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날 / 김 난 석
아이야
오늘은 하얀 눈밭에 둘이 서서
너는 너의 눈에 나의 모습을, 나는 나의 눈에 너의 모습을
하얗게 담고 싶구나
아이야
그리하면 하얀 들판에
눈사람이 몇이나 되는 것이더냐
오래 전에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른단다
눈에 눈이 들어가 눈물이 나왔다는데
그게 눈물이더냐 눈물이더냐
눈물이기도 하고
눈물이기도 하려니
서로 눈망울을 보지 않고야 어찌 답할 수 있겠느냐
눈은 얼음 결정이 구름으로부터 내리는 현상이란다
흔히 말하는 함박눈은 포근한 날에 잘 내리며
눈송이가 소담스러워 잠시 동안에 온 세상을 은세계로 만든단다
춥고 건조한 날에는 가루눈이 내리느니
그리하면 세상은 참 쌀쌀맞게 되는 법이지
눈은 매우 섬세한 구조를 이루고 있어서
빛이 반사하거나 굴절할 수 있는 면을 무수히 가지고 있단다
따라서 눈은 희게 보이지만
공기 중에 떠있는 먼지나 오염물이 붙으면 붉은색
노란색 또는 검은색으로 착색되는 경우가 있단다
눈 결정은 육방정계에 속하는 결정이며
기저면(基底面) 내에서 서로 60°각도로 교차하는
3개의 축과 기저면에 수직인 결정축을 가진다고 한단다
이러한 눈 결정은 빙정핵(氷晶核)을 중심으로 성장하는데
성장과정에서 기저면과 측면이 성장하는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외형을 나타낸다고 한단다
침상결정(針狀結晶)은
보통 가는 바늘 모양의 얼음 여러 개가
다발을 이루거나 두개가 엑스(X)자 모양으로 교차하고
각주상결정(角柱狀結晶)은 육방정계의 결정축 방향으로 발달하며
판상결정(板狀結晶)은 육방정계의 기저면 방향으로 발달한다고 한단다
아이야
첫눈이 내린 모습은
하얀 설원(雪原)에 하얀 하늘이 내려와 합장한 꼴이니
천지가 한 개 눈송이로 성장(聖裝)한 것이 아니더냐
눈밭에 둘이 서 있고저 하는 너와 나는
육방정계의 다면(多面)으로 마주하여 한없이 비추고 있다가
침상결정이거나 각주상결정이거나 판상결정으로 얽혀 하나이고저 하니
이를 일러 몇이라 할 것이랴
오로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요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 중얼거릴 뿐이리라
아이야
첫눈이 내렸다함은 무엇이겠느냐
하늘에서 하얀 너울이 내려와 온 누리를 하얀 장막으로 덮었으니
세월의 한 마당을 끝내려 함이 아니더냐
어제의 밤은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오늘은 이렇듯 하얗게 밝았으니
지난날들을 모두 덮어버리고
이젠 하얀 침묵으로 들어섬을 알리는 것이기도 할 테지
마음을 조아린 자 마음으로 응답하고
땀 흘린 자 땀으로 응답할 뿐
하루만 볕을 더 내려달라는 릴케의 기도도
이젠 응답할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느니...
그러면 아이야
이제 너는 무엇을 기도하려느냐
나는 눈 속에 묻힌 꽃씨를 들여다보면서
작은 음성 하나를 들었단다.
안으로 걸어 닫은 작은 다락방
웅크리고 들어앉은 긴 긴 묵상
머리 조아린다고 기도가 되는 게 아니다
두 손 가슴에 모으는 것만이 기도도 아니다
꽃잎이 꽃잎을 감싸고 감싸고 감싸
한 송이 꽃을 이루듯
꽃들이 꽃들을 감싸고 감싸고 감싸
한 묶음 꽃다발을 이루듯
어제의 몸짓으로
내일을 빌어야지. / 졸시 '꽃씨가 전하는 말' 부분
우리들 어제의 몸짓이 아름다웠다고 하자
그러면 내일의 모습도 아름다움일 테지
첫눈이 내리는 날
우듬지에 내려앉는 눈송이가 다시 내려
소녀의 하얀 건반위에 올라앉는구나
평안하거라 아이야
나도 그러하리라. (첫눈 내리던 날)
춘설(春雪)
이른 아침 안개 자욱한 강변길에 나섰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석촌호로 달려갔다
바람 쌀쌀하니 싸락눈이 내리더니
기온이 올라가는지 제법 큰 눈송이를 이루며
소담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발자국을 남기며 앞서 지나간 사람들을 따라
나도 함께 가만가만 걸어봤다
눈밭을 지날 때엔 어지러이 걷지 말라 했다(서산대사)
뒤따라 오는 사람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나의 행적이 남에게 영향을 미치니 조심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눈도 안 달린 몸으로
마음으로 내리는 것이던지
검은 나무가지
하얗게 덮더니
살그머니 물 위에 내려
고향으로 돌아가네. / 눈 내리는 석촌호반에서
춘설이 들려주는 음성을 다시 들으며
나는 남의 허물을 하얗게 덮어주진 못할망정
발자국이라도 반듯하게 걸어가야겠다.
2022. 1. 19.
첫댓글 발자국
발자취
앞선이가 남겨놓은 깊게 박힌 자동차 바퀴자국
눈 내린날에는 더욱 고맙습니다
앞선이가 선명하게 새겨놓은 자취,
앞선이가 헤쳐놓은 그 길이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어요
앞선이의 자취를 따라 갈수만 있다면 눈밭에서 간신히 빠져 나올수가 있습니다
앞선이의 자취가 고마운것은
꼭 눈길만은 아닐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내 행적이 남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서산대사 탓에 본문과는 하등 관련없는 댓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범을 보인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요
적어도 나쁜 본은 보이지 말아야겠지요.
눈속에 묻힌 꽃씨를 들여다 보면서...
나의 마음을 한곳에 모아봅니다.
눈이 이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버렸으니
하얗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구구절절함도 묻혔을 겁니다.
보지 못할 것은 찾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을 찾습니다.
꽃씨는 봄을 기다리는 맘이지요.
꽃씨는 새 생명을 일구는 새싹입니다.
눈속에 숨어있는 꽃씨를 찾을 겁니다.
고운 글 이으셨네요.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ㅎ
석촌님의 필력이야 이미 알고 있지만
눈에대한 섬세한 고찰과 성찰에 대하여 이리도 아름답게 누에에서 실뽑아 내듯 하심에
존경심이 절로 절로 우러나옵니다
애니님, 수필방에 납시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아이구우 부끄럽습니다.
방금 영어방의 애니님 글을 봤는데
막걸리 생각이 나데요...ㅎㅎ
시와 글을 읽고 나니 그저 하얀 설원만 떠오릅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눈은 신비 그 자체인데
이런 신비가 쌓이고 쌓여서 하얀 세상을 만들곤 하지요.
눈이란 게 희고 참 신비스러운데요
사실 자세히 보면 그것도 공해지요.
환경을 정화해나가야 할 텐데요..
그래야 눈도 더 신비해질 테고요.
위에서 눈에 대한 기학적
분석~
내려가며 눈속에 하나 꽃씨~
그리고 춘설~
눈내리면 하트나 그리고 눈 사람이나
굴려 하나 만드는게 보통인데,
이제 고요히 시나 한수 지어 볼까 합니다.
아무튼 눈은
수고하고 아웅다웅 살아가느라
불상한 인간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늘이
내려주는 선물로 생각합니다.
정리를 참 잘하셨네요.
눈 속에서 기도하는 꽃씨의 말...
그걸 들어야지요.
한국에 눈이 많이 와 온통 설국이 된 모양입니다.
모든 것을 순결하게 덥어 버리는 눈이 주는
감흥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경험이 되겠지요.
올려주신 시 잘 읽었습니다. 즐겁게 일상 보내세요.
네에
건조해서 많은 눈은 아닙니다.
많이 와서 쌓여야 할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