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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 2019 | 97분 | 감독 세르히오 파블로스 | 애니메이션 | 전체관람가
영화 <클라우스> 내용
크리스마스 시즌의 추운 계절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이야기”로부터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산타클로스 이야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아마도 해마다 찾아오는 12월에 아이들이 가장 먼저 떠 올릴 인물은 산타클로스가 아닐지 싶습니다. 물론 선물 때문이겠지만요.
빨간색 옷을 입고 풍성한 수염을 가진 산타클로스는 산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전 세계 착한 어린이를 찾아가 선물을 준다는 전설 속 인물입니다. 산타클로스의 복장과 신분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나라와 지역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이름 앞에 붙은 ‘산타(거룩한 혹은 성)’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 전통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클라우스가 어떻게 성인이 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해주는 이야기랄까요.
영화 <클라우스>는 스페인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입니다. 종교적 느낌을 모두 뺀 것으로 산타클로스의 스페인 버전이라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주인공 제스퍼는 오늘날로 치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고 자란 인물입니다. 제스퍼의 아버지는 오늘날 우체국 국장이라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습니다. 제스퍼는 아버지의 배경만을 믿고 시종 드는 사람들의 편의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게으르게 살아갑니다. 아들의 미래를 염려한 아버지는 제스퍼가 우체국 일을 배워 나중에 자기 자리를 물려받을 걸 기대했으나, 제스퍼의 안일한 태도는 아버지 기대에 못 미칩니다. 심지어 아버지 뒤를 이을 걸 생각하며 굳이 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의 훈육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리는데요, 아들 제스퍼를 외딴 섬마을 스미어 렌스버그 우체국으로 보내기로 한 겁니다. 그곳에서 1년 내 총 6000통의 편지 업무를 마치면 그때 돌아올 수 있고, 만일 그전에 돌아오면 유산은 한 푼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엄포와 함께 말이지요.
온갖 불평과 두려움과 염려를 안고 연락선을 타고 스미어 렌스버그에 도착한 제스퍼는 그곳이 사시사철 눈 덮인 마을임을 알게 되고 게다가 마을의 음산한 분위기에 한층 더 충격을 받습니다. 엘링보 가문과 크럼 가문으로 구성된 섬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낸 끔찍한 정서였습니다. 이 두 가문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서로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어서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상대 가문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서로 괴롭혔고 또 서로 싸우며 지냈습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종은 원래 마을에 소식을 알리는 용도였으니 지금은 두 가문의 싸움을 알리는 전쟁 포고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갈등의 DNA를 갖고 태어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학교 선생님 알바는 두 가문의 갈등과 반목에 영향을 받은 아이들까지도 서로 싸우는 바람에 싸움터로 변한 학교에서 더는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마을을 떠날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생선 장사로 돈을 모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제스퍼는 섬마을에서 1년 동안 6000통의 편지 업무를 마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제스퍼에게는 갈등과 반목으로 가득한 스미어 렌스버그 마을에서 편지 업무를 마칠 계획을 세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제스퍼는 마을을 돌아다니고 또 집을 방문하면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 것을 권고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안부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한 두 가문 간 싸움이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타인을 향한 적대감이 결국 자기편 사람들에게까지도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 겁니다.
아무도 편지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제스퍼는 마을 숲에 거주하는 클라우스를 우연히 방문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숲 속 나무꾼 클라우스의 위협적인 모습을 보고는 놀라 도망하는데, 도망치면서 마을의 아이가 그린 그림을 떨어뜨립니다. 이 그림을 본 클라우스는 그림과 똑같은 나무 장난감을 만들고 제스퍼와 함께 그것을 그림을 그린 아이에게 전해줍니다.
장난감을 받은 아이가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제스퍼는 이것을 우편 비즈니스로 연결할 걸 생각합니다. 그러니까요, 편지를 쓰면 숲 속에 사는 목수 클라우스가 장난감을 만들어서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를 퍼뜨린 겁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걸 보고는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로 주고 그렇지 않으면 선물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장난감에 대한 기대로 편지를 쓰는 건 물론이고 앞다투어 가며 착한 일을 실천합니다. 아이들의 선행은 어른까지도 자극해 마을은 금방 서로 소통하고 갈등과 반목의 분위기는 점점 사라집니다. 마을에 평화의 기운이 넘치게 됩니다. 두 가문이 만들어낸 이전의 분위기를 더는 느낄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학교 선생님 아달도 놀랍도록 바뀐 학교 분위기에 한층 고무되어 섬을 떠날 계획을 포기합니다. 선물을 얻기 위해 시작한 선행은 또 다른 선행으로 이어져 마을 전체를 변화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마을의 장로들은 이런 분위기에 불만을 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전부터 지속한 전통에 맞지 않으며 또한 변화된 분위기에선 자기들의 역할이 사라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마을의 변화를 심각하게 본 두 가문의 장로들은 일단 모든 싸움을 멈추고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합니다. 마을의 변화를 지속하기 위한 선의의 협력을 위한 합의라기보다는 이전 분위기로 돌아갈 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합의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이 세운 계획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제스퍼가 하루속히 마을을 떠날 수 있는 구실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의 분위기가 바뀐 것이 선물에 있다고 보고 클라우스가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을 없애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먼저 그들은 제스퍼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제스퍼가 1년이 채 못 되어 할당된 업무를 마쳤다고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스퍼의 아버지는 제스퍼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를 데리고 본토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제 제스퍼는 그토록 바라던 꿈같은 시간을 보낼 일만 남은 겁니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해 들은 마을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는데요, 왜냐하면 제스퍼가 그동안 마을의 평화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이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두 가문의 장로들은 클라우스가 끄는 마차를 습격해서 아이들에게 더는 선물을 배달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마을은 갈등과 반목으로 가득한 옛날로 되돌아갈까요, 아니면 변화된 평화의 모습을 유지하게 될까요? 물론 영화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니까요, 해피 엔딩입니다. 제스퍼는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지 않았고요, 또한 클라우스를 돕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선물을 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계획을 미리 알았던 클라우스와 그를 돕는 사람들은 원로들이 공격한 마차에 가짜 선물 꾸러미를 실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소통하면서 평화로 가득한 마을로 변한 후 제스퍼는 마을 학교 선생님 아달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았고, 클라우스는 섬마을을 넘어 전 세계 어린이에게 선물을 전해주는 산타클로스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등이 아닌, 소통으로
영화 <클라우스>는 산타클로스 설화의 스페인 버전이라고 했는데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한 내전인데요, 이 전쟁으로 스페인 전 지역이 황폐화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근대에 일어난 사건 같아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미 중세부터 시작한 종교 간 갈등이 이념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또 이념의 갈등이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져 마침내 내전으로까지 이어진 겁니다. 스페인 내전은 이미 스페인 내에 깊이 내재해 있는 갈등과 반목이 겉으로 드러난 사건에 불과합니다.
앞선 세대가 서로 갈등하니 뒤이은 세대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갈등에 휘말리는 비극의 역사가 계속 이어져 온 결과인 거죠. 산타클로스의 스페인 버전은 다분히 이런 배경에서 형성된 것이 아닐지 싶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스페인의 경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모든 나라마다 내적인 갈등은 항상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남과 북의 갈등은 대표적입니다만, 동서의 갈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보수와 진보도 그렇고,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도 그렇습니다. 단지 남과 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혹은 동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전 세대가 경험한 부정적인 것을 후세대가 그대로 물려받아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만, 부조리한 상황입니다. 스미스렌스버그 마을의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의 적대관계를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선물이라는 모티브가 작용하긴 했으나 변화는 바로 소통에 있음을 영화는 말해줍니다. 타인에 대한 대적 관계는 자기편 사람들을 결집할 것이라 믿지만요, 그건 일시적일 뿐입니다. 결국엔 서로에 대한 소통마저도 단절됩니다. 특히 소통을 통해 일어난 변화가 어린아이들로부터 시작했다는 건 의미심장한데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관계에 안주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세대에 적합한 방식의 소통을 통해 얼마든지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일깨워줍니다. 영화에서는 선물을 기대하는 편지가 매개로 작용했지만요,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을 통해 갈등과 반목을 넘어 평화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이 가능하다는 거죠.
소통에서 포용으로
소통은 서로 알고 지내는 관계를 넘어섭니다. 소통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심지어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을 받아들이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아는 관계를 넘어 나는 너의 작용을 받아들이고 너는 나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관계를 전제합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관계 맺음의 방식이 바로 소통입니다.
이런 의미의 소통에서 가장 모범적인 예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도록 매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죠.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늘과 땅 혹은 신과 인간이라는 그저 단순한 도식적인 관계를 넘어 서로를 받아들이고 또 서로 안에서 작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게 된 것이죠. 물론 이 일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또한 이 일에서 선구자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자로 계시면서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또한 서로 안에서 작용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요,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세상에 비친 기독교 이미지는 갈등과 반목으로 가득합니다만, 우리는 이것에 대해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참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말이지요. 우리가 먼저 기독교 신앙을 통해 소통하는 관계를 회복할 때, 우리를 통해 세상은 소통하게 될 것인데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글. 최성수 신학박사
영화와 영성 신앙의 관계를 고민하며 글을 기고하고 있다.
현재는 '서로 세우는 교회(온라인)'에서 섬기고 있으며,
CBS대전 <영화 속에서 만나는 주님>에 출연하고 있다.
출처 : 더미션(https://www.themission.co.kr)
클라우스 리뷰
https://youtu.be/9Xs2UTzmM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