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 (자서전)
1. 처음에
내 나이 70, 나의 할아버지 세대 때에는 고희(古稀)라 하여 참으로 오래 살았다고 자녀들이 아버지 친구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곤 하였지만, 요즈음은 의학의 발달과 이른바 웰빙 식단, 지속적인 운동 덕분으로 모두들 건강하여 젊은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북한산 백운대를 거뜬히 정상 까지 다녀오곤 하기에 칠순이 되어도 거저 가족끼리 모여 조촐한 식사를 하는 것이 고작이다
나도 엊그제 고등학교 동기들과 백운대 정상까지 다녀왔고 오늘은 새벽부터 동기 골프모임 다녀왔지만 별로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지금 건강 같으면 10여 년은 더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하느님 만이 아시는 일, 그래서 지금부터 틈틈이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이를 기록하여, 손자 손녀들에게 할아버지가 이렇게 열심히 살다가 가셨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 2010년 10월 14일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회고에 들어가기 전에, 너희들과 앞으로 태어날 자손들이 최소한 알아야 할 우리 집안의 족보를 간략히 소개한다.
우리집안의 족보
우리 배(裵)씨는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로,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금산가리촌의 촌장, ‘휘(諱) 지타(祗?)’께서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배(裵)씨 성을 받게 되어 본관(관향)을 경주로 하게 되었고, 그래서 ‘경주 배씨’로 불린다. 다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본관이 ‘경주 배씨’ 라 하면 배우지 못한 사람이 되므로 그때는 ‘경주 배가’ 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이처럼 우리의 시조는 ‘휘 지타공’이지만 , 그 후손들이 번창해짐에 따라 여러 파로 나뉘는데, 우리 집안은 ‘운룡 달성군(雲龍 達城君)’의 후손이므로 ‘달성파’에 속한다. 우리의 시조는 이처럼 신라 금산가리촌장 ‘휘 지타공’(문양공) 이시지만, 내가 ‘누구의 몇 대손이다’ 라고 말 할 때는 중시조인 ‘무열공(고려 개국공신 배현경)’ 부터 시작하는데, 나는 ‘무열공’의 35대손이다. 그러니 아들과 딸(정은, 정익, 정민)은 36대손이고, 손자와 손녀(창현, 성현, 소현)는 37대손이 된다.
나아가 우리와 같은 경산 소문중에 속하는 가까운 집안은 모두 달성파에서 다시 쪼개진 ‘병판공파’의 자손으로, 2007년 7월 경북 경산군 진량면 아사리 산23번지에 새로 조성된 문중묘원에 ‘신제 입향조 휘 이도(而度)공’을 위시하여 그 아래 조상님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데, 나의 고조부(在泓 31대손), 증조부(益奇 32대손), 조부(鳳奎 33대손), 부(鐘昊 34대손)의 유골도 안치되어 있다. 나와 아내가 죽을 때 묻힐 장소에 가묘로 상석까지 만들어 세워놓았다. 앞으로 상당 기간 너희들과 너희자손들도 그 묘원에 묻힐 수 있을 것이다.
2. 어린 시절 추억
내가 태어난 해는 1940년, 장소는 대구 동구 신서동 186번지(호적상 본적지로,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경산군 안심면 신서동 186 번지였다), 아버지 배종호(裵鍾昊, 호적명 ; 배재덕), 어머니 정필임(鄭必任) 사이의 5남중 셋 째였다. 그런데 제일 맏형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사고로 사망, 사실상 둘째 병원(柄源) 형님이 장남이 되고, 내가 둘째, 바로 밑의 석원(碩源)이 셋째, 막내 무원(茂源)이 넷째로 되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그 이듬해 일본 해군의 진주만(하와이)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일본에 빼앗겨 먹을 식량이 아주 부족하였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이 희멀건 콩 나물 죽으로 겨우 연명하였고 쌀밥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어쩌다 구경할 뿐 이었다
어릴 때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은, 당시 과수원을 경영하던 외가 (경북경산군 고산면 성동 - 당시 그 지역은 과수원이 많았고 그곳에서 수확된 사과는 ‘대구능금’으로 유명하였다)에 자주 가 7남매나 되는 외사촌들과 산으로, 강으로 놀러 다닌 것, 또 갈 때마다 항상 반겨 주시고 종종 사탕(당시는 사탕이 아주 귀했고 또 매우 작아서 보통 ‘눈깔사탕’ 이라고 불렀다)을 주신 외할머니의 인자하신 얼굴 모습 등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이태후인 1947년 집에서 오리(2킬로미터) 떨어진 반야월초등학교(‘반야월’이란 이름은 행정구역이 아니고아주 옛날부터 경상북도 경산군 안심면 동호동, 서호동, 신기동 일대 즉 안심면 중심부를 그렇게 불렀는데 지금은 행정구역이 바뀌어 대구직할시 동구에 편입되었지만 현재도 옛날 그 자리에 반야월초등학교가 있는데, 내가 다닐 때는 ‘안심국민학교’라고 불린 적도 있다)에 입학하여 졸업 때까지 6년을 다녔는데, 2학년 때 가까운 금호강가로 소풍을 가서 생전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의 나는 무명 바지저고리에 검정 고무신 차림이었고 담임선생님은 양장을 한 예쁜 여선생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진을 간수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내가 4학년 때인 1950. 6. 25 새벽 소련(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탱크를 앞세우고 우리나라를 침입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으로 쳐 내려와 순식간에 대구 가까이 낙동강까지 쫓겨 온 국군과 유엔군이 대구시와 그 주변의 모든 학교를 병사들 숙소로 사용함에 따라 교실이 없어진 우리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남의 과수원 창고로 또는 금호강가로 옮겨 다니면서 수업을 받았다.
이 6.25전쟁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 당시는 버스가 없는 때라 매일 5리(약 2킬로미터)나 되는 학교까지 같은 마을 친구들과 함께 기차 길(대구선 철길-지금은 철거되고 없다)을 따라 걸어 다녔는데, 선로 수리를 하는 선로 보수원들이 그런 우리를 보면 위험하다고 심하게 꾸중을 하곤 하여 그들의 눈을 피해 다녔다. 그런데 어느 여름 무더운 날 친구 셋과 몰래 철길을 걸어가다가 우리 마을 가까이 왔을 때 선로보수차량이 오는 것을 발견하고 다같이 철길 아래 배수구 안 쪽으로 숨었더니 그 배수구와 연결된 지름 1 미터 정도의 커다란 배수관 한가운데 북한제 아카보 소총 한 자루가 총대위에 얹혀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우리는 뛰어 나왔더니 마침 우리 마을 출신 순경(경찰관) 한분이 멀지 않은 도로를 따라 걸어가기에 달려가 알렸는데, 그 사실을 잊고 지나던 몇 달 후 학교 아침 조회 시간에 그때 그 부근을 철길로 지나간 학생을 찾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통행이 금지된 철길을 다녔다고 꾸중 당할까 겁이나 아무 말도 않다가 나중에 북한제 소총을 신고해 포상금이 나왔다고 하여 모두 나갔더니 한 사람당 쌀 반말 정도를 살 수 있는 현금이 든 돈 봉투를 주었다. 어린 나이에 순경에게 신고한 것을 기특하다고 본 모양이다.
그때는 어려서 6.25 전쟁의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전쟁으로 하마터면 우리나라는 김일성 지배의 북한 공산당에 점령당할 뻔했다. 서울을 3일 만에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에 거주하던 사람들까지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했으니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는지 알만하다. 다행이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빼앗긴 서울을 탈환하고 한때는 북으로 진격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중공군(중국 공산당 군대)의 개입으로 후퇴하고 휴전협정 결과 현재의 38선으로 남북이 대치한 채 올해(2010)로 60년째가 된 것이다. 오늘날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 일당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박탈당한 채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당시 우리나라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북한군을 물리쳐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세계 10위권대의 경제 대국을 이룩할 수 있게 된 것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우리 주님의 크나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살던 마을(신서동) 부근에 송정초등학교가 새로이 생겼다. 반야월초등학교에 같이 다니던 동네 친구들 셋은 모두 집 가까운 송정초등학교로 옮겼는데 유독 나 혼자만은 졸업 때까지 반야월초등하교에 그대로 다녔다. 아마 신설학교 보다 역사가 깊은 반야월초등학교가 모든 면에서 좋은 학교이어서 그대로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당시 신서동의 우리 집 사랑방에서 3년 위인 친형과 6년 위인 8촌 형(큰집 배광원 형님, 대구계성고등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 하신 후 경산에서 보강의원을 개업하셨다. 우리 집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외동으로 내려오다가 나의 대에 이르러 4형제가 태어났기에 4촌, 6촌 형제는 없고 가장 가까운 혈족이 8촌이었다.) 이렇게 셋이서 저녁마다 둘레 판에 호롱불을 켜 놓고 둘러 앉아 공부했는데 큰집 형님 말씀이 내가 제일 오래 동안 공부했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중, 고등을 다니시는 형님들 보다 공부를 더 했을리야 없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것을 참 좋아하여 언제나 열심히 공부했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6학년이었을 때 중학교 입학시험은 전국이 같은 문제로 시험을 보는 국가시험이었다. 당시 6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최재철 선생님께서는 내가 학교에서 2 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곳에서 다니느라 공부할 시간을 빼앗긴다고 시험 10여일 전부터 당신의 집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게 해주셨다. 부모님께서 부탁하신 일도 없고 또 숙식비를 드린 일도 없었다. 모두 어렵게 살던 시절인데 얼마나 고마운 선생님이신가!. 그 덕분에 국가고시 성적이 500점 만점에 466점으로 경산군에서 1등이 되었다. 뒤에 알고 보니 당시 전국 1등은 470점, 경상북도 1등은 468점이었다. 발표 하루 전날 경산교육청 직원으로부터 미리 내가 경산군에서 1등이라는 통보를 받으신 선생님께서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께서는 평생을 교직에 계시다가 반야월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하셨는데, 2011년 5월 12일 선생님의 문집출간 축하식 때 축사를 해드렸다. 그때는 정정하셨는데 3년이 지난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시단다. 올해(2014) 미수(米壽) 88세이시다.
3. 중, 고등 시절
중학교 입학시험 성적이 워낙 좋으니 엉뚱한 고민이 생겼다. 그 당시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보통 ‘사대부중’ 이라고 불렸다)는 특차로서 학생 수는 적었지만 국립으로 등록금이 비교적 싼 탓인지 아주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하였다. 3년 위인 형님이 그 학교를 다니셨다. 그리고 당시 대구에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경북중학교가 있었는데, 일제시대부터 한때 서울의 제1고보(경기중학), 평양의 제2고보(평양중학)에 이어 제3고보로 불리던 명문 공립학교로 우수한 인재를 수없이 많이 배출한 곳이다. 성적이 좋아 어디든 원서만 내면 합격이 되는데 어느 쪽을 택할까 상당히 고민하였던 기억이 난다. 원서 내기 직전 감기몸살로 심하게 앓았는데 나를 간호해 주시던 할머님 말씀이, 잠자면서도 사대부중인가 경북중학인가 하고 헛소리까지 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경북중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사회인이 되고 나서보니 사대부중에 비하여 경북중학은 훌륭한 선배들이 많을 뿐 아니라 경북중,고를 졸업한 동기동창이 600여명이나 되어 그 반도 안 되는 사대부중보다 훨씬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당시 경북중학을 선택한 것이 참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어떻든 1학년 반 편성결과 3반이었다. 알고 보니 성적순으로 반을 편성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입학생중 최고점수인 국가시험 466점이 3명이 되어 가장 경북중학에 많이 합격한 대구초등하교 출신이 1반, 그 다음인 수창초등학교 출신이 2반으로 각 배정받고 그다음 내가 1학년 3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휴전 협정이 성립되기 직전인 1953년 3월 이었는데 전쟁 중이라 대봉동 교사는 군에 징발당하고 부근의 형무소(교도소) 밭에 임시로 세운 가교사에서 2학년까지 공부하다가 3학년이 되어서야 대봉동 본교사로 옮긴 것으로 기억된다.
중학교 1, 2 학년 때에는 반야월역을 통과하는 대구선 통학열차를 이용하여 집에서 30리 길인 학교까지 다녔는데 전쟁 중이라 화물칸에 칸막이를 하고 나무의자를 놓은 객실이다 보니 냉, 난방이 될 리 없었고, 그나마 제때 열차가 운행되는 날이 거의 없었다. 등교 때는 대구역에 내려 거의 뛰다시피 빨리 학교로 가도 첫 시간이 끝난 이후에 도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교 때는 사정이 더욱 나빠 보통 밤 8시가 지나서 열차가 대구역을 출발하므로 반야월역에 내려 30분 걸리는 집에 오면 밤 10시 가까이 되었다. 한번은 추운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밤새도록 대구역에서 열차를 탄 채 떨면서 기다리다가 집에 오니 새벽 5시였다. 그런데도 다시 아침 7시에 반야월역으로 나와 기다리다가 열차를 타고 학교에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열악한 환경 아래서도 학교에는 참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그 당시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아주 가난하게 살 때이어서 간식 꺼리가 아주 귀하였고, 또 돈이 없어 자주 간식을 사먹을 수도 없었다. 당시 가교사 울타리는 수성천 제방과 붙어 있었는데 어쩌다가 그 제방 위 가게에서 선생님 몰래 사먹는 찐빵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또 해마다 개교기념일에는 전교생이 함께 학교에서 출발하여 수성못까지 달려가 못을 한바퀴 돌아오는 마라톤 대회가 열렸는데, 지쳐 걸어오다가도 교문 앞에 이르러 학교악대반원들의 나팔 소리가 들리면 새로운 힘이 생겨 열심히 뛰어 들어와 학교에서 기념으로 주는 보기에도 먹음직한 커다란 찹쌀떡을 맛있게 먹었던 것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 1, 2 학년을 기차통학을 하며 지각도 자주 했지만 항상 학교성적 평균 85점 이상에게 주는 우등상을 놓친 일이 없고 수학 일제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할 때도 있었다. 3학년 때부터는 형과 형 친구 형제분 이렇게 넷이 대구 동인동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한 겨울 냉방에서 지내며 많이 떨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대구에서 학교 다닌 3학년 때에도 평균 90점 이상에게 주는 특대상은 한번도 탄 일이 없다. 체육, 음악 등 예능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1,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어느 분 이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3학년 6반 시절 담임은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 이을기 수학선생님이셨다. 그 당시 20대 후반의 젊고 열정적인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통하셨다. 규칙을 어기거나 품행이 바르지 못한 학생에 대하여 사정없이 매질을 하셨지만 어디까지나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치려는 사랑의 매이었다. 사회에 나와 성공한 동급생들 여럿이 당시 선생님의 매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바르게 크지 못했을 것이라며 매질로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고맙다고 말한다.
이을기 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법관의 꿈을 심어준 고마우신 분이시다. 3학년졸업 얼마 전 졸업을 앞둔 모든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적어내라고 하여, 그때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적어 내었더니, 선생님께서는 아주 언짢은 얼굴로 ‘배군은 무엇이든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고 하시며 ‘선생’ 말고 다른 것을 적어 내라고 나무라신다. 어린 나이에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망설이다가 그 무렵 고등학교를 졸업한 형님이 의과 대학을 진학하기로 결정할 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너는 앞으로 법관이 되는 것이 좋겠다’ 고 지나가는 말로 말씀하신 기억이 떠올라 얼른 ‘법관’ 이라고 고쳐 써내었더니 선생님께서 매우 흡족해 하셨다. 사실 당시는 앞으로 꼭 법관이 되겠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선생님 앞에서 난처한 국면을 피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쓴 것이었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가 대학에서 법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평생을 법조인으로 보내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경북중학을 졸업할 때 동기생 일부는 사대부고(경북대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당시 경북중학성적이 중 정도면 특별전형으로 시험 없이 사대부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3학년 6반의 경우 이을기 담임선생님은 경고(경북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운 학생들은 특차인 사대부고에 무시험으로 입학하게 조치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경고 입학시험을 보게 하셨다. 당시 3학년은 8개 반 이었는데 어느 반이 대구시에서 일류고로 꼽히는 경고에 많이 들어가느냐 하고 담임선생님들 간에 무언중에 경쟁이 심했다. 당시 우리 반에서 경고에 30여명 이상 합격하여 1등을 하였다. 최근 경고 졸업 5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학교로부터 자료를 받아보니 당시 경중에서 바로 경고로 진학한 학생이 180여명 밖에 안 되었다. 이는 평균 한반에서 22명 남짓 진학한 꼴이니 우리 반의 경고 진학률이 얼마나 높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경고 1학년 때는 5반으로 배정되었다. 그때 수석 합격은 김명곤이란 친구(이 친구는 서울 법대에도 수석으로 합격 했는데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교육부 이사관까지 지냈다)였고, 나는 5등이었다. 1학년 때에는 중학교 친구인 와촌 출신 송충호와 그 4촌 동생 송풍호(부산고등, 경북대의과대학 졸업 후 대구에서 신경외과병원경영) 이렇게 셋이서 학교 부근에서 자취를 하였는데, 자취란 방만 빌리고 난방, 음식, 청소, 빨래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하며 학교에 다니는 것을 말한다. 빨래거리는 주말에 집에 갈 때 집에 가져갔으니 큰 빨래는 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학생들은 집주인이 밥과 청소, 빨래를 해주는 하숙을 하지만 나는 대학 졸업 때까지 한번도 하숙을 한일이 없고 줄곧 자취를 했는데, 다만 대학 1년 때 할머님께서 동생(배석원/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교수 역임)과 같이 있는 자취집에 한동안 오셔서 밥을 해주신 적이 있었다
당시 경북고등학교는 대구시 앞산 앞 대명동에 있었는데 허허벌판에 학교 건물만 덩그렇게 지어져 있었고 등, 하교 길은 남문시장에서부터 포장이 안 된 흙길이어서 비가 오면 진흙탕 길이 되어 발이 푹 푹 빠지곤 하였다. 1학년 겨울이었던가, 전교생이 눈 덮인 앞산에서 토끼몰이를 하였던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문과, 이과로 나누어 반 편성을 하였는데 평소 수학, 물리, 화학을 좋아하던 나는 이과 반을 택하였다. 사실 그때는 중 3때 내가 장래 희망을 ‘법관’ 이라고 적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기억 하고 있었고 또 법관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법대를 가기 위해 문과 반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4. 대학 진학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반야월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신서동에서 논, 밭 합쳐 15마지기 (3,000평)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농촌 마을에서는 그런대로 잘 사는 편이었으나 형님이 의과대학에 들어가고부터 아버지는 큰아들 대학 보내고 또 나와 동생을 대구에 보내어 공부시키기 위하여 논, 밭을 처분하기 시작하시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아버지는 신서동에서 반야월로 이사를 나왔는데 당시 우리 집 전 재산으로는,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반야월 시장터에 있는 가게가 딸린 집 한 채와 논 4마지기(600평), 아버님이 건어물 가게를 하시어 겨우 용돈을 마련할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얼마 안 되는 논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어 겨우 먹는 것은 해결할 수 있었으나 집에서 자식들 학비를 댈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의과대학 본과에 다니시는 형님께서도 아르바이트로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하셨지 집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3생은 공부를 잘 하면 모두 서울대학교를 선호하였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 줄곧 우등생이었기에 내가 서울대학교에 가겠다고 강력히 말씀드렸다면 자식들 교육에 열성적이셨던 부모님께서는 빚을 내어서라도 내 요구를 들어주셨을 것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철이 빨리 들었던 것 같다. 당시 내 스스로 우리 집 경제사정으로 집에서 등록금을 내고 대학진학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한 번도 부모님께 서울대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집에 부담을 주지 아니하고 공부할 길이 없겠는가를 고심하였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되었고 대학도 학교재정이 어려울 때이어서 장학생을 뽑는 대학이 거의 없었다. 전남에 있는 조선대학교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4년간 전면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하였는데 당시는 대구에서 전남으로 가는 교통편이 아주 불편하여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 하던 중 일반 대학보다 먼저 신입생을 뽑는 육군사관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공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도 있었지만 형님의 고등학교 단짝이었던 분(최영문, 육사 졸업후 서울대학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한 다음 육사 교수로 재직하신 듯)이 육군사관생도 시절 방학이 되면 멋진 제복을 입고 신서동 우리 집으로 놀러 오곤 했는데 그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사관학교는 국가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 군의 핵심간부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학교이고 졸업하면 평생 직업군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직업군인이 결코 내 적성에 맞는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때는 오로지 돈 안들이고 대학과정을 공부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다른 것은 따져보지도 아니한 채 육사에 지원하여 필기시험에는 거뜬히 합격하였다. 그 무렵 돈이 안 든다는 매력 때문에 고등학교 동기생중 성적이 우수한 상당수가 육, 해,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장교로서 착실히 근무하여 장군이 된 친구도 여럿이 된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신체 및 체력 검사에서 군인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고 입학시험에 불합격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농증 증세가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시골에는 의사가 없었고 더구나 이비인후과 병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뼈가 뿌러지는 등의 큰 사고가 나면 몰라도 평소 코가 자주 막히고 콧물이 많이 나온다고 하여 요즘처럼 부모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고 하여 비로소 병원을 찾았더니 만성축농증이 아주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 졸업을 얼마 앞두고 경북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축농증수술을 받았는데 육사 입학시험 때까지 완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운동신경이 무딘데다가 코가 막혀 숨쉬기가 어려우니 100 미터, 1000 미터 달리기 등의 체력시험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어떻든 당시 유일한 희망이던 육사입학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바로 대학 1차 입학시험이 있었다. 주위의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이 서울 공대, 의대, 상대, 법대 등 당시 인기과에 입학 원서를 내고 했지만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원서를 내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때 집이 가난하여도 서울대에 합격하여 아르바이트(주로 가정교사)로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한 친구들이 적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못했고 또 주위에 그렇게 하면 서울에 가서도 공부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 무렵 대구에는 2차로 신입생을 뽑는 후기대학으로서 단과대학인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있었는데 (1976년경 이 두 대학이 합쳐져 현재의 영남대학교로 되었다), 모두 입학시험에서 수석(1등)을 하면 입학금을 전액 면제해 주는 특전이 있었다. 공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야간부에 동시에 원서를 내고 어느 쪽이든 수석합격이 되는 곳으로 진학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무슨 과를 택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중학교 3년 때 이을기 담임선생님의 꾸중을 듣고 장래 희망을 선생에서 법관으로 바꾸었던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때 이과 반이었으니 당연히 약학과나 건축과와 같은 이과계통을 가는 것이 순리였지만, 이을기 선생님과의 약속에 생각이 미치고 또 한편으로 그때만 해도 내가 가려는 곳이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이라 국가에서 주관하는 사법시험(당시는 고등고시)에 당당히 합격하여 서울대학교 법대에 간 친구들에게 꿀리지 않겠다는 나대로의 자신감에서 법과를 선택하였다. 어떻던 같은 날 낮에는 대구대학에서, 저녁에는 청구대학에서 입학시험을 보았다. 내 생각에 대구대학 보다 청구대학에서 시험을 더 잘 본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발표를 보니 대구대학에서 수석합격이 되었다.
그리하여 소원대로 부모님의 도움 없이 대구대학 법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대구대학 법과에는 우수한 교수님이 많이 계셨다. 형법의 백남억 교수(5,16 혁명 후 정치에 입문하여 이른바 민주공화당의 4인방의 한 사람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 되었다. 작고), 민법의 이재철 교수( 뒤에 관계로 진출하여 교통부차관, 감사위원, 인하대학교 총장을 역임, 2000년경 작고 ), 상법의 이종하 교수(영남대에서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로 재직. 2007년 작고, 향년 96세) 등은 명강의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 당시 헌법은 젊은 권영성 교수(전임)가 맡았는데 이분은 얼마 후 서울대학교법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명성을 떨치고 만년에는 우리나라 헌법학의 대가가 되셨다.
대학 입학 후 신입생 기분으로 한 학기를 마치고 나니 성적이 좋아 2학기에도 수험료는 면제받았으나 학도호국단비 등 나머지 등록금을 내어야 되었다. 뿐더러 수험료를 면제받기 위하여는 일정점수이상이 되어야하므로 매번 학교시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 지난해 내가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는 기간 중에 대구대학에서도 4년간 전면장학생을 뽑아 법과에도 고등학교 동기인 최재욱(동아일보 기자, 경향신문사 사장, 환경부 장관, 국회의원 역임), 송충호 두 사람이 전면장학생으로 입학하여 학교성적이 어떻든 졸업 때까지 돈 한 푼 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특전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고등학교 담임인 서수생 선생님께 상의 드렸더니 나를 당시 수도산 아래 한옥에 거주하시던 대구대학의 이종하 교수님께 데려가셨다. 이종하 교수님 말씀이 앞으로 사법시험 준비를 하자면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까우니 차라리 내년에 시행 하는 전면장학생 입학시험을 다시 볼 것을 권하셨다. 그래서 1학년에 재학 중 다시 입학시험을 보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어쨌든 다시 입학시험으로 본 4년간 전면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앞으로 대학졸업 때까지 학비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 대학 생활 - 사법시험준비
다시 1학년에 입학하였으나 지난 해 1학년 교양과목 수업을 모두 들었으므로 2학년 친구들과 같이 2학년 법과전공인 민법, 형법, 헌법 등의 강의를 들으며 서서히 사법시험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대학 3년을 수료해야 사법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 졌는데 전면장학생이 되기 위하여 1학년을 두 번 하다 보니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4학년이 되려면 까마득하였다. 그러니 시험 준비가 옳게 될 리 없었다. 1, 2학년 때에는 전공과목 강의를 충실히 들으려고 노력하였다. 3, 4학년 학생들에게 하는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강의까지 찾아다니며 들었다. 어려운 법학을 책을 읽고 깨우치기는 매우 어려운데 강의를 부지런히 들으며 기본서를 정독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가 기본서로 보는 법률 서적은 서울의 이름 있는 대학교수의 저술로 되어 있기는 했으나 거의 모두가 일본 법률서적을 우리 법조문에 맞추어 번역한 것 이었다. 그래서 읽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때 도서관의 일본원서를 찾아보면, 예를 들어 ‘할 수 없다’ 라고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다’ 로 잘못 인쇄해 놓은 것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외국어대학교 학생들 몇몇이 우리학교에 와서 2 주간 일본어 무료 강좌를 개설하였기에 나는 그때 재미로 일본어 무료강좌를 들었는데, 그들이 한자는 우리와 일본이 거의 같은 글자를 쓰는데 착안하여 한자는 그대로 두고 순수 일본글로 된 어조사, 부사, 동사의 어미변화 등만을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도 일본글과 말이 우리나라와 어순이 같아 그때의 일본어공부로, 한자가 섞인 일본 법률서적을 대충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년 1, 2학년 여름 방학에는 구룡포가 고향인 친구 이규생(일명; 준호)의 집에 동기 친구인 김정환, 송필완, 이종완 등과 같이 피서 겸해 놀러 다니기도 하였고, 또 경북 금능군 산골짜기 김정환의 집과 칠곡군 약목 낙동강 변의 송필완 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때 대학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이 모두 결혼하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명우회(明友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1년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부부 모임을 가지고 기금을 조금씩 모아 아이들이 대학 입학할 때 등록금 일부를 보조해 주기도 하였는데 어언 40여년이 다 되어간다. 그 구성원은 내가 두 번째 입학한 법과(60학번) 동기인 김정환, 송필완, 이규생, 이종완, 이재춘, 정구식, 한강락 등 7명과 나를 포함하여 모두 8명이다. 이중 경북체신청에 근무했던 이재춘 친구는 업무 중 과로로 쓰러져 10 여 년간 식물인간으로 투병하다가 재작년(2009) 11월 경 끝내 사망하였으나, 그 부인은 모임에 계속 나오고 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같은 대학 경제과 친구인 김석찬의 고향인 영일군 지행면 어느 산 속에 있는 고석암(古石庵)이란 조그마한 암자에서 그 친구와 함께 한달 동안 자취를 하며 지낸 일이 있다. 시험공부를 하기 위하여 조용한 곳을 찾아 들어간 것이었으나, 암자 바로 옆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고 숲이 많아 아주 시원한 곳이어서 더운 여름 한철 피서는 되었지만 공부는 잘 되지 않았다. 아침에 방문을 열면 앞뜰에 다람쥐가 빤히 쳐다보다가 달아나곤 하였던 기억이 남아 있다.
본격적인 시험 준비는 대학 3학년 여름방학 이후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마루바닥이 삐걱거리는 조그마한 도서관이었지만 강의시간을 제외하고는 그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열심히 공부했다. 밤 10시가 넘어 도서관문이 닫혀 나올 때는 언제나 학교 선배인 심갑보(56학번/ 정치학과/삼익THK주식회사 대표이사부회장), 최종태(57학번/상학과/영남대학교 경영학부 석좌교수/서울대학교 상대교수, 학장 등 역임) 등과 함께였다. 대학4학년 겨울방학 때는 당시 법학과 주임 교수이시던 이종하 교수님의 배려로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잠을 자며 시험 준비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당시 대구대학은 본관 건물 하나만 겨우 현대식 건물로 지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 교수 연구실과 학사행정을 보는 교무실 등이 있었다. 저녁 5시쯤 모두 퇴근하고 나면 본관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지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한 건물 3층에 있는 교수 연구실에서 밤에 관리직원 몰래 공부를 하려니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연구실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두꺼운 담요로 창문을 모두 가려야 했다. 또 밖에 나가 저녁을 먹고는 다시 들어올 수 없으니 오후부터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아니한 채 연구실 안에서 공부를 하다가 함께 자취하던 동생(배석원/경상대학교 교수 역임)이 저녁마다 현관문 밑 틈새로 저녁밥(도시락)을 밀어 넣어주면 그것을 받아 연구실에서 혼자 먹어야 했다.
그 당시 대구 추위는 왜 그리 심했든지! 추운 겨울 밤 난방이 전혀 안된 연구실에서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추위에 떨면서 겨울 내내 밤낮 시험 준비만 했으니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특히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복도를 나올라 치면 사방이 칠 흙같이 캄캄한데 매서운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며 여기저기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든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그러나 4학년 겨울방학 교수연구실에서의 집중적인 공부가 졸업 이듬해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6. 사법시험 - 4번의 낙방과 수석합격
대학 4학년이 되자 사법시험 응시자격이 주어졌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아직 시험을 칠 준비는 많이 모자란 상태였다. 그해부터 종래 고등고시 (사법과)가 사법시험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객관식으로 치러지는 1차 시험과 주관식(논문) 2차 시험으로 구분되어 시행되기 시작하였고 한번 1차 시험에 합격하면 그 다음번 2차 시험 때는 1차 시험이 면제되었다. 그래서 일단 1차 시험은 합격해둘 필요가 있었으므로 제1회 사법시험에 응시를 하게 되었다. 우선 1차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시험 준비도 1차 시험 위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시험에는 없는 외국어(영어), 법철학, 경제학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다보니 자연 2차 시험 과목은 소홀하게 되어 더욱 2차 시험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1차 시험에 합격하고 보니 2차 시험에도 빠질 수는 없었다. 2차 시험 문제는 필수과목인 헌법, 민법, 형법, 행정법과 선택과목 3과목 (내가 선택한 과목은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 7과목에 대하여 과목 당 2문제씩 출제되었는데, 대체로 답안 작성은 교과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논제에 대하여 하나의 논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시간 이내 우수한 답안을 작성하자면 그 문제에 해당하는 교과서 내용을 거의 암기하고 있어야지 대충 이해한 것만으로는 결코 좋은 답안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험생들 간에 시험 임박해서는 예상문제라는 것이 나 돌았고 완벽하게 답안을 만들어 외운 예상문제가 몇 개 이상 출제되면 쉽게 합격하기도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실제 14문제 중 10개 이상을 맞추어 합격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상문제를 몇 개 주워들으려고 2차 시험 1주일 전 쯤 서울법대에 다니며 사법시험 준비를 하는 친구 하숙집에 들렸더니 법대 친구들 여럿이 모여 예상 문제라고 내 놓은 문제는 각 과목당 20 내지 30 개씩이나 되고 평소 공부하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문제가 다 들어 있었다. 시험 1주 전에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방대한 양 이어서 결코 예상문제라 부르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결국 시험을 잘 보려면 시험 준비기간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 하나하나를 답안작성 하듯이 철저히 공부하는 것 이외 따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떻든 당시는 요즈음과 달리 합격자 수를 미리 1,000명, 또는 1,500명으로 정해두고 그 안에 들어가면 점수가 어떠하든 합격을 시키는 그러한 제도가 아니라, 몇 사람이 되든 2차 시험 평균점수가 60점 이상이고 한 과목이라도 과락(40점 이하)이 없어야 합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시험 때마다 합격자 수가 달랐고, 최종 합격자가 단지 5 명뿐일 때도 있었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응시한 제 1회 사법 시험 2차 시험에서 예상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당시 형편없을 거라 생각한 시험 점수가 평균 59.98 로, 합격점인 60점에 0.02가 부족하였다. 그 정도의 점수는 사실 글씨만 좀 더 정성들여 깨끗이 썼더라도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 점수를 확인 후 사법시험도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구나, 조금만 준비를 더하면 다음번에는 합격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되었지만, 제2회부터 4회까지 연거푸 낙방하고 보니 이러다가 영영 합격 못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자신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1년에 두 번씩 6개월 마다 시험이 있었는데 시험이 끝나고 발표 때까지 거의 3개월 동안은 공부가 제대로 안되었다. 결국 노상 준비부족 상태에서 응시하다 보니, 1964년에 시행된 제2회(2월), 3회(8월), 4회(제4회 시험은 원래 1965년 봄에 시행예정이든 것을 1965년부터 종래 선택과목이든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3 과목이 필수과목으로 바뀌게 되자 쉬운 과목을 선택한 대다수 수험생들을 위하여 1964년 12월로 당겨서 시험이 실시 된 것인데, 나는 처음부터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러한 조치가 나에게는 오히려 수험준비기간만 단축시켜 불리하게 되었다)시험에서 연거푸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위기였다
여기서 자신 없다고, 또 공부 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포기한다면 법관의 꿈은 영영 물거품이 될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나의 합격을 위하여 온갖 희생을 다해주신 부모님께 너무나 큰 실망을 안겨드리게 될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 가정 사정으로 비록 시골의 이름 없는 대학에서 공부하지만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친구들에게는 결코 질 수는 없다. 그들이 해 내는데 내가 할 수 없다고 여기서 주저앉는다는 것은 도저히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중3 때 이을기 담임선생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 배군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 고 하신 말씀이, 실의에 빠진 당시의 나에게는 참으로 큰 힘이 되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중 3 때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매달려 ‘나는 해낼 수 있다’ 는 자신감(일종의 자기최면이다)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오로지 수험 준비에만 몰두하였는데, 당시는 대학을 졸업한 후이어서 반야월 고향집부근의 어느 과수원 빈집을 빌려 공부를 하게 되었다. 걸어서 집까지 30분도 채 안된 곳이었지만 공부할 시간이 아까워 아침, 점심, 저녁 3끼 밥을 올 가을(2011년 9월) 에 고인이 된 막내 동생(무원)이 날라다 주었다.
농한기에는 사람만나기 힘든 한적한 과수원 빈 건물에서 혼자 공부를 하다 보니, 나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지만, 수험생들이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것보다는 잡념에 빠지는 경우가 많고, 또 어려운 문제를 물어볼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경쟁할 상대가 눈앞에 없으니 쉽게 해이해지고 합격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힐 때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 마다 중학교 담임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떠 올리며 ‘나는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짐하였다
1965년 5월인가 6월 어느 날 부산에 있는 경남고등학교에서 제5회 사법시험 1차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부산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동래와 해운대를 다녀왔을 뿐 아주 생소한 곳이었다. 수소문 끝에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에서 친하게 지낸 고향 친구(정창주-체신대학 졸업 후 대구에 여러 전신전화국장 역임)가 부산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연락했더니 자기 집이 경남고등학교 부근이라며 자기 집에 오란다. 가보니 단칸 방 셋집이었는데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보금자리였다. 얼마나 고마운 친구인가! 그 친구와는 대구에서 내가 판사, 변호사로 일 할때 20년 가까이 같은 아파트에서 거주하면서 같은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도 같이하며 안, 밖으로 친하게 지냈고 지금도 친교를 유지하고 있다.
그해 9월 초인가 1차 시험에 수석(1등)합격이라고 일간 신문에 보도되자 고향 아버님친구 분들 여럿이 집에까지 오시어 축하를 해 주시곤 했다. 그런데 1차 시험은 객관식인데다가 2차 시험 과목에 없는 어학, 법철학 등 과목이 들어 있어, 통상 수석합격자는 1차 시험 준비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느라 2차 시험공부를 소홀하기 마련이다. 그 탓에 그때까지 1차 수석 합격자가 2차 시험에 바로 합격한 전례가 없었고, 따라서 수험생 간에는 ‘1차 수석은 2차 낙방’ 이란 말이 떠돌고 있었다
사실 그때 내가 1차 수석을 한 것은, 1차 시험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해 처음 들어간 외국어 선택과목을 영어 대신 일본어로 하였는데, 일본어시험문제가 너무 쉽게 출제 되어 거의 90점정도 받았기 때문이다. 수험생 대부분이 선택하는 영어는 매우 어려워 잘해야 60점 정도이니 1차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1차 수석 2차 낙방’ 이란 말이 나돌고 있는 터에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 커 1차 수석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시험은 이번부터 선택 과목이 없어지고, 헌법, 민법, 상법, 형법, 행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 법률과목 7개로, 과목 당 2 문제씩 출제 되면 2시간 동안 그 문제에 관련된 모든 논점을 정리하여, 하나의 논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이 시절에는 3차 면접 시험이 없었으므로 이 논문 시험에서 모든 과목이 40점 이상으로 평균 점수가 60점을 넘으면 합격이었다.
2차 시험은 청와대 부근의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청운중학교에서 시행되었는데, 주위가 고급 주택가여서 시험기간 동안 하숙할 집을 구할 수가 없어 고심하였다. 다행히 당시 수도육군병원에 근무하시던 형님(배병원)의 동료 군의관의 학창시절 가정 교사하였던 부잣집을 소개 받아 하숙비도 내지 않고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4일 동안 기거하며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 집 주인은 군납업으로 돈을 많이 번 이종대 사장님이셨는데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시험기간 중 특히 사모님이 아주 잘 해주시고 아이들도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덕분에 그 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기에 사법대학원 다닐 때에도 종종 그 집에 놀러 가곤 하여 그 집 가족 모두와 친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 그렇게 단란해 보이던 가정이, 얼마 후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새 부인이 들어오고 또 3형제 중 가장 똑똑했던 막내는 미국 유학중 사망하는 등의 변고가 생겼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2000년 7월 대법관 발령을 받고나서 두어 번 이종대 사장님을 만나 식사도 하고 법률상담도 해드렸는데 그분도 2, 3 년 후 작고하시고 남은 아들과 계모간 재산 문제로 분쟁이 있다는 이야기를 둘째로부터 들은 일이 있는데 그것도 이미 10여 년 전의 일이 되었고 그 이후론 첫째나 둘째 소식을 모르고 있다. 장황하게 그 집 이야기를 쓴 것은 돈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우선 가족 모두가 건강해야하고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간에 의좋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죽고 병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언제나 주님의 품안에서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2차 시험 합격자발표는 그해(1965년) 9월 15일 이었다. 어느 과목이나 큰 실수 없이 답안을 작성하였기에 이번에는 합격하겠지 하며, 시험 후 느긋하게 놀고 지냈지만, 발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혹시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시험을 마친 다음 집으로 내려오기 전 총무처장관 비서관으로 계시는 대학 선배에게 인사를 드릴 때, 그분이 총무처에서 주관하는 시험이니 발표 전이라도 결과가 나오면 미리 연락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9월 14일 오전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어 또 떨어졌구나 하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후 5시 쯤 대학학보사 기자라는 후배가 반야월 집으로 찾아와, 총무처 비서관으로부터 내가 수석(1등)합격이라고 학교에 연락이 왔단다. 이 얼마나 고대하던 소식인가? 합격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수석 합격이라니!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님께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 그 다음 날 신문마다 나의 수석 합격기사가 실렸고, 그 기사를 보고 많은 축하 편지도 왔는데, 그중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같은 대학 전면장학생으로 공부한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 최재욱이 당시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로 있으면서, “구대(邱大) 출신 배기원 제5회 사법 시험 수석 합격” 이라고 제목을 달아 기사를 썼더니 독자들로부터, ‘대구 출신’을 ‘구대 출신’ 으로 잘못 썼다는 항의 전화를 여럿 받았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내가 다닌 ‘대구대학’ 이 시골의 이름 없는 대학이라 그 학교를 다닌 우리는 곧잘 ‘대구대학’을 ‘구대’라고 줄여 불렀지만 서울의 독자들은 ‘대구’를 잘못 쓴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제5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는 모두 16명이었고, 고려대학 출신 3명, 숭실대학 출신 1명, 유일한 지방대학인 대구대학의 나, 이렇게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 열 한명은 모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이었다. 당시 수석합격을 한 내 점수가 평균 63.28인가 였고 2등과 차이가 평균 1점도 안 되었으니, 사법시험 수석이라 하여 다른 합격자보다 실력이 뛰어났다고 볼 수는 없고 오직 운이 좋았을 뿐이지만, 어떻든 나는 사법시험 역사상 1, 2차 동시 수석합격이란 대기록을 세웠고, 그 기록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았으며, 1차 시험 1등이 처음 선택 과목이 된 일본어 문제가 너무 쉽게 출제된 때문이므로, 이 기록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행운을 안겨주신 주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7. 사법대학원 시절
요즈음은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대법원 산하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2년 동안, 민, 형사 법률 이론과 아울러 앞으로 판사, 검사, 변호사로서 하게 될 실무교육, 예컨대 판결문, 공소장, 소장 등의 작성요령을 교육받지만, 그때는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그러한 교육을 맡아 하였다. 역시 2년 과정이었는데, 당시 사법대학원 원장이 처음에는 유명한 헌법 학자셨던 유기천 교수, 그다음은 상법을 전공하신 서돈각 교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수로는 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였지만 당시 서울민사지방법원 주재황 원장, 역시 판사 출신으로 민사소송법 교재를 저술한 방순원 이화여자대학 교수도 있었는데, 이 두 분은 그 후 대법관으로도 근무하셨다.
그 때만 해도 사법 시험에 합격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모두 본인의 희망에 따라 판사 또는 검사로 임용되었으므로, 사법대학원 시절은 수험 공부에 찌들린 합격자들이 공부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젊음을 만끽하는 그러한 기간이기도 하였다. 합격자 수도 적어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친구가 되어 수업이 끝난 후에는 함께 어울려 다닐 때가 많았다. 생일 때마다 서울에 집이 있는 친구들은 그의 집을 방문하여 축하 해주고. 방학 때에는 친한 친구의 고향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천(주광일), 경북 영천(석용진)에도 갔었고, 반야월의 우리 집에도 다녀가기도 하였다.
사법대학원시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때까지 입에 대지도 않았던 담배를 옆에 물을 떠 놓고 억지로 배웠다. 그 때만해도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었고 친구들을 위시하여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젊은이들 모두가 담배를 피웠고 그것을 멋으로 알았다. 그렇게 시작한 담배를 80년대 들어와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며 주위 친구들 몇몇이 끊기도 했지만 하루 한 갑 정도로 계속 피우다가 90연대 들어와 몇 번이나 담배 끊기를 시도했다가 몇 달 안가 실패하며 여러 번 금연과 흡연을 되풀이하다가 완전히 끊은 것은 2000년 대법원에 와서 부터이다. 한번 시작하면 참으로 끊기 힘든 것이 담배이다. 지금은 전 사회적으로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식당이나 전철, 기차, 공공건물, 사무실, 심지어 공원이나 길거리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없도록 하고 이를 위반하면 금 5만원의 과태료를 내도록 강제한다. 그러니 우리 손자, 손녀들은혹시 주위의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며 권하더라도 처음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도록 명심 하여야겠다.
같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16명중 둘(이진강, 변진우 모두 검사로 근무하다가 불행하게도 두 분 다 한창 나이에 작고함)은 대학 재학생이어서 대학을 마치고 사법대학원(9기)에 들어간 탓에 우리 동기생(사법대학원 8기)은 14명이었다. 사법대학원 수료한 다음 군법무관으로 병역의무를 마치고 이중 6명은 판사, 6명은 검사, 2명은 변호사가 되었다. 벌써 많은 세월이 흘러 내년(2015년)이면 시험 합격 50주년이 된다. 14명 중 셋은 연락이 안 되지만 나머지 열 한 사람은 해마다 연말에 부부 송년 모임을 지금까지 이어오며 친교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하였지만 아직도 변호사 사무실에서 소일하는 분이 대부분이다.
통상 사법대학원 8기생으로 통하는 우리 동기생들은 수는 적지만 우리나라의 요직에 근무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 대법관 (유지담과 나), 헌법재판관 (김영일), 국회의원 (변정일, 현경대, 김영수, 이원성), 장관(김영수), 장관급인 법제처장 (주광일) 등등 이다
8. 군법무관 시절
1967년 8월 말경 사법대학원을 수료하고 곧 바로 광주보병학교 SOCS 23기로 입교하였다. 이는 3개월간의 단기 간부후보생 교육기관으로 주로 법무, 군종 장교를 교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다. 법무 장교는 군대에서 일어나는 각종 범죄사건 수사와 재판을 담당하는데 사법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고, 군종 장교는 군인들의 신앙 지도를 목적으로 하는 신부, 목사, 스님이 그 대상이다.
12월 초 훈련을 마치고 중위로 임관(군번 ; 248581)되어 최전방 사단인 강원도 명월리 소재 육군 15사단 검찰관(군 검사)으로 보직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사단사령부 인근 하숙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12월 4일쯤 부대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사단장인 강원채 준장은 그 부대에 배속되는 장교는 누구나 북한과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적근산 GOP(최전방 초소)를 다녀와야 전입신고를 받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장교가 모일 때까지 거의 1주일간 전입신고를 못한 채 기다리다가 전입 장교 7~8명이 모인 다음 참모장 인솔아래 함께 적근산 GOP를 방문하였다. 사람 키만큼 싸인 눈 속을 터널 같이 통로를 내어 초소끼리 왕래 하고 있었고, 저 멀리 북쪽을 내려다보니 5층 정도의 아파트 같은 건물이 보였는데 그곳이 북한의 금성시라는 곳으로 북한 당국이 전시용으로 지어놓은 건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15사단에서 8개월쯤 근무하다가 1968년 8월 초쯤 월남공화국(베트남)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시에 있던 주월사령부로 발령이 났다. 우리나라 군인이 월남전에 파병된 것은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인데, 당시 우리가 파병 않으면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일부 월남으로 빼내어 가야 될 사정이었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월남전 파병이 우리 군대의 현대화와 경제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1965년 비전투 사단인 비둘기부대와 이동외과병원 파병으로부터 시작하여, 전투부대인 맹호, 백마, 청룡부대, 군수물자 담당인 십자성부대가 차례로 파병되었고 이를 총괄하는 주월사령부가 사이공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주월사령부 사령관은 최명신 장군이었는데, 이분은 아주 작전능력이 뛰어나고 부하장병을 혈육같이 사랑하여 모든 장병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장군으로, 작년 말 작고하기 직전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사병묘역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여 현재 동작동 국립현충원 사병묘역에 묻힌 유일한 장군으로 모든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다.
내가 주월사령부 법무사(군 판사)로 사이공에 근무할 당시 나보다 먼저 파병되어 붕타우 이동외과병원에 근무 중이시던 부산의 형님(배병원)을 만나기도 하였다. 우리 시험동기 대부분이 월남전에 종군하였는데, 김영일은 비둘기부대, 유지담은 맹호부대, 이원성과 김영수는 순차 백마부대, 이보환은 십자성부대에 잠시 근무하다가 주월사령부, 주광일은 내 후임으로 주월사령부에서 근무한 것으로 기억된다.
특기할 것은 주월사령부에 근무하던 1969년 1월경 한국으로 1주일 동안 출장을 왔다는 것이다. 당시 채명신 사령관께서 월남전 참전 장병들의 복지를 위한 재단법인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에 필요한 재단법인 정관(규칙)을 만들 기초 자료를 수집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전용사를 한국에 있는 다른 장병들에 비하여 우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국방부의 반대로 재단법인 설립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일로 나는 1년의 파병기간중 전례에 없던 한국 출장을 다녀간 것이다. 이때 군복을 입고 약혼한 아내와 함께 눈 쌓인 덕수궁을 거닐며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나는 월남에서 1969. 8 중순 귀국하여 대구에 있는 2군 사령부에서 1년 더 법무사로 근무하다가 그 다음해 9월 말 3년간의 병역의무기간을 모두 마치고 만기 제대하였다.
월남전 참전으로 다른 참전자와 함께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각종 혜택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제대를 얼마 앞둔 1969년 9월 14일 당시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예식장에서 대학 은사이신 이종하 교수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사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여름 사법대학원 시절 대구지방검찰청에서 검시 시보로 실무 수습할 때이다. 장인어른(呂聖道 여성도)께서는 오래 동안 고향 경산군 안심면(지금은 대구시 동구에 편입, 옛날부터 ‘반야월’ 이라고 불리고 있다)의 면장을 하신 분으로, 고향의 유지였고 아버지와는 오래된 친구 사이였다. 1965년 9월 15일 사법시험합격자 발표가 있었고 사법대학원 입학은 그해 10월 1일이어서 그 공백 기간 동안 내가 반야월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있을 때 장인어른께서 축하차 집을 다녀가시기도 하셨다.
그날 장인어른께서 검찰청으로 막내딸을 데리고 나오시어 향촌동 어느 일식 식당에서 점심을 사 주신 것이다. 아내를 처음 만날 당시엔 장인께서 두 사람이 앞으로 서로 사귀어보라는 취지로 의도적으로 데려오신 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기는 너무 어린 대학 2년생이었고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였기 때문이다. 뒤에 안 일이지만 아내도 그날 엉겁결에 따라나섰다가 나를 만나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후 고향어른이시기에 새해가 되거나 명절이 되면 인사차 당시 장인어른께서 살고 계시던 동인동 집에 들리 곤 할 때 딸도 자연스레 몇 번 만나게 되면서 차츰 이성으로 느끼게 되어, 명절이 아니어도 장인어른께 인사드린다는 핑계로 종종 동인동에 들렸다. 언제쯤일까 어느 날, 동인동 집에 들렸을 때 장인어른께서, 나가서 점심이나 하자시며, 집에 있던 아내에게도 같이 가자하니 아내가 “저 두요!” 하면서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이, 참 구김살 없이 부모 사랑 속에서 자랐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아마 이것이 아내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동기가 된듯하다.
1968년 8월 월남으로 떠날 무렵에는 2년 이상 결혼을 전제로 사귀었고 양가 어른들께서도 결혼을 승낙한 상태에서 교제를 하고 있었기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지만, 장인어른께서 전쟁터로 나가는 마당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걱정하신 듯, 월남으로 떠나기 직전인 1968년 7월 12일 가까운 친지들을 모시고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식은 귀국 후에 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어떻든 월남전 참전으로 아내 될 사람과 떨어져 지낸 1년 동안 거의 매일 그날의 일기 쓰듯 사랑의 편지를 보내고 1주일에 한번 쯤 답장을 받았다. 아마 그때 쓰고 받은 편지가 족히 300여 통은 넘었으리라. 그 편지는 우리 부부의 귀중한 추억꺼리로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아내와 교제하면서, 대구에서는 당시 갈 곳이 그리 많지 않아 주로 유원지로 통하는 수성못을 많이 찾았던 것 같다. 아마 대구지방검찰청으로 파견 나와 있을 때로 기억된다. 퇴근 후 만나 저녁을 먹고 수성못 둑 호젓한 곳에서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아내를 집에 바래다주려고 2킬로는 족히 됨직한 동인동까지 손잡고 걸어왔던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일은, 월남으로 떠나기로 결정된 후 휴가를 얻어 약혼식을 올리고 난 어느 무더운 여름, 김천에 있는 친구 집을 거쳐 해거름에 속리산 법주사에 들렸다가 내친김에 속리산 문장대까지 올라가보자며 무모하게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혼겁을 먹은 일이다. 그때는 등산을 해 본 일도 별로 없고 처음부터 등산을 온 것이 아니므로 등산차림도 등산화도 신지 않은 상태였다. 뿐더러 문장대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어느 듯 해는 넘어가고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아내는 다리가 아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단다. 당시는 휴대폰도 없을 때인데 우리 둘 뿐이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걸어온 시간으로 보아 이미 되돌아 갈수 없을 만큼 멀리 왔기에 아내를 업고 문장대를 향하여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깊은 산속이므로 맹수라도 나오면 어쩌나하고 겁도 났으나 아내마저 겁먹을까 그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 후 철제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밟고 힘들게 올라가니 다행히 식당인지 여관인지 모르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었다(지금은 그런 건물이 없어졌다). 그 집에 들어가 거의 녹초가 된 아내를 눕히고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어리다. 밤늦게 저녁을 먹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힘들게 보냈는데, 다행히 그 다음날 아침에는 열이 떨어졌다. 본의 아니게 외박(?)을 하고 동인동으로 돌아왔더니 장인어른의 호통이 떨어졌다. 결혼도 하기 전에 외박을 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약혼한 사이인데 그렇게 화를 내신 것은 아마 곧 전쟁터로 떠나가는 사위될 내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걱정되셨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후 두고두고 그때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아내를 업고 산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이런 게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도 참으로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9. 판사 시절
1970년 9월 30일자로 군에서 제대하고 그 다음 날인 10월 1일자로 부산지방법원판사로 발령을 받았다. 1지망 서울, 2지망 부산, 3지망 대구로 희망법원을 써 내었는데 부산으로 난 것이다. 서울엔 1명이 났는데 아마 사법대학원 성적이 나보다 나았던 모양이다. 당시 사법대학원 교수 대부분이 서울대학교 법대교수이다 보니 지방대학 출신인 나는 서울법대 출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웠다. 그때 내가 작성한 논문을 그대로 베껴 낸 친구들 점수가 나보다 높게 나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당시 부산 법원에는 동기생인 석용진, 이보환과 함께 발령이 났는데, 부산에 1979년 9월 말까지 근무하면서 1971. 4 ~ 1973. 9 부산법원 관할인 진주법원지원에 배석판사 겸 단독판사로, 1976. 9 ~ 1978. 9 밀양법원 지원장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특기할 일은 석용진 판사와 진주에 근무하면서 그때 붐이 일기 시작한 테니스를 배웠고 그 덕택에 부산법원에 근무하면서 부산법원테니스 대표선수의 한 사람으로 대법원에서 주관하는 전국법원테니스대회에도 여러 번 참석하고, 금성사가 주관한 부산지역 직장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하여 그 때 처음 나오기 시작한 전자손목시계를 부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부산지방법원에 근무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 한 가지, 형사단독 판사 시절 무죄판결이 많다고 공판부검사의 비신사적인 행태가 있어, 한때 곤욕을 치른 사실이다.
형사피고인들은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 받는 것이 헌법상 대원칙이다. 그러기에 검사가 충분한 증거를 대지 못하면, 설령 범인으로 의심될만한 사정이 다소 있더라도 무죄판결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실제 재판을 담당한 판사들 사이에는 위와 같은 원칙을 엄격히 지키지 않고 어느 정도 자료가 있으면 검사 측의 의견대로 유죄로 선고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검사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기도 하고 또 유죄로 할 경우는 판결문 쓰기가 아주 쉬우나 무죄판결을 쓰는 것이 몇 배나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유죄판결이 오히려 진실에 맞을 수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다보면 정말 죄를 짓지 아니한 선량한 시민도 고문, 증거조작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무고한 그 사람뿐 만아니라 그 가정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래서 형사재판에서는 ‘열 명의 죄인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한명의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는 법 격언이 생기고 이는 인권을 중시하는 민주국가의 대원칙으로 되어있다. 나는 이 원칙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다보니 자연 다른 판사들보다 무죄판결이 많이 선고되었던 것이다.
어떤 일이 생겼는가하면, 공판관여 검사가 피고인 신문을 하면서 평소와는 달리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이미 확인된 피고인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부터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문하다보니 보통 오후 5시에 끝나던 재판이 밤 9~10시까지 갈 때도 있게 되고, 또 선고된 판결에 대하여 평소에는 검찰청 기준에 따라 항소하지 않는 형이 선고되었는데도 모두 항소를 하여 기록정리를 맡은 직원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소문이 나 형사단독판사들이 공판부 검사들에게 항의를 하고, 결국 공판부 검사들이 사과하는 의미에서 형사단독 판사들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사건은, 부산지방법원에 근무하던 1979년 4월 부활절을 며칠 앞두고 대연동 성당에서 알폰소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외사촌 누나(정재순-작고)의 의동생을 따라 대구 동인동에 있던 영광교회에 한두 번 간 기억이 있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교회나 성당에 나간 일이 전혀 없었고 어느 누구로부터 입교 권면을 받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아내와 사귀거나 결혼을 할 때까지도 아내가 세례를 받은 가톨릭신자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하였다. 한 번도 이야기 한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세 때 대부를 선 손중모 변호사(1983년경 작고)와는 1974년 쯤 부터 부산테니스클럽의 같은 회원으로서 거의 매일 새벽에 만나 테니스를 치며 친하게 지냈고 따라서 아내도 그 부인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 부인이 열심인 가톨릭 신앙인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아내는 그 부인을 만나 자신도 고등학교 다닐 때 엘리사벳이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하게 되고 그 부인의 권고로 성당에 나가기로 결심한 다음, 나에게도 같이 나가자고 하였던 것이다. 아마 그 때가 1975년 쯤 되었을 듯하다. 그러나 그 무렵 한창 테니스에 빠져 있을 때이다 보니 주말에는 주로 테니스 클럽 회원들과 어울리게 되어 주일에 성당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시간이 나면 어린 아이들 손을 잡고 그 무렵 수녀원 안에서 행해지던 주일미사에 나가곤 하면서, 주위의 권고에 따라 1975년 12월 4일 수녀원에서 혼배성사를 보기도 하였다.
1976~7년 밀양법원 지원장으로 근무할 때에는 아내가 밀양성당에서, 큰 딸 정은(楨恩)은 요세피나, 큰 아들 정익(楨翼)은 요셉, 막내 정민(楨珉)은 요한 이라는 영세명으로 3남매 모두 유아 세례를 받게 하였고 나도 부산에서 보다는 자주 주일에 성당에 따라가곤 하였으나 영세를 위해 교리를 받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9년 초순부터 부산 중앙동성당에서 주로 법조인과 교사들을 상대로 개설한 3개월 코스의 ‘지성인교리 반’에 등록하여 부산 교구의 이갑수 주교님을 위시한 저명한 몇몇 신학자 신부님으로부터 가톨릭 교리를 배웠는데, 세례는 각 주거지 성당에서 받게 하다 보니, 나는 대연동 성당에서 그해 부활절 며칠 전에 혼자 세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내가 부산법원에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형님(배병원)께서도 1972년 쯤 군의관 제대와 동시에 부산에서 병원개업을 하시게 되어 이제껏 50여 년 가까이 부산 가야에서 진료를 하시다 보니 이제 부산 가야의 유지가 되어버렸다.
나는 1979년 10월 1일자로 대구고등법원으로 발령이 나, 2000년 7월 11일 대법관으로 임관되어 서울로 올 때까지, 고향인 대구에서 판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내가 대구에 올 당시만 해도 부산에는 고등법원이 없었다.(1992년 9월 1일 대전고등법원과 동시에 설립) 법원판사들은 대체로, 판사로 임관되면 2~3년 지방법원배석판사로, 4~5년 단독판사로, 그 다음은 고등법원 판사, 대법원재판연구관을 거친 후 임관 10년이 조금 지나 지방법원부장판사로 승진하는 과정을 밟게 된다. 당시 부산에 고등법원이 있었더라면 나는 모르긴 해도 평생 부산에서 판사, 변호사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부산은 법조전통이 확립된 대구와는 달리 경제규모가 큰 상업도시여서 변호사로서는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그곳에서 변호사를 하다가 대법관이 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떻든 대구고등법원 판사로 1년여 근무하다가 1981년 3월 초 대법원재판연구관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 내가 모시게 된 분은 김덕주 대법관님이셨다. 이분은 내가 대학에 재학 중일 때 대구지방법원판사로 근무하시면서 대구대학에서 잠시 민사소송법 강의를 하신 적이 있고 대법관퇴임 후 잠시 대법원장으로도 재직하셨는데, 재판연구관시절 덕수궁 부근의 옛날 대법원청사 가까이 있는 어느 여관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주말마다 대구로 내려오고 하니 대법관께서 그러한 나의 사정을 아시고 복잡한 사건은 같은 방에 있던 다른 연구관에게 검토시키고 나에게는 비교적 간단한 사건을 검토시키는 등으로 배려해 주셨다.
보통 재판연구관으로 가면 1~2년 대법원에서 근무하는데, 같이 간 우리 동기들은 6개월 만에 부장판사로 승진되어 소속법원으로 발령이 났다. 사실 이렇게 단기간에 인사이동이 되면 대법원재판연구관으로 일을 조금 익힐 만 하면 떠나가게 되어 대법관의 과중한 업무를 도와드린다는 재판연구관의 본래 취지에 맞지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 다음부터는 고등법원 판사들이 순차 모두 재판연구관으로 가는 그때까지의 제도를 바꾸어 특히 지방에 근무하는 사람은 희망자에 한하여 대법원에서 선별하여 재판연구관을 시키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떻든 나로서는 가족과 떨어져 하던 객지에서의 여관하숙생활을 빨리 면한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나는 부장판사 승진과 동시에 1981년 10월 1일자로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부산법원에 근무하던 중 진주, 밀양 등 지방의 법원으로 발령이 났을 때에는 아이들이 어렸기에 온 가족이 이사를 가 함께 살았지만, 잠시 서울 근무할 때는 물론, 김천법원 근무 때에도 아이들을 전학시킬 수가 없어 나 혼자 가서 근무하다가 주말은 대구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 김천에는 지원장 관사가 있어 기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고 또 대구와는 기차나 승용차로 1시간 거리여서 일이 있으면 주중에라도 집에 들리 곤 하였다. 김천법원에서 배석판사로 함께 일한 김수학 판사는 대구지방법원장과 고등법원장을 역임 후 현재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한기춘 판사는 오래 전부터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데 두 분 모두 가톨릭 신자이고, 한기춘 판사는 김천 평화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나의 대자이기도하다.
김천법원 지원장으로 있을 때인 1983년 봄에 자동차운전면허를 따고, 아울러 정부의 방침에 따라 지원장용 관용차를 돈 30만원에 불하받아 그때부터 자가용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무렵 법원 뿐 만아니라 행정부처 산하에서도 기관장용 관용차를 불하하는 대신 그 차를 이용하던 기관장에게 차량 운행비를 지불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마이 카(My Car)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불하받은 차는 수동식 기아변속장치가 달린 ‘마크 포’ 란 승용차였는데, 그 무렵 운전을 배운 아내가 운전할 때에는 기어 변속이 힘들어 매우 애를 먹었다. 그러나 이 차에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을 태우고 아내와 교대로 운전하며 친구가족들과 함께 설악산 한계령 단풍놀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또 김천에 근무하는 2년 동안 골프를 시작하여 유성골프장에도 몇 번 나갔고, 또 평화동 성당에서 견진성사도 받았다. 견진 대부는 김천에서 소아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던 이주원 라파엘 선생이었다. 선생은 경북고등학교 39회로 나의 1년 선배가 되는 동문이시다.
1983년 10월 1일자로 대법원의 정기인사이동으로 대구지방법원으로 발령이 나 그때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5년 가까이 대구지방법원에서 1심인 민사합의부, 2심인 형사항소부, 민사항소부의 각 재판장으로 순차 근무하게 되었다. 고향을 지키는, 이른바 '향토법관(향판)' 이 된것이다. 최근(2014년 3월)에 광주 관내에서 '향판'으로 30여년 가까이 근무해온 광주고등법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시절, 지역의 이름있는 기업의 대표에게 벌금 240 여억원을 선고하면서, 벌금을 내지 아니할 때를 대비하여 동시에 선고하는 노역장유치명령에서 1일 환형금액을 터무니없이 높게 5억원(통상 5~10만원)으로 한 것이 밝혀져, 이는 같은 지역에 지나치게 오래 법관으로 근무토록하여 지역의 기업인과 유착된 때문이라며, 향판제도를 폐지해야된다는 여론이 높고, 대법원에서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제도개선을 할 뜻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무렵 이점에 관하여 조선일보 기자와의 전화 인텨부가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향토법관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 법관의 개인적인 자질 내지는 처신이라는게 나의 입장이다. 향판제도가 정착된 것은 오래 전부터로 가장 큰 이유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 일을 할만한 법관들을 검사처럼 1~2년마다 전국을 순환근무케 하면 지방의 대부분 법관들이 사표를 내고 변호사개업을 하게되어, 고향에서 오래동안 판사로 일할 수만 있다면 평생토록 고향에서 법관으로 일하겠다고 희망하는 법관의 이직을 막을 수 있다는데 있는 것이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도 한 번 판사로 임명되면 종신토록 같은 지역에서 일하게 하고 있다. 문제는 향판으로 한 지역에 오래동안 근무하는 법관들의 자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이다.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임관 때부터 법관으로서의 자질 유무를 엄격히 따질 뿐만아니라, 정기적인 교육을 통해 법관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하고, 편향적인 판결이 선고되면 곧 바로 적절한 인사조치로 불이익을 입도록 하여 그러한 일이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것을 모든 향판들이 피부로 느끼도록 대법원의 철저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떻든 김천에서 대구지방법원으로 들어온 후 5년쯤 된 1988 7월 31자로 사표를 내고 대구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대부분 판사로 재직하다가 변호사 개업을 할 때에는 미리 사무실과 사무장을 물색하는 등의 준비를 한 다음에 판사직 사표를 제출하는데, 내 경우는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는 대학 선배가 몇 번 변호사 개업을 권유하곤 했지만 나는 그때까지 판사를 천직으로 알고 있었고 또 한편 막연히 나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변호사로는 적합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선뜻 개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개업 직전 새로이 대법원장님이 취임하시고 첫 대법원의 인사발령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우리 동기들이 고등법원부장판사(법원장급)로 승진할 차례였기에 혹시나 하고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발표된 인사발령을 보니 우리보다 몇 기나 앞선 선배 기수 중에서 몇 년 전 탈락한 분들을 뒤늦게 고등부장으로 순차 승진시키는 것으로, 앞으로 이러한 인사발령이 계속된다면 우리 동기들은 언제 고등부장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지방법원 수석부장으로 있던 친구(경북중고 40회 동기 송진훈, 그는 대구지방법원장, 부산고등법원장을 역임하고 나보다 3년 전쯤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나와 3년 가까이 대법원에서 같이 근무했다)와 함께 같은 차로 저녁 회식모임에 가면서, 불쑥 변호사 개업이나 해볼까 하고 혼자 말처럼 하였더니 그 친구가 지금이 개업시기로는 아주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내 생각에도 대구에서 오래 동안 부장판사로 재직하다 변호사 개업을 하신 분이 없고, 또 한편으로 당시 정은이가 고3, 정익이가 고2로 내년부터 순차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그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할 터인데, 그러자면 판사 봉급으로는 그 뒷바라지가 매우 힘들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저녁 회식 장소에서 함께하신 지방법원장님께 변호사 개업을 위해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참으로 갑작스럽고 어쩌면 무모하게 비칠 결단이었고 그 때문에 사표를 낸 직후 변호사 개업을 위한 사무실과 사무장을 구하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의 결단이 아이들과 가정을 위하여 또 나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아주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10. 변호사 시절
우여곡절 끝에 변호사 사무실과 사무장, 또 그 밖에 필요한 직원을 구한 다음, 1988년 8월 8일 가까운 손님들을 초청하여 개업식을 하게 되었다. 모두들 행운의 수자 8이 네 번 겹쳐 100년 만에 한번 있는 길일(吉日 좋은 날)이라며 개업을 축하해 주었다. 멀리 부산지방법원에 근무하는 조무제 부장판사도 일부러 찾아 주었다. 조무제 부장은 사법대학원 7기로 초임 때부터 줄곧 부산, 대구에서 판사 생활을 같이 해온 친구로 훨씬 뒤 대법원에서 대법관으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변호사 개업과 동시에 우려와 달리 많은 사건을 수임하게 되었고 몇 년 동안 참으로 바쁘게 일했다. 토요일은 말할 것도 없고 일요일에도 혼자 사무실에 나와 일할 때가 많았다. 개업 전 성격이 사교적이 못되어 변호사로는 적합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러한 생각은 잘못이었다. 평소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느냐, 내 사건을 맡아 얼마나 성실하게 처리해 주겠느냐가 변호사를 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뿐, 그 사람이 사교적이냐 아니냐는 변호사 업무와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판사로 재직하면서 사건 하나하나를 성실하게 처리하고 가능하면 당사자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들어주며 친절히 재판 진행을 하려고 노력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된 듯하다.
변호사 개업 초기에 너무 일이 많아 그 이듬해 봄에 있었던 딸의 여고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때 좀 무리해서라도 가보아야 할 걸 하며 지금까지도 후회가 되곤 한다.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동성 로타리클럽에 가입하여 봉사활동을 하면서 클럽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고, 대구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구지방변호사회 부회장을 거쳐 1997~8년도 변호사회장도 역임하면서, 당연직으로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대구지방변호사회장으로 재직 중, 변호사회의 활동으로 길이 남을 두 가지 업적이 있는데, 그 하나는 대구변호사회와 일본 히로시마변호사회가 자매결연을 맺은 일이다. 15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두 변호사회는 해마다 교대로 회원들이 상대방 변호사회를 방문하여 공동 관심사에 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친선 축구 대회, 골프 대회 등으로 회원 간 친교를 나누어 오고 있는데, 아마 두 변호사회가 존속 하는 한 이러한 상호 방문 행사는 계속될 것이다. 또 하나는 전국 처음으로, 1998년 5월 뜻 있는 변호사들을 모아 매월 5만원씩 갹출(醵出)하여 불우이웃 돕기 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여 시행한 일이다. 회원들의 호응도가 좋아 지금까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시행되고 있는데 첫 달에는 300 여 만원 이던 것이 지금은 매월 600만원을 웃도는 성금이 모여 어려운 이웃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15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매월 계속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 했든가 2014년 5월 간행된 대구지방변호사 회보 제71호에 의하면 올 4월까지의 누계 금액이 9억 원을 훌쩍 넘었다.
그러나 변호사로 일하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가톨릭신자피고인에 대하여 내가 대구고등법원에서 무료 변론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교도소에 복역 중인 20년 가까이 마치 가톨릭수사와 같이 주님을 찬미하며 기쁘게 살아 온 덕택에 모범수로 인정받아 20년 유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2011년 가석방으로 출소하여 현재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근무하면서 쉬는 날에는 교도소나 성당에서 신앙을 증거 하는 선교사 역할을 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 변론한 피고인에 대한 선고가 끝나면 그 피고인을 잊고 마는데, 그는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며 교도소에 있는 20년 동안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살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 그래서 나도 한 달에 한번 쯤 답장을 하게 되고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날은 영치금을 넣어 주기도 하였다. 또 그가 있는 관내 법원에 재판감사를 나가는 기회나, 그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 있는 교도소로 와 있을 때 가끔 그를 찾아가 만난 일도 있다. 그때마다 그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나도 그렇게 부르는 그를 나무라지 아니하여, 자연적으로 그는 나의 양아들이 되었다. 최근 ‘행복한 사형수’ 란 수기를 출간한 배정수(본명 이석수) 요아킴이 바로 그다
11. 대법관 시절
지금은 그러한 관행이 거의 사라지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대법관으로 임명될 무렵까지는, 대법원장을 제외한 열둘의 대법관 중 열 명은 현직 고위 법관(주로 법원장 및 고등법원 부장판사)중에서, 나머지 둘 중 한명은 현직 검사장급 검사로, 또 한명은 변호사 중에서 임명하는 관행이 있었다. 임기 6년이 끝나 퇴직하는 대법관이 생길 때마다 위와 같은 관행에 따라 현직 법관, 검사 또는 변호사 중에서 후임 대법관을 뽑았는데, 대체로 사법시험 기수에 따라 그 순서가 정해지곤 하였다. 내가 대법관으로 임명될 때는 여섯 분이 한꺼번에 퇴직하였는데 그 중 네 분은 판사 출신, 한 분은 검사, 또 한 분은 변호사 출신 대법관이었기에 현직 법관 외에 검사와 변호사 중에서도 각 한분이 대법관으로 임명되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직전에 임명된 대법관 넷 중 셋은 사법시험 제4회(사법대학원 7기인 이용우 윤재식, 조무제), 한분은 우리 동기인 사법시험 제5회(사법대학원 8기인 유지담)였기에 이번 대상자는 사법시험 제5회부터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고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그 때 대법관의 꿈을 접었고, 전국에 3,000여명이 넘는 변호사 중 한분이 뽑히게 되어있다지만, 그 자리가 지방에 있는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수한 변호사 대부분이 서울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 6월 초순쯤 대법원행정처장으로부터 내가 대법관으로 임명제청 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헌법상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권자로 되어 있지만 이는 국가수반으로서의 의례적인 권한일 뿐이고 대법원장의 임명제청대로 임명되어 왔다.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에게 실질적인 임명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법원장의 임명제청이 있으면 우리 때부터 처음 시작된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대법관으로 임명되는 것이다. 국회의 인사청문회 당시 마침 미국에서 처형 부부가 우리 집에 놀러와 영동 처형 부부, 대구 처형 모두 아내와 함께 국회 인사청문회과정을 방청하기도 하였다. 특별한 문제가 없었으므로 함께 청문 절차를 거친 여섯 중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것으로 기억된다.
어떻게 지방에서 평범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내가 한 자리뿐인 변호사 몫 대법관으로 발탁되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법관으로 임명을 받고 서울로 떠나기 전 모교인 영남대출신변호사모임에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 후배 한 분이, 나를 한쪽으로 불러내더니 혹시 임명권자로서 가톨릭신자이기도 한 김대중 대통령과 대부, 대자의 관계에 있지 않느냐고 물어오기도 하였다. 그 전에도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내가 가톨릭신자라는 사실을 아는 그 후배가 머리 짜내어 생각해 낸 것인 듯하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물론 실질적 임명권자인 대법원장과도 그때까지는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나대로 추측하자면 이번에 임명될 대법관은 우리 기수와 그다음 기수가 대상인데 아마도 대구법원을 거쳐 간 몇몇 판사들을 통해 나에 대한 변호사로서의 여러 활동과 재판 과정에서의 소송수행능력 등에 관한 좋은 정보가 대법원장에게 들어 간 듯 하고, 또 하나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능력 있는 변호사들은 서울이 지방에 비해 수임료가 고액이다 보니 대부분 재산이 너무 많아 인사청문회에서 들어내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 아니었든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러나 이는 나대로의 추측일 뿐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오늘에 이르기 까지 나를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크나큰 은총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생각지도 않게 대법관으로 임명됨에 따라 임기를 마친 후 대구로 다시 내려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생활 터전을 대구에서 서울로 옮겼다. 대구의 변호사 사무실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도 왔다. 3남매 모두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직장에 다니므로 주말이 되면 종종 아들, 딸과 귀여운 손자, 손녀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곤 하였다. 아내가 좀 힘들기는 하였지만 즐거운 가족 모임으로 대구에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법조인으로서 대법관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이지만, 나로서는 대법원에서 근무하는 5년여 동안 참으로 힘들었다. 처리해야 할 사건은 많은데 어느 것 하나 대충 넘길 수 없는 성격이다 보니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가고 기록 보따리를 집에 가져와서 밤늦게까지 기록 검토를 했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5년 째 접어들면서부터 계속된 과로로, 대법원에 오기 이전부터 약간 문제되었던 심장판막이상증세가 악화되었는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대법원에서는 2년마다 격년으로 전국법원 테니스대회와 등반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등반대회는 북한산에서 개최하는데 그날 각급 법원출전선수와는 별도로 대법관들도 보다 쉬운 코스로 등산을 하는데, 2003년도 대회 때에는 나도 선두 그룹과 함께 완주를 해도 건강상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2005년도 등반대회 때에는 전과 같은 코스인데도 숨이 차서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대법원으로 오기 2 ,3년 전쯤 대구에서 건강검진을 전문으로 하는 어느 내과병원에서 난생 처음 종합건강검진을 받은 일이 있었다. 성인병의 원인으로 흔히 꼽히는 혈압, 당뇨, 콜레스테롤 등의 수치가 모두 정상범위내로 건강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가슴 X-Ray 결과 왼쪽 심장이 오른쪽보다 더 크게 나타났다. 이를 ‘심장이상비대’라 한단다. 심초음파 진단을 한 전문의에 의하면, 언젠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왼쪽 심장판막에 염증이 생겨 고열로 고생하다가 약을 먹고 나은 일이 있었다면서 그때 왼쪽 심장판막이 정상보담 조금 짧아져 심장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간 피가 일부 역류하여 심장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이 생기고, 왼쪽 심장은 같은 시간 안에 되돌아 온 피만큼 다시 내보내기 위하여 한 번 더 작동하다보니 오른쪽심장보다 커졌다는 것이다. 당시 친구 친형으로 서울에서 개업 중인, 심장전문의 이종구 박사를 찾아갔더니, 언젠가 판막이 더 짧아지면 판막교체수술을 해야겠지만 아직은 수술할 단계는 아니라고 하였다.
그 무렵 수성동성당에서 새벽미사 중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옆에 앉아 있던 성당사무장이, 내가 앉아서 신부님 강론을 듣다가 갑자기 머리를 탁자에 떨어뜨리기에 깨웠다면서 나를 지하에 있는 성당폐백실 방안에 누워 잠시 안정하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혹시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경북대학병원 신경과에 입원하여 그 원인을 찾으러 온갖 검사를 하였으나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심장판막이상과 관련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심장에서 나간 피가 일부 역류되고 있다하여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물론 등산을 할 때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후, 대법원에 근무 중이던 2002년도 여름으로 기억된다. 여름휴가기간에 대구에 있는 어느 친구 부부와 함께 터어키 여행을 가기로 한 날 새벽에 집 부근의 대중목욕탕에 갔다가 목욕탕 안에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일이 있었다. 곧 바로 정신이 들어 평시와 다름없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보통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공항까지 직접 가서 같이 여행하기로 한 친구에게 여행을 취소해야겠다고 사정 이야기를 하고, 그날 서울대학병원 신경과에 입원하여 정밀검사를 받게 되었다. 검사 결과 주치의인 윤병우 신경과 과장의 진단은 뇌파이상 (뇌전증) 증세로 보이지만 왜 이러한 증상이 생겼는지, 심장판막에 이상이 있다고 반드시 이러한 증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심장판막이상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며, 그 증세에 대한 처방으로 뇌전증 약을 복용하게 하여 오랫동안 먹고 있었는데,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도 대법원 근무 중 몇 달 만에 한 번씩 부정기적으로 모두 세 번이나 그러한 증상이 생겼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 번 모두 성당에서 아내와 나란히 서서 미사를 드리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는데, 그때마다 아내가 나의 영세명을 부르며 어깨를 흔들면 곧 바로 정신이 돌아와 미사를 끝내고 아무 일도 없었듯이 평시와 같이 출근하여 일상생활을 하곤 하였다. 우리는 이 증세가 심장판막이상으로 피가 뇌에 충분히 공급되지 못한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치의는 확신이 안 서는 듯, 판막교체수술을 권하지는 않고 복용하는 약의 량만 계속 늘여나갔다. 그러나 퇴직하고 곧 바로 심장판막교체수술을 시행한 다음, 미국에서 소아신경과를 전공한 처남(여호근)의 조언에 따라 주치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을 모두 끊고 거의 10년 가까이 약을 먹지 않아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 증세의 원인이 심장판막이상에 있었던 것이 확실해졌다. 당시 주치의가 이점을 미리 파악하여 좀 더 빨리 심장수술을 받게 하였더라면 대법원 근무 중 고생을 덜 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더라도 인간의 능력이란 게 한계가 있기 마련, 의사를 탓 할 일만은 아닐 것 같다
어떻든 그 약의 부작용이었는지, 정년퇴직을 몇 개월 앞두고는 골프 라운딩을 하면서 퍼팅을 할 때 공이 두 개로 보이곤 할 때도 있었다. 아내는 건강을 위해 대법관을 당장 그만두라고 권하기도 하였지만 대법관은 함부로 그만 둘 수 있는 그러한 자리도 아닐 뿐만 아니라, 업무처리에 힘은 들었지만 사무실이나 법정에서는 한 번도 그러한 증세가 나타나지 아니하여 외견상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다가 정년퇴임도 얼마 남지아니한 마당에 사표를 낼 수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바닥이 돌 같이 딱딱한 공중목욕탕에서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또 사무실이나 법정에서는 한 번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 정년퇴임까지 정상적으로 업무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게 결코 우연이 아니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년퇴임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에서 내가 주심으로 처리한 많은 사건 중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 하나만 들면, 형사사건의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조사받는 자리에 변호사가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된 사건에서 최초로, 헌법이 피의자에게 보장하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에는 피의자가 변호사가 있는 자리에서 조사 받는 권리도 포함된다고 판결(대법원 2003년11월 11일 선고,2003모402사건)하여, 피의자의 인권신장에 기여하였다는 평을 받았고, 이것이 2007년 6월 1일 형사소송법 개정 때에 “변호인의 참여권” 이란 조항(형사소송법 제243의2)으로 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2005년 11월 30일 임기 6년을 7개월 여 앞두고 65세 정년으로 대법원에서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변호사 개업을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변호사를 할 성격이 아니라는 전제아래 법관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법관으로 정년퇴임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 개업으로 말미암아 당초의 꿈이 깨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최고법원인 대법원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되니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내가 퇴임 당시는 이른바 진보파로 분류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어서 3개월 전 교체된 이용훈 대법원장도 언론에서는 진보파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래서 퇴임사에서,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고 그 기준에 따른 판단이 사안에 따라 어떤 것은 진보적인 판단으로, 어떤 것은 보수적인 판단으로 비칠 수는 있지만, 법관을 진보, 보수로 분류하여 어느 한 쪽으로 몰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 기억이 난다.
퇴임 직후 조선일보 기자와 전화 인터뷰가 있었는데, 주로 퇴임사에서 지적한 법관의 진보, 보수 문제가 주제였고, 덧붙여 다시 변호사 개업을 하느냐의 질문에 대하여 아니 한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대로 신문 사회면에 크게 보도되었다. 대법관으로 퇴직한 대부분의 선배들이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당시에도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아니하여 변호사 개업을 할 수도 있었지만, 모교인 영남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후배를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또 대법관으로 오기 전 10여년 변호사로 일하여 노후생활 준비도 어느 정도는 되어 있었는데다가, 당시의 건강이 좋지 않아 우선 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기 때문에 그때 변호사개업을 않는다고 대답한 것이다.
사실 대법원에 올라 올 때만 해도 퇴직 후 다시 대구로 내려가 변호사로 일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삼남매 모두 서울에서 가정을 이루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만년에 아이들, 특히 퇴직 당시 한창 재롱을 피우는 귀여운 손자, 손녀들을 자주 만날 수 없는 대구로 내려가는 게 싫어 서울에 계속 살기로 마음이 바뀌었고, 퇴직 후 심장판막교체수술로 건강이 좋아졌지만 그때의 변호사개업을 아니한다는 공개 선언으로 인하여 서울에서도 변호사 개업을 않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요즈음 개업을 한 대법관이 짧은 기간에 많은 돈을 벌어 전관예우 문제로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될 때마다 내 이름이 좋은 이미지로 언론에 나오게 되어, 아는 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
12. 퇴직 후 생활
퇴직 다음 해인 2006년 1월 6일 서울대학병원에서 흉부외과 안혁 과장의 집도로 심장판막 교체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을 끝내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까지 장장 8시간이나 걸린 큰 수술이었다. 나는 마취된 상태에서 아무것도 모르다가 깨어났지만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피 말리는 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심장수술이 처음 시도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심장 수술에 성공하였다는 기사가 해외 토픽으로 나온 것이 1960년대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동안 의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요즈음은 마치 맹장수술 같이 빈번히 심장수술이 행해지고 있단다. 그렇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판막을, 정상적으로 온 몸에 피를 공급하면서 교체하는 수술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잘못되면 생명을 잃게 하거나 뇌세포를 상하게 하여 평생 불구자가 될 수 있는 위험한 수술임에는 틀림없으리라. 가톨릭 신앙인이었기에 수술 전 모든 것을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맡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찍부터 신앙의 길로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심장수술을 한 이듬해인 2007년 11경부터 중, 고등 40회 동기이고 같은 신앙인인 구명회 바오로의 안내로 청계산 등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공원역에서 옥녀봉에 오르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매주 한 번씩, 몇 달이 지나서는 매주 수(水), 토(土) 두 번씩 꾸준히 산행을 계속하다 보니 체력이 많이 좋아졌다. 산을 좋아하는 동기 친구들도 하나, 둘 매주 수, 토 청계산 산행에 합류하여, 자연히 10명 내외의 사공(40-경북 중, 고 40회동기회의 약칭)수토산행모임이 형성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산행모임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1년 5월 그렇게 꾸준히 청계산 산행을 같이한 친구들 10여명이 함께 1박 2일로 설악산 대청봉을 다녀왔고, 그해 10월에는 3박 4일로 지리산을 종주하기도 하였다.
대법관 퇴직 후 5년 동안 영남대학교 석좌교수로서 한 학기에 두, 세 번 정도 특강을 나가기도 했지만, 주로 중, 고등 동기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사공 수토산행모임 외에도, 작년 5 월경까지 5년이 넘도록 선릉의 동기회 사무실에서 동기인 이원재 교수로부터 역시 동기친구 10여명과 더불어 논어, 대학, 맹자, 주역 등 한문고전강의를 순차 듣고 강의가 끝나면 함께 점심을 하며 친교를 나누었고, 매주 목요일 점심때에는 별도의 동기친구 7~8명이 사정이 되는 대로 지정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친교를 나누고 있다. 또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았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하여 3년 여 전부터 한 달에 한번 꼴로 내가 거주하는 서초구 구청OK민원센터와 내가 나가는 방배동성당에서 무료법률상담도 해주고 있다. 그 외에도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사공동기골프모임, 대학동창회 골프모임 등에 참가하고, 매주 화요일마다 오후는 연당 백호자 선생이 지도하는 한문서예교실, 저녁에는 또 레지오 주회에 참석 하다보면 일 주일 내내 하루도 집에 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그런데 올(2014년) 겨울 한 달 동안 말레이시아 팜 스프링 골프장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18홀 씩 라운딩을 하고 밤 비행기로 2월 10일 월요일 새벽 귀국한 다음 며칠은 푹 쉬어야 하는데도, 그 다음 날부터 오후 내내 한문서예공부, 저녁에 레지오 주회 참석, 그 다음날 사공의 청계산 산행, 그리고 이틀 후 당일로 부산까지 다녀오는 등 무리를 한 탓에 피로가 너무 쌓인 때문이었던가, 심장수술 후 10년 가까이 약을 먹지 않고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증세가 다시 나타났다. 2월 18일 10시 보좌신부님 송별미사로 성당을 가득 메운 교우들 속에서 미사전례에 참석 중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종전과는 달리 좀 요란하게 쓰러진 모양이다. 제대에서 미사를 집전하시던 주임신부님께서 뛰어내려 오시어 인공호홉을 시도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여럿사람이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 증세로 알고 그에 맞는 조치를 시도했지만 곧 바로 정신을 차린 나는 이것이 심장수술 전 뇌파이상증세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게 재발한 것이구나 하고 곧 도착한 구급차에 실려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을 통하여 옛 주치의 윤병우 과장이 있는 신경과 병실에 입원을 하였다. 며칠간 MRI, 심초음파, 심전도 등 정밀 검사를 했으나 수술한 심장판막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심장은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윤병우 교수도 피로가 누적되어 심장수술 전의 뇌파이상증세가 재발한 것 같다며 그때 먹던 같은 약을 처방해 주면서, 과로를 피하고 술을 먹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조금이라도 피곤하면 쉬고, 일주일에 한번만 산행을 하는 등으로 가능한 한 과로를 피하려고 노력한다. 그 덕분인지 지금까지는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이글을 쓰고 있는 오늘(2014. 6/23) 청와대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국무총리후보 제의를 받았지만. 무리해서는 안 되는 나의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워 완곡히 거절하였음을 밝혀둔다. 아직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나 어린 손자, 손녀와 앞으로 태어 날 자손들은 작금의 우리나라 상황을 알아야 나에게까지 총리후보제의가 들어오게 된 사정이 이해될 것 같아 간단히 기록한다.
2개월여 전인 2014년 4월 16일 아침 8시경, 구원파라는 사이비종교집단의 우두머리인 유병언(73세)이란사람이 실질적으로 소유, 관리하는 인천 ? 제주를 운항하는 여객선(세월호)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였는데, 그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도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2학년생 300여명이 배가 기울어져 넘어가는데도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에 그대로 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따라 객실 안에 머물다가, 학생 대부분이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의 주된 원인은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장이란 작자가 나이 70이나 되는 구원파 신자로 싼 임금에 혹사당하는 무능력자로서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승객들의 구조의무를 저버린 채 선원들과 함께 먼저 배에서 탈출해 버린데 있었지만, 그 배의 운항을 관리, 감독하는 항만청 공무원의 직무태만, 사고 수습과정에서 들어난 정부의 가지가지 실책에 대한 책임을 지고 4월 말경, 정홍원 국무총리가 사표를 제출하였다. 후임총리로 지명된 한분은 검사장 출신으로 내가 퇴직 후 대법관을 지냈고, 한때 정권의 눈치를 안보고 소신 있게 일한다고 ‘국민검사’로 존경받던 분이었지만, 변호사로 단기간에 너무 많은 수입을 올린 것이 전관예우 때문이라는 여론의 혹독한 비판에 못 이겨 1주일 여 만에 자진사퇴하였고, 그 후 새로이 지명된 분은 언론인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던 분으로서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한 연설이 방송에 ‘반민족자, 친일파’ 로 왜곡 보도된 탓에 극도로 나빠진 여론 때문에 역시 국회의 인사청문회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자진사퇴 형식으로 물러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무총리로서 행정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보다는 우선, 국회인사청문회에 통과될 수 있는 사람을 총리후보로 찾다보니 그 부분에서는 아무 결함이 없어 보이는 나에게까지 총리후보요청이 들어오게 된 모양이다. 그때 총리후보제의를 수락하였더라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리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태어나 자란 내 고향, 내가 다닌 모교, 특히 총리가 처음 배출되는 반야월초등학교와 영남대학교로서는 무한한 영광이었을 터 이지만, 그러나 나는 평생 법조인, 그것도 주로 판사로서 재판만을 해온 사람이고 또 내 성격이 전혀 정치 지향적이 아니기에, 한 나라의 총리로서 온갖 이해관계가 얽히고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정치인, 특히 야당정치인과 싸워 가면서 방대한 국가의 가지가지 일을 원만하게 처리할 자신이 없다. 뿐만 아니라 70 중반에 접어드는 이 나이에 조용히 좋으신 주님 품안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리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주님을 찬미하며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기쁘게 살고 있는 현재의 이 행복한 삶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 몇 달 전 성당 미사 중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넘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저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과로를 하지마라는 경고와 더불어 오늘 이러한 일이 있을 줄 미리 아시고 청와대의 요청을 쉽게 거절할 수 있게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를 만들어 주신 것이구나! 하고, 다시금 주님의 오묘한 섭리에 놀라게 된다. 사실 그러한 일이 없었더라면 단순히 능력이 부족하다, 또는 하기 싫다는 것만으로는 청와대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결국 총리후보를 구하지 못한 박근혜대통령께서는 정홍원 총리의 사표를 반려하고 유임시켰다)
여기서 하나 더 언급할 것이 있구나. 내가 2014년 7월 1일부터 내가 속한 ‘사랑의 샘’ Pr(레지오)의 단장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12명 단원은 50대 초반부터 70대 후반까지(나이 많기로 내가 두 번째이고 첫 번째는 80이다) 고루 분포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단장을 할 만한 사람은 모두 한 번씩 했고 아직 아니한 소장파 몇몇은 직장생활이 너무 바빠서 아직은 단장을 맡기가 힘들다고 하여, 부득이 나이도 많고 건강이 시원찮은 나이지만 마지막 봉사로 단장을 맡아하기로 자원한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니 앞으로 3년의 임기 동안 주님께서 나의 건강을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13. 나의 신앙생활과 자손들에 대한 당부
올해 사순시기부터 멀리 여행을 가거나 새벽에 골프 라운딩을 가는 경우 외에는 거의 매일 새벽미사에 나간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기적의 새날을 나에게 열어준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미사에 참례하면서 듣게 되는 예수님의 복음 말씀, 이에 대한 신부님의 강론이 항상 새롭게 마음에 다가오며, 기쁘게 성체를 받아 모시게 된다.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그러나 이처럼 성당에 가는 게 부담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기쁨으로 느껴지고 그래서 매일 기쁘게 평일 미사에 참례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기간이 걸렸다.
앞서 잠깐 언급한대로 나는 1979년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 부산 중앙동 성당에서 행해진 ‘지성인 교리반’ 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고, 그해 부활절 며칠 전날 나 혼자 당시 주거지관내인 부산대연동성당에서 알폰소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교리를 맡아하신 어느 신부님께서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님의 존재에 관하여 설명하신 내용이 그럴 듯 했다.
신부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우리가 세종대왕을 본 일이 없는데도 그가 이씨조선 제4대 임금으로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데 이는 그러한 사실이 ‘이조실록’ 이란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죄 많은 우리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온갖 멸시와 고통을 받으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이 신약성경은, 온갖 기적을 행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예수님께서, 어느 날 맥없이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걸 보고 모두 겁내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숨어 지내는 방안에, 며칠 후 다시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말도하시고 음식도 드시는 것을 보니 생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 그대로이어서, 이 분은 분명 하느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다며,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등이 각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것이니, 이는 이조실록과 마찬가지로 그 기재 내용을 믿을 만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신(하느님)의 존재를 믿어보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으나, 3개월 동안의 짧은 예비자 교리 공부를 한 것만으로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때까지 지은 모든 죄가 소멸되고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세례의 참뜻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뿐더러 혼자 세례를 받다보니, 여럿이 함께 세례를 받을 때와 같이 축하객이 북적거리고 꽃다발을 받아들고 단체로, 또 가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며 모두들 기뻐하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영세를 받아 기쁘다는 감정이 전혀 생기지도 않았다. 그 결과 영세 후에도 테니스 모임 등 일이 생기면 쉽게 주일을 빼먹게 되고, 아니어도 주일을 지켜야 된다는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이른바 ‘일요신자’ 행세를 오래 동안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4년 쯤 대구 수성동성당에 나갈 때 주임신부님의 권유로 ‘레지오 마리에’ (통상 “레지오” 라고 불린다)라는 신심단체에 가입하게 되었다. 레지오는 성모마리아를 정점으로 하는 군대조직의 신심단체 중 가장 아래 단위부대로, 10명 내외로 구성되는 신자들의 모임인데, 쁘레시디움(Pr.)이라고도 부른다. 단원의 개인성화와 복음전파가 주된 목적이지만, 매주 한 번씩 정해진 시간,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회합(주회)이 이루어지고 종종 주회 끝에 2차 주회라 하며 맥주 집에 함께 가서 생맥주를 마시는 등으로 단원들 간에 친교가 이루어지고, 또 성당의 모든 행사 일정이 레지오 회합 때 단원들에게 상세히 전달됨으로 단원은 성당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다 잘 알게 된다.
레지오에 가입하기 전에는 주일미사에 나가도 반갑게 인사하는 교우도 없으니 미사가 끝나는 대로 곧장 돌아오고 말지만 이제 친해진 레지오 단원과 기쁘게 인사하고 차를 나누며 이야기도 할 수 있어, 한결 같은 교우라는 소속감을 가지게 되고, 성당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니 성당이 벌리는 행사에 관심이 가고 시간이 나면 아내에 끌려 더러 참여하게도 되었다. 그러나 레지오 가입으로 그 전보다는 성당에 나가는 것이 다소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뿐이지, 하느님이 어떤 존재이고 나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일에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일 뿐이고 일주일 내내 세상의 온갖 잡다한 일상으로 돌아와 하느님의 존재나 내가 신자라는 것도 잊고 지낼 때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1987년 1월 15~18일 주임신부님의 추천으로 3박 4일간 대구대교구 남성 제71차 꾸르실료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 교육에서 어렴풋이 하느님을 체험한 것인가,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주일에 성당에 나가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하나의 기쁨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그 때부터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는 각종 신앙서적을 찾아 읽고, 성당의 여러 행사, 예컨대 구역 모임, 단체로 가는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피정 등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1992년 11월 3일 대구에서 한창 변호사 업무로 바쁠 때인데도 김무한 주임신부님의 명으로 수성동성당의 평협회장(평신도사도직협의회장-지금의 사목회장)직을 맡아 5년 간 계속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구대교구 평협 선교분과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신부님의 명을 거절할 수가 없어 형식적으로 여러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신앙심이 깊어서가 아니라 부장판사 출신으로 능력 있는 변호사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맡겨졌을 뿐, 나 자신의 신앙이 아주 미약할 때이어서 지금 돌이켜보면 그러한 직책을 맡았다는 게 부끄럽기 그지없다
어떻든 그러한 직책에 있다 보니 대구대교구 평협회의에도 종종 참석하여 교구장이신 이문희 대주교님의 말씀도 듣게 되고 신앙심이 깊고 훌륭한 분들과 교구발전을 위한 교구 시노드(일종의 교구차원의 신앙 쇄신모임)에도 관여한 것이 나 자신의 신앙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듯하다.
한편 1996년 쯤 부터 4년 동안, 대구 파티마수녀원에서 주관하는 ‘어버이 성서모임’에 다니면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공부를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에 압량에 있는 강의실까지 가서 한 시간은 성서학을 전공한 수녀님의 강의를 들은 다음, 한 시간 동안 그룹 모임에서 봉사자의 지도아래 ‘복음 나누기’를 하는데 이는 그날 강의들은 성경말씀을 우리 생활과 관련시켜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아내는 나 보다 4년 먼저 이러한 과정을 모두 마치고 그 때는 봉사자로 나와 함께 다녔다. 신, 구약 성경을 개괄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공부할 수 있어 신앙을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4년 간 ‘어버이 성서모임’을 수료한 기념으로 아내와 같이 그때 공부를 같이한 분들과 더불어 신부님과 수녀님 인솔아래 2000년 1월, 20여일에 걸쳐 구약 성경의 무대인 이집트 시나이 산을 비롯하여, 예수님이 태어나시어 복음을 전파하시다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이스라엘의 나자렛, 갈릴레아, 예루살렘 등 신약성경에 나오는 역사의 현장을 살펴 볼 기회도 가졌다.
위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잇달아 이집트,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부터는 서서히 새벽미사에도 종종 나가게 되었다. 대법원에 와서는 업무가 바빠서 대구 수성동성당에서 오랫동안 해온 레지오 활동을 쉬었지만, 출근 전 가능한 한 아내와 같이 방배동성당의 새벽미사에 참례한 다음, 성당 뒷산을 거쳐 우면산 대성사까지 산책을 다녔다. 퇴직 후 건강이 좋아진 2007년 3월부터 수녀님께 부탁하여 추천받은 방배동성당 “사랑의 샘 Pr.” 에 들어가 레지오 단원으로 한 달에 두 번씩 즐겁게 봉사를 나가는데, 한 번은 성가소비녀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미아리의 무료진료병원인 성가복지병원에서 매주 실시하는 무료급식소에 매월 넷째 토요일 레지오 단원 5~6명이 함께 가서 배식봉사를 하고, 또 한 번은 매월 둘째 일요일 서초노인요양센터에 역시 레지오 단원 5~6명이 함께 가서 중증장애노인들을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시켜주고 점심식사수발을 들어 주는 것이다.
뿐더러 친구들과 함께 산행을 하거나 그 외에도 친구들을 만나면 저절로 화제를 신앙문제로 이끌어 믿지 않는 이에게는 예비자 교리 반에 나가도록 권하고, 영세를 받고도 쉬는 교우에게는 성당에 나가도록 권하게 된다. 심지어 기차 옆 좌석의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위와 같이 주님의 복음 말씀을 전하려고 말을 걸게 된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을 모르고 세속 일에만 얽매여 영혼의 구원에 관심 없이 살아가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과 손자, 손녀들아!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나의 자손들아! 너희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 집안이 윗대부터 가톨릭 집안은 아니었지만, 조상들 세대에는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적극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 그리된 것일 뿐, 그분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분들도 선하게 열심히 살다 가셨으니 틀림없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것으로 믿는다.
다행히 요즈음은 하느님의 복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도 많고 곳곳에 가톨릭교회인 성당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늦게나마 하느님의 우리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깨닫게 되어 하루하루를 주님 품안에서 기쁘게 살다보니, 이러한 기쁨을 사랑하는 너희들도 하루 빨리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 너희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려한다. 그에 앞서 앞으로 우리 집안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에 대하여는 반드시 유아영세를 시키고 때가되면 교리를 배워 영성체를 하도록 하여야하고, 짝을 만나 결혼을 시킬 때 나의 아들, 딸이 그렇게 하였듯이, 배우자 될 사람이 가톨릭신자가 아니면 반드시 영세를 시켜야 한다. 그리고 결혼식도 가능하면 성당에서 하도록 권한다.
영세를 받고 곧 바로 하느님을 ‘주님’ 이라고 고백하며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사람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 극히 드문 일인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앞에서 자세히 기록한대로, 영세를 받고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신앙에 맛 들이기까지는 장구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에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려면 남다른 노력을 해야 한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 뜨거운지를 깨닫고 받아들이는데 어찌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영세를 받더라도 주일에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성당에 나가는 것만으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다. 모두 직장 생활이 바쁘겠지만 틈나는 대로 신앙에 맛들이기 위하여 아래에 적은 몇 가지를 실천하도록 당부한다. 한꺼번에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선은 쉬운 것부터 조금 씩 실천하자.
우선은 아침, 저녁 기도를 받치는 습관을 들이자. 매일미사 책 부록에 실려 있다. 매주 나오는 ‘성당 주보’ 의 신부님의 글부터 읽기 시작하자. 그리고 직장에 나가야 하니 평일미사에 나갈 수는 없겠지만, 잠들기 전 매일미사 책에 나오는 그날의 복음말씀과 신부님이 쓰신 ‘오늘의 묵상’을 읽어 보자
매주 한 번씩 나오는 가톨릭신문이나 평화신문에 게재된 신부님의 좋은 글도 신앙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어느 것이든 하나를 정기 구독하여 읽는 습관을 들이자.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당에서 사순시기나 대림시기에 매번 외부 신부님을 초빙하여 시행하는 신앙특강도 빠짐없이 듣도록 하자. 초빙되는 신부님들은 대부분 우리의 영적 갈증을 풀어주는 내용의 강의에 능하신 분들이다. 좀 더 영적 갈증을 풀려면 신앙 서적을 폭 넓게 찾아 읽고, 성당이나 수녀원에서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성경공부모임에도 나가보자.
그리고 아무리 늦어도 40대 후반이나 50대에 접어들면 성당의 레지오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면서, 신부님의 추천을 받아 꾸르실료 교육을 받도록 권한다. 내 경험에 의할 때 성당에서의 지속적인 활동과 꾸르실료 교육이 신앙을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꾸르실료 교육은 평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고 나이가 많으면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경쟁도 심하여 주임신부님의 추천이 필요한데 레지오단원이 되어야 추천받기 쉽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모두 들 명심하여라.
젊을 때는 모두 자기가 능력이 좋아서 좋은 학교도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 간 것으로 알겠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내가 지방변호사로서 대법관으로 임명된 것도, 대법원 근무 중 심장판막이상으로 몇 번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일이 있었지만 사무실이나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는 한 번도 그러한 일이 없었고, 주로 성당 미사 때에, 마치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심장판막을 빨리 수술로 교체 하라고 나에게 경고 주듯, 그러한 일이 생겼고, 올 2월에도 더 이상 과로하지 말라고 경고 주듯, 성당 미사 중에 그러한 일이 생긴 것을 어찌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신혼 때는 아무리 힘든 일을 하는 경우라도 자신을 극진히 사랑하는 아내 또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그 일을 해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믿는 하느님께서는 아내나 남편보다 훨씬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우리를 구원하기위한 속죄 제물로 내어주신 분이시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을 맛 들이는 것이고, 하루하루를 주님의 품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길이다. 나의 자손들은 누구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알고 믿음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어떠한 처지에 있던지 늘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언젠가 죽는 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늘나라(천국)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기 바란다
. 마침 오늘(2014, 6/8)은 성령강림대축일! 명동대성당 주임 고찬근 신부님께서 서울주보에 쓴 ‘오소서 성령이여’ 일부를 아래에 인용하면서 당부의 말을 마친다.
“인생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닙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치킨 집 할아버지를 더 반기게 되고, 학창시절에 우정을 다짐하던 친구들도 다 잃어버리고, 연애시절 뜨겁던 사랑도 식어 버리고, 자식들은 제 짝 찾아 떠나고, 외로움에 지치자 온갖 집요한 병들이 친구하자고 조르고, 남은 것은 허무한 죽음뿐인 것, 그것이 인생 아닙니까? 이런 생각에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뜻밖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사랑을 받게 되면 인생은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새로운 희망으로 돌변합니다. 미지근한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고, 고목나무 같던 가슴에 푸른 잎이 돋고, 노란색 꽃이 피어납니다. 이렇듯이 사람을 뜨겁게 만들고,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다른 이름으로서, 우리를 뜨겁게 변화시키고, 온전히 차지하고, 사랑으로 이끄는 분이십니다.”
. 14. 글을 마치며.
이상으로 나의 어린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70 여년,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성공한 삶을 살아온 과정을 비교적 솔직하게 적어보았다. 돌이켜보면 하느님을 알고 나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느님을 모르고 살 때에도 항상 정직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언제나 좋은 결실이 따랐다. 하느님을 알기 전까지는 모두 내가 능력이 있고 또 잘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알았는데, 뒤늦게나마 내가 하느님을 알기이전부터 하느님께서는 나를 극진히 사랑해주시어 삶의 고비 고비마다 나를 이끌어 주셨다는걸 깨닫게 되어, 하루하루 좋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사는 요즈음이 참으로 행복하다. 너희들도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하여 맡은 일을 해나가도록 하여라. 틀림없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201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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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kw1158 원문보기 글쓴이: 배기원
첫댓글 저의 장인어르신의절친 이십니다..
대법관을 지내셨구요~~훌룡 하신 분이시죠.
제 주위에 이런분을 알고 있다는것 만으로도 축복이며 행운 입니다.
누군가 했더니, 언젠가 인터넷 블로그에서 지나가듯 읽은 미담의 주인공이셨네요. 역시 한국 사회가 좁긴 좁은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