 10명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아군초소를 탈환하기 위해 폭탄 한 개씩을 짊어지고 낮은 포복으로 적군에 접근해 일제히 토치카 안으로 돌입, 토치카를 폭파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산화했다. 이를 국군에서는 '육탄 10용사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 와중에 장병 3백여명이 표무원 소령의 거짓 정보에 의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표 소령은 장병들에게 "적에게 포위됐다. 투항만이 살길이다"며 월북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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