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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흔들리는 마음
아침 식사를 마치자 게이조가 말했다.
“쓰기코, 오늘은 좀 추운 것 같군.”
“네 눈이라도 올 것 같아요.”
“설마! 아직 10월 16일밖에 되지 않았어. 눈은 오지 않겠지만 겨울옷 좀 꺼내 주겠어?”
“네.”
쓰기코는 힘없이 대답하고 나서,
“저…..겨울옷 상자는 선반 위에 있나요, 양복장 위에 있나요?”
하고 물었다.
“글쎄. 쓰기코도 모르고 있어?”
“죄송해요. 옷가지는 모두 아주머니께서 챙기시거든요…..하지만 찾아볼게요.”
쓰기코는 미안해하며 이층으로 올라가더니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게이조는 아직 치우지 않은 식탁 앞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신문이에요.”
도오루가 게이조 옆으로 다가왔다.
“허, 어제 가미가와에 첫눈이 왔구나.”
신문을 펴 들고 게이조가 말했다.
“눈이 왔어요? 가미가와가 어디에요?”
“왜, 언젠가 소운쿄에 간 적 있지? 커다란 온천이 있던 곳 말이야. 그 바로 옆이야.”
“아사히가와에는 눈이 언제나 오죠?”
“글쎄, 아사히가와에는 대개 10월 20일이 지나면 오니까 앞으로 열 밤만 더 자면 눈이 올거야.”
“야, 신난다. 눈이 오면 엄마도 오는 거죠?”
“응.”
“아기를 낳아서 엄마 배가 아픈 거야?”
“그래.”
“아기는 배꼽 있는 데가 팡 찢어져서 나오는 거지?”
“……….”
“많이 아플 거야. 엄마가 불쌍해.”
“………”
“불쌍해. 그렇죠?”
“도오루가 불쌍해.”
“왜? 난 배 안 아픈데.”
“엄마가 없어서 쓸쓸하잖니.”
“응, 쓸쓸하긴 하지만………”
출근 시간이 신경이 쓰여 게이조는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쓰기코가 돌아왔다.
“이상해요. 겨울옷이 아무데도 없어요.”
“없어?”
“그런데 겨울옷 상자가 다섯 개나 비어 있어요. 누가 훔쳐간 게 아닐까요?”
“설마…., 양복장에 있는 거 아냐?”
“거긴 춘추복밖에 없어요.”
“거, 이상하군.”
게이조는 이쑤시개로 이를 신경질적으로 쑤셔댔다.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아냐, 쓰기코 탓이 아니야. 계절이 바뀌는 땐데 어디에 뭐가 있다는 것도 알려 주지 않은 아줌마가 나쁜 거지.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걸. 정말 도둑맞은 게 아닐까?”
게이조는 평소보다 늦게 현관으로 나왔다. 생각보다는 춥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쓸쓸했다. 구두를 신고 있는데 쓰기코가 겨울옷을 찾았다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나 간(肝) 검사를 하기 위해 아침도 굶고 기다리고 있을 환자가 있었기 때문에 게이조는 춘추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나쓰에는 꼼꼼해서 무슨 옷이 어디 있다는 것을 환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정전이 되어 집안이 온통 캄캄해진 속에서도 중요한 것을 어김없이 찾아냈다. 그런 만큼 자기 일은 좀처럼 남의 손에 맡기지 않았으며, 특히 요즘 들어 옷가지는 쓰기코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오늘 아침처럼 입을 옷을 찾지 못해 지체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그런 점 때문에 게이조는 더욱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정류장에는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시간마다 다니는 버스가 금방 떠난 모양이었다.
‘우는 얼굴에 벌이 쏘는 격이군.’
게이조는 쓴웃음을 짓고는 어쩔 수 없이 걸어가기로 했다. 넓은 거리의 맞은편에는 높다란 소나무 숲에 길을 따라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한쪽에는 낡은 목조 건물이 죽 늘어서 있었다.
게이조는 깨끗이 쓸어 놓은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 집이나 단무지를 만들 무를 깨끗이 씻어 새끼줄에 매달아 놓고 있었다. 무는 가을의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반사되고 있었다.
‘우리 집은 올해 무를 말리지 않은 것 같은데.’
자동차도 많이 다니지 않는 조용한 거리였다. 게이조는 배추를 잔뜩 실은 짐마차를 앞질렀다. 천천히 내딛는 말굽 소리가 한가하게 울려왔다. 그 말굽 소리에 쓸쓸하던 게이조의 마음도 약간 누그러졌다.
‘동복 없이 스웨터만 걸치고도 겨울을 날 수 잇어.’
낡은 군복에 군화를 신은 청년과 마주쳤을 때, 게이조는 자신이 철따라 옷을 장만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누구나 옷가지를 쌀과 바꿔 간신히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시대였던 것이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갑자기 등뒤에서 누군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마쓰사키 유카코였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게이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나, 유카코 양의 집이 이쪽이었나?”
“아녜요.”
유카코의 등에 늘어진 길다란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친구네 집에서 잤어요.”
그녀는 게이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다가 곧 멈춰 서서,
“어머, 예뻐라!”
하며 편자를 박는 대장간을 들여다보았다. 말을 매 놓는 네 개의 둥근 기둥이 서 있을 뿐 사람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뭐가?”
“불꽃 말이에요.”
어두컴컴한 대장간 안에 편자를 달구는 불꽃이 빨갛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까요?”
유카코의 깃을 세운 그린색 바바리 속으로 흰 스웨터가 엿보였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그시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유카코를 내버려둔 채 게이조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선생님, 불꽃은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까요?”
유카코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따라와 평소 버릇대로 게이조에게 바싹 붙어서 나란히 걸었다.
“글쎄 말이야.”
게이조는 유카코에게서 좀 떨어졌다.
“불타고 있기 때문일까요? 불타면 금방 재가 되고 연기가 될 텐데요. 다음 순간에 사라져 없어지기 때문에 저렇게 아름다운 걸까요?”
유카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다시 게이조에게 바싹 몸을 붙여왔다. 게이조는 얼른 한 걸음 오른쪽으로 비켰다.
“저, 선생님, 불꽃이란……”
“마쓰사키 양!”
“네.”
유카코의 작은 입 속에서 하얀 치아가 빛났다.
“유카코 양, 좀 떨어져서 걸을 수 없나?”
“어머!”
유카코는 귓볼까지 새빨개졌다.
“죄송해요. 이를 어쩌나! 어째서 그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언제나 사람들에게 주의를 듣거든요.”
한동안 유카코는 말없이 게이조의 뒤를 따라왔다.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게이조가,
“나란히 걸어도 좋아, 좀 떨어지기만 하면 말이야.”
하고 뒤돌아보니 유카코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게이조는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러는 거지?”
아침부터 여자의 눈물을 보는 건 못 견딜 노릇이었다. 언젠가 무라이가 한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쓰사키 유카코는 원장님께 반해 있어요.”
하고 무라이가 말했던 것이다.
중심가로 들어섰다. 잡화점, 식당, 철물점, 약국, 시장 등이 길 양쪽에 나직한 차양을 내밀고 늘어서 있었다 대장간은 이곳에도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모님이 아기를 낳으셨다고요?”
눈은 아직도 눈물에 젖어 있었으나 유카코는 웃고 잇었다.
“그래.”
“무라이 선생님이…..”
하고 그녀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무라이가?”
화제가 어쩐지 울적하여 게이조는 발길을 재촉했다.
“무라이에게 문병을 갔었나?”
‘언젠가 이 여자는 병원 약국에 무라이와 단둘이 있었지.’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유카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양이 같은 여자야.’
유카코는 어느새 게이조에게 어깨를 바싹 밀착시킨 채 걷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었다. 아무도 맞아 주지 않았다. 나쓰에가 집을 비운 지 한 달이 되었지만, 게이조는 아무도 맞아 주지 않는 쓸쓸함에 좀처럼 길들여지지가 않았다.
쓰기코는 대개 부엌에서 일하느라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맞아들이지 못했다. 도오루는 엄마가 없는 집은 쓸쓸하다며 저녁때까지 밖에서 놀고 있었다.
“아니, 누구 구두지?”
검정색 하이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양장을 입은 여자 손님은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마쓰사키 유카코일까?’
오늘 아침에 보았던 유카코의 눈물이 생각났다. 그러나 장지문을 열고,
“선생님, 꽤 일찍 들어오시네요.”
하고 말한 사람은 의외로 다쓰코였다. 검은 V자형 네크라인의 스웨터에 회색 타이트 스커트 차림이었다.
“놀랐는데요.”
게이조는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왜요?”
“왜요라니요? 다쓰코 씨의 양장 차림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죠.”
다쓰코는 발목이 가느다란 다리를 가볍게 포개고 소파에 앉았다.
“이게 양장이라고요? 스웨터만 걸쳤을 뿐인데 뭘 그러세요?”
“정말 처음 보는 차림인데요.”
“어처구니 없군요. 아무리 나쓰에한테 푹 빠져 있기로서니, 그래 다쓰코의 스웨터 차림 정도도 기억에 없으세요?”
다쓰코는 표정이 풍부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가볍게 흘겨보았다.
“아니, 분명히 처음 봐요.”
게이조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그는 다쓰코의 위로 땋아올린 머리에서부터 풍만한 가슴 근처까지를 슬쩍 훑어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역시 처음 보는데요.”
“그래요? 그럼 제가 기모노 차림으로 테니스를 쳤던가요?”
“아! 그렇지.”
게이조는 웃었다.
“뭐예요, 이제 겨우 생각해 내시고!”
“아니, 그건 여학생 시절이 아닌가요? 어른이 된 후의 양장 차림은 역시 처음 봐요.”
눈에 익은 기모노 차림의 다쓰코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미소년과 같은 산뜻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잘 오셨어요.”
“부인께서 집에 없어 쓸쓸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을 하고 계시군요.”
“삿포로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애가 생겨서 말이오.”
다쓰코는 고개를 숙인 채 담뱃재를 털면서 아무 말도 귀담아 듣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엇다
그때 도오루가 밖에서 돌아왔다. 그는 스웨터 차림의 다쓰코를 보더니 낯선지 깜짝 놀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독 알아보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손에 매달리고 작은 발을 그녀의 아름다운 발 위에 얹었다 다쓰코가 말했다.
“오늘밤엔 아줌마하고 같이 잘까, 도오루?”
“자고 갈 거예요, 정말이에요, 아줌마?”
도오루는 너무 기쁜 나머지 다쓰코에게서 떨어져 다다미 위를 마구 뒹굴었다. 도오루는 어떻게 기쁨을 나타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자고 갈 거요, 다쓰코 씨?”
하고 들뜬 게이조의 목소리에 다쓰코는,
“뭐, 선생님까지 기뻐할 거야 없잖아요? 나쓰에의 부탁을 받았으니 할 수 없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놓고는 언제나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듯이 무뚝뚝해지곤 했다. 그런 점이 다쓰코답다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빙그레 웃었다.
저녁 식사 때 쓰기코가 도오루 앞에 구운 생선이 담긴 접시를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다쓰코가 도오루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도오루는 몇 살이야?”
“다섯 살.”
“혼자서 생선을 먹을 수 있어?”
“아니, 못 먹어요.”
“왜?”
“학교에 안 가서요.”
“학교에 안 가서?”
“네, 가시가 목에 걸려요.”
“걸리지 않으면 먹을 거야?”
“네, 하지만 무서워요.”
“저기, 도오루, 마구 씹어먹지 말고 잠깐 혀 위에 올려놔 봐. 그러면 가시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겠지?”
다스코는 일부러 가시가 있는 것을 도오루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알겠지?”
“네.”
“그걸 살짝 뱉는 거야.”
“네.”
도오루는 이날 저녁 식사 때는 혼자서 생선 가시를 뱉어내고 먹었다.
게이조는 나쓰에를 생각하고 잇었다. 나쓰에는 구운 생선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내어 도오루의 밥 위에 얹어 주었다. 나쓰에에게는 다쓰코와 같은 엄격한 데가 없었다.
“도오루, 생선이 웃는 것을 본 적이 있니?”
“생선도 웃어요, 아줌마?”
“그럼 웃지.”
다쓰코는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글쎄 말이다.”
“바쇼(芭蕉) 선생이 ‘가는 봄아, 새는 울고 물고기의 눈은 울먹이나니’라고 했잖아요. 울먹이는 걸 보면 웃기도 할 거예요.”
다쓰코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게이조는 전등이 여느 때보다 밝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가정의 단란함을 맛본 듯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는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쓰에가 앉아 있어야 할 곳에 다쓰코가 있군.’
그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었나 하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다쓰코를 바라보았다. 다쓰코는 명랑하게 떠들어댔다. 그런데 문득 게이조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쓰코는 식탁에 식기를 내려놓을 때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것이었다. 유심히 보니 깔깔거리며 웃어댈 때에도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게이조는 다쓰코라는 인간을 다시 보게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오루를 재우고 나서 다쓰코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미안해요, 극성을 부려서.”
하고 의자에 앉자마자 사과했다.
“무슨 얘기예요?”
“도오루에게 생선을 혼자 먹게 해서요.”
“아니, 오히려 고마워요. 나쓰에는 너무 애지중지해서…..”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로서의 교육 방침이 따로 있는 거예요.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게 순서였어요.”
하고 다쓰코는 후회하는 듯한 얼굴을 하는가 싶더니 곧,
“오늘 일은 눈감아 주세요.”
하고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만…….”
“뭔데요?”
게이조는 다쓰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부터 아가씨와 사이 좋게 걸어다니면 못써요.”
다쓰코의 눈이 환하게 빛나면서 웃고 있었다.
“아침부터요…….?”
“오늘 아침에 머리 긴 아가씨와 같이 걷지 않았어요?”
마쓰사키 유카코에 대한 얘기임을 알아차리고 게이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봤지요?”
“글쎄요. 하지만 나쓰에한테서 선생님을 감시하라는 부탁을 받은 건 아니니까 염려 말아요. 헌데 그 아가씨 좀 이상해 보이더군요.”
“정말 이상한 아가씨에요.”
하고 게이조가 누구에게나 몸을 바싹 붙이고 걷는 유카코의 버릇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다쓰코는,
“그래요? 하지만 뭐라고 할까, 그 아가씨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다지 기분나빠 보이지는 않더군요.”
하고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랴뇨? 금세 기쁜 얼굴을 하시네요.”
다쓰코는 게이조를 가볍게 흘겨보며 말했다.
게이조는 문득 유카코에게서 들은 무라이의 말이 생각났다. 나쓰에가 불임 수술을 한 사실은 병원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가지가 낳았다고 우겨도 남들이 믿을 리가 없다.’
다쓰코도 물론 그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아까 어린애 얘기를 했을 때, 다쓰코는 짐짓 못 들은 척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염려에서였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게이조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어린애 일 말이에요.”
하고 다시 말을 꺼내자, 다쓰코는 곧 알아차리고,
“아무렴 어때요. 나쓰에가 낳았다고 했으니 그걸로 됐어요.”
“하지만 수술을 해……”
“불임 수술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잖아요? 하지만 나쓰에는 바보예요. 일곱 달 만에 낳았다느니 자기를닮았다느니 하고 거의 필사적으로 주워섬기니 말이에요. 너무 가엾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어요. 은근슬쩍 속아넘어 가주지 않으니 나쓰에가 너무 가엾게 생각되는 거예요. 루리코 일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컸나봐요. 루리코 대신이라 생각하며 기를 거라고 편지에 몇 번이나 씌어 있었어요.”
다스코는 차를 타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 사람도 설마 우리가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기르고 있는 줄은 모를 테지.’
하고 게이조는 생각하면서,
“기른다고는 하지만 어떤 애로 커줄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쓰코는 그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 아이라뇨?”
“아니, 거 뭐라고 하는 범인의 자식이 다카기 씨가 관계하고 있는 유아원에 있다지 않았어요?”
“아, 그거.”
게이조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이 사람 혹시 다카기에게서 진상을 들은 것이 아닐까? 만을 그렇다면 금방 나쓰에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잘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하고 말하고 게이조는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길렀더라면 좋았을 걸.”
다쓰코는 입술 언저리까지 갖고 갔던 찻잔을 잠깐 멈추고 말했다.
“맡을 수 없을 거예요. 선생님으로서는.”
다쓰코의 말에 게이조는 한시름 놓았다.
“다쓰코 씨라면 맡을 수 있을까요?”
“맡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다쓰코 씨 같은 분이라면 맡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요.”
“전 그렇게 자비롭지 못해요. 전 제 자신을 조금은 알고 있어요.”
게이조는 회초리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래요? 그러나 절대로 기를 수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요.”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자기 아이를 살해한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기른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만일 인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훨씬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난 그런 인간이 이 세상에 한두 사람은 있을 것 같은데요.”
“전 인간이란 그렇게 훌륭하지는 못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식도 잘 기르지 못하거나 자기 보모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바로 인간이니까요. 전 인간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아요.”
“아주 박식하시군요, 여전히. 그렇다면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운다면 그땐 어떡할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머리를 헝끌어뜨리고 미친 듯이 떠들어댈지, 입을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할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니까 바람기가 있는 벌레 두세 마리는 마음속에 들어 있겠지 하고 의외로 너그러워질지 아무튼 그때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모르겠군요.”
“그때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모르겠다고요? 하긴 그럴 테지요.”
‘나쓰에가 무라이와 그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너그럽고 다정한 남편으로 자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완전히 변했다.
“난 남자니까 여자에 대한 남자의 심정은 알 수 있지만, 남자에 대한 여자의 심정은 잘 모르겠어요. 다쓰코 씨도 남자한테 꼬리를 치는 때가 있나요?”
“다쓰코 씨도가 뭐예요? 도라니요?”
다쓰코는 웃고 나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거 실례했어요.”
“정말 실례예요. 전 언제나 남성에게 꼬리를 치는 걸요. 우등생 여자와 얘기하는 것보다 낙제생 남자와 얘기하는 게 몇 배나 재미있거든요. 그러니 언제 어떤 기회에 어떻게 될지 알게 뭐예요.”
“정말입니까? 다쓰코 씨가 그렇다면 나쓰에 같은 여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어떤 기회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겠군요. 아니, 벌써 어떻게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게이조는 농담처럼 짐짓 능청을 떨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세요. 선생님도 그런 악담을 하시는군요. 다시 봐야 겠는데요.”
다쓰코는 동그스름한 무릎을 껴안고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여자는 무라이와 나쓰에의 일을 알고 있지 않을까?’
게이조는 다쓰코에게서 용케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쓰코 씨는 어딘지 어른스러운 데가 있군요. 무용을 하면 침착해지나보죠? 미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거 칭찬하는 말이죠? 고밥다고 인사해야 하나요? 하지만 미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그런 듣기 거북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결혼하는데 지장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고 다쓰코는 벌떡 일어나더니,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님.”
하고 살짝 웃고 나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게이조는 잠자리에 들자 피곤했는지 금방 잠이 쏟아졌다.
꾸벅꾸벽 졸고 있을 때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다쓰코 씨…….”
하고 게이조가 베개에서 머리를 들자 뺨에 여자의 머리가 닿았다.
‘아, 다쓰코 씨군.’
하고 게이조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니에요, 유카코예요.”
여자가 몸을 바싹 들이댔다. 여자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
“왜 신발을 신고 있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요.”
여자는 잠자코 있었다.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껴안았더니 그녀는 어느새 나쓰에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