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P align=center><FONT face=돋움><FONT size=2><FONT color=blue>사랑을 분석하라, 문학이 거기
있다.</FONT><BR></FONT></FONT></P>
<P align=right><FONT face=돋움 size=2>김대행, 『문학이란 무엇인가』문학과 사상사, 1995<BR></FONT></P>
<P style="LINE-HEIGHT: 150%" align=left><FONT face=돋움 color=red size=2>'제 눈의
안경'의 행렬</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문학이 어찌 이런 몇 줄의 글로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랴. 애당초부터 이 시도는 무모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방황을 통해서 문학의 옷자락 한 부분이라도 매만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BR>이제부터는 문학의 모든 것을 가장 함축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랑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것을 종종 '연애의
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사랑을 아는 사람이면 문학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BR>'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랑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거나 문예지의 추천을 필하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사랑의 전과정이 바로 문학의 전과정과 같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의 얘기라도 좋고 내 얘기라도 좋다. 어쩌면 저렇게
부부가 닮았을까. 생각되는 내외가 있는가 하면, 두 사람이 정말 사랑을 해서 어울려 다니는 걸까. 의심스러운 커플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는 뜨겁기만 하다. <BR>이럴 때 우리가 하는 말이 있다. '제 눈에 안경'이 그것이다. 평생을 함께 할 반려를 선택하는 것이 남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시력과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사랑을 하면 눈에 콩꺼풀이 씌인다'는 말은 사랑의 맹목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제
눈의 안경'이란 말은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본다는 말에 해당한다.<BR>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 처음을 상상하기 바란다. 그것은 어느 날
돌연히 시작되기도 하고, 오랜 기간을 천천히 관찰하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경우건 자기의 발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BR>맞선이란
그 발견이 더디거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발견이 이루어지도록 주선하는 강제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BR>그 어떤 과정을
통해서건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이 세상에 '있게' 된다. 그 이전에도 그 사람이 객관적 사실로 존재야 했겠지만,
내가 인식하고 그 인식을 통해서 비로소 구성되는 '세계'에는 그 사람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비로소 있게 된 것이다.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우주에 가득한 존재로 인식될 때 우리는 사랑에 불타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BR>남들은 별로 주목하지도 않는 대상에 대해서, 아니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한 대상에 대해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부여하고 감싸안은 행위, 이것이 사랑이며 문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주관적이라는 점에서도 사랑과 문학은 닮아 있다. <BR>'제 눈의 안경'이란 말의 참뜻이 여기에 있고, '사랑을 해서 시인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BR>그러고 보면, 사랑을 하는 모든 이와, 글을 쓰는 모든 이와, 글을 읽는 모든 이는 다 제 눈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제 눈에 맞는 안경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color=red size=2>착시(錯視)와 자기
동일시(自己同一視)</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불이 나서 물을 가득 싣고 달려가는 자동차는
불자동차인가 물자동차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BR>우리의 관습으로서는 불자동차라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가리켜 물자동차라고 한대서 이를
지탄할 논거는 없다. '불'과 '물'의 양면성을 다 지니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부르느냐 하는 것은 양면 가운데서 어떤 것을 보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BR>내 얘기를 하자. 웃을 때 보일 듯 말 듯 드러나는 금니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여겨지는 한 여자가 있었다. 지금 내 아내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BR>그러나 이 무슨 착각인가? 금니가 아름답다는 것은 미적 환상일 따름이요, 그것은 치아가 부실하다는 증거임을 그때
알아차렸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으니 제 눈의 안경이 바로 이것인가 싶다. 지금 내 아내는 열심히 치과엘 드나든다.
<BR>그러길래 '겨울철에 여름 옷을 사오는 여자는 알뜰한 사람인가 소비형인가' 하는 질문도 있지만, 인생만사 모두가 여러 면을 가지고 있는
법이고, 그것은 흔히 모순이요 당착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그것을 보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BR>나의 아내는 결혼 전에는
담뱃재를 아무 데나 털어놓는 나를 보고 '대범하고 소탈하다'고 하더니, 결혼 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변한 데가 없는 그 행동을 두고
'똥오줌도 못 가릴 사람'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이것이 어찌 대상의 진실이요, 오직 보는 이의 착시 또는 자기 동일시가 아니고
무엇이리요.<BR>사랑 얘기나 문학 얘기나 같은 뿌리요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아무 글에서나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BR>가령 정비석의
저 유명한 글 '산정무한(山情無限)'에 나오는 한 대목에서도 그 일은 가능하다.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 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裏)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천운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지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BR>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 년도 수유(須臾)던가!<BR>고작 칠십 평생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敷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이 글의 필자가 마의태자의 무덤에서 본 것은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내 알아차릴 수가 있다. <BR>사실 어느 무덤이건 동두렷이 쌓아 올린 흙더미요 그 위에 잔디가 덮인 지상 구조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공동묘지를 지나칠 때 남의 무덤에 대해서 무슨 감흥이 있던가? 그것이 자기 조상이거나 부모님의 것일 때 그 대상을 보는 눈은
사뭇 달라진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건 자기 자신을 그 대상에 투사해 바라보는 자기 동일시며 착시 현상임에 틀림이 없다. <BR>문학은 바로
이러한 눈뜸에서 비롯된다.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color=red size=2>'보이는 것은 그대 얼굴'과
형상화</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하는 유행가가 있다. 이런 노래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대체로 그런 심경을 맛보았다는 증거가 된다.<BR>사실 깊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더구나 그 시기가 정신 못 차릴 나이거나 상황일 때, 눈길 닿는 곳마다 그 사람의 모습만 있더라는 추억은 다들 지니고 있을 것이다.
'모습', 그것이 문학적 용어로 그럴듯하게 말하는 '형상화'이다.<BR>이걸 글로 드러내는 것을 가리켜 '형상화'라고들 하는데, 이런 용어가
문학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문학의 요체가 형상화라고 설명하는 배후에는, 그것이 특별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오해가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BR>그러나 정말 깊은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면, 자기가 기술을 부리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모습이 천장에,
벽에, 책장에, 도처에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으리라.<BR>문학도 그러하다. 어떻게 이걸 그려 낼까 하고 궁리한 결과 글이 씌어지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충만한 애정으로 바라보노라면 그 모습이 뚜렷한 형상을 가지고 다가서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문학의 본질에 다다를 수가 있다. 진정한
문학은 기교가 대상에의 침잠이라고 말하는 참뜻이 여기 있다. <BR>이런 점에서 문학은 짝사랑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은 이쪽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데, 그가 웃는 모습으로 다가서기도 하고, 때로는 무어라고 말도 하고, 어떤 때는 우수에 젖어서 낙엽 진 포도 위를
걸어가기도 한다.<BR>이런 것을 두고 상상이라는 말도 쓰는데, 상상이란 것도 실은 저절로 떠오르는 그대의 얼굴처럼 대상에의 침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라는 점을 사랑의 체험을 통해 확인해 주길 바란다. 이 점을 놓치게 되면 문학을 손재주로 아는 기술자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게
된다. <BR>대상에 몰입하게 되면, 그 모습이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뜻에서 형상화라는 말을 쓰고, 또 그러한 정신의 작용을 가리켜 상상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거기에 어떤 질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것을 밝혀 보려는 노력이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도 사실이다. <BR>그러나 그것이
만족스럽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일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신 작용이 본디 그렇게 다양하고 복잡 미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설명은, 연애할 때처럼 대상에 몰입하라는 말뿐일 수도 있다. <BR>야콥슨(R. Jakobson)
같은 사람들은 실어증(失語症)을 관찰해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형상화의 두 유형을 가정하기도 하였다.<BR>그에 따르면, 말을 해야 할 때
'어머니'나 '형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선택의 실패'에 의한 실어가 있고, 반면에 '나는 집으로 간다.'고 해야 할 때에 '나는 집을
가니?'와 같이 '결합의 실패'에 의한 실어가 있다고 분석된다. <BR>이로 비추어 볼 때, 정상적인 언어 생활에서 선택을 결정하는 요인은
'유사성'의 원리이며, 그 유사성이 은유에 의한 형상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고, 결합을 결정하는 요인은 '연속성'의 원리이며, 그 연속성이 환유에
의한 형상화를 이루게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BR>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대상을 '수염'으로 떠올리는 것은 '아버지'가 지닌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한 것이므로 연속성에 근거한 환유적 형상이 된다.<BR>반면에 '아버지'를 '두부'로 떠올리게 되면 그와는 무관하되 유사성에
의해 구체화된 형상이므로 은유적 구조를 갖게 된다.<BR>야콥슨은 은유적 형상화가 낭만주의적 특질이며 환유적 형상화가 사실주의적 특질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가령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에서 철길에 뛰어들어 자살한 주인공의 최후를 말하기 위해 나둥그러진 그의 핸드백을 보여 주는
것은 환유적이다. <BR>이러한 환유성을 극도로 추구한 것이 입체파의 정신이다. 입체파가 부분의 이미지를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BR>반면에 은유성을 무한대로 추구한 것은 초현실주의다. 유사성의 축을 따라서 형상의 징검다리 뛰기를 계속함으로써 사실성을
떠난 주관적 형상을 극대화하게 된 것이다. <BR>야콥슨의 이런 분석으로 형상화에 대한 천고의 의문이 다 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문학은 특별한 기술자의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말할 줄 아는 모든 사람이 다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누구나 문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color=red size=2>'소설 쓰고 있네'와
서사</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얘기가 다소 딱딱해졌다면 다시 사랑 얘기로
돌아가자.<BR>정말 골똘하게 사랑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설적 상상을 하게 마련이다. <BR>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약속한 시간에 늦었다.
그때 당신은 무엇으로 그 초조하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었던가 회고해 주기 바란다. <BR>'왜 늦었을까? 그의 어머니가 나를 마뜩치 않게 보는
눈치인데, 어쩌면 오늘 누구를 만나러 가느냐고 묻고는 못 가게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가 순전히 주저앉았을까? 그렇지 않겠지…… 아마
무슨 핑계를 댔을 거야. ……그러면 언쟁이 벌어지겠지. 그런 다음에 화를 내고는 뛰쳐나올 거야. 늦게 나섰으니 차가 더 막히겠지, 그래서 지금
저기 로터리께를 지나고 있을 꺼야…….'<BR>대개 이런 식의 생각으로 머리 속은 혼미하다. 이 혼미가 바로 형상화요 상상인데, 무슨 일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되어 가는가 하는 쪽으로 생각을 해나가는 것이라서 이를 서사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BR>그래서 뒤늦게 그 사람이
헐레벌떡 약속 장소에 나타났을 때, 어찌어찌하다가 그 생각을 얘기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 '아유, 소설
쓰고 있네!'<BR>이때 소설을 쓴다는 말은 무엇인가? 여기에 문학을 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상에 몰입해서
그 형상을 떠올리는데, 서사적인 방식의 상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면 그것이 소설이 된다는 말이다. <BR>그 한 예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찾아보자.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12월 4일<BR>부탁하네 여보게, 나는 다 틀렸네,
이 이상은 더 참을 수 없다. 오늘 나는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었단 말이다. 그녀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멜로디를,
온갖 표현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녀의 어린 동생이 내 무릎 위에서 인형에 옷을 입혀 주고 있었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맺혔다.
고개를 숙였더니 그녀의 결혼 반지가 눈에 띄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갑자기 그녀는 그지없이 감미로운 옛 멜로디를 치기 시작했다. 전혀
돌발적이었다. 위로감과 지난날의 회상이 나의 마음속을 꿰뚫고 스쳐갔다. 그 노래를 들었던 시절의 회상, 그동안 여러 번 우울했던 때의 회상,
불쾌한 일이나 빗나가 버린 희망에 대한 회상 등이, 그리고 나서, 나는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나의 마음은 절박한 감정에 짓눌려 질식할
지경이었다. 격렬한 감정의 폭발에 못 이겨 그녀 곁으로 성큼 다가서면서 나는 말했다. <BR>"제발, 제발 그만두시오!"</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베르테르가 목숨을 끊기 얼마 전에 남긴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글에서 형상화의 문제를 두 방면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BR>하나는 작가가 베르테르를 형상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르테르의 심리 상태가 롯데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BR>작가가 베르테르를 형상화하는 데서는 누구나 작가일 수 있음을 암시받을 수 있고,
베르테르의 마음이 롯데를 형상화하는 데서는 누구나 작품을 읽어 이해할 수가 있음을 시사받을 수가 있다.<BR>작가는 이루지 못할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결말을 이루겠는가를 골똘히 천착한 나머지에 이 한 편의 소설이라는 형상화의 구조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사랑을 겪어 본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BR>그러기 위해서는 베르테르를 누구보다도 잘 알아야 했고, 그는 반지 하나, 피아노 연주 하나에 어떤
심리 상태가 되어 무엇을 형상화할 것인가를 보여 주어야 했다. 우리가 또한 모두 그러했듯이. <BR>많은 사람,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오해가 있는데, 그것은 소설 또는 서사 양식이 주인공을 합리화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다. <BR>주인공을 가리켜
주동 인물이라 하고, 그에 대결하는 인물을 반동 인물이라고 한다든지, 주인공을 자아요 그 밖의 것을 세계라고 하는 것은 자칫하면 문학을 서부
활극의 차원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착하고 영웅적인 우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승리하고 악인은 지옥으로 간다는 식의 관념이 도사리게 된다는
것이다. <BR>약속 시간에 늦는 애인을 기다리면서 소설적 상상을 하는 사람이 누구나 경험하듯이, 약속 시간에 늦는 주인공만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서사적 상상을 할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그를 늦도록 만든, 인적·물적 모든 요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천착이 없이는 그 상상이 불가능하다. 혹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엉터리이다. 그런 엉터리</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 형상화를 거치면 그건 우연의 남발로 이어지는
삼류 신파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BR>그러기에 사랑이나 문학이나 마찬가지로 모든 대상에 대한 몰입과 천착이 필요해진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약속 시간에 늦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모든 원인에 대해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 마땅한 것들로 형상화는 이어져야 한다. <BR>그렇게 되려면
그 대상에 다시 또 몰입해야 함은 필연적이다. 마치 아기를 키우는 엄마가 아기의 마음이 되어 배고픔과 졸림을 분간하듯이 세상 삼라만상의 마음을
아기 마음 헤아리듯 할 때 사랑도 문학도 가능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 놓고 형상화해 나갈 때
문학은 서사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color=red size=2>'결혼식에서 끝나는 영화'와
시(詩)</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두 내외가 영화 구경을 갔다.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
얘기였고, 여자는 그 아름다운 화면에 매료되어 감동받았으며, 영화가 끝난 뒤 남편의 팔을 꼬옥 끼고 한동안 말없이 거닐다가 아직도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한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한마디 던진다. <BR>"참 행복한 이야기죠? 나도 저런 사랑을 해봤으면……."<BR>그러나 날아드는
남편의 퉁명스런 대답, "결혼식에서 끝났잖아! 결혼식 다음 얘기도 저렇게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림없는 얘기야!"<BR>그 다음에 이어질
아내의 대답을 우리는 몰라도 좋다. 그렇다고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는 견해에 지지를 보내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혼은 사랑의 종점일
수 없으므로, 결혼으로 끝나는 사랑 얘기는 사랑 얘기의 전부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랑의 어느 순간을 포착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사랑의 서사가 아니라 서정적 함축이라는 말도 된다. <BR>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바지만, 뜨겁게 사랑을 하던
사람들이 일단 결혼을 한 뒤에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의 사랑 이야기는 지리멸렬한 서사로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BR>결혼 전의
그 뜨겁고 농도 짙은 표정이며 언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연애 시절에는 '좀더 먹지 그래' 하던 사람이 결혼 후에는 '살쩌, 그만 먹어'
하다가 좀더 지난 뒤에는 '참 돼지같이 먹는군' 하게 되는 것이 그 지리멸렬성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BR>결혼 전에는 자기
신랑감을 자랑하다가 결혼해서는 자기 자랑을 하다가 한참 지나면 친구 남편 자랑을 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BR>왜 그런가? 우주를 압축해
놓은 것으로 인식하던 대상의 함축성이 느슨하게 풀어지면서 사랑보다는 일상의 몫에 눈을 더 주게 되면서 일어나는 변화다.<BR>가슴 졸이며 잠시
잠깐 만나던 시절에는 그 순간이 온 우주요 전부였기에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감정의 압축과 생활의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시절에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 <BR>하나의 눈짓도 의미가 있고, 한 번의 미소조차 전우주의 상징이 된다. 이래서 시는 탄생한다.
삼라만상의 순간적 함축이 시라는 말은 이래서 가능하고, 결혼 직전까지만 문제를 삼는 사랑 얘기는 서정이니 서사가 아니라는 말은 이래서 성립된다.
<BR>영화로 말을 하더라도 결혼 전까지는 보랏빛 화면이 지배하다가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부터는 회색의 화면으로 전개될 것이다. <BR>이치가
그러하므로 평생 동안 사랑이 식지 않고 연애 시절의 뜨거움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한평생이 순간과 순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시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게 된다.<BR>시와 사랑의 순간이 어떻게 함께 설명될 수 있는가를 정지용의 '유리창'이라는 시에서
살펴보자.</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BR>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BR>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BR>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BR>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BR>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BR>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BR>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BR>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BR>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 갔구나!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사랑하는 아이를 잃고 쓴 시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의
어디에서도 너는 누구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혹은 그래서 어찌어찌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지를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다.<BR> 특히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는 대목에서는 찰나에 가까운 환영과 현실의 결합을 보여 주기까지 한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표정만으로 사랑의 깊이를 알아낼 수 있는 것과 흡사하다. <BR>고로 시를 쓰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며,
사랑의 깊이를 헤아리는 마음이며, 뜨거운 사랑 때문에 대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마음이다. 다만 서사적인 형상과는 달리 압축된 함축으로 눈짓을,
그리고 손짓을 해석해 내는 마음이 시의 세계로 이어진다. <BR>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시인이며, 시를 읽고 알아차리는 마음은 사랑이라 말해도
무방하다.</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color=red size=2>사랑의 연극과 연극적
인생</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팔장을 끼거나 어깨를 감싸안고 거리를 걷는 젊은 남녀를
보거나 찻집 같은 데서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지그시 기대고 앉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여자를 보면 나는 화가 난다. <BR>그런 것이
허락된 분위기인 지금, 나는 그럴 만큼 뜨거운 사랑과는 먼 곳에 있다. 그렇다고 그런 시샘을 토로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오해는
말자.<BR>팔짱을 끼거나 어깨를 감싸안거나 머리를 기대거나 그것은 다 동작의 언어며, 그것이 연극적 형상화다.<BR>태초에 조물주가 인간을
빚으실 때에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브의 후예들은 자기 본적지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어서 잘 파고들고 기댄다고
해석한 우스갯소리도 들었지만, 그야 어떻든지, 그런 몸짓들은 천 마디 만 마디의 말을 웅변으로 담고 있는 몸짓의 언어다. 그래서 연극이다.
<BR>나이가 많이 든 부인이 남편의 시들한 사랑을 다시 환기시키고자 궁리를 했다. 그래서 실천에 옮기는데. 남편이 올 시간쯤 해서 파아란
잠옷만 걸치고 나타나 봤다가 하는데도 도무지 남편은 쳐다보지도 않는 눈치다. 그래서 대담한 연극을 꾸민다. 아예 알몸으로 남편 앞에 나서 본
것이다. 그래도 반응은 없다. 화가 나고 이왕지사 용기를 낸 일, 효과를 거두리라 작정을 하고 묻는다. <BR>"여보, 제 옷 안 보여요? 이
옷 어때요?"하면서 알몸을 강조하는데, 남편의 대답 왈, "거, 옷 좀 다려 입지 그래!"<BR>내용이야 어떻든지 이것이 연극의 요체다. 이윽히
들여다보는 눈빛만으로도 그 속에 감추어진 사연이며 경과를 다 짐작해 내고, 또 마음의 미세한 흔들림조차도 얼굴 표정으로 알아차리는 원리를 한
편의 구조화된 이야기로 형상화할 때 연극은 성립된다.<BR>따라서 희곡의 작가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내는 할머니가 되어서 반은 점쟁이요,
반은 의사처럼 인물들의 애증과 뒤얽힘을 샅샅이 읽어 낼 때만 작품을 쓸 수가 있게 된다.<BR>그것은 동작과 언어로 함축된 이야기적
형상화이기 때문에 서사와 시의 두 요소를 역동적으로 내포하게 된다. 독자도 이런 사랑의 기미를 알아차릴 수가 있을 때 그 작품의 참된 뜻을 알게
됨은 물론이다. <BR>그 한 예로 차범석의 『성난 기계』 끝부분을 보자.</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회기 : (강하게) 아내가 죽어가도 내버려두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BR>상현 : (처음에 지녔던 겸손과 비굴은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참견 마세요! 내 처를 내가 죽이건 살리건 무슨
걱정이오! 나 살고 남도 있지! (불쑥 일어서서 손가방을 쥐며) 아무튼 실례했습니다! (하며 문을 탁 닫고 나가 버린다. 회기는 감전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고 금숙은 회기를 주시하고만 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BR>회기 : (여전히 허공만 바라보며) 미스 정!<BR>금숙 :
예?<BR>회기 : 아까 그 환자의 주소 알지!<BR>금숙 : 예, 접수를 보면…….<BR>회기 : 좋아! 그럼 속달 우편으로
보내요.<BR>금숙 : 예? (하며 가까이 온다.)<BR>회기 : 수술을 받고 싶으면 편지 받은 즉시로 찾아오라고!<BR>금숙 : (놀라운
표정으로) 아니, 그렇지만…….<BR>회기 : (속삭이듯) 자신은 있어! 그대신 수혈용 혈액을 충분히 준비할 것을 잊지 말어!
알겠어?<BR>금숙 : (빙그레 웃으며) 선생님, 웬일이세요?<BR>회기 : 응? (가볍게 웃으며) 이번 환자는 꼭 살려 보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군!<BR>금숙 : 왜?<BR>회기 : (분노를 띠며) 그 친구에게 살해당할 바엔 내가 맡아서 살리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것
같아!<BR>금숙 : (힐끗 쳐다보며) 기계가 노하셨네요…….</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기계처럼 되어 버린 의사가, 아내가 죽기를 바라는
남자와 부딪치면서 인간성을 찾아 돌아서게 된다는 대단원인 이 희곡에는 달콤하지는 않아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읽어지고 찾아지느냐 하는
설명이 담겨 있다. 그 설명을 말로 하지 않고 동작과 형상화된 언어로 함으로써 희곡의 성격을 구현한다. <BR>개인적인 소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되는 드라마에서는 우리말이 아닌 말이 자주 등장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BR>그건 '나 당신 사랑해……' 하는 식의 대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말에 그런 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BR>'I love you……' 어쩌구 하는 말은 서양
사람들에나 하는 말이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눈 말똥말똥하게 뜨고 이런 말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뱉는 관습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BR>아니 그런 말이 필요 없이도 눈빛이며 행동거지 하나로도 충분히 사랑하고 않고를 능히 전달하고 판단할 수 있기에 굳이 그런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부엌에서 그릇 부딪는 소리며 칼·도마 소리의 가락이 어떠한가 하는 것만으로도 아내의 기분이 충분히 파악되는 데에 이상 무슨 군말이
필요하겠는가?<BR>이 점에서 우리의 사랑 풍습은 대단히 연극적이었던 셈이다. 그러기에 사랑을 아는 사람은 희곡도 저의 것이요, 연극을 사랑하는
것도 저의 것이 된다. 우리 모두가 그럴 자격이 있음을 새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size=2><FONT face=돋움 color=red>표현의 언어와 전달의
언어</FONT><BR><BR></FONT><FONT face=돋움 size=2>그러나 사랑했느니 말았느니 하는 말이 필요한 순간이 있음도
사실이다. 그것은 대개 사랑이 끝났음을 알리는 언어들이다. 정철의 '속미인곡'은 이런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예가 된다. <BR><저기
가는 저 부인, 본 듯도 하구나. <BR>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BR>해가 다 져서 저문 날에 누구를 만나러
가시는고?><BR><아, 네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 보오. <BR>내 얼굴과 이 나의 태도는 임께서 사랑함 직한가마는
<BR>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BR>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BR>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지나치게
굴었던지 <BR>반기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BR>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BR>내 몸의 지은 죄가 산같이
쌓였으니, <BR>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탓하랴. <BR>설워서 여러 가지 일을 풀어 내어 헤아려 보니, 조물주의
탓이로다.><BR><그것을랑 생각하지 마오. 마음 속에 맺힌 일이 있습니다. <BR>예전에 임을 모시어서 임의 일을 내가 알거니,
<BR>물같이 연약한 몸이 편하실 때가 몇 날일꼬?>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두 사람의 여인이 주고받는 형식으로 된 이 가사 작품은
사랑을 잃은 자의 하소연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 나오듯이 '맺힌 일'에 대한 사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BR>이런 점에서 이것은 사랑을
'전달'하기 위한 사설이다. <BR>그러나,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만, 돌아섰거나 떠나 버린 사랑이 이런 사설을 듣고 다시 발길을 돌리는 예는
극히 드물다. 그것은 이미 다른 바탕 혹은 다른 지평 위에 마음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BR>사랑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는 마음의
우편번호가 같음으로써 가능한 것인데, 그것이 달라져 버린 마당에는 어떤 전달의 편지도 통달의 효과를 상실한다는 것이 자명하다. <BR>그런
점에서 이 사설은 푸념이다. 그냥 자기 마음을 퍼놓은 것이지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보아야 하고,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표현에 중점이 놓인다. <BR>정철의 이 작품이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이런 데 있다. 잃어버린 사랑의 하소연이기는 하되, 어떤 목적을 가진
전언이 아니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하려는 표현의 욕구를 지향하는 형상화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BR>흔히 이별을 결심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말이 '참 많이 사랑했었는데……'라고 하는데, 우리말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경우는 이렇듯이 과거형에서만
가능했던 것 같다. <BR>그러나 그것은 무슨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표현해 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아쉬움의 토로에 그칠 뿐이다.
<BR>그러한 아쉬움이 전하고, 칼로 베듯이 정을 끊지 못하는 마음이 강할 때는 대개 상대방을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는 언어로 치환된다. 이것이
이른바 전달의 언어요 그 기대 효과는 교술적 설득이다. <BR>이황의 시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교술적 언어의 모습이다. <BR>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BR>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긏지 아니는고<BR>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face=돋움 size=2>사랑의 공감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며, 그러기에 설명이
없어도 통달이 가능하고, 그렇기에 형상화의 모습을 띠게 된다면 교술은 그러한 사랑의 모습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공감보다는 설득을 지향하게 됨이
당연하다.<BR>그러나 이미 공감의 기반에서 멀어져 있는데 공감을 형성하기란 지극히 어려울밖에 없다. 교술의 언어로 된 문학 작품이 감동이 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설득을 통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서지 않듯이, 교술의 언어는 감동은 없이 취지만 전달될 따름이다. <BR>문학이
형상화를 요체로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으며, 정철의 '속미인곡'이 충신연주(忠信戀主)의 간절한 호소면서도 설득의 언어가 아닌 표현의 언어로
형상화되었기에 그 작품의 감동이 더하다는 것도 사랑의 이치와 현상으로 족히 이해가 가능하다. </FONT></P>
<P style="LINE-HEIGHT: 150%"><FONT size=2><FONT face=돋움 color=red>결혼의 관습과 문학의
장르<BR></FONT><BR></FONT><FONT face=돋움 size=2>결혼식을 하기 전에는 온갖 궁리를 다 했었다. 덕수궁에서 가든
파티로 결혼식을 해볼까, 아니면 어디 학교 운동장에서 해볼까? 이런 궁리를 필요했던 것은 결혼 예식장이라는 것이 너무 소란하고 번잡하고, 그래서
속되다고까지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시장바닥 같은 곳에서의 결혼식만은 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범속한 예식장에서의 결혼식을
하게 되고야 말았다. <BR>우리 살아가는 데도 잘 굳어져서 체계화된 관습이라는 것이 우리 생각과 행동을 규정하고, 또 우리 스스로가 그 속에
매몰되어서 살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BR>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는 매우 대담한 용기와 그에 따른 어려움을 이겨낼 각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BR>그러나 나와는 달리 용기 있고 기백 있는 사람들은 이따금 관습에서 벗어난 결혼식을 하는 것을 본다. 물 속에서 잠수복을 입고
결혼식을 하는 사람도 있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는 사람도 있다. <BR>사랑을 분석하면 거기 문학이 있어서 사랑은 문학의 교과서라는 취지를
쓰고 있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도 사랑의 관습과 문학의 장르가 바로 그와 같음을 말하고자 한다. <BR>우리가 시라고 하면 우선 짧은 것, 줄이
들쑥날쑥한 것,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관습이다. <BR>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용기 있는 사람에 의해서 깨지기도
한다. 시조나 가사와 같은 정형적인 틀에 얽매여 있던 관습을 깨고 우선 길이에서 자유로운 시를 쓰게 된 것도 그런 변화로 이해하면 된다.
<BR>관습의 준수와 변형은 문화의 한 모습이며 본질이기도 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문화의 계승과 변모를 이루어 낸다. 사랑의 풍습이
그러하듯이, 용기와 형안을 지닌 사람의 손에 의해서 문학의 장르도 새로이 창안되고, 또 전통의 이름으로 어떤 자질을 계속해서 지니기도 한다.
<BR>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하던 결혼에서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결혼식으로 바뀌었지만, 신랑 신부가 퇴장을 할 때에 폭음탄을 터뜨리는 것은
옛날에 신랑과 행렬에 재를 퍼붓던 관습의 잔영이다. <BR>그러나 결혼을 한 두 남녀가 살아가는 방식은 여전하지 않은가. 물론 '뒷간과 처갓집은
멀어야 한다'던 속담이 '뒷간과 처갓집은 가까워야 한다.'로 뒤바뀌는 변화도 있긴 했지만, 사회 구성원의 단위가 되어 책임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간다는 구조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BR>문학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시도되고 있는 장르의 해체 움직임도 결코 돌연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이 그러하였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BR>가사가 사라지고 향가의 형식이 이제 더 이상 지어지지 않는 것처럼, 혹은 신라나
고려 때는 볼 수 없었던 소설이 등장하는 것처럼, 앞으로도 또 어떤 장르가 새로이 등장하여 우리 문학사를 새롭게 할 것이다. 언제나의 역사가
그러하였듯이.<BR>그러나 문학이 공감의 언어고, 형상화의 언어라는 본질은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는 만큼이나 오래 유지될 본질일 것이다.
<BR>그러기에 그 본질에 기대어 문학은 가능하며 또 감동의 원천으로 우리에게 봉사할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사랑처럼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할 것이다. <BR>문학을 사랑의 구조로 설명하는 것은, 맨 처음에 했던 약속 - 문학은 우리 모든 일상적인 것이지 결코 특별한
전문가들만의 것일 수 없음 -을 재확인하기 위한 뜻에서이다. <BR>우리 모두가 사랑을 통해 행복을 말하고 풍요를 말할 수 있듯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것이듯이, 문학과 더불어 행복과 풍요를 말하면서 문학을 우리 일상 속으로 가져오는 데 주저가 없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일상적인
문학은 그 모습을 확인하게 할 수 있으리라.</FONT></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