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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똥그라미는 무슨 용도의 건물일까요? (정답은 아래로 쭉🔻)
<조선 500년 동안 엄격히 금지된 세가지>
🌹소나무벌채
🌹살인
🌹양조(술 제조)
한 무리가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가기에 잡으려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도주하여 (이곳)에 숨었습니다.
감히 들어갈 수 없어 잡을 길이 없다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영조실록 ㆍ영조6년 10 월 11일)
어떤 중죄에도 처벌을 면할 수 있었던
특별한 공간.....*반촌(泮村)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세운
조선 최고의 국립대학~~
성균관(成均館).....
동시에 명나라의 제후국인 조선의 학교로
✅ 반궁(泮宮)이라고도 불렸다.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도)
⬆️효명세자(1809~1830)의 성균관 입학례(入學禮)를 그린
<왕세자입학도첩>
반궁 泮宮 (성균관) 학생들의 공부를 돕기위해 제공된 전속 노비.............
이들을 반인(泮人) 이라고 한다.
반촌의 기원은 고려말 안향이 성균관에 기부한 노비들이라고 하며, 그들의 후예들이 조선 성립 이후에도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반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반촌 사람들은 자신을 안향의 노비들의 후예라고 믿었으며,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옛 주인의 후손이 오셨다'고하면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반인(泮人)은 성균관 주변에 살며 특별한 마을인 반촌(泮村)을 형성한다.
🦋반촌은 기숙사의 정원이 넘치면
유생들의 하숙촌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반촌은 과거철이면 수험생들이 머무는
숙박촌으로도 이용된다.
🦋반촌은 성균관 내에서 금지된 천주교
경전등 새로운 학문을 나눌 수 있는 토론장이 되기도 하고
🦋반촌은 바둑ㆍ장기등 금지된 놀이를 즐기며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 있던 특별한 공간이다.
성균관근처 저잣거리의 음식점에서는 다른곳보다 싸게 콩죽도 팔고 국밥과 인절미도 팔았다.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킨 반촌은
조선 최초의 대학가였다.
지금의 대학로와도 일부 겹치는 반촌.
뿐만 아니라
반촌은 한성부 내 특별한 구역으로 이곳의 반인들은 노동 동원에서 면제됐고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신 신성한 곳으로
포교가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던 성균관.
성균관과 가까운 반촌 역시
죄인이 들어가도 왕의 특명없이 체포할 수 없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다.
"포교가 반촌에서 도둑을 잡았는데
성묘(聖廟)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게 했으니 해당 포도대장을 파직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영조실록 41년. 5월 13일)
도둑잡은 포도대장을 파직하라고요 ㅋㅋ
"성균관 노비 윤복이 왕대비전 시녀로 들어왔습니다. 속히 성균관으로 돌려보내게 하소서"
(명종실록 21년 2월6일)
궁으로 들어갔는데도 돌려보내라꼬?
파워 막강!!!
반인(泮人)은 성균관의 전속 노비로서
자유로운 이주및 소속 변경이 불가능했고
더욱이 성묘(聖廟) 관리및 유생들에 관한
모든 업무를 감당해야 했던 이들은
어린 자식부터 집안 대대로 일함은 물론
때로는 과중한 세금까지 바쳐야 하는
노비중 가장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괴롭고 무거운 역(役)으로 성균관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사람이 7명이 넘으니 정말 가련하다'
(승정원일기ㆍ영조3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 (맨위 똥그란 그림의 정답)--> 정육점
포주--->푸주--->푸주간
반인들만이 소를 도살할 수 있고
성균관에 소고기를 공급하였다.
조선 후기 신분제 폐지와함께
반인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고
국가의 인재 양성이라는 명분아래
양반만의 교육을 위해 살았던 그들은,
1910년 반촌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 혜화초등학교)로 이어져오고 있다.
오늘도 감사ㆍ感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