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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위에 손잡고 거닐던 길목도 아스라이 멀어져간 소중했던 옛 생각을 돌이켜 그려보네.
나래치는 가슴이 서러워 아파와 한숨 지며 그려보는 그 사람을 기억 하나요 지금 잠시라도 ...’
차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김연숙의 '그날’이 흘러나왔다.
밤하늘에 참 많은 별들이 떠있다. 오늘은 또 몇 개의 별이 생겨나고 사라졌을까?
사랑을 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앞으로 내게 사랑이 올지 또한 미지수다.
사랑해서 행복한 쪽은 둘 다 아닌 혼자뿐임을 알게 된 나 같은 사람은 사랑 앞에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오늘도 또 하루가 갔다.
똑같은 일상에 지쳐 물을 가득 먹은 스펀지 같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반겨주는 이 없는 적막으로 뒤덮인 방안은 없던 외로움도 생기게 만든다.
이런 날은 비누냄새 가득 머금은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의 품에 안겨 잠들고 싶다.
거울을 보면 어느새 하나 둘 생겨난 잔주름들이 나이를 먹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말해준다.
화장품을 덧발라 가려보아도 웃음 뒤에 드러나는 잔주름은 더욱 더 도드라져 보이기만 할 뿐이다.
서른다섯이란 나이가 오늘은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 없다.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내 마음은 아직도 열여덟 청춘에 머물러 있는데도 말이다.
문득 사랑이 하고 싶어 졌다.
가슴 아픈 사랑이 아니라 열정이 들끓는 그런 미칠 듯한 사랑을 나는 원한다.
내 젊은 날을 보상해줄 패기 넘치고 아직은 세상의 때가 덜 묻은 그런 순수함을 가진 남자와
마지막 로맨스를 꿈꾸어 본다. 내게도 아직 남은 사랑이 있다면 말이다.
- 윤새롬 다이어리 中 -
“저희 병원 첨이신가요?”
쌀쌀맞게 생긴 간호사가 카운터 앞에 선 나에게 물었다.
“네.”
“그럼 여기다가 본인 이름하고 주민증 번호랑 주소 전화번호 좀 기재해 주세요.”
어느 때부터인가 내 주민번호에 앞자리를 쓰는 일이 꺼려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려보이는 내 외모로만 평가받고 싶은 이유에서다.
주민번호를 보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간호사와 같은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본다.
“잠시만 앉아 계세요.”
내 주위로 여학생들 몇몇이 보였고 다들 피부과 치료를 받으러 온 듯했다.
하지만, 난 피부는 뭐 일단 20대의 피부처럼 얼룩진 데 없이 매끈한 편이라 그 문제로 온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소변 볼 때 따끔거리고 아랫배가 묵직한 것이 어제는 심하다 싶을 정도의 혈뇨가
보여서 비뇨기과를 찾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싹수없이 힐긋거리는 간호사의 눈빛이 자꾸 거슬렸다.
나보다 10살은 더 어려보이는 간호사의 싱싱함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조용한 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병원 소파에 기대 잡지를 보고 있었다.
카운터에 서있던 간호사가 내 이름을 호명했다.
“윤새롬씨! 들어오세요.”
다행히도 진료실에 들어가 보니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의사셨다.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네, 저번 주부터 자꾸 아랫배가 아프고.. 소.. 소변보기 좀..”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의사는 옆에 서있던 간호사에게 뭔가 신호를 보냈다.
역시나 그 간호사는 딱딱한 말투로 얘기했다.
“따라오세요.”
진료실 밖으로 따라 나섰고 그 간호사는 종이컵 하나를 쭉 내밀었다.
“뭐?”
“문 열고 나가시면 복도 왼쪽 편에 화장실 있거든요, 거기서 소변 받아 오세요.”
조금 난감하긴 했지만 주변에는 초등학생처럼 뵈는 남자아이 하나만 남아있던 터라 조금 덜 부끄러웠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데 종이컵에 잘 조준해 볼일을 보아야 하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은 내 요도의 힘이 그래도 쓸 만한지라 여차했다간 밖으로 새어나오기 십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다가 휴지까지 없는 마당에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었다.
다행히 무사히 일을 치르고 민망하지만 손으로 살짝 종이컵을 막고는 다시 병원 문을 밀고 들어갔다.
간호사에게 종이컵을 내밀고 그 간호사는 진료실 옆 어딘가로 종이컵을 들고 들어갔다.
뚫려있는 칸 너머로 현미경이 보였다.
볼일을 끝내고 나온 간호사는 카운터 안에 간이 싱크대에서 비누로 박박 문지르며 손을 씻었다.
‘넌 소변 안 보니? 환자의 소변에 한낱 사심을 느끼다니. 넌 직업 마인드도 없냐? 썩을!’
혼자 속으로 구시렁대며 꼬고 있던 다리를 까딱까딱 거리며 앉아있었다.
손을 닦고 나온 간호사가 다시 나를 불렀다.
“들어오세요.”
표정이 아까보다 더 살벌하다.
‘기지배, 성깔 있네.’
진료실에 들어간 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알아본 결과,
혈뇨가 비쳤을 때는 여러 가지 병들을 예견할 수 있다고 했다. 최악의 상황인 암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어제 난 잠까지 설쳤다. ‘결혼도 못해보고 생을 마감해야하는 운명이 나에게?’
잡다한 망념을 만들어내 자학하듯 와인과 끊었던 담배까지 피워 물었다.
의사 선생님의 표정은 과히 심각하고 어두웠다. 책상위에 볼펜을 두들기시던 선생님은 힘겹게 말을 이으셨다.
“심한데..”
“네.. 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설마??’
“이 지경이 되도록 왜 그렇게 방치를 하고 있었어요?”
“뭐가 많이 안 좋아요, 선생님?”
“간호사 따라가서 직접 봐요.”
난 진료실 옆 작은 공간에 놓여진 현미경을 들여다봤다.
작은 세포 같은 것이 많이 보이긴 했지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여준 건 백혈구가 많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려는 의도였고,
알고 보니 방광염이 아주 심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젯밤 내내 들던 불안감에서는 벗어났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남아있어 기분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항생제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주사실로 인도를 받은 나는 불주사를 맞는 아이마냥 덜덜덜 떨었다.
난 내 몸에 뭐가 들어오는 게 싫다. 내 첫 경험이 아주 늦어졌던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민망하게 엉덩이를 까야 하는 것도 곤욕이었지만,
엉거주춤 눕지도 서지도 않은 자세로 서있어야 하는 것도 껄끄러웠다.
하얗게 드러낸 내 속살에 살짝 두들김과 동시에 시퍼런 바늘이 내 살을 뚫고 들어왔다.
‘윽~! 어?’
간호사는 차가운 생김새와는 다르게 주사를 놓는 손길은 아주 아트였다.
태어나서 몇 번 맞아보지 않은 주사지만 그 중 제일 아프지 않게 느껴졌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주책없이 쓸데없는 말까지 늘어놓았다.
“언니, 그런데 왜 걸리는 거예요?”
아니다 다를까 간호사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살가운 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은 간호사는 나의 질문에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대답해주는 것치고는 아주 상세하고 대략 전문적으로 콕 찔러주었다.
“성관계나 그런 거 때문일 수도 있고 뭐 피곤해서 생기는 경우도 있구요.
배뇨습관 때문에 종종 생기기도 하구요.”
‘뭐? 성.. 성관계? 내가 뭐 부적절한 관계라도 가졌단 말이야 뭐야? 성관계 좋아하시네~
거기에 거미줄 치고 산지 오래거든!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
혼잣말 하듯 애써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억울해서였다.
“요 며칠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무안함을 무마하려 한 마디 덧붙였다.
“뭐 조심해야 될 음식 같은 건 없나요?”
“술 담배 피하시구요, 물 많이 드시구, 관계 후에 좌욕이나 배뇨를 해주시는 것도 좋구요.”
‘내가 음식 말하랬지! 왜 또 없는 성관계까지 들먹여? 얘 그렇게까지 안 봤더니 사상 완전 구리네.
완전 오늘 재수 꽝이다, 너 땜에! 내가 다신 이 병원 오나 봐라! 너 우연이라도 나랑 마주치지 마라.
다시 만나면 그땐 간호사 언니가 아니라 간호사 년이 될 테니까!’
나이 들어 느는 게 또 하나가 있다. 이 구시렁거리는 병이다.
진료비를 계산하고 인사도 없이 쌩하니 나와 버렸다. 인사가 없긴 그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투덜투덜 병원 문을 나섰고 복도 끝에 가까운 약국이 있어 그리로 곧장 들어갔다.
환절기라 감기가 극성인 요즘, 약국에는 감기로 인해 약을 타러 온 환자들이 제법 많았다.
양옆에 의자에 꽉 들어차 있는 사람들 속에 멀뚱히 서있던 나는 약국보조원에게 처방전을 내밀었다.
한 손님이 일어났고 나는 그 자리에 냉큼 앉았다.
나이가 들어 느는 것 중 한 가지 더는 여러 각도로 빈자리를 찾아내는 넓어진 시야와 안목이다.
그와 더불어 그걸 알아차리고 넙죽 앉을 수 있는 뻔뻔한 배짱도 덤으로 생긴다.
내 차례가 돌아오고 일어서려는데 웬걸 아주 새파랗게 젊은 남자약사가 내 눈앞에 떡하니
서있는 게 아닌가? 허우대까지 왜 그렇게 멀쩡한 거니?
아닌 척 슬그머니 약국을 빠져나가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윤새롬씨!”
“네?”
“약은 항생제랑 염증 가라앉히는 소염제구요. 이 약은 소변 잘 나오게 하는 약이니까
취침 전에 드시구요.”
‘사람들도 좀 많아. 좀 작게라도 말해주지. 젠장~’
그 젊은 약사의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지만 내 얼굴은 달아올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약봉지를 잡아채듯 들고는 얼굴을 돌리고 잽싸게 돌아섰다.
“저기요!”
‘왜 또 부르고 난리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풀고 우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계산하셔야죠?”
‘아뿔싸~!’
“아..네..”
지갑에서 꺼낸 지폐를 올려놓고는 잔돈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 건지 원.
내미는 잔돈을 받아들고 돌아서려는데 그 약사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아 또 왜?’
그 젊은 약사는 내 손에 이름 모를 회사의 쌍화탕 한 병을 지어주었다.
‘됐거든!’
“후...고맙습니다..”
무심한 척 받아들곤 눈을 질끈 감은 채 문을 나오는데 아까 같은 병원에 앉아있던 그 꼬마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유리문에 ‘꽈당’하고 이마까지 찧었다.
이래저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가게에 데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위해
장시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쇼윈도에 얼룩을 보고는 괜스레 트집을 잡으며 가게로 들어섰다.
진주는 진열장 위에 붕어빵 봉지를 슬그머니 숨기며 말했다.
“왔어요?”
“넌 내가 유리창 좀 닦으라고 몇 번을 말했어?”
“아, 왜 또 심통이래?”
“나 네 사장이거든! 말대꾸 그렇게 자꾸 따박따박 해라!”
진주는 내 남동생의 여자 친구기도 해서 직원과 고용인의 관계를 때론 아니 자주 넘어선다.
다행히 진주는 성격이 유들유들해 내 까칠함과 노처녀 히스테리까지도 달갑게 받아 넘겨준다.
“병원에선 뭐래요?”
“죽을 병이랜다. 됐냐?”
“얼마나 산대요?”
“이게!”
“이따 그 네가지(싸가지) 오기로 했어요. 보내준 디자인이 별로래요.”
“아, 진짜 오늘 욕 나오게 하네! 어디가 어떻게 또 마음에 안 쳐드신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새로 생긴 그 여친이 어쩐대나 뭐래나?”
“씨팔, 둘이 같이 오라고 그래 그럼!”
“안 그래도 그러라고 했는데.. 모르죠? 이따 데리고 올는지.”
진열장 위에 붕어빵 부스러기가 눈에 대문짝만하게 들어왔다.
“네가 애니? 먹었음 흔적은 좀 없애지? 그리고 가게에서 내가 냄새 난다고 간식거리는
들어가서 먹으라고 했어, 안했어?”
“아, 배고픈데 그럼 어떡해요? 언니가 와야 밥을 시켜먹죠?”
“넌 밥 좀 늦게 먹으면 어떻게 되니? 뱃살은 샘플로 달고 다녀? 이럴 때 그 지방연소 좀 시키지! 응?”
“언니 정말 너무 해요. 나랑 한해 두해 보는 사이도 아니고 꼭 그렇게 후벼 파야겠어요?”
“후벼 판다고 네가 파이긴 하니?”
이놈에 입이 방정이다. 담아두지 못하고 뱉어낼 줄만 아는 이 못된 습성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줄
알면서도 35년 세월동안 몸에 밴 거라 쉬 고쳐지지가 않는다.
더더구나 힘들었던 유학생활 후에 생겨난 아집으로 근래는 이기적으로 변했다는 소리까지
결혼한 친구들에게 종종 듣는다.
애들과 남편 생각하느라 실속 차리기에 바쁜 자기네들도 나와 별반 틀린 건 없는데도 말이다.
늦게 나와서 먹을 거 다 먹고 남편과 애들 자랑만 늘어놓고 기껏해야 반지 리셋팅이나 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고작이다. 개념은 죽 써서 개를 줬는지 매번 만날 때 마다 ‘명색이 사장인데’하며
추켜세우고는 계산하기 전 쏙 빠져버리는 건 퍽이나 이타적인 행동이냐 말이다.
그게 눈꼴셔 독설을 내지르고 나면 노처녀 히스테리니 뭐니 들먹이며 면박을 준다.
그러면 침 빠진 벌처럼 몸에 힘이 쭉 빠진다.
잡다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씹어대고 있는 동안 진주는 아무 말도 없었다.
대화 없는 겸연쩍은 분위기가 사뭇 적응이 안됐다. 원래라면 말을 먼저 붙였을 진주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시판 관리를 하고 있는 진주를 보며 좀 전에 머쓱했을 입장을 생각하니
뒤늦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시누이와 올케가 될 사이에 내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먼저 백기를 드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손님이라도 오면 좀 나을 텐데 나른한 점심시간이라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별 없었다.
시큰둥하게 있던 나는 최대한 절제된 목소리로 말을 붙이려는데..
“쩌.. 어... 기..”
잠겨있던 목소리가 노래방 기계의 하울링 마냥 ‘찌~익’ 하고 찢어지듯 나왔다.
순간,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 덕에 진주는 피식 웃었다.
“크흠, 저기 너 좋아하는 돈까스 정식 시켜줄까?”
눈치를 슬그머니 보던 나에게 진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맑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끝 없는 저런 모습이 나와 몇 년을 같이 일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항상 일방적으로 받아주는 진주에게 미안해서 가끔은 후하게 보너스로 그 미안함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진주가 나한테 붙어있는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참, 아까 청담동.. 그 왜 저번에 산호랑 호박 브로치 주문하셨던 그 분 전화 왔었는데..”
“그래? 전화 달래?”
“아뇨. 그냥 청금석으로 타이핀 하고 커프스단추 세트로 해서 백금으로 디자인 주문 되냐고
물어보시던데?”
“요즘 라피스 라줄리 찾는 사람이 많네.”
“왜 성공을 보장해준다는 그런 미신 때문 아니에요? 취업시즌이라 더 많이들 찾는 거 같은데..”
“마냥 맹목적인 그런 미신 아니거든. 그렇게 만들어 주는 힘이 보석에 있는 거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석을 좋아하는 거구.”
입을 삐죽이던 진주가 마우스를 잡은 손을 움직여댔다.
“그리고 목걸이랑 반지 주문 들어왔는데, 이미지 올려진 거 보실래요?”
“이따가, 나 지금 너무 피곤하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자서.”
“싱글인 언니가 밤에 잠 못 잘 일이 어디가 있어요?”
“이게 또 좀 풀어주면 금세! 그리고 가게에선 선생님이나 사장님이라고 부르랬지!”
“알았어요. 들어가서 좀 쉬세요. 대신 밥 오면 체인지 하자구요.”
“고객한텐 친절히! 누구처럼 얼굴에 오만상 쓰고 있지 말고.”
“누구요?”
“있어, 그런 애가.”
“참, 언니! 아니 사장님! 캐드작업 다 끝냈어요?”
“작업 할 게 한 두 개야지. 나 책 좀 보고 쉴 테니까 손님 오면 불러.”
약봉지에 든 듣도 보도 못한 쌍화탕이 생각났다.
“이거 너 마셔라.”
“어머, 언니 고마워요.”
난 언니라는 말에 혀끝을 찼다. 진주는 아차 싶었는지 혀를 날름 거렸다.
“나 감기기운 살짝 있는 거 어떻게 아시구.”
“그거 약 지으니까 덤으로 딸려오더라.”
“그럼, 그렇지.”
“나 안 먹고 너 주는 거니까 한 방울까지 남기지 말고 먹어.”
“공짜로 얻은 거면서 생색은.”
“저게, 먹기 싫음 줘!”
“누가 먹기 싫대요?”
사무실로 들어가 소파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몸을 뒤로 젖히며 기지개를 폈다.
졸음이 쏟아지긴 했지만 참아야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식사가 배달되었는지 진주는 수선스럽게 노크를 해댔다.
“알았어, 나간다. 나가!”
한가하기도 했고 나른하기도 하던 터라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진주가 밥을 먹는 사이 내 손으로 직접 쇼윈도에 유리창을 닦기로 했다.
팔까지 걷어붙이고 유리 닦는 세정제를 열심히 뿌려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갈 쯤에 요란한 크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 놈의 차였다. 볼 때 마다 내 눈에는 그 놈보단 그놈의 차에 먼저 시선이 간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자기 돈 주고 저렇게 멋진 스포츠카를 샀을 리는 없고
돈 많은 부모덕을 톡톡히 보고 사는 놈 같아서 사실 부럽기도 했다.
‘쟤는 놀고 싶을 때 놀고, 쓰고 싶을 때 쓰고, 하고 싶을 땐.. 뭐 그건 지가 알아서 할 거고,
퍼질러 자고 싶을 땐 또 그러겠지.’
나는 그 놈만 보면 저 밑바닥에 감춰져 있던 열등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더러워진다.
매번 올 때마다 가게 앞을 떡하니 막고 가뜩이나 좁은 가게 앞에다 바짝 차를 댄다.
그놈의 등장은 항상 예사롭지 않다.
차에 걸맞게 패셔너블한 옷차림은 항상 빼어난 외모의 그놈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예쁘기만 할 뿐 향기가 없는 꽃처럼 빛나는 외모만큼 인격이 따라주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오늘은 또 뭔 애먼 소리로 사람을 잡을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기대부터 되었다.
첨에 우리가게에서 실랑이를 벌였을 때는 있어 보이는 집 자식이 왜 저렇게 쪼잔한가 싶었지만
갈수록 그놈과의 입씨름에도 재미가 들렸다. 그놈도 은근히 즐기는 듯 느껴질 때가 있다.
득달같이 차에서 달려 나온 그놈은 열나게 유리창을 닦고 있던 내 빈 옆구리를 사정없이 푹 찔렀다.
그러고는 가게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어련히 들어오리라는 것을 아는 놈이다 그놈은.
티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책을 허락도 없이 빼내들곤 대뜸 나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걸었다.
“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 나이든 여자들은 이런 책 읽나 봐요?”
어이가 없었다.
“그럼 젊은 사람들은 어떤 책 읽어요?”
“책이요? 책 안 읽죠. 그 시간에 게임하거나 클럽 가서 술 마시거나 여자 만나지.”
“아, 네.. 저도 게임은 잠깐 해봤는데 머리가 텅 비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래 못 하겠더라구요.”
썩소를 마음껏 날리며 놀려댔다. 하지만, 되받아치는 기술은 그놈이 나보다 한 수 위다.
“그래요? 머리 안 쓰는 게임만 하셨나보네.”
“크흠. 디자인 얘기나 하죠? 어느 부분이 어떻게 마음에 안 드시는지 좀 소!상!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뭐 그렇게 소상히 말할 거까진 없구요. 다 마음에 안 든대요. 제 여자친구가.”
첫댓글 재밌어요~~~ㅋㅋ
ㅎㅎ 다시 연재 시작하셨군요. 재밌게 읽겠습니다. 바로 새로 연재하시고 많은 이야기들이 가득 하신것 같아요~!
아이코! '내 여친은 골드미스' 편에도 댓글이 달렸네요^^ 권리다군군님과 redhan님 두 분 다 처음 뵙네요.. 너무 감사드리구요..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전 힘을 얻어 또 열심히 쓰겠습니다. 행복하시구요^^
읽고 코멘을 안남겼다 ㅠㅠ 어제 읽었는데 ㅠㅠ 전편소설은 새드였지만 이번에는 해피로 해줘요~
아이코! 짱구액션가면님처럼 댓글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도 없으실 거예요. 잊었던 댓글까지 달아주시고 어찌 이리도 맘이 고우실까나.. '내 여친은 골드미스' 편 해피로 잡아놓긴 했는데 이야기의 방향이 어디로 흐를진 저도.. 행복한 결말이 이어질 때까지 지켜봐 주세요^^
이야기가 정말 풍부해지네요. 나른한 봄인데 즐거운 이야기가 됬으면~ 생기도 넘치고 기대!!!
아이코! 기대에 부흥하려면 더 열심히 써야겠어요.. 혼트님도 좋은 글 부탁해요~~~~
재미있네요.....새롬이 아주 성격이 화끈하네요....장점이면서 한편으로 단점이겠죠....다음편도....건필아시죠...
아이코! Benjamin님 건필!!! 마음에 새길게요.. 감사드려요~ 다음 편으로 만나 뵐게요~~~~~
프롤로그가 꼭 내 얘기를 하는 줄 알았네요 ^^
아이코! 국강상광개토경님 아니십니까^^ 공감을 하셨다니 저도 흐뭇합니다.. 항상 이렇게 뒤에서 조용히 힘을 북돋아 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