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譜)란 무슨 말인가. 기록함이 넓음을 말한다. 널리 그 종족(宗族)을 기록한 책을 ‘족보(族譜)’라 하니, 이 책은 박씨(朴氏)의 종족을 널리 기록한 것인데, 또 어찌하여 ‘족보’라 하지 않고 ‘세보(世譜)’라고 하는가. 세(世)로써 그 종족을 이으면 ‘세’라 하고 ‘족’이라 하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박씨는 뿌리가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어 자손들이 널리 퍼졌다.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면서 낮게는 평민이나 종이 되기도 하고 높게는 공경(公卿)이나 대부(大夫)가 되기도 하였으니,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리하여 각각 기록할 만한 세손(世孫)을 시조(始祖)로 삼고 시조가 일어난 곳을 관적(貫籍)으로 나타냈으니, 반남으로 관적을 나타내고 호장(戶長) 응주(應珠)를 시조로 삼은 가문(家門)이 우리 종족이다. 우리 종족이 세상에 드러난 때는 고려(高麗) 말엽인데, 본조(本朝.조선시대)에 와서야 창성(昌盛)하기 시작하여 3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더욱 번성하고 창대해져서 여러 성(姓) 중에 으뜸이 되었다. 고어(古語)에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장구하다[根深者枝茂 夫源遠者流長].”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관면(冠冕)과 문벌(門閥)을 이르는 말이겠는가. 이는 공덕(功德)이 전대에 쌓이면 복택(福澤)이 후대에 넘친다는 뜻이니, 하늘이 장차 이로써 세상을 권면하는 징험을 삼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 종족의 번성함과 창대함이 이와 같으므로 세보를 만들 때 상세히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의 족보는 소략한 문제가 있고, 또 수십 년 전에 만들어서 뒤에 출생한 자손들이 실리지 못하였으니, 끊어진 가계(家系)를 잇고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는 것은 반드시 후대에 해야 할 일이었다.
족제(族弟) 세채(世采) 화숙(和叔)이 처음 지금의 세보를 만들다가 중간에 족질(族姪) 태징(泰徵)에게 맡겨 17년 만에 완성을 보았으니, 과거의 소략한 문제가 있던 것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늦게 출생한 후손도 이어서 모두 실리게 되었으며, 널리 오류를 바로잡은 것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체례(體例)는 분묘(墳墓)의 소재를 반드시 쓰고 어디에서 이주하였는지를 반드시 썼으니, 이는 먼 조상을 추념하고 종족을 분변하려 해서이다. 그리고 외손(外孫)은 대자(大字)로 쓴 줄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고 이성(異姓)을 분별하려 해서이다. 또 벼슬을 하였는지,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는지, 향년(享年)이 몇인지, 모일(某日)에 졸(卒)했는지를 반드시 자세히 썼으니, 이는 소씨(蘇氏.소동파의 아버지 蘇洵)의 족보에서 그 좋은 점을 택한 것이다.
내가 이로 인하여 느끼는 점이 있으니, 친친(親親)에 대해 박하게 한 소명윤(蘇明允.소순)의 인(仁)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긴다. 소명윤이 자신의 족보를 만들 적에, 위로는 고조(高祖)까지만 싣고 아래로는 아들까지만 실었으며, 방계(傍系)는 8촌인 시마(緦麻)까지만 실었다. 이와 같은데도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길 것이다.”라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저 소명윤은 장차 천하 사람들을 모두 들어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손을 자손으로 여기지 않아, 기년복(朞年服)과 공복(功服)을 입는 가까운 종족을 남남으로 보게 만들었을 뿐이니, 그러고도 도리어 종족에 대해 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족보를 만들어 기록하는 것은 모르거나 잊지 않고자 해서이다. 천하에 고조와 증조의 이름과 작위를 잊고 시마와 공복의 항렬(行列)을 모르는 자는 있지 않으니, 소씨처럼 싣는다면 또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마침내 “다행히 남남이 되기 전에 소홀히 하고 잊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였다.”라고 한단 말인가. 고조와 증조, 시마와 공복도 오히려 족보가 있어야 잊지 않는 관계라면 남남이 되는 것을 겨우 면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소씨가 친친에 대해 너무 박하지 아니한가. 옛날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지을 적에, 황제(黃帝) 이래의 씨(氏)와 성(姓)의 유래를 상세히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 대부분 몇 대(代)인지를 밝혔으니, 만약 예로부터 보첩(譜牒)이 없고 또 보첩을 만드는 자들이 대다수 소씨처럼 간략하게 만들었다면 사마천이 어디에서 근거를 취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세보에 실은 것은 시조인 호장(戶長)으로부터 우리 형제까지 15세(世)가 되고, 우리 형제의 자손까지가 또 3세인데, 이보다 아래의 자손은 다만 아직 보이지 않아 기록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별도로 종통을 이룬 방계(傍系)도 모두 수록하였는데,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다만 증빙할 길이 없어서 기록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와 같이 널리 실은 까닭은 친친(親親)의 의리를 극도로 넓히기 위함이다.
아, 아들로부터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아래로 내려오는 18대 종족이 모두 부자의 친한 관계가 아님이 없다. 내 몸에 있어 이미 그러하니, 곧 내 종족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만 갈래가 한 근원임을 생각하고 천 가지가 한 뿌리임을 살핀다면, 반드시 장차 금할 수 없는 정(情)이 우러나고 차마 할 수 없는 의(義)가 생겨날 것이니, 어찌 친(親)이 다하고 복(服)이 없다고 해서 종족을 남처럼 보는 데에 이르기까지 하겠는가.
금상(今上.숙종) 9년 계해년(1683) 5월 갑진일에 반남 박세당이 삼가 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