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을 찾아서/ 노작 홍사용 문학관
눈물의 왕, 설움 있는 이 땅의 이슬이여!
박재경
2021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 1년은 코로나로 인해 멈춤과 인내를 배운 한 해였다. 마치 움직이면 더 가라앉는 코로나의 늪에 갇힌 듯 아이들과 어른 모두의 일상이 마스크 속처럼 답답했다. 1월 중순에 북극한파가 몰아치고 눈도 많이 내렸다. 복잡한 서울에서 살다가 한적한 경기도에 이사 와서 처음 맞는 겨울, 눈 덮인 하얀 산과 나무의 동화 나라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눈길에 내 발자국을 남기며 걸을 수 있는 낭만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놀이터에서 눈 놀이로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며 하루빨리 전염병 없는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대설 지나 입춘이 오는 길목에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동탄에 있는 <노작 홍사용 문학관>을 찾아갔다.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206번지에 문학관을 품은 반석산 에코 벨트와 노작 공원이 눈석임물과 겨울비에 젖어있었다.
지상 2층의 문학관 옆 공원은 겨울나무와 꽃밭이 정돈되어 있고, 노작 홍사용 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오솔길을 더 올라가니 ‘노작 홍사용 묘역’이라는 팻말과 반석산 에코 벨트 안내 표지판을 따라 삼삼오오 산책하는 시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노작(露 이슬 노, 雀 참새 작)을 호로 쓰는 홍사용(1900~1947)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10년 3월 18일 개관했다.
노작 홍사용 선생은 한국 근대 시사의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의 감성적 성향을 표방한 문예 종합 동인지 『백조』를 창간하고, 3.1운동의 좌절로 인한 민족적 패배감과 지식인으로서의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을 낭만주의 시에 토로했던 시인이자 극단 ‘토월회’를 이끌며 신극 운동에 참여했던 예술인이다.
근대 낭만주의 문학과 신극 운동을 이끈 노작 홍사용 선생의 문학사적 업적을 두루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건립된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개관 이래 시민들의 쉼터이자 문화충전소로서 전국연극제며, ‘시와 희곡’ 같은 잡지 간행, 창작 강의를 들은 시민들이 시인과 소설가로 등단하는 등 전국 문학관 중에서 가장 성공한 지역 문학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자랑거리가 많다. 첫째로, 전국 문학관 중에서 유일하게 소극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규모 연극 공연과 각종 강좌가 가능해 시민들과 소통할 기회가 많다는 의미이다. 둘째로, 관내에 정식 등록한 문학전문도서관이 있어서 지역민들과 문학 애호가, 작가 지망생들이 문학적 감수성과 교양을 쌓고 창작 역량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각종 강좌가 가능한 문예 프로그램으로 지역사회에 문화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시민동아리, 노노카페 등을 운영하며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고 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2층 건물로 1층 입구에 들어서면 작은도서관과 산유화 극장이 자리 잡고 있다. 제1전시실은 ‘눈물의 왕’ 노작 홍사용 선생의 유년시절과 문학의 길인 삶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과 사료가 전시되어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백조』 3호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