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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약 2:14-20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약 2:14-20 /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남 돕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신앙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15) 여러분의 친구 한사람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합시다. 16) 그런 사람에게 여러분이 `참 안됐구려.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는 말만 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따위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7)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한 행실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증명해 내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죽은 것입니다. 18)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믿음만 있으면 될 뿐 아무 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선한 행동도 동시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한 행동이 없이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동을 보여야만 사람들이 내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19)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런 당신도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믿겠지요? 맞습니다. 악마도 그걸 알고 있기에 공포에 떨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20)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을 작정입니까?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 아닙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교리적인 지식이나 도덕적인 말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야고보는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 산 믿음은 행함이라는 확실한 증표가 있습니다. 야고보가 듣기는 속히(1:19)하라 말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신속히 순종하여 형제를 유익하게 하라는 것을 의미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선한 행실은 없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에 동의 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참되고 살아있다면 선한 행위가 증거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이 좀 더 성숙해지려면 믿음에 행함을 더해 가야합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이던지 죽어가는 믿음일 것입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은 믿음으로는 형제를 유익하게 하거나 자기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경고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모순되는 듯이 보입니까?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그리스도)을 받음이고, 그 행실은 남들에게 사랑을 내어줌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을 증거하는 행함이 없다면, 거짓된 믿음이며 구원에서 멀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행실이 구원의 공로는 될 수 없지만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증거임은 확실합니다. 구원을 받게 하는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를 드러낼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있어야 함(15-20) 형제나 자매가 옷이 없어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주림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평안하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으로 행운을 빈다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들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시험당하는 형제에게 아무 응답도 못하는 자일 것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이 행함과 연결될 때 많은 이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단호하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믿음이 죽었다는 뜻은, 죽은 자와 같이 믿음이 아무런 선한 행위를 보이지 못함을 말합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행동을 갖습니다(갈 5:6). 그 믿음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의 사랑을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심은 우리로 선한 일을 하려 하심이며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라 했고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했습니다(딛 3:3-8). 다음 단락에서 소개되는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라합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바치거나,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그들의 행위가 믿음을 온전케 한 것입니다.
적 용 : 나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에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그것에 맞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말만으로 하는 것이 아닌 행동 말이죠. 주님을 믿는 믿음에도 우리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고 적고서, 행동으로 옮겨보길 바랍니다.
< 설 교 >
네 믿음을 보이라
■ 이 폭포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있는데 정말 장관입니다. 이 폭포와 연관된 에피소드가 참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통나무로 만든 둥근 통을 타고 폭포 아래로 떨어졌는데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직접 배를 타고 위에서 뛰어내렸는데 아직까지 못 찾았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폭포 근처 박물관에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외줄타기 곡예사 블론딘(Blondine)의 이야기입니다. 블론딘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양쪽에 외줄을 걸어놓고 막대기 하나를 들고 그 거센 물살과 폭포가 휘몰아치는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외줄을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외줄을 타고 캐나다 쪽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렁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는 박수를 치던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막대기를 들고 또 다시 미국 쪽으로 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예 믿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앞에 있는 소년을 등에 업고 건너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맨 앞줄에서 소리치던 꼬마에게 "얘야 내 등에 업혀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큰 소리쳤던 꼬마는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나중에 천진난만한 꼬마가 자원해서 그를 등에 업고 안전벨트를 잘 묶은 다음 미국 쪽으로 건너가서 성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큰소리는 치는데 정작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무익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5~16절 말씀에 보면 입술로만 믿는 믿음이 나옵니다.
제가 공동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먹을 것은 주지 않고 말로만 집에 가서 배불리 먹으라고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즘 불신자들이 믿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조롱합니다.
“예수쟁이들은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뜰 거야”
요즘은 더 업그레이드 되서 입이 뜨지 않고 엉덩이가 뜬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물에 빠져서도 물 속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요한1서 3:17~18절에서는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과 혀로만 믿는 것이 무익한 믿음입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기 머리로만 믿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런 믿음을 헛된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9~20절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귀신은 정말 잘 압니다. 그러나 귀신이 아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귀신은 예수님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습니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알기만 했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반대학을 다닐 때 행정법을 가르치셨던 교수님을 잘 압니다. 그분은 교회는 다니지 않았는데 성경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많이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 할 때마다 아는 것은 저보다 많은데 도무지 믿는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교회 가시라고 하면 학술세미나에 가야한다, 낚시 가야한다, 동창회 가야한다 핑계를 되면서 교회를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타까워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는 다 아는데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믿어져야 믿지요” 그 때 제가 확실히 깨달은 것은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알기는 아는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귀신 같이 잘 알고 많이 알아도 단순히 지식으로만 머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말로만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서 큰 복을 받았던 두 분이 나옵니다.
먼저 본문 21~24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첫번째로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서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할 때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겼던 사람입니다. 그의 행동하는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아 이제서야 너의 믿음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았노라”
어떤 분들은 그것은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6~9절 말씀에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가 받은 복을 똑같이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가장 큰 복은? 마태복음 1: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입니까! 아브라함의 행동하는 믿음이 결국 예수님의 족보를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서 복을 받은 사람은 ‘라합’입니다.
본문 25-26절 말씀에“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라합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줄을 알고 그는 생명을 걸고 숨겨 주었습니다. 잘못되면 자기 집안이 몰살당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목숨을 담보로 정탐꾼들을 숨겨 주어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행동이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의 운명 까지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하는 믿음은 결국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는 대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결 론
영국에 존 윌튼이라는 매우 훌륭한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71세때 영국 엘리자베스2세로부터 작위(귀족)까지 받은 분입니다. 그는 원래 26세까지 삶을 방황하며 탕자처럼 살았습니다. 어느 날 인생을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우연히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목사님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날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와 그는 겨자씨를 한 알을 투명한 비닐봉지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 겨자씨를 꺼내보면서 다짐했습니다. “이만한 믿음만 있어도 나는 할 수 있어” 훗날 성공한 그에게 기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의 인생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저는 순간순간 제가 약해질 때나, 힘들 때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겨자씨를 바라보면서 이겨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입술로만 믿는 사람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머리로만 믿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가장 작은 것일찌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