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奉呈杜僕射(봉정두복야)
北去同甘苦(북거동감고)
東來共死生(동래공사생)
城南他夜月(성남타야월)
今日一盃情(금일일배정)
두복야에게 드리는 시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같이했고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했네
성 남쪽 타향의 달 아래에서
오늘은 한잔 술로 정을 나누세
(두사충을 ‘두복야’라고 한 것은 관직명이 ‘비장복야문하주부(裨將僕射門下主簿)’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射’는 ‘이름 야’로 읽는다.)
두사충 역시 이순신 장군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충남 아산시 음봉리에 장군의 묏자리를 직접 잡아준 것이 그 일례다.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의 우정은 훗날 대를 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수군통제사 이인수(1737~1813)가 두사충의 신도비 비문을 썼고, 그 비문이 새겨진 신도비는 현재 모명재 뜰에 서있다.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 외에도 조선의 쟁쟁한 정치인들과 폭넓게 사귀었다. 《두릉두씨세보》 〈동국동유록(東國同遊錄)〉에 두사충과 깊이 교류한 이들의 명단이 공개돼 있다.
정철(鄭澈) 정탁(鄭琢), 류운룡(柳雲龍), 류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 윤두수(尹斗壽), 이덕형(李德馨), 심희수(沈喜壽), 김상헌(金尙憲) 등등이다.
두사충은 왜 조선에 귀화했나
이에 관한 기록은 1999년에 간행된 《두릉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의 ‘자서(自序)’, 즉 두사충이 직접 지은 서문에 자세하고 명료하게 기술돼 있다.
“ ··· 두 번째로 東國에 와서 창을 베개 하여 들판에 잠자는 간난고초를 겪으면서도 ··· 다행이 중흥의 과업을 완수하여 ··· 발병 난 다리를 끌고 압록강까지 와서 울면서 陳君(陳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황제께 復命해야 할 터이니 부득이 가야하겠으나, 나는 생각한 바 있으나 말할 수는 없으니 ··· 고시(古詩)에 말하기를 ‘하늘 끝에 있는 노인은 돌아가지 못하여 저문 날 동녘 땅 강가에서 우노라’ 하였으니 나를 두고 하는 말 아닌가 ··· 차라리 남아서 小中華(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머지않아 오랑캐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달구현(達句縣, 현 대구시 달성)의 최정산(最頂山, 지금의 앞산) 밑에 자리 잡아 야인들 속에 섞여 살며 ··· ”
한마디로 두사충은 “小中華(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머지않아 오랑캐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귀화한 것이다.
당시 여러 가지 객관적인 상황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 대가로서 곧 명나라의 국운이 다하고 청나라 세상이 될 것을 충분히 내다볼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변방 오랑캐로 취급하던 여진족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을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출병할 때 이미 귀화를 결심하고 왔다. 《두릉두씨세보》에 '우리 선조 복야공께서는 임진년과 정유년에 왜적을 정벌하러 조선에 오실 때 많은 책을 가지고 오셨다, 다시 돌아가지 않으실 뜻이 결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온 것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 외에 그가 명나라로 돌아가지 못할 사유나 조선에 남아야 할 이유가 따로 있지 않았다.
두사충이 명나라를 사모한 행적
《두릉두씨세보》 自序에,
두사충은 조국인 명나라를 그리워하여 아호(雅號)를 ‘모명(慕明)’으로 짓고, 그가 사는 대구 최정산(앞산) 일대를 대명동(大明洞)이라 이름 붙였다고 했다.
또한 최정산 기슭에 대명단(大明壇)이란 단(壇)을 쌓아놓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관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가 사망한 후, 1912년 그의 후손들이 두사충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묘소 부근에 재실을 지었다.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모명재’란 이름을 붙였고, 모명재 안팎에 그런 사모의 정을 두루 새겨 놓았다. 지금도 이 재실에서 한식(寒食) 전후로 향사(享祀)를 지낸다.
두사충과 모명재 관련 홍보자료의 문제점
《두릉두씨세보》를 중심으로 사실 관계를 확인한 결과, 공식 홍보자료가 과장되거나 정확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바로잡고자한다.
‣ 모명재 뜰에 있는 2점의 문인상(文人像)은 “명나라에서 가져온 청석으로 다듬은 것이다.”는 표현
이와 관련해 두씨 문중의 두진국 총무는 “《두릉두씨세보》에 그런 기록은 없다”며 “우리로서는 모르는 일이고, 아마 스토리텔링 과정에서 입혀진 이야기일 것”이라고 했다.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1912년 모명재를 지을 때 명나라가 존재했을 리 만무하고, 이때를 대비해 명나라 시대에 미리 갖다놨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에 중국까지 가서 가져왔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 “모명재 대문에 달려 있는 현판 ‘만동문(萬東門)’은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 必之東)’이란 말에서 따온 것인데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말로, 그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는 표현
‘만동문(萬東門)’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말로 봐야 한다. 이는 《순자(荀子)》 〈유좌(宥坐)〉편에 실린 공자의 말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로, ’물은 만 번을 굽이쳐 흘러도 끝내는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황하(黃河)가 남과 북으로 수없이 꺾여도 중국의 지형이 서고동저(西高東低)인 까닭에 끝내는 동쪽으로 흘러간다. 결국 원래 뜻대로 된다거나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를 때 사용된다.
‘만절필동’과 ‘만동문’은 자형(字形)과 뜻에서 완벽하게 포개진다. 더 중요한 것은 두사충의 심경을 가장 잘 대변하는 표현이란 점이다. 그가 조선에 귀화한 것은 일종의 ‘折(꺾임)’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고국을 등지는 행위가 아니라는 뜻을, 그리고 멀리 이국땅에서도 결코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이 ‘만절필동’을 빌려 동시에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두사충의 복합적인 심경을 단순히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간다(百川流水 必之東)’는 말로는 다 담기 어렵다. 따라서 ‘만동문’이 ‘백천유수 필지동’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백천유수 필지동’은 ‘만동문’의 곁가지 풀이로 봄이 마땅하다.
두씨 문중 두정택(杜禎澤) 총무도 이에 동의하면서 “‘백천유수 필지동’ 유래설은 우리가 제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그렇게 소개되는 데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는 ‘만전필동’으로 유래를 삼겠다”고 했다.
두사충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두사충은 눈감을 때까지 명나라를 사모했고, 동시에 조선을 사랑하여 조선인으로 살다 간 사람이다. 그렇게 두 나라를 운명적으로 사랑한 사람이 지금 중국인과 한국인, 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운명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치부하기엔 그가 보여준 정신과 행동이 돋보이게 아름답다.
그는 이국땅에서도 애국충정(愛國衷情)의 참모습을 보여 줬고, 몸과 정신을 더럽히지 않는 절개를 보여줬다. 그리고 모국에 대한 신의를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지켰다. 그는 조선을 위해서도 두 번씩이나 몸을 던져 전선에 섰고, 두보의 혈통을 이 땅에 전하고 조선인 아내를 맞이하며 조선과 하나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몸소 뽕밭을 일구며 자립의 모범을 보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그런 시각은 한국인과 중국인 모두에게 요구된다. 그를 기리는 모명재도 단순히 눈요깃거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두사충이 보여준 행적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얘깃거리가 되어서도 안 된다. 400년을 이어온 인연이 어찌 그리 가벼우랴. 옷깃을 여미고 숙연히 그의 정신을 추모하고 되새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취재하는 동안 여러 번 모명재를 찾았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마음에 담았다. 이제 다시 한 번 따뜻이 손을 맞잡고 시 한 수로 위로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모명을 생각하며
뜻은 정했어도 생각은 움직이고
몸은 예 있어도 마음은 내달린다
고향 땅 못 잊어서 모명(慕明)이라 호(號)를 짓고
새 터에 정 붙이려 대명동(大明洞)에 산다 했네
두릉(杜陵)을 본관(本貫) 삼아 뿌리를 잇대 놓고
대구(大邱)에 핏줄 떨궈 후손을 벌게 했네
아, 400년을 그렇게 두 나라를 오고 갔을
조선의, 대명국(大明國) 모명 선생을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