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옳은 정치로 되돌려놓겠다며 정권을 잡았는데...인조반정과 창의문, 세검정
조선에서는 두 차례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1506년의 중종반정과 1623년의 인조반정이다.
중종반정 때 중종은 반정세력에 의해 추대됐지만, 인조는 반정 세력을 규합했고 직접 반정에 참여했다.
1623년 3월 13일 새벽, 700명의 반정군이 홍제원(弘濟院, 지금의 홍제동)에 집결했다.
그러나,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가 바로 합류하지 않아 작전이 지연됐다.
김류의 도착이 늦어지자 반정군들은 즉석에서 이괄을 대장으로 지명했으나, 김류가 뒤늦게 합류하면서 이괄의 대장 임명은 없던 일이 됐다.
이들은 창덕궁을 향해 진격하는 길목에서 개울물에 칼을 씻으며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북쪽에서 한양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창의문(자하문)이었다.
반정군과 내통한 훈련대장 이흥립의 도움으로 별다른 저항 없이 창의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반정군은 도끼로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로 쳐들어갔다.
반정군이 난입하는 과정에 일어난 화재로 창덕궁은 불타버렸다.
인조가 반정에 직접 참여한 것은 개인적 원한이 크게 작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선조가 각별하게 아낀 후궁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이었다.
인빈 김씨의 큰 아들 의안군은 일찍 죽었고, 선조가 후계자로까지 생각한 둘째 아들 신성군은 임진왜란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정원군은 능양군, 능원군, 능창군 세 아들을 뒀는데, 능창군은 선조의 세자가 될 뻔했던 신성군의 양자가 됐다.
1615년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고변이 일어났다.
교동도로 유배된 능창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명분이다.
광해군 정권의 붕괴는 계축옥사(癸丑獄事)를 통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이 결정타였다.
효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여기던 조선 사회에서 인목대비 유폐는 반정에 가장 확실한 명분을 제공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 윤동주문학관'에서 내린다.
답사는 창의문(彰義門)에서 시작한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리는데, 백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움푹한 고갯마루에 세워졌다.
창의문을 중심으로 부암동 서쪽 인왕산 자락은 청계동천, 동쪽 백악산 자락은 백석동천이다.
'창의문'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이다.
인조반정 때 반군이 홍제원에 집결해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해 반정에 성공하였으므로 창의문은 인조와 집권세력에게는 개선문이었다.
창의문에는 문루가 없었지만, 영조 17년(1741년) 문루를 세우고 반정공신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다.
창의문을 통해 한양도성 밖으로 나오면 부암동이다.
부암동은 북한산 문수봉·보현봉·비봉과 백악산, 인왕산이 첩첩을 이룬 마을이고, 여기서 흘러내린 물은 세검정계곡을 따라 홍제천을 이룬다.
부암동은 산이 깊고 물이 맑으며 경치가 아름다워 조선 세도가들의 별서(別墅·교외에 한적하게 지은 집) 자리였다.
부암동은 1936년 고양군에서 서울 서대문구가 됐고 1975년 종로구에 편입됐다.
창의문을 통해 성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삼거리 길목에 회색 칠을 한 벽돌담에 ‘동양방앗간’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부암동을 찾을 때마다 방앗간에 들러 떡 한팩을 산다.
동양방앗간에서 왼쪽으로 빠지면 환기미술관이 나온다.
수화(樹話) 김환기의 300여 작품이 상설 전시돼 있다.
김환기는 1913년 전남 신안 안좌도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10대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이던 1932년 고향으로 잠시 돌아와 혼례를 치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대학 예술과를 다니면서 미술 창작에 매진했다.
아버지 타계 후 김환기는 부인과 헤어졌고, 이후 엘리트 신여성 김향안(1916~2004)을 만나 1944년 재혼했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었다.
1936년 시인 이상과 결혼했지만 이상의 갑작스러운 일본행과 죽음으로 혼자가 됐다.
이후 김환기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 후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었다.
6·25전쟁이 끝나자 김환기는 서양미술의 본고장 프랑스를 꿈꾸기 시작했다.
김향안은 그 꿈을 실현해주고자 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1955년 먼저 프랑스로 건너가 아틀리에를 마련하는 등 김환기가 파리에서 미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1963년 김환기는 다시 뉴욕 예술계에 도전했다.
김향안은 이 과정에서도 김환기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김환기는 1974년 뉴욕에서 생을 마쳤다.
이후 김향안은 환기미술재단을 설립하고, 1992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웠다.
개인의 사비로 만든 최초의 미술관이다.
김향안은 2004년 뉴욕에서 생을 마치고 뉴욕의 김환기 옆에 묻혔다.
미술관을 지나 오른쪽 언덕길을 오른다.
백사실계곡까지의 길을 '능금나무길'이라 부른다.
능금은 사과하고는 종(種)이 다르다.
자생하던 능금은 알이 작아 엄지와 검지로 충분히 잡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부암동 주민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 능금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언덕길을 오를수록 좌우로 북악과 인왕산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드라마 <커피프린스>로 유명해진 카페 '산모퉁이'가 나온다.
부암동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게 이 드라마가 방영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백사실(白沙室)계곡 입구에 들어선다.
숲으로 들어서면 곧 바위가 병풍처럼 서 있다.
바위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 네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 있다.
18세기 문인 이병연이 새긴 글씨로 지금도 선명하다.
백석은 백악(白岳)의 다른 이름이고 동천(洞天)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을 뜻한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으로 가면 별서 터가 있고, 오른쪽은 능금마을로 가는 길이다.
왼쪽 길로 접어 들면 계곡 깊숙한 곳에 별서 터가 나온다.
육각형의 주춧돌과 사랑채의 돌계단, 연못, 연못 위에 세운 정자의 주춧돌 등이 흩어져 있다.
당시의 별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국가유산청은 이곳의 별서 주인이 추사 김정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추사가 쓴 글에 "'백석정’을 예전에 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는 것이다.
냇물을 따라 난 산길을 걷는다.
길가에는 '도롱뇽이 살고 있어요'라는 푯말이 서 있다.
도롱뇽은 1급 수지에서만 산다.
여름에 오면 도룡농, 버들치를 볼 수 있다.
인적이 없다.
고요함은 깊은 사색의 시간을 준다.
계곡을 빠져나오면 너럭바위에 세워진 아담한 현통사(玄通寺)가 보인다.
일주문에 ‘삼각산(三角山) 현통사’란 현판이 걸려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 ‘일붕선교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서경보(徐京保) 스님이 주석하고,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절 앞에는 동령폭포가 흘러 내려간다.
서울에서 보기 드문 자연폭포다.
이 물길이 홍제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세검정(洗劍亭)이 있다.
급경사 계단을 내려오면 신영동(新營洞)이다.
도성 밖 북쪽을 지키는 군영(軍營)인 총융청(摠戎廳)이라는 새로운 군영(新營)이 들어섰기에 신영동(新營洞)이다.
세검정초등학교를 만난다.
이곳이 연산군의 탕춘대가 있던 곳이다.
본래는 신라시대의 장의사(藏義寺)라는 절터였다.
장의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등장하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신라 태종무열왕이 백제와의 황산벌(지금의 논산으로 추정) 전투에서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659년에 창건했다.
연산군이 장의사를 허물고 연희장으로 바꿔 탕춘대라는 이름을 붙었다.
'탕춘’이란 ‘질펀하게 봄을 즐긴다’는 뜻이다.
영조가 총융청(摠戎廳)을 두면서 탕춘대를 연융대(練戎臺)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탕춘대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검정초등학교 교정 귀퉁이에는 높이 3.63m의 장의사 당간지주가 1400년의 역사를 간직한채 서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이다.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장의사는 사라졌지만 이름은 장의동으로 남았다.
안동 김씨 중 이곳에 사는 권문세족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평창동 상명대사거리 쪽으로 개천을 따라 올라간다.
평창(平倉)은 전시 식량을 비축하는 곳간이었다.
세검정(洗劍亭)이 나온다.
인조반정 세력이 모의 전 칼을 씻으며 '세검입의(洗劍立義)’의 결의를 다진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세검정이 들어선 널따란 바위는 '차일암'으로 불린다.
바위에 차일(궁중 행사 때 햇빛을 가리기 위해 치는 휘장)을 쳤던 흔적이 있어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차일암에서 세초 작업이 이뤄졌다.
세초는 실록에 사용된 사초(史草·사관이 시정을 적어 둔 사기의 초고)를 없애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초본은 물로 씻어 글자를 지운 뒤 종이를 재활용했다.
세초까지 하면서 원자료를 철저하게 삭제한 까닭은 대외비로 관리되던 사초의 유출을 막아 완성된 실록에 시비가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근처에 조지서(造紙署)가 있어 인력 동원이 쉬웠고, 홍제천 맑은 물이 있어 세초에 적합했다.
조지서는 국가문서 및 외교문서에 쓰인 고급한지를 만들던 관청이었다.
조지서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주려는듯 닥나무 몇 그루가 있다.
이 일대에는 1960년대까지 한지 공장들이 있었다
한지 공장에는 화재가 잦았다.
1944년 화재는 세검정을 재로 만들었다.
지금의 세검정은 1977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에 의거해 새로 지었다.
세검정, 수성동계곡 등 옛 서울의 모습을 복원할 때마다 겸재의 그림은 요긴하게 활용된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인조는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수도 한양을 세 번이나 버리고 도망갔다.
첫 번째 도피는 '이괄의 난' 때였다.
이괄은 인조반정 과정에서 활약이 컸지만,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이 되고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으로 가게 되자 인조반정 이듬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한양 가까이 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인조는 공주로 몸을 피했다.
반란을 일으킨 군대가 한양을 접수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괄이 안산 일대에서 관군에 패해 도주하던 중 휘하 반란군의 손에 목이 달아나면서 인조는 20여 일 만에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1627년 2월 23일~4월 18일), 병자호란(丙子胡亂·1637년 1월 3일~2월 24일) 때도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주했다.
인조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옳은 정치(正)로 되돌려 놓는다(反)'며 정권을 잡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인조 때 나라와 백성은 최대, 최악의 치욕을 겪었고, 국격은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