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3번째 편지 - 절대 공간
비상계엄과 탄핵소추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제 27년 만에 항공기 참사로 181명의 탑승객 중 179명이 사망했습니다. 무어라 지금 상황을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사망자를 애도하는 일 외에는 달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려 저만의 공간으로 들어섰습니다. 지난달 저희 집 일부에 만든 저만의 안식처입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현실에서 저만치 멀어져 보려고 합니다.
<차안(此岸)의 세계>가 아닌 <피안(彼岸)의 세계>로 들어서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우리나라에 이런 액운이 이어지는가? 답답한 심정입니다.
저는 이 공간을 만들면서 글을 한 편 썼습니다.
제목은 <피안의 세계>입니다.
"저는 퇴근할 때마다 손님이 들어서기 전 호텔 로비나 카페처럼 우리 집이 잘 정돈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몇 번 집 전체를 인테리어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집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잡지에 날 정도로 인테리어를 잘했더라도 그 공간은 생활공간이라 몇 달이 지나면 혼돈과 무질서의 싸움에서 늘 패하고 맙니다.
저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정리 정돈법을 공부하고 곤도 마리에의 미니멀리즘에 심취하기도 하였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리된 공간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 2년간 일본을 자주 다니면서 일본 인테리어에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찰이 주는 정갈함과 편안함은 '나도 이런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일본 인테리어 요소 중 <반듯함>에 매료되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단순함은 반듯함과 어우러져 공간에 깊이를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방 곳곳에 있는 <직선>은 이 반듯함을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직선>으로 구성된 공간을 꿈꾸었습니다.
그 직선의 공간 요소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칸살문>입니다. 칸살문은 다른 문처럼 이 공간과 저 공간 사이를 꽉 막아 두지 않습니다. 통과되는 빛이 두 공간을 이어줍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듯한 그 미묘함이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여유 있게 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일본 인테리어에서 배운 것은 <와비사비> 개념입니다. 와비는 완전하지 않은 것, 사비는 오래된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본의 미학적 개념입니다. 저는 공간은 완전할 수 없고 늘 새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와비사비의 정신이 깃든 공간을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사무실 근처에 있는 카페 B2에서 그런 공간을 만났습니다. 일본식 인테리어를 한 카페였습니다. 저는 그 공간을 인테리어 한 분을 소개받아 rare layer 박종성 대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대화 끝에 B2에서 진화된 버전의 카페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아파트는 두 세대가 함께 또 따로 쓸 수 있도록 구성한 세대 분리형 구조입니다. 양쪽 중 한세대의 부엌 및 식당과 거실 약 25평 정도의 메인 공간을 과감하게 카페로 만든 것입니다.
그 공간은 모두 직선으로 구성했고, 칸살문이 다섯 쪽 있습니다. 커튼도 두 겹으로 만들어 커튼을 내리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됩니다. 일본 교토의 어느 찻집을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 공간에는 다른 물건을 절대로 둘 수 없습니다.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장식장도 텅 비어 있습니다. 아마 몇 년 후에 이 공간에 와도 처음 인테리어 한 직후와 같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이 공간에 대한 철칙입니다.
제가 그 공간에 머물며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새벽 5시입니다. 어둠이 가시기 전 그 공간에 들어서 부엌 쪽 등만 켭니다. 그러면 칸살문 사이로 거실 쪽에 빛이 들어옵니다. 거실 검은색 차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십니다.
그리고 쇼팽의 녹턴 9번 2악장을 듣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저는 <피안의 세계>의 주인입니다. 공간의 힘은 위대합니다."
오늘 아침 저는 그 공간에 들어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뒤엉킨 <차안의 세계>에서 극도로 정제된 <피안의 세계>로 피신하지 않으면 제 자신을 지켜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혼란과 무질서로 뒤덮인 비상상황>에서 빠져나와 <소박하고 지루한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언제쯤 우리에게 이런 순간이 올까요.
우리 모두가 선진국을 향해 정신없이 치달을 때부터 어쩌면 이런 비상상황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요, 소비, 향락을 탐닉하던 그 시기부터 우리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거부했는지도 모릅니다.
<미술과 음악, 끝없는 우주의 확장, 종교의 깊이, 나와 너 그리고 생태계의 신비로움 등이 선사하는 거대한 의미를 뒤로 하고 우리는 소비의 러닝머신에서 미친 듯이 달린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노르웨이의 사회인류학자 토마스 힐라드 에릭센의 저서 <인생의 의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저는 혼돈과 무질서를 거부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제가 붙인 이름은 <절대 공간>입니다. 다른 것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공간에서 인생의 의미를 사색하고 찾을 것입니다.
혼돈과 무질서 속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2024년은 저물고 있습니다. 이 혼돈과 무질서가 하루빨리 정리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항공기 참사 피해자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올립니다.
2024.12.30. 조근호 드림
<조근호변호사의 월요편지>
첫댓글 좋은글 의미있게 읽었습니다.2025년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사라져 새로운 질서 와 자유민주주의 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