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아내'와 '내비게이션'의 말은 잘 들으라고 했다.
듣는 게 현명했다.
내가 봐도 그랬다.
36년 전,
나의 연애시절에 여친을 데리고 '지리산'에 갔었다.
'용산역'에서 완행 열차를 타고 '남원역'에서 내렸다.
남원에서 '인월', 다시 인월에서 '백무동' 가는 버스를 갈아 타고 갔다.
지금도 남원에서 백무동까지 가는 직통 버스가 없지만 과거엔 훨씬 더 열악했다.
백무동에서 장터목, 천황봉, 다시 장터목, 세석, 대성동 계곡, 의신마을, 쌍계사까지 하이킹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무거운 텐트에 코펠, 버너, 쌀과 각종 부식을 짊어지고 다녔다.
엄청난 무게였지만 그래도 젊을 때라 삼천리를 용감하게 누비고 다녔다.
그때가 1988년 8월이었다.
'장터목'에서 '세석'을 거쳐 '대성동 계곡'과 '의신마을'까지만 가도 정말로 힘든 코스였다.
지리산을 아는 사람이라면 금세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을까지 와보니 버스가 없었다.
낭패였다.
기가 막혔다.
버스가 끊어진 게 아니라 아예 다니질 않았다.
지리산 중 가장 깊은 오지였다.
할 수 없었다.
'의신마을'에서 '쌍계사'까지 꼬박 10킬로를 더 걸었다.
나도 나였지만, 내 여친은 거의 죽음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도 지리산에 가면 그때 그 추억들을 되뇌이곤 한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금번 우리 삼총사의 지리산 종단에 아내는 걱정을 많이 했다.
나에게 그 우려를 몇 번 얘기했다.
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폭염 때문이었다.
'쌍계사' 앞에서 숙박한 다음에 하이킹을 시작해도 쌍계사, 삼신봉, 세석, 백무동까지의 코스를 하루만에 주파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물며 서울에서 아침에 KTX로 출발, 택시타고 쌍계사에 도착해 그 코스를 탄다는 것은 마치 지옥훈련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도전일 터였다.
아내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극구 말렸던 거였다.
연일 33도를 넘는 불가마 더위에 환갑인 세 사람이 그 코스를 가겠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아내의 조언을 적극 수용하기로 했다.
나는 그 코스를 알고 있었지만, 두 친구는 초행길이라 아직 감이 없었다.
구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데, 우리보다 한참 선배처럼 보이는 기사님도 그랬다.
이런 날씨에 쌍계사부터 삼신봉을 찍고 세석과 백무동까지 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죽음'이라고 했다.
봄, 가을이라면 몰라도 여름 날씨엔 큰 변고가 생길 수 있으니 절대로 객기를 부리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택시로 '쌍계사'를 통과해 '의신마을'까지 갔다.
쌍계사에서 의신까지는 약 10킬로 였다.
의신에서 세석을 거쳐 백무동에 도착해 보고서야 알았다.
아내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았으면 거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예정대로 갔더라면 예상컨대, 숙소 도착 시간이 대략 밤 9시는 넘었을 터였다.
야간 산행에 부상의 위험도 크고.
나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랬다.
자고로 '아내'와 '내비' 말은 잘 들으라고 했다.
실수를 예방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지리산 종단 종주를 잘 하고 왔다.
남원에서 관광으로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1박2일을 깔끔하고 행복하게 잘 마무리 했다.
성실과 열정으로 33년 4개월 동안 소방관을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근무했던 친구에게 다시 한번 격려와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멋진 추억을 함께 엮어 준 친구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