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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나라를지킨 '어비리의 대충혼'
가덕도서 적탄 맞고 숨진 뒤 눈 부릅뜨고 버텨
왜적 궤멸된 뒤에야 주저앉은 채 쓰러져
임진년엔 이순신과 함께 세 번의 승전 거둬
피난길 왕을 위해 사지를 넘나들며 활약
용인이 낳은 큰 영웅! 안홍국(1555~1597) 장군의 삶과 자취를 취재하기 위해, 폭염 속에서 이동면 어비리를 두 차례 찾았다.
그를 기린 정려각과 묘소를 둘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을이 수몰되어 큰 호수로 변한 어비리 이동저수지의 수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저기 어디쯤에, 안홍국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 있었고, 그가 죽기로 결심하고 수군으로 나아가던 날,
말 잔등에 돌려보낸 군복이 당도했던 곳이 있었으리라.
말이 쓰러진 자리, 가족의 통곡의 환청이 들렸다.
안홍국은 이 땅의 사람 모두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만큼 뜨겁고 빛나는 삶을 살았다.
임진외란 때 피난길에서 갈피를 잃은 국왕을 위해 사지를 뛰어다녔고,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이순신과 함께 잇단 승전보를 울렸으며 정유재란에는 불리한 전세 속에도 죽음으로 왜를 물리친 '불사신'
같은 장군이다.
왜란 당시 나라가 이순신과 함께 3대 장수로 모셨던 분, 중국의 기록에까지 '안홍국이 죽기전에는 일본도 범접을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남았을 만큼 뚜렷한 공을 세운 분.
용인소식은 옷깃을 여미며, 지금부터 그를 따라가보려 한다.
'오늘이 그날이다, 죽음으로 나라 은혜 갚겠다'
정유재란, 안골포의 진격
정유년(1597년) 여름 왜군이 다시 침공했다.
6월 19일 권율 장군이 보성군수 안홍국에게 종사관을 보내 병력지원을 요청한다.
안홍국은 이에 응하여 수군으로 들어가 3도통제사 원균 휘하의 중군장으로 참전한다.
원균이 거느린 전함 90여 척은 한산도를 떠나 안골포로 진격했다.
안홍국은 김산만호 김축과 함께 30여 척의 선단을 이끌며, 이 전투에서 거듭해 달려드는 왜작을 격퇴했다.
왜군은 해변에 잠복하여 포를 쏘아댔다.
안홍국이 악착같이 밀어붙여 적을 압박하니 이들은 결국 진지를 버리고 달아났다.
안골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안홍국은 왜군을 역습하며 섬멸하기위해 선단을 재배열하여 가덕도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때 적이 새롭게 꾸린 두 줄의 선단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측면에서 집요하게 협공을 펼쳤다.
일시에 아군이 불리해지면서 선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을 떄다
수군들은 중군장 안홍국을 향해 외쳤다.
'장군, 우리는 숫자가 적고 적은 숫자가 많습니다.
잠시 물러섰다가 기회를 보아서 다시 공격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안홍국이 소리쳤다.
'어림없다, 우리는 적과 6년을 서로 싸웠다.
조선 수군이 내내 이길 듯하다가도 결국 못 이기지 않았던가.
마침내 승리의 기회가 왔는데 적을 보고 물러서는 것이 가당한가.
적을 보고 후퇴하면, 언제 결판을 낸단 말인가.
통제사(원균)의 지원 병력이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우리가 당한다면 어찌 그 군사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 길이며, 이기는 길이다'
이렇게 말한 뒤 기를 흔들게 하여 병선 지원출전을 요청했으나 원균의 본진에선 응답이 없었다.
안홍국은 비장하게 병사들에게 말했다.
'흔들리지 말라,
흔들릴 일이 없다.
평생위국지심이 정좌금일이니 종피불구아라도 아감불이사보!(평생을 나라 위한 마음 뿐이었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저들이 우리를 구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어찌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지 않겠느가')
가덕도의 불사신
치열한 가덕도 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안홍국은 비장한 목소리로 공격을 외쳤다.
'우현의 적선을 따라잡고 '현자포'를 발포하라!'
적의 포위망의 한쪽을 향해 맹렬히 반격하자 적선의 한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저기다! 안홍국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돌아서는 적을 쫓으면서 그는 피를 토하듯 명령하며 독전했다.
이 장면을 강현 선생은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공이 드디어 몸을 일으켜 갑판에 나가니 적이 곧바로 한 겹을 에워쌌다.
공은 분신혈전하면서 활을 쏘고 칼을 막아 곧바로 적선을에 닿아 부딪치니 적의 병졸들이 놀라 후퇴를 시작했다.
그 기세로 공은 추격을 거듭했고 분노가 더욱 치미는 듯 죽음을 잊고 우뚝 서서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강현 '충현공기)
(강현(1650~1733)은 화가 강세황의 부친으로 예조참판과 대제학을 지낸 숙종 시대의 문인 서예가로 당시, 100년 전 왜란에 맞선 큰 장수였던 안홍국에 대해 생생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때 저쪽에서 적탄 하나가 날아와 눈썹을 쳤다.
그는 활을 한 아름 당기고 화살을 굳게 잡은 채 돛대 옆에 기대앉았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전사한 뒤에도 그는 생시처럼 눈을 부릅뜨고 노여운 안색을 풀지 않았다.
온 몸과 표정이 당당하여 살아있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곁에서 함께 싸우던 병사들은 그가 총을 맞은 것도 알지 못했다.
도망치는 적을 수십 리 쫓아 궤멸시킨 뒤애야 주저앉은 채 쓰러지는 그를 보았다.
숨을 거둔지 한참 뒤였다.
적은 사라졌고 전투는 기어이 이겼다.
충무공은 알아도 충현공은 모른다?
정유재란에서 죽음으로 왜를 물리친 이 장군을 아는가.
이 사람이 안홍국이다.
그에 못지 않은 투혼으로 왜군을 물리친이 놀라운 장수는 모르는가.
죽음도 불사한 이 대장군이 용인 어비리 출신의 큰 별임을 모르는 건 역사에 죄짓는 것과 다름없다.
이 고장이 낳은 뜨거운 넋을 잊었다면 침딤힌 일이고, 놓쳤다면 통탄할 일이다.
그는 '용인의 이순신'이었고, 당시에도 이순신과 함께 높이 기려했던 외란의 '또 다른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란 당시 안홍국의 활약에 관하여 많은 이들이 기록해 놓고 있다.
호남의 임준은'충현공전기'를 썼고, 명나라의 황실 기록(황명통기), 군사 기록(황명존신록, 만력동정기)에도 안홍국에 관한 내용들이 남아있다.
특히 정유년 기록에는 '왜선 수십 대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바다를 침범해 부산과 가덕도, 안골포에 숨어있다가 소나기처럼
쏟아부었는데 안홍국을 죽이고서야 갸우 마음 놓고 양산, 웅천 등지까지 쳐들어와 싸움터를 넓혔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명나라가 이토록 중대한 의미를 부여해 기록해놓은 사람이 바로 '용인 사람 안홍국'이다.
임진왜란 떄 이순신과 함께 승승장구했던 안홍국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권율은 왜 보성군수로 있던 안홍국을 수군 장수로 호출했을까.
그에게는 이런 '구원투수'의 이미지가 있었다.
1592년 임진란 때 그는 보성 군수로 내려가 있었는데, 전란을 맞아 급히 전라죄수사 이순신의 수군에 합류하게 된다.
안홍국은 군사훈련과 작전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고, 이순신은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그는 떄로 이순신의 직무를 대리했다.
옥포해전에서 는 선봉으로 나서 전공을 세웠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휘하 군졸 1만여명을 해산하고 육지로 피란을 하려 했다.
영동포 만호(거제도) 우치적(1560~1628)이 이를 말리면서 호남수군에 지원요청을 하자고 건의했다.
이때 이순신은 함장들을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키고 임전태세를 갖추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균의 급사 이영남이 좌수사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신료들이 반발이 있었지만 이순신은 원균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동
진격을 결행한다.
안홍국은 이순신과 함께 선봉에서 진두지휘를 맡았다.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왜적 30여 척을 발견하고 모두 격파해 침몰시켰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왜전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6월 1일 당포에서 왜선단과 마주쳤고, 대대적인 승리를거뒀다.
이후 율포해전에서도 왜군을 격퇴했다.
이 세번의 놀라운 승전에 이순신과 함께 안홍국이 있었다.
고향 용인 짓밟은 왜장의 선단을 궤멸
이순신 함대가 바다에서 승승장구하자, 육지에 들어와 용인을 유린한 뒤 기세를 몰아 올라가던 와키자카 야쓰하루(154~1626)가 급히 남하하여 해전에 투입됐다.
안홍국은, 돌연 나타난 와키자카의 선단을 가차없이 무너뜨려 고향을 짓밟은 원수를 갚았다.
이순신이 투옥되는 것은 이 무렵이다.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했던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낙마한다.
이 자리를 원균이 차지한다.
안홍국은, 이런 상황에도 난리 중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원균 휘하에서 중군장을 맡아 전투를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그를 바라보며 기세를 돋웠다.
이후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에 안홍국은 보성 군수로 복직한 것이다.
권율은 그를 빼놓고 왜병과의 해전을 생각할 수 없었기에, 정유재란이 터지자 '안홍국 컴백'을 주장했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모두를 자다의 선봉에서 지켜냈던, 구국의 영웅이었다.
피난길 왕을 모시고 필사의 미션 수행
안홍국은 해전의 승장으로 활약하기 전에도, 이미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는 사실 또한 반드시 짚어야 한다.
그는 1555년(명종 10년) 용인 어비리에서 안언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583년(선조16년) 24세로 무과에 급제했다.
33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선전관이 되어 의주로 임금을 호송한다.
선전관으로 용만까지 모시는 동안 조정 신하는 24명 뿐이었다.
왜적 뗴가 뒤쫓아 와서 황해도와 평안도를 휩쓸고 있었다.
덕흥군과 임해군이 이산가족이 되어 더 이상 피난 길을 나아가지 못하고 함경도 영흥에서 멈췄다.
안홍국은 이떄 적진을 뚫고 선조의 소식과 뜻을 전했으며, 남쪽 삼남의 길이 막혀 꼼짝할 수 있을 떄에도 팔을 걷고 나서 군사
진영을 돌아다니며 왕의 서신을 하달하는 일을 수행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션 수행에, 이후 그는 호종공신 1등에 책록되기도 한다.
그가 보성 군수로 나아가게 된 것은 , 조정이 그의 충정과 용맹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애마야 , 이 군복을 고향에 전해주렴' 어비리 말무덤의 비밀
순흥안씨 가문, 독립투사 안중근을 낳은 '뜨거운 피'...용인 안홍국에 큰 자부심
말에 군복을 실어, 고향 용인에 보내다
안홍국은 임진왜란 초기 육지의 장수로 활동하다가 수군으로 발령받은 날, 운명을 예감한 듯 자신의 애마의 고삐를 풀고
말잔등에 그의 철락(병사의 군복)을 얹고는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말이여, 이제 네 시세 는 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대신 할 일이 있다.
나는 이 길로 반드시, 나와 함께 오고갔던, 용인 고향 마을로 달려가라.
나는 살아서 그곳에 갈 전망도 미련도 없다.
너라도 가서 유품인 이 옷을 가족에게 전해다오.'
말을 혼자서 천리 길을 달려 용인 이동면 어비리에 있는 그의 본가에 닿았다.
안홍국의 말은, 집 앞에 이르러 마치 힘을 다한 듯 쓰러졌고 이후 일어나지 못했다.
이동면 묘봉리 산 26번지엔 작은 무덤 하나가 있다.
그 앞에는 '충신 안홍국 애마비'라고 쓰여진 비석이 서 있다.
안홍국의 철력을 목숨 바쳐 전한 말의 충직한 뜻을 기린 것이다.
바다의 수장된 충혼, 옷무덤과 말무덤만 남아
산자락을 오르다 보면 니란히 앉은 안홍국 장군과 부인 이씨의 부부묘소가 보인다.
가덕도 앞바다에서 전사하여 수장된 장수이니, 몸이 올 수는 없었 그의 묘는 다만 그날 그의 뜻을 담아 보낸 찰력이 묻힌 옷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그 비장한 삶을 묵묵히 증언하며 보위하고 선 석장들과 함께 담담히 자리잡고 있다.
왜란이 끝난 뒤 조정에서는 그가 군수로 있었던 보성에 사당을 세워 위패를 봉안했다.
이것이 정충사다.
또 1630년(인조8년) 충민사란 현판이 사액되고 여수에 사당이 마련됐다.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과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 세 분을 모신 곳이다.
아산 현충사보다 105년 먼저 지어진 충무공 사액사당이기도 하다.
이억기는 전라우수사였다.
충현에서 땄다.
조선 조정이 왜란을 막은 최고의 3대 공신을 이렇게 모신 곳이다.
1642년 인조는 용인에 안홍국 충신정례문을 세우게 했다.
그의 묘소로 올라가틑 기슭에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1668년(현종9년) 그는 병마절제사로 중직되고, 충현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부인 전주 이씨에게도 정경부인 첩지가 내려진다.
1795년 자손인 안석광은 정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6대조 안홍국이 가덕도 해전에서 원균과 함께 싸우다가 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니 고쳐야 마땅합니다.' 정조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수정을 지시했다.
용인 사람으로서, 충무공을 알고 있지만 충현공은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이순신과 함께 싸운 장수이자 정유재란에서 불굴의 투혼으로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안홍국 장군을 잊는다면, 그것은 위대한
용인정신을 놓치는 일이다.
그의 사후 200여 년에 걸쳐서 그의 공훈을 제대로 링식해야 한다고 외쳤던 아들이 있었건만,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거리니 그건 이 땅에 '옷가지' 하나로 비통하게 묻힌 위대한 장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용인의 명문 순흥안씨의 자부심
안홍국은 순흥안씨 가문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용인 양지면 제일리, 백암면 백곡리, 남사읍, 삼가동을 중심으로, 순흥안씨들이 세거헤오고 있다.
삼가동에는 이괄(1571~1650)의 묘가 있다.
이 분이 입향조라고 한다.
주자학을 이 땅에 들여온 안향(1243~1306)이 손흥안씨 4세손이다.
근데의 안중근 의사와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교육자 안창호가 저명한 순흥안씨들이다.
고려시대 묵은 이색은 이렇게 말했다.
'순흘안씨는 대대로 축계 위에 살았으니 죽계의 근우너은 소백산에서 출발하였다.
산이 트고 물이 맑으맑은 석처럼 안씨의 흥성함이 무궁하리라 또 퇴계 이황은 이렇게 예찬했다.
'죽계의 여러 안씨가 이 산 아래서 태어나 뻗어나갔으니 이름이 이 중원에까지 펼쳤다. 용인소식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