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 자향
여보!
그때가 생각나요?
당신과 내가 데이트할 때 말이에요
종로에 있는 비원 뜰을 거닐 때 말이에요
그때 아마도 여름이 살짝 지나고 초가을로 접어들 때였지요?
퇴색되지 않은 파란 잔디밭을 걸을 때였어요
느닷없이 제가 그런 말을 했지요
잔디가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잔디를 밟으며 애석하다는 마음으로
했던 말 이었는데
당신은 그 말 한마디에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나중에 말해주었었지요
잔디의 숨소리를 들을 정도에 심성이라면
분명 착한 여자일 거라고 ㅎㅎㅎ
그래서 시하층층 10 식구
맏며느리로 낙찰이 되었던 거구요
날이 서도록 잘 다린 군복 사지바지에
정모를 쓰고 걷던 당신은 아가씨들이
환호성 지를 만큼 멋졌지요
어느 날이었던가?
남산에 올라갔다 내려와 당신과 헤어져
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당신은 사람 많은 명동길로 접어들때 였지요
난 막 출발해서 달리는 뻐쓰에서 뛰어내려 당신께
달려가고 싶었어요
뛰어가 포옹하고
당신 얼굴에 입맞춤하고 싶었다오
차창밖으로 당신이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던
그때 그 기억이 아직도 아련히 떠오르네요
지금생각해 보면
20대 가 한창 어린애 같아 보이는데
그땐 아니었어요
최고로 성숙한 사랑의 묘약을 당신과 나만이 알고 있는 듯
우리들의 사랑만이 세상을 지배한 듯
온통 세상을 당신이 다 차지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청춘이었는데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이제는 거실소파 한끝에 붙박이 처럼 붙어 앉아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안쓰럽도록 저린 눈물 흘리는 아내를 아시나요?
요즘은 부쩍 고관절이 아파서 걸음걷기도 힘들어 하시니....
어디 나갔다 들어오면 늘 그 자리에
우두커니 당신이 지켜주고 있어
그래도 얼마나 마음 든든한지요
충성을 외치던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갔나요?
난 당신은 안 늙을 줄 알았어요
제식훈련에 길들여진 당신은
지금도 내복을 안 입고 목에 머플러도 잘 안 하려고 고집 피우지만
여보 당신이 늙었다는 걸 아무리 인정 안 하려고 해도
그건 마음일 뿐 육신이 이미 제대로
말을 안 듣는다는 걸 아셔야 해요
이제는 서로 챙겨줄 것이라곤
아픈 곳을 서로 묻고 하는 것 이외엔 할 일이 없군요
왜! 아픈 남편 아픈 아내 일지라도
죽지만 말고 서로 옆에 있어주기만을 바라는지 알 것 같아요
어제도 당신 초등학교 동창이신 친구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문자를 받고
한없이 침울해하시던 모습
이제는 남에 일이 아닌
우리들 자신의 일들이 되어버렸군요
우리에게도 헤어질 날이 얼마 큼이나 남아 있을까요?
그날까지 서로힘이 되어주며
싸늘하게 식은 손 되기 전에
더운 손 마주 잡고
서로 따듯하게 지켜줘요 여보!.
출처: 향기있는 좋은글 원문보기 글쓴이: 자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