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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 주말입니다. 어제는 맑고 파란 하늘을 보며 따사로운 햇빛에 봄도 한참 지나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모처럼 아내와 산행을 하였습니다. 바람 분다 하여 목도리를 하고 나갔다가 중턱도 안 되어 벗어 들었습니다. 긴 겨울방학을 끝내고 나오니 그렇게도 시원하고 상쾌했답니다. 놀랍게도 나비도 보았습니다. 아니 벌써!! 세상에 2월에 나비라니, 가능한 일인가요? 쟤가 혹 정신 나간 것 아니야? 이러다 개구리도 팔짝 뛰어 나오겠습니다요. 그런데 그럴 만한 날씨였습니다. 근데 그러다 갑자기 다시 영하로 떨어지면 어쩌려고? 3월의 날씨는 믿을 것이 못 되니 말입니다. 내려오며 개나리인지 벚꽃인지는 모르겠으나 꽃망울이 아주 조그맣게 맺힌 것까지 보았습니다. 야, 진짜 봄인가봐요.
2월도 가는데 이 코로나19는 왜 안 간데? 여전히 거리두기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 영 맘에 안 듭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 참고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지만 당장 풀리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금년 1년도 이렇게 답답한 시간을 지나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봄, 여름, 가을, 아 - 그렇게 다시 겨울을 기다려야 하는가? 다가오는 시간 속에 어떻게 희망을 새겨 넣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바에는 시간이 달음박질이라도 하면 좋겠습니다. 1년 없다 치고 가버리면 좋겠습니다. 인내를 시험하시나? 확실하게 도를 닦아야 하는 모양입니다. 오는 세상은 그래야 맞을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뭔가는 나아지는 것이 있겠지요. 아무리 짓눌러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자 3월이 보입니다. 마스크 속에서라도 희망을 그려봅니다. 건강하고 복된 춘3월을 기대합니다. ^&^
2021년 2월 27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2-21주일설교(아버지 집 비밀번호)
성경 마가복음 4 : 10 - 12 2021년 02월 21일
설교 : 아버지 집 비밀번호 김종우 목사
세상에 종교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종교라면 일단 자기 종교를 소개 또는 이야기해주는 경전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경전 가운데 오래 되고 유명한 것은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불경입니다. 조선 시대에 유교를 이야기하는 사서삼경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종교의 경전과 달리 우리 기독교의 성경에는 독특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족보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사람의 족보가 나오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경전들은 대부분 인생과 세상에 대한 사상 또는 윤리도덕 문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그런 부분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지요. 그런 것은 부수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 그 뜻을 이루실 때 하나님 계신 하늘에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피조세계인 이 땅에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신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 일해오신 사람들이 그만큼 종요하지요. 성경은 그들의 이야기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와 족보가 성경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상의 기록이 아니라 실제 일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얼마나 알고 읽을까요? 사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이해하며 읽는 경우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단어, 그리고 문구 다음에는 문장 나아가 한 단락을 완전히 이해하고 넘어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물론 아주 평이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다 한들 때로는 읽으며 다른 생각을 하다가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냥 이어갑니다. 전체적인 흐름은 이해하니까요. 성경도 그렇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 식으로 말입니다. 하기야 성경도 어린이들이 읽기 쉽도록 이야기로 풀어서 쓴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경은 아닙니다. 성경 이야기지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 속에 포함되기 어려운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성경의 내용은 크게 4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첫째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역사는 세상의 역사가 아닙니다. 물론 세상의 역사가 스며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류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 역사를 이야기한다 해도 주변 국가의 이야기가 따라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한 보조 자료일 뿐입니다. 성경 속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주된 흐름이지요. 그 가운데 주변 나라들이나 민족들의 이야기가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당신 백성의 구원과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기록된 목적이 있습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즉 지나간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기 때문이지요.
둘째 성경에는 많은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을 읽곤 합니다. 소위 교훈이 되고 유익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배우고 따를 가치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세상 책은 전혀 읽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이야기도 듣고 보고 배웁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그 때까지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며 지내야 합니다. 그들과 일단 공존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야 합니다. 아무튼 성경 속에는 많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이 교훈은 영구불변합니다. 세상이 있고 우리가 존재하는 한 항상 지켜야 하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 5계명인 부모 공경이 수천 년 전의 고리타분한 말씀이라고 안 지켜도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야 할 교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훈하는 목적은 차원이 좀 다릅니다. 딤후 3 : 16 -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으로 유익을 얻든 말든 그것은 둘째 문제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세상에도 많습니다. 어쩌면 성경 속의 이야기보다 훨씬 많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그런 역사나 교훈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 안에 구원과 영생을 위한 약속과 예언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예언뿐만 아니라 그 약속과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 곧 성취된 이야기까지 다 들어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세상에도 예언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아무도 모릅니다. 때문에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다릅니다. 예언이 있고 그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하는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누가 장래사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이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셨고 그것을 미리 말씀하셨으며 그리고 때가 되어 이루십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곧 마귀가 안다면 가만있겠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훼방하겠지요. 그러므로 결코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집의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아무한테나 공개하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집 비밀번호는 우리 집 식구만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 곧 천국 비밀도 하나님 백성만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에게만 알려주십니다. 마귀에게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막 4 :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주었으나 외인에게는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그렇습니다. 분명히 나뉘지요.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 백성에게는 알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외인,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합니다. 그 이유, 12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그들은 들어도 모르고 봐도 모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서 비밀입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답답하지요. 왜 비유로 말씀하시지? 탁 터놓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알아도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아서는 안 되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서는 안 되는 무리에게 감추기 위해서 비유로 싸맸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봉했다고 표현합니다. 사 29 : 11 - 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봉했다고 해서 정말 성경을 열쇠로 채우듯이 그렇게 잠가두었다는 말이 아니지요. 읽어도 모르고 들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등진 백성에게는 그렇게 조치하십니다. 사 6 : 9 -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들은 알아서도 안 되고 깨달아서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변절한 자들이기 때문이지요. 겉으로는 하나님 백성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마귀 편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언과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이야기는 비유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곧 문자대로 읽으면 뜻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예를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신 약속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핵심은 그들 가운데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보내주마 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지요. 골 2 :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원하는 바는 바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속 하나님 약속의 핵심이었습니다. 바울 전에 예수님 당신 자신이 원하신 바도 이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해석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사흘째,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눅 24 : 13 - 14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그 두 제자들 사이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눈치 채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지요. 21 - 23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지금 제자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는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긴가 민가 하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5 - 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사라지고 나서 제자들이 고백하는 말입니다. 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성경은 읽는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역사와 교훈은 읽어도 대부분 압니다. 구태여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해석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비밀이니까요. 누구나가 다 안다면 비밀도 아닙니다.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아버지 자신도 우리에게는 비밀입니다. 누가 본 적이 있습니까, 만난 적이 있습니까?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말해주는데 그것을 받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읽지 않은 자들이 아닙니다. 읽는 것은 고사하고 암송까지 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거부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말씀 성경은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행 8 : 30 - 31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잘 아는 대로 이사야의 글은 선지서요 곧 예언서입니다. 그러니 읽는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였던 빌립이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아는 것을 설명해줍니다. 35절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그래서 말씀을 깨닫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시 119 : 130 “주의 말씀을 열므로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여기서 연다는 것은 문자대로 닫은 것을 여는 것이 아니지요. 난외주에 보면 ‘해석하므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 해석해줄 수 있습니까? 보고 들은 자이겠지요. 연구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의 일을 연구해서 알 수 있습니까? 속된 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보면 됩니다. 그리고 먼저 본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이 당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주었고 제자들이 그것을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의 예언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설명될까요?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셨고 그것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신약성경의 예언을 이루고 그 이룬 것을 설명해주는 분이 분명 다시 오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언의 의미를 모르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한 것과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끼고 산 사람들입니다. 암송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몰랐습니다. 행 13 : 26 - 27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외워도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펼쳤을지라도 봉한 책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 알듯이 선민이라 자부하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비밀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막 4 :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시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죄 사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도 영생도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신앙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려는 아닙니까? 그런데 그 소망이 그냥 꽝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오래 신앙하고 교회를 다니며 충성하고 헌신한다 해도 미안하지만 구원은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어설프게 ‘믿으면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일 뿐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마 13 : 34 - 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멘! 예, 오래 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 그런 예언을 한 것입니까? 시 78 : 2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라고 말했던 이 말씀은 예언이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당시 시편 기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예언이 이루어질 때는 그 시편기자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되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렇게 하리라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그 ‘내’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한 “옛 비밀한 말”은 곧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을 비유로 말씀하셨는지 보면 그 감추인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바로 천국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비밀은 창세부터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오시기 전의 구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구약성경 어디를 읽어봐도 ‘천국’이란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가 없었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만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새로운 일꾼을 선택하여 일하려고 하셨지만 얼마 안 가면 등을 돌리고 배반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잘났어도 아담의 후손, 즉 죄인의 자손입니다. 죄의 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의 씨를 갖지 않은 하늘의 씨를 가진 자를 예비하십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요 1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뭐라고 설명합니까?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 아담의 씨를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씨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또 생깁니다. 예수님이 좋은 씨 곧 하나님의 씨를 뿌렸는데 마귀가 따라와서 또 장난질을 합니다. 마 13 : 27 - 28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원수 마귀가 가라지를 뿌린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지요? 30절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추수 때까지 기다리자 하십니다. 그래서 여태 기다려온 것입니다. 그 때 비유도 풀리고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또 나뉠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무엇을 비유로 말씀하셨다고요? 천국 비밀입니다. 그것은 창세부터 감추어져 있습니다. 언제 열렸습니까? 구약의 비밀이 무엇이라고요? 고전 2 : 7 - 8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의 비밀 곧 그리스도입니다.(골 2 : 2)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셨고 친히 그 비밀을 열어서 설명하여 주셨습니다.(눅 24 : 44 - 45) 이제 남은 것은 신약의 비밀입니다. 계 1 :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 10 : 7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계 17 :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비밀이 열리고 비유가 풀려야 천국이 열리고 구원과 영생이 이루어집니다. 이 비밀들을 알아야 합니다.
<더블 패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이 일치하여 하나로 나올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경제적인 득을 가져온다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하여 좀 힘들어도, 조금 맘에 들지 않아도 참고 견딥니다.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이 또한 바람직한 경우입니다. 소위 신나게 일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소위 먹고살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도 적응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익숙해진다면 덜 힘들 것입니다.
운동하는 사람은 보다 목표가 뚜렷할 수 있습니다. 우승이 목표가 될 수 있고 챔피언이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목표가 뚜렷하면 전력투구할 동기와 계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마지못해서 한다든지 어영부영 시간 때우기 식으로 한다면 사실 목표도 없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취미생활 정도로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성인이 되면 목표가 무엇이든 자신의 독립적인 생활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인 여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 슬하에 있을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좋아하는 일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돈이 되는 일을 찾아야 하지요.
좋아한다고 꼭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청년 때 가장 고민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일을 찾는 것입니다. 인생을 걸머지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잘하는 것이 직업이 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나아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한 일을 찾아다니지만 사회가 잘 응해주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냥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을 하려고 자기를 맞추기 시작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인생이 쓸 고(苦)가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자기를 만들려고 애씁니다. 해본다 한들 나 혼자만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경쟁해야 합니다. 그렇게 적응해갑니다.
씨름 선수로 활동을 합니다. 잘 나가다가 좋아하던 선배가 경기 도중 절명합니다. 충격을 받습니다. 이미 병세가 깊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자기 꿈을 이루려 버텼던 것입니다. 그렇게 짧은 인생을 마칩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우람’이는 짐 싸들고 서울로 옵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삶이 고달프지요.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 24시간 햄버거음식점에 들릅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젊은 여성 혼자서 지키고 있습니다. 옆에 광고를 보니 그 시간에는 두 개를 하나 값에 준다는 것입니다. 그 덩치에 값싸게 허기를 채우기에는 그야말로 횡재지요. 그렇게 ‘더블 패티’ 단골이 됩니다.
‘현지’는 방송국 앵커 지망생입니다. 아빠와 떨어져 혼자서 자기 삶을 만들고 있습니다. 낮에는 아기를 돌보는 아르바이트, 그리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저녁 햄버거 집 아르바이트로 힘들게 살아갑니다. 어느 날 지친 몸 홀로 곱창집에서 소맥을 기차게 말아먹는 광경을 동료들과 함께 자리하던 우람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햄버거 집에서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더구나 틈만 있으면 노트북으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아마도 속으로 대단하다 싶었을 것입니다. 얼마 후 술이 취해 들른 그 집에 그날은 여분이 없었습니다. 서로가 미안스럽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만들어집니다. 너나나나 처지가 비슷하기도 하지요.
그것이 내가 잘 하는 일인지, 좋아하는 일인지, 해야 할 일인지, 바라는 일인지, 그런 것은 따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해온 일이고 하고 싶은 목표입니다. 일단 목표가 생겼다면 다른 것 생각할 필요 없이 도전해봐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젊음의 특권입니다. 우람이는 씨름 선수입니다. 충격으로 잠시 이탈했지만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목표에 도전해봐야 합니다. 현지는 그 먹성에 운동선수임을 짐작하였을 것입니다. 이야기 나눠보니 비슷한 환경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음을 압니다. 우리 서로 자리를 지키며 그래, 가자! 함께! 서로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그렇게 가까워지고 서로를 응원해줍니다. 인생, 혼자가 아니니 힘들어도 즐겁습니다.
우선 영화를 보면서 입맛을 돋게 만듭니다. 우리가 흔히 가까이 하는 음식들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먹으니 저절로 구미가 당기지요. 햄버거, 짜장면, 곱창전골, 제육덮밥, 홍어 등등. 하나 아쉽다 싶은 것은 웬 술을 그렇게 마셔대는지, 술 없이도 대화가 가능한데, 아니면 좀 절제하든지. 그리고 우리 문화 중 하나, 모이면 서열을 만든다는 것 - 오빠냐, 누나냐, 그게 아직도 그렇게 중요한가요? 거참! 아무튼 두 젊은이의 각자의 삶의 도전기를 보는 듯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세상은 그래도 살아볼 만합니다. 영화 ‘더블 패티’(Double Patty)를 보았습니다.
<1944>
장면 1.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는 가운데 진군하는 소련군을 만납니다. 치열한 전투 중 독일군이 중과부족으로 더 버틸 수 없음을 알고 후퇴 명령을 내립니다. 그 후퇴명령을 들은 상대방 소련군 지휘관이 놀랍니다. 그 말이 바로 자기네 에스토니아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주춤하다가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바로 직전 마주친 두 사람이 서로 놀란 가운데 한쪽이 반사적으로 총을 발사합니다. 독일군 쪽의 군인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집니다. 그의 마지막 눈길이 가슴에 찍힙니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입니다. 같은 민족인데 총을 발사한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사고입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신분을 확인해보려 주머니를 살피다가 편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편지를 고이 간직합니다.
소련군 ‘요르기’는 그 독일군 병사 ‘카알’의 편지를 가지고 주둔지로 갑니다. 바로 그곳 근방에 편지 수신자가 거하고 있음을 알고 찾아갑니다. 아마도 찾아가서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려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인인 줄 알았는데 오누이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따뜻한 접대와 친절에 도저히 사실을 고백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짧은 시간 함께 지내며 은근히 친밀한 감정을 가집니다. 부대에 돌아왔을 때 소련군 상관이 부릅니다. 주변에서 붉은 군대에 위해가 될 인물들을 잘 조사하여 알려달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면 사귀는 여자와 관계가 잘 이루어지도록 허락해준다고 합니다. 출세도 보장해주겠다고 합니다. 감시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면 2. 독일군은 전군 철수하고 있습니다. 독일군에 징집되었던 에스토니아 군에게도 자기네 독일로 후퇴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독일로 함께 가려는 에스토니아 병사들은 거의 없습니다. 요르기가 속한 소련군이 진군하면서 독일군 패잔병을 진멸합니다. 한 곳에서 항복하는 패잔병을 만납니다. 다섯 명의 독일군 군복을 입은 병사들의 모습이 군인답지 않게 앳됩니다. 더구나 같은 에스토니아인입니다. 자원한 것도 아니고 끌려와서 참전한 것인데 후퇴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가기를 거부하고 집에 돌아가려 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그 때 소련군 바로 그 부대장이 나타나 요르기에게 명령합니다.
‘요르기, 저들 모두 사살해!’ 아니 애들이잖아요. ‘적에게 들어갔던 녀석들은 필요 없어. 모두 처단해!’ 당황하여 주저하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명령이야!’ 재촉합니다. 못합니다. 그러자 그 즉시 권총을 꺼내 요르기를 사살합니다. 주변 병사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찌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소련인 부대장은 다른 상급자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못하면 너도 마찬가지야.’ 하고 총을 겨누려하자 요르기와 가까웠던 동료병사가 부대장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됩니다. 독일군 소년병들에게 독일군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합니다. 떨고 서있던 소년들이 부랴부랴 옷을 벗어버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요르기의 동료병사가 요르기 가슴에서 메모장을 꺼냅니다. 병사들과 시신을 잘 매장해줍니다. 그리고 그의 메모장을 가지고 카알의 여동생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그는 요르기가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것을 위로해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르기는 카알을 죽인 그 죄책감을 쉽게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네 잘못이 아니야. 알잖아. 전쟁이 잘못이지.’ 아무튼 결심과는 다르게 여동생을 만났을 때 고백하지 못한 것도 마음에 아프게 담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메모장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여자가 묵묵히 요르기의 고백을 읽으며 이야기는 종료됩니다.
에스토니아, 소련에 합병된 후 다시 독일군에게 점령당합니다. 많은 사람이 독일군에 징집되어 참전합니다. 그 후 붉은 군대, 소련군이 다시 점령해 들어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 유형으로 끌려가고 또 쓸만한 사람들이 징집되어 붉은 군대에 들어가 참전합니다. 짐작하는 대로 이 둘 사이에 낀 사람들은 똑같은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서로 자기 백성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됩니다. 한쪽은 파시스트, 다른 한쪽은 공산주의, 서로가 어울릴 수 없는 극과 극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싸움일 뿐 에스토니아와는 상관없는 일이지요. 아무런 상관없는 일에 껴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알은 독일 총통 히틀러 사진에 경의를 표하지 않습니다. 요르기 또한 소련군 부대장을 마음으로부터 멀리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두 희생당합니다.
우리 자신도 민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우가 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념의 대결로 우리 자신이 서로 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방인들에 의해 나뉘었습니다. 서로 다른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기에 적으로 오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말을 듣고 보니 한 백성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서로가 얼마나 원치 않는 살생을 저질렀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픕니다. 나라의 비극이 백성의 슬픔을 빚어냅니다. 영화 ‘1944’를 보았습니다. 2015년 에스토니아와 핀란드 합작 영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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