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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와 메추라기
출 16: 1-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430년간의 세월을 마치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홍해바다앞에서 참으로 막막한 현실에 두려워 떨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이 모세를 향하여 던진 원망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
“애굽에 장사지낼 곳이 없어서 우리를 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만드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그러지 않았느냐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기면서 이렇게 살겠노라고 말이다. 봐라 이렇게 애굽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보다 애굽 사람을 섬기면서 그렇게 종살이 하는 것이 나을 뻔하지 않았느냐” 참으로 이 말이 기가 막힌 소리입니다.
그들은 결과론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
이렇게 비참하게 이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과 비굴하게 서럽게 애굽 사람들에게 당하고 사는 것 가운데 택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는 것’보다는 ‘어찌하든 살아남는 것’을 택하겠다는 소리입니다.
그들은 그 광야에서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도전과 위기앞에 자신들의 선택을 말하면서 자신들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그들의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애굽군대가 자기들을 건드리지도 못할 것을 알았더라면 이런 소리(막말)을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
결국 사람은 극한 상황을 만나면 자신의 수준을 드러내게끔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고 언약이고 가나안 땅이고 뭐고 그들은 일단은 ‘비굴하게라도 살아남는 길’을 택할 수준의 사람들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예비하신 기적으로 홍해바다를 건넜고, 사흘 길을 가도록 마실 물을 얻지 못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사흘 전에 그들이 겪은 일은 어떤 일이었는가.
상상도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애굽군대를 피하고 그 바다를 건너 광야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14장3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되어있다.
“큰일을 보았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을 믿었다”고 분명히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은 그 믿음이 어찌되는가. 사흘 길을 가도록 마실 물을 얻지 못하다가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 있는 물이 너무 써서 마시지 못하게 되니까 15장24절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라고 되어있습니다.
성경이 참으로 얌전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이 사람들이 일찍이 홍해바다와 애굽군대 사이에서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퍼부었던 그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결코 그들이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고만 있었을 사람들이 아님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애굽에는 마실 물이 풍족하였는데 어쩌자고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 차라리 이렇게 목말라 죽게 되느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물이라도 풍족한데서 사는 것이 나을뻔 하였겠노라”고 하면서 아우성을 쳤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듯,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면서 그것을 물에 던지라하시고 모세가 순종하여 던지니 그 썼던 물이 달아 지게 되었다(15:25)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제부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끌어 40년 광야생활을 시작하게 하실 터인데 이렇게 사사건건 원망 의심 불평을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앞에서 의를 행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를 지켜 행하면 너희가 앞으로 어떤 환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보호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앞길을 책임질 것이다 하셨다(15:26) 바로 이때 하신 말씀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치료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의 문제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홍해 바다를 건넌 것처럼, 애굽 군대가 멸망을 당한 것처럼, 쓴 물이 단 물이 된 것 처럼 앞으로도 너희 앞에 나타나게 될 수많은 문제들 앞에 내가 대책을 세우고 내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홍해를 건너셨는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이미 홍해를 건넌 사람들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넜고 이젠 40년 광야 생활이후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것만 남아있지만, 여전히 그 마음의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은 얻었으나 아직도 자신이 과거 죄악의 종살이를 하던 때의 습성과 사고방식과 가치관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사사건건 문제를 만날 때 마다 의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의 탓만 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몸은 홍해를 건넜으나 아직도 마음은 홍해를 건너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놀라운 이적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홍해를 건넜고 그것이 그들의 인생에 최고의 간증거리가 되게끔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격과 확신과 간증이 얼마나 오래 갔는가? 단 사흘 만에 쓴 물앞에서 그들은 또 다른 홍해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홍해 앞에 좌절하고 맙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쓴물이 단물되는 역사를 보이시고 그들은 계속 전진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출16장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홍해를 건너지 못한 수준임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 제가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을 물을 얻지 못하다가 쓴물을 만나서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원망하는 장면을 말씀할 때, 저들이 결코 간단하고 얌전하게 그렇게 말 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홍해바다와 애굽 군대 사이에 포위되었을 때와 오늘 고기와 떡이 생각이 나서 원망을 하는 장면에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꾸만 지난 과거 애굽 생활을 떠올리면서 ‘그때가 더 나았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430년 눌림의 생활을 하다가 지금 이렇게 자유를 누리는 생활을 하는 것을 비교할 줄은 모릅니다.
오직 과거 애굽에선 먹을 것이 있었고 지금 이순간 이 광야에선 먹을 게 없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얼마나 오래갔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사흘만에 그리고 두달보름만에 다 잊어버리고 당장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절망하고 원망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지금 이순간 구원의 감격이고 뭐고 내가 당장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음으로 인해서 세상이 원망스럽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운 사람은 아닌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네가 내 말을 잘 듣고 나 보기에 의를 행하고 내 모든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너는 생존의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5:26)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이 되는 순간에는 하나님이 앞으로도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실 것이 믿어졌는데, 아니 믿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또 다른 문제가 닥쳐오면 그 믿음은 다 어디로 가고 원망의 소리만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난 문제는 ‘먹을 것’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지난 430년간 애굽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주면 주는대로 받아먹고 살아가는데 익숙한 사람들, 이타적이고 의존적인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현실속에 닥쳐온 ‘배고픔’의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니 그 언약을 붙들고 견디고만 있을 수는 없을만큼 심각한 문제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과연 이 백성이 홍해바다를 건넌 백성이 맞는가?’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바로 두달보름전에 홍해바다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4장31절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지 않는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어라” 이랬던 저들이 3일 만에 마실 물 없다고 원망하고 두달 보름 만에 먹을 것 없다고 오늘 모세를 향하여 원망의 소리를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저들은 육신으로는 홍해바다를 직접 건넜지만, 마음과 영으로는 아직도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라의 쓴물이 홍해였고, 오늘 본문의 먹을 것이 없는 문제가 그들의 홍해였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의 홍해 앞에 여지없이 넘어지고 있질 않습니까. 여러분의 홍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홍해를 건넌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도 홍해 앞에서 두려워 떨며 절망하며 원망만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부디 오늘 내 심령의 홍해, 현실의 홍해마저 온전히 건너는 역사가 있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럴려면 홍해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그 홍해를 가르신 여호와 하나님, 엘샤다이 하나님, 전능한 나의 아버지를 바라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물질문제의 홍해 앞에 선분들이 있습니다.
가슴아픈 나만의 사연의 홍해 앞에 서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가정문제의 홍해 앞에 선 분들도 있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 때문에 시달리는 심각한 홍해 앞에 서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홍해는 이미 갈라졌고, 여러분의 홍해도 갈라지기 위하여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일 뿐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열가지 재앙을 통과하고 출애굽의 꿈을 이루고 나서, 홍해바닷가에서 뒤쫓아오는 애굽군대를 만난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홍해가 갈라지면서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3일만에 만난 물이 마실 수 없는 쓴물이었던 것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물도 하나님이 단물(마실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오늘 출애굽 두달보름 만에 당도한 신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른 홍해를 만납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유의 원망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냅니다.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죽게 하는도다’(16:3) 저들은 또 하나의 홍해 앞에서 낙망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홍해바다를 건너 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마치 쓴물이 변하여 단물된 그 마라의 물을 마셔본 적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어떻게 이끌어 오셨고, 우리에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셨건만, 우리는 문제 앞에 서면, 마치 단 한번도 하나님이 날 돌보시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절망을 말하고 원망을 말힙니다.
이래선 안되는 것입니다. 말도 가려가면서 해야 합니다.
해선 안될 말들까지도 마구 쏟아내는 것은 불신앙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힘들면 ‘죽겠다’는 소릴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겠다’는 소리는 아주 잘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왜 우리를 이끌어 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것 보다 낫겠다’(14장) ‘우리가 애굽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굶어) 죽게 하는도다’(16:3)
게다가 출17장에 가 보면, 그들이 르비딤땅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을때,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17:3)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입에다 ‘죽겠다 죽겠다’하는 소리를 달고 살아가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극단적인 표현인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겠다’고 했던 때, 그 고비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살길을 주셨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죽겠다는 소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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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어떠한가? 살만한가 아니면 죽을 지경인가.
수성가족 여러분 우리는 말을 잘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두렵고 막막하고 걱정되고 하여도 절대 ‘죽겠다’는 소린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그 소리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15:26)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함부로 ‘죽겠다’는 말은 해선 안됩니다.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또 다시 살길을 열어주십니다.
4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이 말이 무슨 말인가.
“너희는 더 이상 죽겠다는 말은 입에서 꺼내지도 말거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살게 하리니 그러면 과연 너희가 살길을 열어주는 나 여호와의 말을 잘 듣나 안 듣나 내가 한번 지켜보겠다”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녁에는 고기를 주시고 아침에는 떡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목적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시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우리를 세심하게 채워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신지를 이젠 좀 스스로 깨달으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좋아라만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말씀순종”여부를 확인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20절과 27절에 특이한 말이 두 번 등장을 합니다.
그 말은 “더러는-”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이 등장을 하는가. 사연인 즉슨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면서,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하루치 식량’(18)을 주셨는데, 이때 하나님이 지시하신 바가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16:19)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의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순종이 되어지는가를 보고자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장 하루치 분량의 양식 외에는 남기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더러는”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7절의 ‘더러는’은 어떤 사람인가.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지 않을 것이니 안식일 전날 이틀 분량을 거두어라 하셨건만 그 말도 듣지 않고, 어떤 이들은 안식일에도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어딜 가나 꼭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할 때 잘 듣지 않고 딴짓하다가 엉뚱한 소리하는 사람,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건만 건성으로 듣고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 ‘하지 말라는 일을 굳이 하고야 마는 사람’, 문제 앞에서 당황해하고 불안해하고 절망만 하다가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확실히 믿는다고 했다가 또 다시 문제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망을 쏟아내는 사람 어딜 가나 꼭 있는 사람입니다.
왜 이러고 사는 것일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고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의 삶의 대책이요 살아가는 소망이 된 삶을 사는 사람, ‘내가 말씀 붙들고 살면 하나님은 나를 붙들고 책임져 주신다고 믿고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홍해바다 앞에서 절망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홍해바다를 우리가 무슨 수로 가르겠는가. 홍해를 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거라”하고 계십니다.
원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출 16: 1-12
유대인 한 사람이 아랍인 두 사람과 함께 비행기를 탔습니다. 유대인이 구두를 벗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랍인들이 유대인의 옆구리를 위협적으로 찌르면서"어이, 가서 주스 두 잔만 가지고 와"하고 다그칩니다. 유대인은 기분이 나쁘지만 싸우기 싫어서 얼른 일어나 오렌지 주스를 가지러갔습니다. 그러자 아랍인들 둘이서 유대인이 벗어 놓은 구두 속에 침을 마구 뱉었습니다
.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대인이 가지고 온 주스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셨습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유대인이 구두를 신으려고 보니 구두 안에 침이 질퍽거렸습니다. 그 구두를 들고 유대인이 아랍인들을 보면서 말했습니다."이스라엘과 아랍이 평화로우려면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구두에 침을 뱉지 말아야 되고 유대인은 아랍인들이 마시는 오렌지 주스에 오줌을 싸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평안은 신뢰에서 옵니다. 사람은 서로 믿을 수 있을 때에 그 관계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명확합니다. 내가 그를 믿어주면 그가 나를 믿어주지만 내가 그를 믿지 못하는 한 그도 나를 믿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신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신앙이 올발라야합니다.
또 하나 평안은 책임에서 옵니다. 서로가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자기 책임이라고 하는 곳에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싸웁니까? 서로 네가 잘못했다는데서 싸움이 있는 것이거든요. 먼저 내 잘못이다 인정하는 데에서는 다툼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이 책임감이 문제입니다.
[스티븐 코비]의<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워낙 베스트셀러여서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다들 알고 있습니다만 결국 그 책에서도 하는 이야기가 제목 그대로 성공한 사람의 성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환경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품이요, 습관이 성공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독특한 성품이 대략적으로 일곱 가지인데 통틀어서 요지가 뭐냐 하면<주도성>이라는 것입니다. 주도적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가장 쉬운 예가"내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은 남에게 떠넘기거나 남의 도움을 빌어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손해 볼 각오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먼저 희생할 마음으로 앞장서는 것입니다.
가령 백만 원짜리의 물건이 꼭 필요하다고 합시다. 이건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주도적인 성격의 사람은 내가 먼저 얼마라도 돈을 내놓습니다. 그리고는 사자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진다는 의지입니다. 이 물건이 사지겠습니까 안 사지겠습니까? 사집니다.
그런데 이 주도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장서서 큰 소리만 치면 되는 줄 압니다. 자기희생, 자기 손해, 책임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책임지는 영역만큼이 내 것입니다. 내 것만 책임지면 좁은 영역을 살지만 남의 것 까지 책임지는 사람은 그만큼 넓은 영역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잘못까지 남에게 돌리면 내 영역은 반으로 줄어드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내 책임은 전혀 없고 완전히 남의 책임이라고 하는 순간 내 존재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스티븐 코비]의 말이 이런 주도적인 정신을 가지고, 성품을 가지고 살아서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이"성공할 것이다."가 아니라"성공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은 확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환경도 탓하지 말아야 됩니다. 환경이란 수시로 변하는 것 아닙니까? 변하는 환경에 따라 내 근본마저도 또한 달라져야한다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환경에 매여 살아야 한다는 것도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간혹 보면 실패한 과거 때문에 미래를 망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실패한 과거란 지나간 환경일 뿐이지 내 미래가 그 과거 환경 때문에 어두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로 성공한 과거가 미래를 망치는 경우도 봅니다.
지난날에 좀 잘된 것이 있다고 여기에만 집착되어서 오늘과 내일을 망쳐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 중에는 자기가 일류대학을 나왔다는 과거, 그것 하나 때문에 미래를 망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가하면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지 옛날에나 가능했던 일이 있습니다. 지금 될 수도 없고 앞으로도 되어 지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과거에 매달려서 그것만을 꿈꾸다가 미래를 다 망치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놓고는 세상이 어떻고, 사람들이 어떻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실패한 과거 때문에 현실을 원망하느라 미래가 어두워도 안 되지만 성공한 과거의 환경에 매여서 교만하여 현재를 원망하느라 미래를 실패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손만대에 노예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의 400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애굽 군대가 쫓아오지 못할 만큼 완전한 자유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자유인은 됐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비롯한 몇 사람 외에는 광야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 이유를 혹시 아십니까?
성경은"원망 죄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원망은 무서운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을 만큼 원망이라는 죄의 결과는 비참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원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죄는 범하지 말아야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원망을 하는지 본문 가운데에 원망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이 된 어느 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곧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이 불평합니다. 애굽에서는 먹을 것이라도 있었는데 차라리 거기서 먹고 죽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둥 괜히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굶어죽게 만든다는 둥 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거침없이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십니다. 이것을 주신 의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망의 내용이 정말 유치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은"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건 곧 다시 노예생활로 가자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고기 이야기를 합니다만 노예주제에 무슨 마음껏 고기를 삶아 먹었겠습니까? 노예생활 할 때 주인들의 음식 만들면서 고기 가마 옆에서 갈고리로 몇 점 건져 먹었는데 그게 맛이 있었다는 겁니다.
자 중요한 이야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원망하고 있는 것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우리도 가끔씩은 옛날로 돌아가서 많이 생각합니다.'그때가 좋았는데...'하는 감상에 빠져서 현실을 보지 못하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완전히 단절 되어야 할 과거는 단절해야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하는 과거와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했던 것도 그렇고 실패했던 것도 그렇고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과거라도 해석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과거를 어떻게 해석 하느냐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오늘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 작년보다 올해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항상 과거가 오늘 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는 또 그때대로 죽을 지경으로 살아놓고도 이제 와서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면 단지 이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해석능력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 길고 긴 노예생활 중에 그 잠깐 잠깐에 있었던 즐거움 그거 하나를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기 한 점 건져먹을 때 육체적이고 세속적이요, 물질적인 만족 그 기억 때문에 이성이 병들었습니다. 차라리"거기서 노예적으로 향락하기보다는 자유인으로서 광야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냐?"이 정도가 되었더라면 원망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 고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텐데 어찌 이런 저속한 인간이 되었더냐 말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정리해봅니다. 그들의 믿음이 문제였습니다. 불신앙이 원망을 만들었고 거침없는 원망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신앙 없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랑은 믿음이어야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신앙으로 자랑거리를 삼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늘 들어도 우스우면서도 찔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 한 분이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천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중국집으로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배고픈 차에 잘되었다 생각하는데 같은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장로님보다 먼저 와서 탕수육을 맛있게 먹고 있더랍니다
. 순간 장로님이 생각하기를'아, 집사님이 탕수육을 먹는 것 보니 나는 장로인데 더 맛있는 것을 주겠구나'생각하고 기다리는데 자장면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실망한 장로님이 하나님께"아니, 하나님 집사에게는 탕수육을 주고 장로인 나에게는 겨우 자장면을 주십니까?"하고 볼멘소리로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장로님 귀에다 대고 하시는 말씀이"김장로! 그런 소리하지 말어! 자네교회 담임목사는 지금 자장면 배달 갔어!"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원망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환경에서도 아니고 세상사에서도 아닙니다. 또 그 누구로부터도 아닙니다. 오직 나의 불 신앙적인 교만으로부터 원망은 시작됩니다. 실패한 과거에 매이지 말고 벗어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성공한 과거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져서 지금의 내 신앙을 살펴보아 깨끗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모든 원망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와 그 능력이 바로 우리 눈앞에 보여 질것입니다.
하늘 양식을 비같이
출 16: 1-12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관심사는 '먹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흔한 인사말이 '진지 드셨습니까? 밥 먹었는가?'였습니다. 기층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옛 속담에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수염이 석자라
도 먹어야 양반이다' 혹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또 '산 입에 거미줄 치겠나?'하는 등등 먹는 것과 관련된 속담이 많습니다. 이 말은 그만큼 먹고살기가 참 어려웠었다는 것을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흥부전을 읽어보면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 보름달만한 박을 얻어 그 박을 타는데, 그 박에서 금은보화와 함께 쏟아진 보물 가운데 뒤주가 있습니다. 뒤주가 뭡니까? 옛날에 쌀을 담아 두던 쌀통이지요. 그런데 그 박속에서 나온 뒤주는 그냥 뒤주가 아니라 아무리 퍼내고 또 퍼내도 하루만 지나면 다시 고스란히 채워져 있는 신비한 뒤주였습니다.
착하게 살아서 복받은 흥부에게 주어진 상이,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쌀뒤주였다는 사실은 먹는 문제를 기적을 통해서라도 해결해 보려고 했던 우리 민족의 소박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제로 배고픔과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의 쌀뒤주같은 것은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스라엘백성의 광야 40년 생활을 읽어 나가다보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라는 기적의 음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백성의 숫자가 적어도 200만명입니다. 그 200만명이 40년동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무슨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민족의 곡식을 약탈해서 먹은 것도 아니고 그저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과 식량입니다. 물은 그래도 땅속에 있는 지하수나 우물물을 먹는다 하더라도 식량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40년입니다. 40년을 200만이 먹을 양식을 준비한다고 해 보십시다.
이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출애급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모세가 즉시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만약에 '하나님 잠깐만요' 하면서 그 비용을 계산해 보았다고 합시다. 아론하고 앉아서 주판을 튀겨 봅니다.
"총 인구가 200만, 이 사람들을 먹이려면 한
끼당 얼마가 필요하고, 이걸 하루에 두 번, 40년을 먹여야하니까 곱하기 2에, 365 곱하기 40.....뭐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면 아마도 주판을 탁 던져 버리면서 '아이고 바로가 그냥 가라고 해도 돈이 없어서 못가겠다'하면서 '하나님 이건 불가능입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안되겠습니다' 하고는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계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머리를 짜 내어도 이건 도무지 불가능입니다. 방법이 없는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인간의 불가능앞에 하나님은 길을 여셨습니다.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기적의 음식, 만나였습니다.
2절과 3절을 읽어봅시다.--인간의 원망, 불평, 그리고 절망...이 이스라엘의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방법이 없다, 해결책이 없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만나가 가르쳐주는 첫번째 메세지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길은 하늘에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은 절망했습니다. 더이상 길이 없고 방법이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앞뒤양옆 사방어디를 둘러보아도 방법은 없고 길은 막혀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방 막힌 것 위, 하늘로부터 길을 내십니다.
하늘에서부터 사람이 감히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방법으로 길을 내시고, 해결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전혀 길이 없는 절망의 끝에서 늘 새로운 소망의 길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십니다. 광야에서 음식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1.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기후적으로
2. 된다고 해도 이스라엘은 농사 지을 땅 한 평없다.
3. 늘 이동해야 한다.
4. 사막엔 강대한 민족들이 살고 있다.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판.
...가만히 헤아려보면 안되는 이유가 열가지는 더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 모든 염려를 일거에 물리쳐 버리는 놀라운 답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겠다'
--하나님안에는 인간의 모든 근심과 염려를 물리치는 놀라운 해결책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동서사방 모든 길이 다 막혀 있어도 위로 하늘의 문은 늘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결코 낙망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근심이나 염려도 위로 난 하늘의 문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땅에는 결코 양식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을 늘 잊지마십시오. 이 말을 바꾸면요, 하늘 백성의 양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 겁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겁니다. 썩어질 이 땅만 자꾸 내려다보며 한숨짓지 마세요. 길이 안 보인다고 답답해하지도 마세요. 양식은 오직 하늘에서 비같이 내릴 것이라는 것을 믿고 어떤 경우에도 담대한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이 만나를 먹는 데에는 두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4절--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라..미리 내일치까지 준비치 못하게 하심. 21절 5절--육일에는 갑절을 거두라..23절..안식일엔 일을 쉰다. 이런 규칙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하반절--율법을 준행하나 안하나 시험하리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제대로 믿고 순종하는지를 훈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틀치 사흘치를 미리 준비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믿음을 훈련하시기 위함입니다.
---이틀치를 미리 준비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떤 것인가? '혹시 내일은 안 내리지 않을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오늘 먹으면서도 내일을 염려합니다.
'오늘은 먹었지만 혹시 내일은???'... 염려하고 근심하며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감사히 먹고 내일을 기대하며 편안히 단잠을 잡니다. 시127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
고 했습니다.
이걸 엉뚱하게 적용하는 사람도 있는데(예: 설교시간의 단잠...)
사실은 이것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믿음의 복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단잠을 잘 수 있습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이 잘 수 있습니다.
--군선교지 방문 갔을 때 한 목사님이 차를 모는데 전부 다 잤다. 얼마후 피곤해서 다른 분이 차를 운전했는데, 차가 출발하는 순간부터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못잤다. 얼마나 위험하고 긴장을 했는지...사람을 졸게 하는 운전자가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운전자가 있다.....
믿으니까 잘 수 있는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누가 운전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운전대를 잡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님을 믿고 단잠을 잘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이 운전하시는데 불안해하고 긴장하고 소리를 자꾸 지른다면 주님의 자존심을 얼마나 건드리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만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자들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믿음없는 사람들이 있다. 20절// 27절//
믿음 없는 사람은 먹지 못했습니다. 믿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보고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양식이 비같이 내리면 무엇합니까? 믿음이 없으니 먹을 수 없지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자신을 드릴 때 그 양식을 온전히 먹을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라. 말씀대로 살때 은혜가 넘쳐 날 줄로 믿고 그 말씀에 삶을 걸라...
3. 감사와 자족을 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35절--40년을 먹었다. 왜 하나님은 다양하게 먹이시지 않고 한가지 만나만 먹이셨을까? 40년을 먹으면 질리거나 싫증이 나지 않았겠나? 실제로 이스라엘백성들은 처음엔 감
사하고 놀라워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시하게 되었고 더 시간이 지나자 다른 것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 기적의 양식을 멸시하고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민 11:4-6 탐욕을 품으매... '이 만나외에는...'
인간의 죄성은 뿌리깊은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 자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새롭고 놀라워 하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욕심이 발동해서 원망하게 되고 불평을 늘어 놓게 됩니다. 그래서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결국 그것도 오래가지 못합니다.(오디오에 빠진 사람. 기기를 바꾸고 감탄에 찬사를 연발. 그러나 6개월만 지나면 또 교체, 더 비싼 것으로...귀가 얼마나 간사한지....끝이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주시는 은혜에 대해 감사하다가도 조금 지나면 당연히 여기고 조금더 지나면 불평하기 시작한다.--기도해서 얻은 직장..감사하다가 조금 지나면 당연. 나중엔 불평...//교회
는??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은혜를 주신다. 욕망을 채워 달라고 소리치지는 않았나?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보라. 혹 이미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욕망을 채워달라는 것은 아닌가?...
처음 감격을 기억하라...처음 감사를 기억하라....교회,,직장,,,직분,,,하나님이 주신 사람들...
그래서 헛된 욕망 버리고, 감사하고 자족하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께 찬양드리라...
하나님은 우리 삶에 필요한 은혜의 양식을 하늘로 부터 공급해 주신다. 그러므로 땅만 쳐다보며 살지 말고 위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비록 현실이 물 한방울 보이지 않는 불가능한 것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은
하늘에서 길을 내신다. 문제는 이 은혜의 양식은 믿음과 감사로 받아야 한다는 데 있다. 하늘양식은 믿음으로 얻는 줄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삶을 헌신 하십시오.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그 속에 길이 있습니다.
답이 있습니다. 또한 감사하며 사십시오.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하라. 당연시 하던 것들에 새로운 눈을 떠라. 처음 받았을 때의 그 감격을 가지라....하늘 양식을 비같이...
비같이 내리시는 하늘의 양식을 풍성히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만나의 축복
출 16: 1-12
지난주에 우리들은 단물에 관한 축복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광야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저주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에게 광야는 축복이요, 기쁨과 흥분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 도착해서 만난 첫번째 경험이 갈증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축복과 고통이 항상 공존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때는 축복도 주시고 고통도 주심으로 말미암아 축복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고통을 통하여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합니다. 그들이 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삼일째 고생하던 날 한 물을 발견하고 가보았더니 먹지 못할 쓴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가끔 이런 일을 겪게 됩니다. 기적인줄 알았는데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때 우리는 또 한번 절망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 제일 쉽게 반응하는 것이 원망과 불평입니다. 고통이 오고 절망이 올때 그 뒤에 있는 세계를 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현실만 보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쓴물을 기적같이 단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한 나무를 보게 하시고 그 나무를 꺾어서 쓴물에 던지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단물이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광야에서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쓴물이 단물이 되었던 장소를 가리켜 엘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엘림에 머물러 있을수 없었기 때문에 살만한 곳을 찾아 산악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엘림과 시내산 중간쯤에 신광야가 있었는데 이곳에 도착할쯤 되어서 또 한번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것이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일이라
양식은 떨어지고…
이월 십오일이라면 애굽에서 나온지 한달 가량 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떠날때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준비한다 하여도 한달이 지나면 다 없어집니다.
사막을 계속 걷고 있는데 음식은 떨어지고 갈 길이 보이지 않게 되자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음식이 떨어지게 되면 불안해집니다. 쌀독에 쌀이 없고, 잘 다니던 직장을 잃어버리고, 사업이 망하고 지금 먹고 있는 밥이 마지막이라고 생각이 될때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불안해지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것이 떨어지고 몇끼 남지 않게 되자 불안해지고 생존의 위협까지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에서 40년동안 미리 연습을 한 사람입니다. 여기가 어디쯤 되고 얼마만큼 가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처음이기 때문에 전혀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더욱 불안합니다.
도대체 얼마를 더 가야 하는가? 혹시 우리는 여기서 굶어 죽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하나님앞에는 대들지 못하고 모세에게 대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사람은 고생하면 과거를 생각하고,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픈 고통앞에서 약해집니다.
우리 민족도 6.25때 그런 고통을 겪었읍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쫓겨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조금만 더가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원망을 합니다. 사실 인간은 속물입니다. 겉보기에는 멋있고 이상을 꿈꾸는 것 같지만 실제는 언제나 현실의 벽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배고픈 자유와 이상을 추구하기 보다는 배부른 돼지를 더 원합니다. 우리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문제는 위대한 주제가 아닙니다. 시시한 것을 가지고 너무나 심각하게 자기를 자학하고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작은일 앞에 우리는 인생을 걸고 고민합니다.
이상을 잃지 말아야
여러분, 왜 광야가 그렇게 힘들고 고달픈지 아십니까? 고통스러워서도 돈이 없어서도 건강이 없어서도 환경이 나쁘기 때문도 아닙니다. 광야에 제일 힘든 상황은 꿈과 이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비전이 없고 이상이 없고 꿈을 잃어버렸을때 비참해 집니다. 우리는 어렸을때는 꿈을 많이 꿉니다. 그런데 현실에 부딪혀서 결혼하고 직장가지고 애기낳고 살다보면 점점 이상이 작아집니다. 그러다 보면 살아가는 존재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따르는지 아십니까? 뻔한 사람은 절대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말하는 것도 가는 곳도 생각하는 것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고통스럽고 어려울지라도 꿈과 이상을 가지고 미래를 보는 사람을 사람들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배고픈 현실앞에 하나님이 주셨던 기막힌 축복과 약속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잊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환상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이 아무리 살기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삶의 비전을 가지고 나갈때 어떤 고통과 역경도 이겨낼수 있을 줄 믿습니다.
꿈이 있고 비전이 있는 교회는성장합니다.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하는 이스라엘백성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은 현재의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나를 보고 다루십니다.만일 하나님이 현재의 나를 보고 다루신다면 여기 존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형편없는 존재들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다루시지 않습니다. 지금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형편없는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변하고 새로워질 그들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인간은 현재 밖에 볼수 없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보십니다.
여러분, 미래를 보시고 소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조금 배가 고프고 학교에 떨어지고 결혼에 실패하는 일들이 많이 있을수 있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결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래를 축복하기 원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양식에 관심이 있다.
4절의 말씀에서 배울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너희를 위하여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린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양식에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 세상살이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병든자가 낫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축복하듯이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필요인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공급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공급해 주었는데 왜 안받은 것처럼 고민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음식을 다 차려놓고 정말 따뜻하고 맛있는 만나를 준비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먹는 문제로 괴로와 합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북한입니다. 북한의 정치는 쌀정치였는데 쌀로 그 사람들을 다 통제했다가 지금은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쌀은 사람이 주는 것이 그 사람들을 다 통제했다가 지금은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쌀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양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착각은 내가 노력해서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두번째 메시지는 하나님의 관심은 양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양식에 대한 관점은 내가 노력해서 먹는다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 나가 돈을 벌어서 쌀 사다가 밥을 먹고 직업이 좋은 사람은 좋은 쌀먹고 직업이 나쁜 사람은 나쁜쌀 먹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나라는 부자나 가난한 자가 먹는 것이 비슷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나라는 부자는 너무나 잘 먹고 가난한 사람은 못먹는 나라입니다. 음식과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음식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식의 본질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선을 행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음식은 내가 노력해서 먹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처럼 양식도 하늘에서 비같이 주셨습니다.
입이 있는 것은 먹을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식구라는 말을 쓰는데 두식구라는 이야기는 먹는 사람이 두사람, 다섯식구는 먹는 사람이 다섯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잘먹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미래에 대한 불안때문에 매일 음식을 쌓아놓고 열쇠를 잠궈놓아도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는 사람은 마음에 안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노동하고 땀을 흘려서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음식을 먹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지 밥먹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직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그것이 내가 밥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한다면 인간은 너무나 비참해집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오만해지고 못 벌면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4절에서 또 하나 배울 말씀은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로마서 8장 37절에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크리스천의 양식은 이렇게 하나님이 만나를 비같이 온천지에 주신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믿지못하고 좥그래도 내가 가서 고생해야지좦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좥가서 고생해라좦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양을 보면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비슷한데 그것은 약간의 부족함을 느끼고 산다는 것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큰 월급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올려달라고 하고 큰 건강달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건강하길 바라며 집도 어마어마하게 큰 집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방 한칸 정도 더 달라는 것입니다. 직위도 갑자기 사장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 직위정도 진급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런것이 다 모이면 원망과 불평과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 만사가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제 차를 운전해주는 형제가 얼마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 형제는 요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삶의 조건은 그 형제보다 내가 더 낫습니다. 그 형제는 조그만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서 삽니다. 행복이란 양이 아니고 질입니다. 좋은 조건이 있다고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속에 있어도 하나님 믿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발견된 축복이란 무엇을 많이 가졌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굽에 임했던 재앙이 하나도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고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양식은 두가지가 있는데 세상 양식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있습니다. 세상사람은 세상 음식먹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식은 내가 노력해서 먹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양식은 일일분
그러면 그 양식은 어떤 양식이겠습니까? 세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시는 양식은 일일분입니다. 하나님은 따뜻한 음식을 주기 원하십니다. 상한 것도 아니고 식은 것도 아닌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일분도 한달치도 일년치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재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양식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월용할 양식을, 연용할 양식을 먹습니다. 주일날 한번 정도 예배를 드리고 가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끼 먹는 것입니다.
양식은 매일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틀분 수확을 하면 그 음식을 썩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음식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찌꺼기로 북한 사람 몇번 먹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음식은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거두게 되면 썩습니다.
또 한가지는 안식에는 이틀분을 구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음식에 안식일의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안식과 예배는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새벽은 축복의 보고
또 한가지는 만나는 해뜨기전 아침에 거두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21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13절에서 15절을 보면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만나는 새벽이슬이 내린 후에 만들어진 꿀과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비같이 40년동안 주셨습니다. 만나는 해뜨면 없어집니다.
여러분, 새벽의 이슬이 만나였다면 만나를 얻어 먹으려면 새벽기도에 나와야 합니다. 새벽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못나오는 이유는 늦게 잔다는 것인데 늦게 자면 정신병과 우울증에 걸립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중에는 정신병이나 우울증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새벽에 매일 나와서 새벽을 사는 사람치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새벽부터 술먹고 도박하고 원망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새벽은 축복의 보고입니다. 체질이 안되는 사람도 1년 고생하면 됩니다.
이제 만나에 대한 세번째 신약의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31~33절에 보면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구약에는 모세를 통하여 만나를 주었는데 만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단물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식탁에 떡과 포도주를 베풀어 놓으시고 지치고 배고프고 상처받은 여러분들을 초대해서 먹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통 떡을 먹으면 다 배고프겠지만 예수님이 주는 생명의 떡을 먹는자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 그럴수 있느냐라고 따지지 않으시고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먹이고 난 후에도 따지지 않으시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예수님이 광야의 식탁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셔라. 이것은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떡이다. 이 피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다. 이것을 먹고 세상에서 승리해라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