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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스카 폭풍의 밤, Штурмовые ночи Спасска, Николаевские дни, 니항사건
1930년대 공산당들의 선전술
해방된 도시
1920년 2월 28일 늦은 밤 일본군과의 합의에 따라
파르티잔 부대 1연대의 2개 중대와 스키 부대가 니콜라예프스크에 진입하여
다음날 아침 일본군으로부터 모든 경비를 인계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니콜라예프스크 시 도심 (니항시)
사할린 주의 고려인 마을
1920년대 독립군 3대 승리의 시작
그리고 1920년 2월 29일 아침 10시에 기병 중대와 함께 야코프 트리피츤과 참모장 나우모프가 붉은 깃발들로 장식된 도시로 행진해 왔습니다.
1900년대 초반 니항의 지도
그 뒤를 이어 1연대와 2연대 파리티잔 부대들이 엄숙하게 도시의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니항 거주 주민들의 거의 대부분은 나와 환영하였고, 그중에서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들의 환영은 대단하였다.
중국인 파르티잔 부대는 1919년 5.4운동 이래 만주, 중국본토에서 일제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기에 열렬히 환영받았으며,
일제의 압제를 받던 민족에게 니항 해방은 민족 해방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니항에 도착한 부대중에는 마가 마을 등의 기타민족도 약 200여명 이상이었으며,
니항 도회지역 거주 조선인들 상당수가 일제 협력단체를 조직한 것은 사실이나, 무혈해방이 이루어지자 또 볼셰비키로 넘어온 것도 사실이다.
밀정에 대한 즉결 처형은 독립군이 가진 것이기 때문에 독립군의 법으로 한 것으로 오늘날 기준을 적용하기는 힘든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중국의 1919년 5.4운동
트리피츤 부대원들
수천 명의 집회 퍼레이드가 도심의 중앙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같은 날 일본군은 백파 군대 장교를 파르티잔들에게 넘겨주었다.
군사혁명재판소는 다음날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재판소는 처형과 형벌이 선고된 사람들중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석방했습니다.
무르가보프(Мургабов) 대위, 그리고리예프(Григорьев) 중령, 스마렌스키이(Смоленский) 중위 등이 석방되었습니다.
사할린 주 지역 젬스트바(земство, 도시자치기구)와 니항의 도시 자치기구가 해산되고
모든 권력이 임시 사할린 주 지역 혁명 위원회의 손에 넘어가 소비에트 기관의 유형에 따라 젬스트바(земство) 제도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1920년 2월 당시 행정구역상 니항은 한반도 면적 정도의 사할린주를 관할하던 주도였다.)
니콜라예프스크 시 자치기구 대신 3월 1일
행정,
경제 및 식품,
재정 및 기술의
4개 부서로 구성된 시의회가 선출되었습니다.
파르티잔 부대들과 연대가 재편성되었고, 나이 든 유격대들은 해산되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마로프(А. Комаров)는 수비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모든 러시아 문헌들에서 니콜라예프스크 해방 이후 일제와 백파들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병들을 모집하였다고 하며,
남한에 잘못 알려진 박병길에 의한 사할린부대 조직설과 니항 해방설은 1921년 6월 자유시참변과 1920년 7월 트리피츤 살해에 가담했던 한국계 몇명이 나중에 소련 공산당원증 혹은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기 위해 조작해 낸 것이 명백하다.
러시아의 어떤 기록에도 박병길이 니항 해방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없으며, 일본인과 협력관계였다고 한다.
이지택, 김낙현(김이노껜지), 최호림의 주장은 1953년경 스탈린 사망후 공개된 일부 자료와 일본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았던 부분을 허위로 쓴 부분이 많고, 당시 니항에는 <니항 조선인회>, <니항 한인회>, <니항 거류민회>, <니항 조선인 민회> 등의 명칭을 가진 친일 단체가 분명 존재하였다.)
니항사건 추모비
혁명 지지자들과 제국주의 식민지국가 주민의 적극적 참여
당시 니콜라예프스크 시내 거주자중 러시아인들의 상당수는 1905년 일제의 사할린섬 남부 학살을 피해 쫒겨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족중 상당수가 과거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탄압되었던 것입니다.
사할린 주 지역의 공산당 조직은 아주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20년 3월 10일, 볼셰비키의 첫 번째 조직 회의가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에서 개최되어 공산당의 시 및 지역 위원회를 창설했습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 자료로 충분합니다.
볼셰비키(공산당)인 수다코프(Г. Судаков)는 1933년 12월 14일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중앙위원회 박물관에서 열린 극동 공동체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볼셰비키에 동조했고 볼셰비키 대열에 합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조직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
파르티잔 운동의 또 다른 구성원인 프리크샤이티스(Г. Прикшайтис)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인민의 집에서 만남이 있었습니다.
드니프로프스키(Днепровский) 동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당원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기억합니다.
우리는 거의 두 시간 동안 줄을 서 있었습니다. ”
러시아 공산당 중앙과 극동공화국의 미미한 영향력
그러나 3월 10일 조직회의에서 볼셰비키는 공산당 조직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아무르 하류 지역의 볼셰비키 이론가 중 한 명인 아우스셈(О. Ауссем)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첫째 공산주의자의 수가 너무 적었다.
적대 행위가 끝난 직후 러시아 공산당(РКП)의 사할린 지역위원회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중 10명에서 ~ 12명 정도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우스셈 지역 위원회 위원장과 게르만 가파녠카(Германа Гапоненко) 비서관(매우 젊은 파르티잔이었으며 혁명에 매우 헌신적이며 훌륭한 동지)이 상임위원회를 선출했습니다..
위원회가 취한 첫 번째 질문은 지침과 정보를 위해 러시아공산당(РКП)의 시베리아 및 모스크바 센터와 어떻게 연락을 해야하는가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극동 민주 공화국(ДВР) 건설에 대한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еков)의 계획에 대한 태도에 대한 의문 때문에 동요했습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의 본부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명분에 대한 배신을 목격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 극동공화국은 공산당의 꼭두각시로 단지 일본 및 간섭국들과 적당한 타협을 하여 러시아 내전을 빨리 종식시킬 의도가 분명 있었다고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한다. 물론 한국 인터넷에는 온갖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는 이 지역 러시아공산당(РКП)은 두세 번만 만났고 어떤 경우에도 사건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 (아우스셈의 회고록 하략).....”
아나키스트들은 여전히 최고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해방된 도시에 아쳬빌리-파블루츠키이(Оцевилли-Павлуцкий)가 이끄는 상시적인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예약이 있어야만 파티 회원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강의가 때때로 그곳에서 진행되었지만
그곳은 파르티잔들과 도시 주민들의 모임과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장소로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공산당의 괴뢰국가인 극동공화국 일대
1920년 3월 12일 일본군의 기습공격 이전에 학살과 체포가 과연 있었는가?
소비에트 문헌에서 일부 작가들은 해방된 도시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
(※A.Y.구트만과 일본파쇼,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이 각종 도서에서 주장하는)
즉 일본군의 기습공격 <이전>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반대자들에 대한 대규모 테러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그 시작을 트리피츤에게 돌립니다.
1920년 3월 13일까지는 그런 일이 실제로는 없었지만, 일제와 밀정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파르티잔 볼셰비키 본부의 조사위원회는 일본측과 중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살해된 사람들의 무덤을 열었다.
아르로프(Орлов) 등의 살해
그래서 파르티잔 위원회 위원이었던 아르로프(Орлов)와 그의 마차운전원 소로킨(Сорокин)의 시체가 발견되어 사진이 찍혔습니다.
오를로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눈은 그을렸고, 코와 혀는 잘렸고, 뺨에는 검붉은 줄무늬와 붉은 철로 만든 흉터가 보였고, 등은 몽둥이와 채찍으로 구타당했습니다.
아무르 얼음의 눈 아래에서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지역의 혁명 조직의 가담자였던 노동자 제르데프(Жердев), 쿠로프(Куров), 슬리포프(Слепов)의 시체가 발견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시체는 절단되고 총검으로 찔리고 뒤틀린 팔에 뺨이 잘렸 있었습니다.
예전 니항 수비대원들 집회에, 시신이 모두 전시되어
일반인들이 보기에 참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외대 도서와 A.Y.구트만의 400여명 처형설은 조작극
일제와 앞잡이들이 쓴 책들, 당시 니항에서 활동했다는 공산당원들의 진술, 혹은 독립유공자 이지택, 김낙현, 최호림 등이 쓴 책들에서
이론적으로 말해서,
니콜라예프스크시(Николаевск)에서 백파와 일제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전시회>가 열린 바로 다음 날부터,
감옥에 있던 백파 세력 지지자들 몇명에 대한 린치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여기서 A.Y.구트만과 밀정들, 국내 몇몇 도서 등의 400명 학살설 혹은 살해설이 또 허구임이 증명된다.)
이 기간 동안 아나키스트 트리피츤과 그의 동료들은 혁명적 합법성의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여 파르티잔 군대를 완전히 통제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당시 니항의 인구는 명확하지 않다. 경기도 면적보다 넓었던 당시 니항의 직할 구역에는 전년의 인구조사로는 대략 1만 2천여명이 등록되었으나,
내전으로 인해 피난온 사람들과
볼셰비키를 피해 탈출한 사람들을 고려해 봤을 때, 인구수가 명확하지는 않다.
니항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오늘날 약 17제곱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을 가지는 도심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당시 주택수와 전년도 인구조사에 따른 도심 거주 러시아계 인구는 대략 7천~8천여명이고, 주변 마을 인구 4천~5천여명이며, 중국 국적자, 유럽 국적자 등과
사할린섬 북부 주변 유전, 탄광, 금광 등을 소유한 자본가들도 다수 거주하였으며,
극동의 세계적인 어장인 관계로 외국계 어민들도 다수 거주하였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당시 행정 구역상 한반도 육지 면적과 비슷한) 사할린 주(Сахалинское област) 지역의
주도(州都)인 니콜라예프스크시에서 소비에트 사할린주(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 지역 대회의 개막이 계획되었고,
소비에트 권력의 회복을 선언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따라서, 트리피츤이 술먹고 살인, 약탈, 강간, 강도질과 난동을 부렸기에 밤중에 참다못한 일본군과 앞잡이들의 기습공격을 당하게 되었다는 일제와 밀정들의 주장은 일제의 선전술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본군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상급부대의 지시
트리피츤(Тряпицын)과 파르티잔들은 10여 일간의 평화가 지속되자 일본군을 믿고 방심하였다.
그리고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백파와 일제의 반란이나 천둥번개가 몰아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파르티잔 볼셰비키 부대 사령부와 일본 수비대의 관계는 좋았으며 당사자들은 이전에 약속한 조약을 완전히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 3월 11일 ~ 12일 밤중에 한국 독립운동사와 세계역사에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으로 기록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니항사건이라고도 한다.)
첫댓글 니항이 해방되자 니항 거주 주민들의 거의 대부분이 환영하였군요 니항사건이 기대되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