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15일 점심 무렵. 공수특전단과 수도경비사령부의 무장군인, 헌병대가 연 고대 서울대 등 캠퍼스에 진입했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집총한 군인들이 학교 별로 2백∼5백 명씩 물밀 듯 쏟아져 들어갔다. 군인들은 말 그대로 인정사정이 없었다. 강의실을 덮쳐 학생들을 연행하고 달아나는 학생 뒤를 쫓아가 워커 발로 까고 정강이를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1971년 위수령 발동에 아수라장이 된 대학가
위수령이 발동된 것이다. 양탁식 서울시장이 “데모로 흐트러진 학원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군을 투입해 달라”고 요청했고 육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물론 그렇다는 건 행정적 요식일 뿐, 실제 대학에 군 병력을 집어넣은 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날 오전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 “교련반대를 빙자한 불법데모로 질서가 파괴된 대학에는 학원의 자유 자주 자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박대통령은 이 명령에서 “경찰은 학원 안에 들어가서라도 데모 주동학생을 색출하고 안 되면 군을 투입해서라도” 질서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학생들의 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거부 및 수강방해 등 난동은 일체 용납할 수 없다”며 “주동학생을 전원 잡아들여 학적에서 제적하라”고 강조했다. 마치 한 무리의 적을 일망타진, 섬멸하라는 투의 지시였으니 캠퍼스에 난입한 군인들이 물불 안 가리고 학생들을 잡아들인 건 너무나 당연했다.
무장 군·경들이 각대학에 투입되던 날의 캠퍼스
고려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들은 강의실까지 들어가 문을 부수고 학생들을 연행했다. 문이 열리지 않는 방은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던져 ‘너구리 잡듯’ 학생들을 체포했다. 여학생 십여 명이 최루가스에 질식해 쓰러졌다. 놀라 도망가는 학생들을 총과 곤봉을 든 군인이 쫓느라 캠퍼스 안에는 비명과 고함이 어지러웠다. 학교주변 주민들은 높은 건물 옥상에서 ‘야수적 폭력현장’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훔쳤다.
연세대에서는 교련거부 단식농성을 벌이던 학생회 간부들이 연행되며 집단폭행 당했다. 이를 항의하던 교수들도 군인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학생처장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6.3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이젠 통곡을 해도 해결할 수 없으니 집에 가서 학교의 연락을 기다려라”며 울먹였다.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서울문리대 법대와 성균관대 외대 등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교련 반대 항의 데모로 뜨겁던 대학가
비상에 묶인 대학가
그해 대학가 데모 초점은 군사훈련(교련) 반대였다.
신학기 직전인 2월25일 당국은 교련강화 지침을 발표했다. 69년 시행 때부터 선택과목이던 교련을 교양필수로 격상했고 현역군인을 교관으로 대학에 진입시켰다.
남학생은 주 3시간 학과와 방학 집체훈련 포함 총711시간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했다. 교련은 전체수업의 20%로 졸업 때까지 7학점을 채워야 했다.
전시에도 대학 군사훈련 비중이 이렇게 높은 적은 없었다. 교수들조차 항의데모를 부추겼다. 한 대학총장은 “데모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나 1학기 데모가 투석전으로 변하는 등 극성을 부려도 당국은 일부 대학에 잠시 휴업령을 내렸을 뿐 센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그해 4월엔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학생들은 교련반대 데모를 벌이다 전력을 공명선거 감시 쪽으로 돌렸다. 박정희 김대중 후보가 격돌한 선거가 끝난 뒤 다시 거리로 나왔으나 정부는 역시 강경대응을 자제했다. 대신 교련을 주 2시간으로 하며 병역단축 혜택을 주는 완화 방침을 내놓았다.
이게 2학기에 학원을 초토화하려는 전략이었을까.
걷잡을 수없이 시끄럽게 만들어놓고 싹쓸이하려는 계산이 숨어있었던 것일까. 사실 정부가 내놓은 완화안도 교련을 필수과목으로 하며 현역군인 교관이 대학에 상주한다는 첫 방침에서 후퇴한 게 아니었다. ‘상아탑’에 ‘총검술’을 접목시킨 자체에 반대한 학생들이 받아들일 리 없는 안이었다. 교련을 선택과목으로 재조정하고 예비역이 교련을 전담토록 하자는 의견은 차라리 타협적이었다.
2학기 들어 두 달 동안 가두데모는 1백여 차례 넘게 일어났다.
국무총리가 “(교련을) 압박감 부담감 없이 체육을 한다는 마음으로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현역군인이 시간강사 급으로 30∼40명씩 진주해있던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그들을 캠퍼스 밖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교련 허수아비, 군복 화형식도 일어났다.
당시 대학생들이 징집 연기원을 낼 때는 교관으로부터 ‘교련 수강확인서’를 받도록 돼있었으니만큼 이는 제목에 칼을 대는 경우나 마찬가지였다.
위수·휴업령 내려져 굳게 닫힌 캠퍼스
계속되는 데모시위를 막기 위해 강행한 강제 징집
바로 이런 교관 밀어내기와 화형식이 박대통령의 분노를 촉발했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다시 총칼로 학원을 짓누르는 강수를 선택하게 빌미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항의가 심하다 한들 대통령이 더 이상 대학에 “자유 자주 자치가 없다”는 말을 공언할 수 있었을까. 위수령 발동 첫날 군경은 대학에서 1616명을 연행했다. 위수령 발동 전부터 학원사찰을 통해 데모 주동자는 112명, 학내 ‘불량’서클 174개, 지하신문 20여개 등을 파악해 놓았던 즉각 이들의 검거와 해체, 와해 작업에 들어갔다.
훈련소에서 온 편지…입영 학생들
놀라운 것은 데모 주동자급 학생들은 검거 즉시 입영영장을 발부해 군대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당국자들이 스스럼없이 밝히고 나선 것이었다. 위수령이 내려진 9일 동안 전국 대학에서 174명이 제적됐고 68명이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논산훈련소 등으로 보내졌다. 가족 친지들과의 송별? 그런 건 없었다. 검거 즉시 군대로 직행했으니 매 맞지 않고 간다면 그것만이라도 감사해야할 판이었다.
그해 12월 송년호에서 한 신문은 ‘1971 안부- 훈련소에서 온 편지’란 특집을 실었다. 강제 징집된 71명(위수령 해제 후 피검, 징집된 학생 포함) ‘전’ 대학생들의 심정을 전한 것이었다. 당국의 눈이 무서워선지 기사는 일부 ‘개과천선한’ 학생의 얘기도 실었지만 대부분 강제 입대자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가능한 한 조용히 젊음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나 꿈과 낭만과 정열을 잃은 젊음은 추호도 갖고 싶지 않다.” “인생 제 1라운드는 실패로 끝났으나 결코 굽힐 수 없는 젊은 용기가 그립다.”
당시 강제입대자, 데모 주동자들은 훗날 ‘71 동지회’를 만들어 지금도 모임을 갖는다. 그들이 징집될 당시 야당은 “위수령을 발동해 놓고 데모 주동자를 현역병으로 데려가는 것은 신성한 병역의무를 형벌 응징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라고 성토했으나 당국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문제는 위수령과 함께 징집된 학생들은 공개리에 처벌된 셈이지만 그 전에도 당국은 사찰과 협박을 통해 입대를 반대자 처벌의 도구로 악용했다는 점이다. 69년 교련 도입 때부터 반대활동을 벌인 A의 경우가 그런 사례다.
공무원인 아버지를 협박하며 군대 보내기도..
71년 봄 대학3년생이던 A는 군대에 간 학생회 간부 출신 선배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선배는 정보기관 요원으로 대학에 파견 나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공무원이던데… 목이 떨어지면 자네 대학에 다닐 수 있나?”고 천연덕스레 물었다. 교련반대 기고문을 발표한 대학신문 기사뭉치를 들이밀면서였다. 아버지의 직위, 상관의 평가까지 주절거린 그는 “공무원 하나 목 치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좋고 아들 좋게 군대에 가라. 아니면 온 가족이 쪽박 찰 것”이라고 회유했다.
A의 아버지도 직장에서 비슷한 협박을 당했다. 그러나 아들에게 말을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라”고 했지만 그건 군대에 가라는 것보다 더 가슴을 후비는 말이었다.
A는 결국 ‘어린 나이에’ ‘가족과 가정을 위해’ 군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며칠 전 육군의 징집 신체검사를 연기한 것이었다. 정보기관 선배에게 1년 후에나 신검을 받게 된다고 하자 “해 공군 지원병으로 가라. 아니면 아버지는 결국 잘릴 것”이라고 계속 협박했다.
위수령 발동 경위 등 밝혀
당시 해군 지원병의 합격요건 중 하나는 좌우시력 1.0이상이었다. 안경을 쓰고도 0.5수준 시력이던 A는 당연히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이튿날 대방동 해군본부에 붙은 지원병 합격자 명단에는 그의 수험번호가 끼워 넣기(∨) 표시 속에 들어가 있었다. 당국의 ‘배려’였다. 진해에서 2차 신검을 받을 때는 아예 해군본부 중사가 함께 가 시력표를 읽어주고 A는 따라 말하는 방식으로 시험에 통과했다. 그는 훈련기간은 물론 부대에 배치돼서도 시력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대학에서 엉뚱한 짓 하다’ 군대에 왔다고 걸핏하면 ‘빳다 세례’를 받은 데다 눈이 나빠 ‘고문관’ 노릇까지 하니 군대생활은 가히 ‘지옥 수준’이었다.
그가 5개월쯤 군대생활을 했을 때 위수령으로 제적된 학우들이 강제 입대했다.
당국은 그들이 군대에서 보복적 가혹행위를 당한다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며 강제 징집자들에게 가급적 폭력 폭언을 하지 않도록 특별 지시했다. A도 그 혜택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정년 때까지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A의 참 어처구니없는 입대도 40년이 지난 지금은 추억이란 수채화 속에 들어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