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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여름호 애지문학회 편
강익수 성재봉 박설하 김길중 허이서 배옥주 김행석 이영선 백지 이미순 김은정 김평엽 조숙진 이병연 최병근 김정원 김혁분 이희석 김명이 김재언 현상연 백승자 사공경현 임덕기 강수정 한성환 황금비 유계자 정해영 송승안의 시
동동주
강익수
아버지와 우시장에 갔다 온 어미 소가 울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밖에 없다는 듯 목 놓아 울고 있었다
큰 눈망울이 젖어 있었다
어느 낯선 집에서 송아지도 울고 있었을 것이다
주춤주춤 뛰어보기도 하면서 젖어 갔을 것이다
말없이 저녁 식사를 하고
숙제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아무리 밀려와도 빈자리 하나 메우지 못하는 어둠을 만지작거리다가
그예 나는 아버지가 드시던 동동주를 몰래 퍼가서
여물통에 가만히 넣어 주었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강익수 울산 출생. 2021년 『애지』로 등단. 시집 『호수의 책』, 애지문학회, 글벗문학회, 시산맥 회원.
마이너리티
성재봉
시든 꽃, 뱀 한 마리 가을산을 오르고 있다
관절이 꺾인 가지가 날선 바람에 쫓기듯
기울어진 산을 오른다
그의 근원은 태초의 바위가 뿌리내린
차갑고 음습한 흙덩어리, 징그러운 모태신앙이
싹틔운 창조주를 향한 경외이다
조상의 배교로 두 동강 난 머리는
천년 후 가을을 피로 물들이고
신을 항명한 죄로 갈라진 혀는 위선의 도구가 되고 말았지
고독(蠱毒)으로 고독(孤獨)을 품고
독이 스민 쓸개는 함께를 망각하여 몸뚱이를 길게만 늘어뜨렸다
밤이슬에 몸을 적시고 오미자 열매를 짓이겨 삼켜도
말라비틀어진 비늘, 마른 독새풀 같은 두 눈
바위에게 조차 가을은 말을 걸었지
… 나는 ……
바위를 칭칭 감아 갈라진 혀로 침묵을 핥았지
돌아온 건 원죄가 각인된 화석의 돌팔매질 뿐
긴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소실되어가는 구원
허공을 마주한 오래된 벼랑 끝
시간의 틈에서 흩어진 폭포처럼 떨어지는 절망들
몸을 던진다
허공을 찢으며 튀어오른 경외의 파편들
박명의 서쪽 하늘 끝
잠시 반짝이는 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성재봉
경남 창녕 출생, 2024년『애지』신인문학상 등단, 풀꽃시문학회 회원
숲, 드라마 숲
박설하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는 일은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반쯤 눈을 감고 의자가 비스듬해질 때 너의 발을 지긋 밟았다 찡그리다 고요해진 네게 수요일을 흘려보내는 지금, 밤하늘의 트럼펫이 초승을 불러내고 벽에서 벽으로 건너가는 변주곡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가 한 페이지씩 스텝을 넘기고
웃는 사람에게도
훌쩍이는 사람에게도
깍지를 낀 사람에게도
일곱 시 너머로 방류되는 숲 오케스트라
맞닿거나 멀어질 때도
엔딩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눈을 감았던
눈을 감지 않았던
트럼펫 오보에, 클라리넷 심지어 심벌즈
덤불로 껴안은 노래
나무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사람의 숲
어깨를 툭 건드린다
나이테가 나이테에게 건네주는 음률
다음 주엔 드라마 숲이 부는 현악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약력 : 2022년 『애지』 등단, 시집 『화요일의 목록』
메일 주소 : paae11@daum.net
人
김길중
점심때 지나
노부부가 곰탕집으로 들어선다
할아버지가
햇살 드는 창가 쪽 테이블로 가더니
의자를 빼주자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앉는다
김이 모락거리는 곰탕이 나오고
할아버지는 곰탕을 뜨면서도 연신 할머니를 바라본다
먼저 수저를 놓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곰탕 뚝배기를 두 손으로 기울이자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할머니는 마지막 국물까지 퍼 드신다
할아버지가 평생 받아온 기울임을
이제는 되돌려 주는 모양이다
곰탕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노부부가 한 사람처럼 곰탕집을 나간다
사람 人자가 보인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 2023년 《애지》로 등단
고장난 심장
허이서
주유소 입구마다 리터당 가격을 적어 놓은 입간판들이
그날그날의 기분처럼 서있다
숫자가 수시로 바뀌지만 사람들은
계기판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무섭게 가까운 주유소를 찾는다
쓰고 채우고 또 쓰고 채우는 텅 빈 반복
그렇게 반복하다 50대가 되었다
처음엔 가성비 좋은 20대와 30대였는데
이젠 잔 고장에 시달리고 힘이 부족한 직전이 되었다
퇴출이 되지 않기 위해 병원에 간다
아무리 돈을 들어부어도 고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서러운데
고향친구의 갑작스런 부고가 온다
노후된 심장이 슬픔도 빨아먹었는지 그저 무덤덤하기만 하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충북 옥천 출생. 2022년 계간 <애지> 가을호 등단
메일 : glstnr0630@hanmail.net
수목 진단서
배옥주
병상에 누운 몽당연필
무딘 심을 꽉 쥔 채
그늘을 눌러 그리고 있다
해마다 바꿔 쓴 수족 자음
염라가 이 글자는 걸레로 읽은 탓에
긴 요도관에 꽂힌 몇 해 밤낮이
하릴없이 지나가고
안간힘을 다한 흑연 끝에
침이 묻어 있다
여생을 여음이라 고쳐 읽는다
석션* 중인 주목朱木
빗살무늬도 그늘이다
미라를 둘러싼 채 토론하는 사람들이
닳아버린 머리통을 두들긴다
매트리스를 걷어낸 병상에
압필 자국이 깊다
*석션(suction) : 토양에 포함된 수분을 대기 중으로 뽑아내는 일
2008년 《서정시학》 시 등단, 2022년 《애지》 평론 등단, 시집 『오후의 지퍼들』, 『The 빨강』, 『리을리을』, 평론집 『언어의 가면』, 연구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공간』, ‘김민부 문학상’, ‘애지 비평문학상’, ‘두레 문학상’ 수상, ‘요산문학 창작지원금’ 선정.《부경대학교》연구교수, 《애지》편집위원
밥과 똥
김행석
산다는 게 난리법석인 거 같아도
밥 먹고 똥 싸는 거 빼면 다 별거 아니지
항우장사도 밥 먹어야 살고
양귀비도 똥 못 싸면 죽느니
입만 열면 말을 비틀고
멀쩡한 손바닥 자꾸 비벼대는 것도
다 밥 때문이고
기름진 밥 달콤한 밥 찾아 떠도는 부나비 떼들
천방지축 날뛰지만
뒤가 구린 거 아는지 몰라
밥, 맨날 밥 아니고
똥, 날 때부터 똥 아니듯
구름이 비 되고 비가 다시 풀로 일어서는
저 야생의 들판
날것들의 눈물겨운 가면놀이를 보라
경이롭지 않는가
걱정 말게, 그대여
사나흘 내내 비가 내려도
별은 젖지 않으니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약력 : 2021년 《애지》 봄호 신인문학상
이메일 : hanbada51@daum.net
화살나무
이영선
아직 시위를 당기지는 말아야지
아픔마저 그리워
눈부신
그런 날
비워내고 비워낸 마음 헤집고
툭, 잎새 하나 내밀면
당신 눈길 어쩌면 내게로 향할지도 몰라
밤마다 흔들리다
비로소
가지 하나 화살이 되어
당신에게 향하는 날
붉은 내 얼굴을
당신이 잘 볼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활시위를 놓아야지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이영선
경북 김천 출생
2024년 『애지』로 등단
시집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D-day
백지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던 날,
엄마는 채식주의자*를 건네주었다
학교 도서관의 도서 폐기 목록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엄마는 늘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했다
엄마를 믿어도 될까?
사냥개의 다큐멘터리를 보던 날,
엄마는 토끼를 쫓는 사냥개를 보고 잔인하다 했다
엄마랑 돼지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중이었는데
사냥개와 나, 둘 중 누가 더 잔인한지 헷갈렸다
시험문제를 풀 때마다 답지는 반쯤 찢어져 있었고
찢어진 답지를 찾아 엄마의 꿈속에서 늘 헤매고 다녔다
꿈을 깨도 하루 종일 다리가 아팠는데
엄마는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나는 언제까지 다리가 아파야 할까?
*한강 소설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백지 약력 2023년 [애지]로 등단
거품 안개
이미순
진달래 군락지 종남산을 오른다
남천강 물안개가 솜뭉치를 풀어놓은 것처럼
강과 길과 산과 하늘을 뒤덮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다
솜뭉치
생각만 해도 아득한 솜
시집에서 분가하는 날, 새어머니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목화 솜이불을 주셨다
색이 바랜 양단 이불 호청 사이로 삐져나온 누런 솜이 눈에 거슬려 겁도 없이
뜯어내어 하이타이를 풀었다
솜은 솜을 낳고 또 솜을 낳고 물먹은 솜은 점점 솜을 불려 단칸방 부엌 안에 거품
이 거품에 부풀려 거품을 구름처럼 피워 올렸다
이 4월도 철없던 나처럼
얼마나 두터운 솜이불을 뜯어놨길래 강과 산과 구름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에
천지 구분 없는 물안개로 들였는지
정상에 올라서니 천지가 거품인데
날아든 나비 한 마리
나비야, 이 거품들 어쩌면 좋으니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이름 이미순
약력 2022년 [애지] 신인문학상 수상
독서하라
김은정
사랑하는 어머님과
오랫동안
이별했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독서하라.*
안산의 아름다운 소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읽고 쓰고 토론하기
동네 곳곳에
펼쳐진 책의 향연
성호와 함께 쌓여가는
독서의 기쁨
스스로 탐구해서
이룩한 자득自得
그 푸른 결실을 위해
독서하라
*성호전집
---애지문학회 백지 외 {D-day}에서
김은정 경북 경산 출생, 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단국대학교 석사과정을 졸업,2015년 『애지』로 등단, 시집『아빠찾기』, 『독서하는 소녀』, 「화랑유원지에 흐르는 빛].
겨울 청소부
김평엽
시베리아 원목 냄새로 바람이 분다
영공을 지나 거리로 몰린다
저녁처럼 흘러나온 사람은
귀가하지 않고
탄불 위에 질긴 살점 굽는다
그리고 침묵을 마신다
북극발 선전포고 때문일까
뼈 없는 이야기를 소금에 찍어 먹는다
술은 다시 채워지고
술잔 속에 술잔이 있는 걸
깨닫는다
휘핑크림처럼 하얀 저녁
낙엽으로 열반한 사람이
무심히 고독의 중심 옮기고 있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김평엽
2003년 애지 등단, 임화문학상(2007), 교원문학상(2009)
시집: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노을 속에 집을 짓다』, 『박쥐우산을 든 남자』,
kimpy9@hanmail.net
흘러내림의 디엔에이
조숙진
주근깨 속에 묻힌 네 눈은 한없이 소심해지고
내리는 눈에 가려 더욱 위축되었다
고무줄 같은 헐렁한 잣대로
쉽게 버림받았다는 대물림의 기억이
해이해진 입술까지 흘러내리자
순식간에 콧속으로 당겨 감춘다
밀려왔다 사라지는 물결이 흔드는 대로
출렁이는 몸은 육지에서도 그네를 탔지
모로 누운 허연 배 위로 눈발이 부풀면
굽은 고무장갑에 낚인 물컹한 감촉
무쇠 칼로 휘저은 찬바람에
주르륵, 토막 난 냉기가 검정 봉지에 빨려든다
본명도 헷갈리는 많은 이름이
풀어져 솥 안에서 떴다 가라앉고
뼈대 있는 물메기의 뿌리를 찾아
흐릿한 수증기 속을 헤맨다
치근대지 않는 맑고 달큼한 맛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흘러내림은 네 내림의 흔적
더없이 밖으로 스며들기 딱 좋은 DNA야
찬바람에 절인 생 덕지덕지 붙은 문풍지를 풀어내어
뜨거운 국물 후루룩 입안으로 빨려들면
운 좋은 어느 일꾼의 근심은 밀려나고
두둑하니 뱃심이 살아나지
너도 나도
작은 눈이 더없이 환해진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조숙진 전북 남원 출생, 2023년 계간 시전문지 『애지』로 등단, 시집『우리, 구면이지요?』
담금질하다
이병연
비가 작심을 했다
때를 기다린 듯
수직으로 내리꽂으며 사선으로 옆구리를 찬다
잎이 놀라 몸을 움츠리고
중심을 잃고 비틀대다
비수처럼 꽂히는 빗줄기를 튕겨낸다
잎맥을 키워준 햇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천지를 호령하는 빗속
오그라든 심지를 돋우어야 할 때
잊고 지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앞으로 나가는 발판도 어둠 속
내리붓는 여름비에
무른 근육을 다지고 있다
몰아치는 비의 늪에서
잎은 어둠을 빛으로 읽는 중이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이병연
약력 : 공주사대 국어교육과 졸업, 공주대 문학석사, 2016년 계간지 『시세계』 신인문학상 등단, 2021 제16회 한국창작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꽃이 보이는 날』, 『적막은 새로운 길을 낸다』, 『바위를 낚다』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최병근
간판 없는 공장은 그의 1인 놀이터였다
수령 오백 년 보호수 발치에
기와 정자 하나 빈 채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주름진 나무 옆구리에 붙어 있는
볼트 공장 사장을 만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한 치 오차 없이 여름을 깎아
가을의 힘줄을 한껏 조여야 할 그의
볼트
이순에 늦장가 들어 세 살 딸아이를 둔 그는
나무 그늘을 나이테처럼 둥글게
둥글게 땀 흘려 깎고 있었다
그와, 그의 필리핀 아내와
저녁이 여전히 무서운 딸아이
웃음만으로 세상이 어찌 환해질 수 있겠는가
나는 처음 보았다
느티나무가 수만의 푸른 눈동자로
그의 볼트 공장 지붕 그늘을 완성한
한여름 그 오후를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최병근
충남 보령 출생, 2020『애지』로 등단. 시집『바람의 지휘자』,『말의 활주로},『먼지』등
검은 도로
김정원
점호 시간, 이등병 관물대처럼 가지런하고
성인 신장보다 더 높게 차곡차곡 쌓은
폐지가 빛 한줄기 샐 틈도 없이 가려
밀고 가는 수레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메똥 봉분만 한 폐지로는
가면 갈수록 할아버지 앞길이 어두워진다
수레가 할아버지를 끌면 망둥어 눈같이 불거진
핏줄이 종아리 아래로 뿌리 뻗어가는 헤름참
비지땀 차서 솔찬히 미끄러운 고무신 벗겨지게
가까스로 생존을 버티는 깔끄막인데
폐지는 무겁고
지폐는 가볍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김정원
전남 담양 출생. 2006년 『애지』 등단. 시집 『아심찬하게』 외 다수 발간. 수주문학상 등 수상. 영문학박사.
내 손안에 캔디
김혁분
밀은 잘 자랐다
밀밭에 숨은 토끼는 몇 마리일까
발톱을 세운다
밀밭을 달리는 놈의 숨줄을 잡고 등짝을 콱
착지 전 날개는
접을 때를 잘 정해야 해
두 눈을 크게 뜨고 욤욤욤 밀밭 귀퉁이를 갉아먹는 쥐새끼는 밀어놓고 저 방정맞은 고라니는 제쳐놓고 눈이 붉은 흰 토끼를 잡아채는 거야, 모눈종이처럼 촘촘한 밀밭 속을 헤치고 다니는 솜털 뽀얀 토끼 등짝에 좌표를 찍는다 쪼아먹을 하얀 솜사탕
(내 손을 벗어날 수 있겠니?)
날개를 접고 조심조심 놈의 무게를 가늠하며
코끼리처럼 든든한 토끼 한 마리를 낚아 날아오르는 거지
활짝
물결치는 황금 밀밭 위를 행글라이더처럼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김혁분 2007년『애지』등단. 시집『목욕탕에는 국어사전이 없다』,『식물성의 수다』
눈보라 속을 걷다
이희석
내가 뱉었던 말들이 눈이 되어 내게로 오고 있다
바람을 등지고 온다
술 취한 사내처럼 비틀비틀 온다
죽은 척 떨어지다가
영하 십이 도를 목도리 사이로 쑥 들이민다
호숫가 물 위에 세워진 산책로
발아래 쌓인 눈들이 우두둑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를 낸다
철골 위에 깔아놓은 목판들이
끄윽 끅 허리 앓는 소리를 낸다
호수 건너편에서 낯익은 사내가 내 쪽을 보며
뭐라 뭐라 말하는 듯 입을 움직이고 있다
들리지 않지만 뭔 소린지 알 것 같다
나도 그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가 손을 슬쩍 올렸다 내린다
조각난 나이테들로 가득한 이 둘레 길의 한 바퀴는 나무의 몇 년일까?
호수 이편의 나와 건너편의 나 사이엔 몇 년이 있을까?
바람 분다
눈발이 휘날린다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얼음 속에 물결의 흔적이 어지럽다
윤슬이 얼음 아래서 반짝인다
당분간 풀리지 않을 얼음 아래
서로 꼭 껴안고 있는
공기 방울들이
다음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2024년 {애지}로 등단
또 가을이라는 긴 인사
김명이
해를 지워가는 갈참나무 잎 고인다 젖은 소리로
술 취한 큰 발에 호롱불이 넘어지고 어린 너가 있다
성장할수록 비대칭 기울기를 갖게 된
몸속에 새겨진 갈빛 화인을 들켰을 때 웃을 수 있니
총명한 아이가 감정 풍부한 소녀가
요절가수 노래 좀 부르지 마라니까
선아! 아직 너의 이름이 뚜렷한 계절이다
창구에 앉아 짓무르도록 헤아리던 자본주의
무조건 상냥해야 얇아도 월급봉투 쥐었다
습관적으로 손을 주무르던 해바라기야
숨쉬기 운동이 필요하다고
산정 극기훈련은 너의 심장을 거둬갔다
선아! 천사의 미소를 허락하지 않는 너의 신께 미움이 박힌 걸까
선생님 지시봉이 누군가를 노릴 때 시 한 편 단번에 외웠다
내포한 뜻과 상관없이 족속이란 시어가 싫었어
함부로 대하는 단어 같았거든
마른 가지일지도 모를 관의 허물들
웃음과 울음의 중간을 생각하다 썩소라 하나
선애야! 의미 없는 생 알아차려 사슴 눈망울 일찍 감아버렸니
또 한 뭉치의 우울을 던진다
J군! 썩은 오일 뒤집어쓰고 후려치는 수리비 받을 때인지
격한 온도 상승으로 입가에 거품 물고 더러워
엔진에 날개를 달아 훌쩍 탈출하겠다더니
부쩍 바깥은 자네 눈이 부릅뜨던 약아빠진 자의 논리들
남은 자의 시간은 휩쓸려간 회오리 물살 같아 숨막힌다
겹겹의 낙엽 위치가 없는 낙엽 이름을 지우는 낙엽
끝난 줄 알았던 긴 이별의 시간 병증으로 되돌아와 있다
둑 안에 차 있어 떠도는 걸까
터져야 말라버릴까
기억은 흐려지고 추억으로 결리는 날들
낙엽이 스며들어 흙으로 사라질 때까지 견뎌야 한다
차가운 가을 꽃잎 몇 장 사랑할 때가 되었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전북 오수 출생. 시집『엄마가 아팠다』, 『모자의 그늘』, 『사랑에 대하여는 쓰지 않겠다』, 『섬 몽상 주머니』등.
리마스터링
김재언
다시,
'중경삼림'을 본다
예보를 훌쩍 넘긴 장마의 변주에
발목이 젖어든다
'California Dreaming' 속으로
찾아가는 청춘들의 항로
떠날 때를 알고 가는 뒷모습*을 지우며
예정된 결별을 돌아본다
회항하는 그림자는
어느 약속을 비행하고 있을까
옥상에 널어둔 동쪽 한 귀퉁이에
날개가 찢어진 날
나침반 위에 눈빛을 올려놓으면
닫고 있던 귓바퀴에서
네가 좋아했던 가사가 흘러나오고
빗방울이 쓸려가는 난간
파란 슬리퍼 한 짝이 버티고 있다
다정하게 들려오는 우리의 강우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형기 「낙화⌟에서 변용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경북 청도 출생, 2021년 {애지}로 등단. 2024년 제1회 청도문학자품상 수상. 시집 {꽃의 속도}(2024년 도서출판 지혜)
날 세우다
현상연
싱크대 서랍 무쇠 칼
꺼내보니 녹슬어 있다
습한 계절을 물고 있던 탓인지
칼은 붉은 게으름 들쓰고 무뎌진 칼끝은
나를 향하고 있다
숫돌에 물 먹이며
희미해진 기억 벗겨본다
칼날이 숫돌을 먹고
무심한 기억은 세월을 먹고
날 세운다는 것은
부단한 시간 응어리져
부패된 부위를 드러내기 위함 아닌가
그건 아마도 손 없는 날을 고르기 위한
내 오래된 공복의 풍습일지 모르며
푸른 날의 약속을 다시 꺼내기 위함이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현상연-2017년 애지로 등단.
시집『가마우지 달빛을 낚다』 『울음, 태우다』
자연인
사공경현
비우고
떼 내는 일이다
인간의 간을 떼 내고
혼자 살아내는 일이다
지우고 덜어내고
고독한 포기 끝에
人의 파임을 떼고
홀로 서는 일이다
그리하여 자연인이 되었다가
이윽고 인마저 떼어 내는 일이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사공경현 군위 출생 2022년 『애지』 등단 이 메일 v4040@hanmail.net
이른 가을 오후 네 시
백승자
모든 버티는 것들이 시계를 풀기 시작하면
바람을 뜨겁게 달구던 해도 격정을 놓는다
몰고 온 바람도
실려 온 바람도
쏜살보다 빨리 시간의 팔부능선을 넘고
동쪽으로 내달리던 관성이 흠칫,
지친 기린의 혀처럼 축 늘어진 그림자에 놀라
부지깽이 같은 말뚝을 더듬는다
한낮 쏟아지던 해를 향해 박았던 말뚝
그림자의 그림자도 허락하지 않던 말뚝이 비틀거리자
우물가 소문처럼 자라나는 그림자들
검다
실핏줄 하나 살리지 못한 족적들
무엇을 키워온 걸까
기린이라며 긴 목을 꼿꼿하게 세웠던 많은 날
나뭇잎이나 나무열매나 순수한 풀잎만 먹은 건 맞나
기억은 어제까지 먹은 종種들을 횡설수설하고
사자가 먹다 남긴 불쌍한 것들의 살점을 먹었는지도
하이에나 무리에 끼어 썩은 사체를 후벼팠었는지도
외면하거나 모르거나 열심으로 키워낸 그림자들에 먹힐 듯한 오후
서쪽으로 돌아 서서
조금은 겸손해진 해를 끌어 안으면
등 뒤에 숨긴 그림자와 곱게 누울 수 있을까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백승자 : 2016년 《애지》로 등단 2023년 첫시집 『그와 나의 아포리즘』 출간
시간의 간극
임덕기
놀이터가 보이는 길가에서
유치원생 남자 아이
깨금발로 걸어가며
앞서 가는 아이 이름을 부른다
여자아이는 뒤돌아보며 걸음을 멈춘다
미래시간이 아이들 곁에 달려온다
빛나는 보랏빛 아우라
아이들을 감싸며
아이들과 함께 걷는다
뒤따라가는 기운 없는 발걸음
몇 굽이 골짜기와 강물을 힘겹게 건너왔을까
시간의 물이끼에 젖어
후줄근한 모양새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안노인
물살에 떠내려간
기억의 편린이 되돌아온다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 목소리에
낡은 시간들이 설레발치며 다가온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임덕기 약력
이화여대 국문학과 졸업, 2014년 계간《애지》시 등단. 시집《꼰드랍다》,⟪봄으로 가는 지도⟫‘A Map to the Spring' (미국 뉴욕에서 2024년 영역본 출간),
수필집⟪조각보를 꿈꾸다⟫,⟪기우뚱한 나무⟫(2015년 세종나눔도서), ⟪서로 다른 물빛⟫(원종린수필문학상),⟪스며들다⟫.
어린이날
강수정
아이가 우네
꽃무늬 실크 블라우스에 멜빵 치마를 입은 삐삐처럼
마른 여자아이가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네
칭얼대는 고양이 마냥 앵앵거리는 TV 소리는 들리지 않고
어린 조카가 갖고 노는 커다란 코끼리 인형에 시선을 맞추고 있네
흰 페인트를 가득 묻힌 아버지의 기름진 머리에는 초라한
홀애비의 고독이 떨어지네
암으로 유배 갔던 엄마가 돌아오던 날
개마고원보다 먼 그곳
시든 감자처럼 말라버린, 푸른 싹조차 나지 않는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국제시장에서 구해온 뽀글이 가발을 꺼내놓으시네
돼지털보다 굵고 억센 머릿결
흐느적거리는 마른 손가락을 넣어 매무새를 가다듬었지
힘겹게 찾아온 엄마의 마음도 모른 채 설운 마음에 쏟아지는 아이의 푸념, 원망, 그리움
기념사진 속 아이의 꽉 쥔 주먹과
흐릿한 엄마의 미소가 물먹은 별처럼 반짝였던
어린이날 오후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강수정: 경남 삼천포 출생, 2025년 애지로 등단. 전 동국대, 경기대 등 시간강사(일문학전공)
풀꽃시문학회 및 금강여성문학회 회원
둥지 속 세상
한성환
후드득
둥지로 날아든 개개비
주둥이에 가득 물고
새끼들 먹이려는데
어, 어
작은 것들아
모두 어디로 갔니
개개 개개 개개객
삐비이 비비비
쩍 벌린 큰 놈 입에
몽땅 밀어 넣고
그냥 운다
저 너머
숲속에 둥지가 없어
내가 지은 둥지가 없어
네 집에 맡겨 둔 새끼
뻐꾹뻐꾹
뻐뻐꾹 뻐꾹
뻐꾸기가 운다
남의집살이 내 새끼
눈치 보지 않고
잘 살고 있는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운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충남 논산 출생. 2025년 애지로 등단
귀벌레 증후군
황금비
뫼르소가 죽이고 싶었던 건
태양이었어
열대야는 삼복을 뒤척이고
불타는 밤은
뜬눈으로 지샐 때였지
허점 찔린 귀뚜리는
막바지 선전포고를 하는 울음으로
귀청을 흔들었어
귀벌레들이 소리의 잠을 흥얼대고
목청을 따라 울어보는
일곱 해의 밤낮
이명을 키우던 귀벌레를 풀어놓으면
잦아들 것 같지 않던 소용돌이를
어떻게 재운 걸까
아직 죽지 않은 당신이 숨을 고르지
어둠을 울던 가을이
꾸물꾸물
뫼르소의 귓속에서 기어 나올 때까지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황금비
약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25년 {애지}로 등단. 도시락挑詩樂동인
달력을 바꿔 거는 동안
유계자
벚나무는 자꾸 꽃잎을 흘리는데
빈 그네에 노을이 앉아요
나를 안고 그네를 타던 엄마의 붉은 구두는
놀이터를 벗어나 어디를 걷고 있을까요
주방에서 쌀국수 삶는 냄새가 사라지고
날마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밥상 위에 쏟아져요
티브이에서 탁란하는 뻐꾸기를 보고
저런 저런 못된 것 같으니라고
못된 짐승이 또 있네
어쩔 수 없이 나는 탁란의 아이
할머니는 짐승의 아이마저 사라질까 봐
나보다 먼저 울어요
동전처럼 머리털이 빠져나가고
날짜의 각질들은 말라가는데
붉은 모랫바닥에 쓴 내 생일
초대할 친구 없어 고양이만 그려요
놀이터에 자주 오는 줄무늬 어린 고양이
내 울음에 끼어드는
나비야 나비야
풀린 꽃잎처럼 오래도록 어깨를 들썩이죠
폰 속의 이모티콘 생일축하 촛불은 타고 있는데
엄마는 줄이 없는 꽃잎,
지금쯤 어디까지 날아갔을까요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약력: 2016년 《애지》 등단, 시집『 오래오래오래』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등
『물마중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2년 중소 출판사 출판콘텐츠 선정, 애지문학작품상, 웅진문학상 수상, poem-y@hanmail.net
말의 즙
정해영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입안에 들어온 딱딱하고 거칠은
이물질 같아 내 뱉고 싶었다
넘길 수 없는 말
입속에 넣고 혀끝으로
오래 굴렸다
녹인다는 것은
둥근 모양으로 어루만지는 일
울퉁불퉁 거친 것을 받아
부드럽게 넘기는 법은
어릴 적
사탕을 먹으면서 알았다
굴릴수록 단맛이 난다
그 말에서 나오는
즙인가
어느새
말이 넘어 간다
돌을 삭이듯
녹여 먹는 말
며칠 혹은 몇 백 년이
걸린다 해도
즙이 된 말은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정해영 2009년 {애지}로 등단. 시집 {왼쪽이 쓸쓸하다}(2014년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 선정)2021년 제19회 애지문학상 수상.
오래된 선풍기
송승안
바람이 분다
이잉이잉 소리를 죽이고 분다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거리
식지 않는 가슴을 파닥이며 분다
아무리 불어도 모자라는 힘
힘 없이도 과열되는 걸
타버리고 나면 소용없는 걸
목을 빼고 분다
한쪽으로만 분다
뒤돌아볼 줄 모르고
고개를 흔들 줄은 더욱 모르고
걷잡을 수 없다가 가라앉다가
어지러운 속을 다잡고 분다
흐어엉 흐어엉 떨다가도 분다
멈추었다가도 분다
----애지문학회, 백지 외『D-day}에서
송승안 2024년 애지 겨울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