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님의 퇴임식장은 마지막 부임지인 강릉초등학교다. 은사님 동료였던 전,현직 교장선생님과 후배 교사들 그리고 제자들로 1층 대강당은 만원이다. 4~5백 명은 족히 될 것 같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식은 頌功牌 및 紀念品贈呈순서에서 한없이 길어진다. 송공패와 기념품이 한 트럭은 될 것 같다. 이것은 선생님의 발자취를 말해주는 것이다. 선생님은 황조근정훈장,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표창 등 지금까지 받은 훈,표창이 6개나 된다. 선생님의 업적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이 지역 교육계의 고목이시다.
백발이 성성한 선생님을 뵈오니 눈물이 핑 돈다. 선생님께서 처음 부임 오셨을 때 나이는 20세 동안이었다. 선생님은 강릉사범학교를 수석 합격, 수석 졸업하셨던 만큼 학습 지도력이 뛰어났다. 10등 안에 겨우 들었던 나도 시험을 치면 한 두 문제 틀리거나 만점을 받는 예가 흔했다. 선생님께서 맡는 반은 무조건 모범학습반이었다.
선생님의 학습지도는 재미있었지만 또 엄하셨다. 장난이 심했던 학급반장아이와 현직교장선생님 아들을 매로 다스리는 모습을 보고 진정한 사랑은 저런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반 아이 모두를 평등하게 아끼셨다.
선생님은 칭찬에도 인색하지 않으셨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도 칭찬, 운동을 잘해도 칭찬, 청소를 잘해도 칭찬, 무엇이든 잘하면 칭찬으로 용기를 주었다. 나는 1년간 받은 칭찬이 5년 동안 받은 칭찬보다 많았다. 그 칭찬은 평생을 바르게 살도록 한 지침서나 다름없다.
도교육감의 축사가 끝나고 재학생의 사은사에 이어 내 차례다. 차분하게 원고를 낭독하자 다짐했지만 원고를 든 손이 떨리고 다리가 떨려온다. 떨림을 예방하여 내의까지 입었지만 소용없다.
나는 사람들 앞에 서면 떨리는 버릇이 있다. 이런 버릇 때문에 며칠 전, 결혼을 하려는 후배로부터 주례 청탁을 받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기피했었다. 이런 버릇 때문에 선생님의 사은사 부탁을 받고 갈등을 겪었었다. 선생님 명예에 누가 될까봐, 또 떨려서 제대로 할 자신이 없어서 사양했지만 거듭된 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승낙을 하고 이틀 밤을 새워 원고를 썼던 것이다.
웅변가처럼 쩡쩡 울리던 교육감의 축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내 목소리는 초라하다. 축하객들로 꽉 찬 대강당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입안은 바싹 말라오고, 불안을 떨쳐내려 애썼지만 제대로 될 리 없다. 다행인 것은 마이크성능이 뛰어났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참고 겨우 끝냈다. 순간, 강당이 떠나갈 듯 박수가 들려왔다.
선생님 손에 끌려 단상에 올랐다. “제 첫 제자입니다. 지금 창원특수강에서 천장크레인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훌륭한 제자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박수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이렇게 큰 박수를 받아보긴 처음이다.
식이 끝나고 자리에 일어섰을 때 한 여자가 다가오며 “강동 학교 몇 회십니까?”한다. 30회라 하자 “저는 31회입니다. 혹시 동기가 아닌 가해서 여쭈어 본겁니다. 선배님이시군요. 사은사 감동 깊게 들었습니다.” 그 후배도 선생님 제자며 교사라 했다.
의외의 반응이다. 의외의 반응은 만찬장인 식당에서 절정을 이룬다. 자리에 앉자 바로 앞자리서 은사님 후임교장선생님이라는 분이 손을 내밀며
“수필가선생 사은사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너무 장합니다.”하며 악수를 청한다.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옆에 앉은 사람들도 훌륭한 제자라며 오랜 친구에게 얘기하듯 친절하게 한마디씩 한다.
“나는 은사님하고 사범학교 동기에요, 방송대도 동기지, 그러고 보니 무리모두 방송대 동문이구먼.”
“은사님은 처음 발령받았을 때 양복도 못 입었었을 거야. 그땐 참 어렵게 살았었거든. 지금 그 나이에 박사과정은 또 무엇이고, 이번에 장남이 행정고시에 수석합격을 했는데도 그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안하더군. 사람이 너무 엄격해.”
선생님께서 좌중을 한 바퀴 돌며 술을 따른 후 내가 은사님께 술을 올리자 선생님은 또 일어서며 좌중을 향해 인사를 한다.
“이 제자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첫 비행기를 타고 제게 달려왔습니다. 양주 한 병을 들고 말입니다. 그동안 나를 잊지 않고 있다가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달려온 겁니다. 이 제자는 주목을 받을 만큼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어려운 과정을 굴하지 않고 성공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가 나보다 결혼을 먼저 했습니다. 지금은 자녀를 출가시켜 손주가 많습니다. 가정도 얼마나 다복합니까?
“자, 이제는 자네가 돌면서 술을 올리게. 여기 계시는 분은 모두 내 스승님이야, 이분이 내 첫 스승님이야. 스승님 저의 제자 술을 받으십시오.”
고령인 전직 교장선생님들에게 술을 올리자 그렇게 좋아할 줄 모른다. 참 훌륭하게 성공했구만 고맙네, 스승을 잘 만났어, 바로 인간승리야, 퇴임식에 많이 다녔지만 오늘같이 감동받은 일은 처음이네, 그 스승에 그 제자, 김진목 교장선생님은 복도 많아요. 저런 제자를 두었으니, 평생 선생노릇 했으면 저런 제자 하나쯤은 있어야하는데, 눈물이 쏟아질 뻔했구먼, 한마디씩 하는 말은 칭찬을 넘는 찬사다.
내가 살아온 삶에 충격을 받은 듯 모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낸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무슨 말이든 한마디씩 하려 애를 쓰고 나보다 어린사람은 무조건 머리를 숙인다. 무엇보다 흐뭇해하시는 선생님모습이 인상 깊다.
내가 글쓰는 일 말고 무엇으로 선생님을 즐겁게 해 드릴 수 있을까? 내가 무슨 일로 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이미 구면인 사모님은 나를 친동생처럼 따뜻이 대한다. 2남1녀의 자녀들은 일렬로 서서 내게 정중히 머리를 숙인다. 오늘은 선생님께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그런 날일 것이다. 한동안 이 지역교육계에 내 얘기가 화제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은 선생님을 위해 모처럼 좋은 일을 한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내내 속으로 울었다. 출세한 많은 제자 중에 나를 가장 아끼는 선생님의 깊은 사랑에 울고, 전국을 떠돌며 살아온 내 삶이 흥건히 젖어와 울고, 무리한 막장생활 후유증으로 쑤셔오는 무릎의 통증에 울었다.
謝恩辭
평생을 바르게 살도록 가르침을 주신 김진목 선생님의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머리 숙여 축원 드립니다.
훌륭한 제자들을 제처 두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제가 영광스런 자리에서 인사를 드리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저는 1962년 강동 초등학교에서 갓 부임하신 선생님에게 1년간 5학년 과정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학습에 열정이 많으셨던 선생님은 학습지도 방법이 독특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쉽게 기억하고 쉽게 풀 수 있는 요령을 터득시켰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수준별 개별화 교육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으로 저희들 잠자던 머리가 트이면서 깊숙이 숨겨졌던 재능이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부임하신 다음달부터 5학년 2반은 모범학습반이라는 패찰을 1년 내내 달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선생님의 학습지도방법에 따라 성적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교실 입구에 걸린 모범학습반이란 패찰은 저희들의 조그만 자존심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지금껏 선생님을 우러러 받드는 것은 학업성적보다 편애하지 않는 넓은 사랑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학급반장이라고 감싸지 않았습니다. 공부 잘 한다고 감싸지 않았습니다. 부자 집 아들이라고 감싸지 않았습니다. 누구라도 잘못하면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방학숙제였던 저의 글을 반 아이들 앞에서 직접 낭송하시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칭찬을 많이 하셨습니다. 틀린 맞춤법을 하나하나 고쳐주시면서 “한걸이는 문학에 소질이 있으니 중․고․대학교를 진학할 때에는 문학과 연관지어서 결정하는 게 좋겠구나.” 하시며 격려의 말씀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던 저로서는 너무 과분한 칭찬과 격려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와 격려의 말씀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키보다 큰 지게를 지고 30리길을 나무하러다니면서, 이발소에서 손님 머리를 감는 일을 하면서, 중국집 자장면 배달을 하면서, 빵 만드는 일을 하면서, 방앗간 일을 하면서, 기생들이 히히거리는 요정 주방장 보조로 일하면서, 제주도로 끌려가 건설단이란 이름으로 강제노역을 했던 깡패출신들과 청소년범죄자들로 구성된 갱생원들과 공사판을 전전하면서, 밤이면 까만 나비넥타이를 매고 길을 지나는 사람을 향해“어서 오십쇼.”를 외치던 빠 안내를 하면서, 소작농을 하면서, 아내와 아이 셋의 부양가족을 거느리고 지하 수 백 미터 막장에서 광부로 일하면서, 쇳물을 다루는 철강공장에서 숨막히는 위험으로부터 끝까지 나를 지켜준 것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꿈을 버려선 안 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결코 저를 지켜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려 햇살 부신 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직장생활 틈틈이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늦게나마 학문의 길을 걷게 하였습니다. 독학 10년의 피나는 노력으로 중․고과정은 검정고시, 대학은 방송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33년 만에 문학사가 되었던 힘의 원동력은 바로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선생님!
저는 험한 여정을 살아오면서 결코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이익 앞에 추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꿋꿋하게 살았습니다. “사람은 올곧게 살아야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간곡히 권하던 “문학의 길을 가라”는 뜻을 저버린 적도 없었습니다. 피를 말리는 학점과 싸우면서 문학수업을 병행하였습니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94년 근로자문학상과 95년 방송대문학상을 거쳐 마침내 98년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선생님의 뜻에 부응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42년 전 선생님께 그토록 칭찬을 받았던 저는 마산문인협회, 남도 시문학회, 경상남도문인협회, 경상남도작가회의, 전국노동자문학회의 일원으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밑바닥을 굴러다니던 제가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작가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노동자 신분으로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신앙 같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온몸을 던져 실천하여 얻은 결실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성실히 사는 제자가 어디 저 하나뿐이겠습니까? 선생님의 제자들은 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을 자양분삼아 모두 훌륭한 일꾼으로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땅 구석구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하며 땀을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
평생을 교육 일선에서 인재육성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이제부터는 자유로운 몸으로 평생을 공들여 길러내신 제자들의 모습에서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내내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