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임이스트 이두성씨의 16일 정읍공연의 한 장면. 세번째 작품 오세암을 연기하고 있다.
장마 끝 무렵 비가 오락가락하며 대기에 습기를 뿌려대는 토요일 오후, 무엇을 해봐도 짜증에서 탈출하기는 어렵다. 물리적 짜증 유발요인에게 영향받지 않는 방법 중 하나는 몰입. 삼매경에 빠져 잠시만이라도 다습한 날씨가 주는 불쾌감을 잊어야 할 것이다. 이때 안성마춤으로 눈에 들어오는 공연이 있으니 마임 공연. 정읍에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마임공연을 보러간 장소는 정읍시 청소년수련관 소극장. 시간은 16일 토요일 2~4시.
한국마임협회부회장이자 경희대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마임연기자 이두성씨를 초빙, 신비롭고 몰아의 경지로 이끄는 마임공연이 있었던 것. 실험극 형식을 가미한 절제된 공연 예술을 보고나면 어느덧 자아가 고양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만드는 공연이었다. 옥에 티라면 관객의 대다수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라서 마임의 형식과 주제가 그들에게 다가서기 어렵게 느껴졌다는 점.
입을 닫으니 온 몸 구석구석이 말을 하는 역설
이두성 씨. 40대 초반의 남자. 남성의 몸이 가질 수 있는 골격과 근육질이 제거되어 슬림하게 쭉 뻗은 몸매의 소유자. 그 가녀린 선이 흔들리며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몸을 비틀면 그려지는 선... 유연하게 움직이는 어깨 선과 팔. 손끝, 발끝, 어깨 위 몸의 그 어느 곳,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위 아래 검게 입은 이두성씨의 육체가 그려내는 실루엣과 표정,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 흔들렸을 때의 울림, 그 울림과 떨림을 통해 관객들은 그의 세계를 , 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믿게된다. 말로 공표되지 않았으니 확인할 것도 없다. 해석할 것도 없다. 그저 내마음에 떠오르는대로 느끼기만 하면된다.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도 없다. 그로인한 갈등과 대립도 없을 터. 마임이 만들어낸 세계는 몰입의 세계. 경계밖의 세계끼리 충돌함이 없는 하나의 세계. 몰입의 세계.
그를 처음 보았지만 잘 알게 되었다?
내성적이라는 이두성씨. 생물학도로서 동아리 활동을 하다 연극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말이 불필요한 마임을 택하게 되었다고. 수줍던 청년이 만인 앞에 서게되었으니 인생의 아이러니요, 정해진 운명의 힘이다.
말문이 잘 열리지 않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늘 자기이야기를 하게된다. 그가 이날 공연한 내용들의 대부분은 자전적인 것들. 끊임없이 관객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느끼는 인생이란... 첫번째 레퍼토리였다.
반젤리스의 '인생'이란 곡에 맞춰 공연된 첫번째 마임은 인생이란 주제의 심오함 탓인지 동작은 가장 간단한 듯하지만 가장 어렵다는 것. "공연을 할 때마다 식은 땀이 흐른다"는 게 이두성 씨의 고백. 그는 무대에 서는 한 이 레퍼토리만큼은 끝까지 할 것 같다. 마임이스트로서의 자신의 경지를 가늠해볼 수도 있고 그자체가 하나의 명상과정이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해본다.
"마임을 통해 갈라선 노래, 춤, 연극을 통합하고 싶다"
두번째 공연 '아버지와 나' 역시 자전적 내용. '내'가 성장하면서 아버지와 빚는 갈등과 화해, 같은 남성으로서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 극의 독특한 점은 마임에 인형극을 가미한 점. '아버지 인형'과 '내 인형' 사이를 오가며 인형을 들고 마임을 해 보였다.
이씨에 따르면 "태초엔 종합예술형태로 공연예술안에 모든 것이 녹아들어있었는데 시대를 거치면서 세분화되어 독립된 장르로 자리잡았다. 그 세분화되어 버린 연극, 노래, 춤 등을 하나로 묶어내보고자 하는 것이 마임의 시도이다."
특히 "마임은 연극이 노래와 춤 등 몸짓을 덜어내 화술만 발달했다"고 지적하며 화술만 남은 연극대신 몸짓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마임의 존재의미를 강조했다.
간단한 소품은 극도로 신경을 집중시키고
또한 연극이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 볼 수 있는 마임의 실험성도 부각시켰다. 그 사례가 세번쩨 레퍼토리. 화장지를 이용한 마임극이었다. 어느 미술가가 닦는 용도인 휴지로 꽃을 만들어 주는 것에 영감을 얻었다는 것. 거기에 정체봉 동화 '오세암', 가난한 예술가로서 고단한 삶을 영위하는 자신이 휴지같다는 자괴감이 섞여 만든 작품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검은 옷을 입은 마임이스트가 하얀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가며 만드는 꽃송이, 휴지가 플리면서 만들어내는 하이얀 선들이 여백을 만들며 가슴에 스며들었다. 지극히 간단한 소품은 고도의 집중을 요구한다는 또 하나의 역설을 남긴 것.
무대에 점으로 서있는 검은 옷의 가녀린 남자. 무대장치도, 별다른 조명의 움직임도 없기에 우리는 그 남자만을 응시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심해서 견딜 수 없어진다. 그 남자의 일거수 일투족를 레이더의 포커스가 쫓는다. 그 남자가 뭔가 색다른 움직임만 보이면 반색하며 환호하는 시신경.
그날 그렇게 하얀 두루말이 화장지는 근사하기 이를 데 없는 소품이 되어 검은 옷의 남자가 그려내는 환타지에 녹아들었다. 그 남자가 지닌 예술과 인생에 대한 순결성을 증명하고 강조하는 시각적 장치로서 손색이 없었다. 화장지도 예술이 되는 마임극의 마술인 것.
허수아비 같이 달 속 토끼와 노닐 수만 있다면...
앞선 3개의 레퍼토리를 통해 인생에 대한 편린들을 고백했던 이두성씨, 네번쩨 순서로 들고 나온 것은 영원한 환타지의 바닷가에 노닐겠다는 마임이스트로서의 선언같은 것이었다. 몸짓이 유연하지 못하여 자신과도 동일시된다는 허수아비가 "보름날 달 속에서 뛰어나온 토끼와 옹달샘가에 가서...."
여기까지가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 그 다음부터는 몸짓을 통해 느껴보라는 메시지. 우리의 시선은 허수아비의 동선과 몸짓을 따라 허공을 날아다니다 문득 그의 꿈을 접하고 안도한다. 그 내용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이심전심. 마임의 힘이다.
허수아비의 환타지는 어린관객들에게도 환타지. 마술을 보여주며 풍선아트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서비스로 마무리. 아이들은 삐에로마임에 마음을 빼앗긴다. 비로소 공연과 밀착된 어린 관객들이 안심하며 즐거워했다.
마지막 레퍼토리는 씨앗틔우기. 이 또한 1번 '인생'처럼 구도자적으로 인생을 성찰하며 표현하는 몸놀림. 5번째 극이 끝났지만 어린이들은 여전히 허수아비 극이 보여준 삐에로마임, 아니 풍선아트에 머물고 있었다. 이두성씨에게 풍선으로 동물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
망설임 없이 이씨가 허락하자 거의 모든 어린이들이 줄을 서버렸다. '인터뷰는 언제하라고?'
"어린이 공연은 어린이에게 지나치게 부합하고 있다'
그 길다란 줄이 다 없어지도록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며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 주는 이두성씨에게 마음에 걸릴 질문을 던질 차례. 약간의 괴로움이 고개를 든다. 눈 앞의 선한 자에게 마법을 써야하는 마녀의 심정이었지만 기어코 물어봤다.
"제게는 좋은 공연이었는데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형식이나 주제라 아이들에게는 버겁겠어요. 더구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그렇죠. 하지만 어린이 공연이 지나치게 어린이에게 부합하는 경향이 있어요.( 쉬운 주제와 떠들썩하며 자극적인 형식 등등..?) 저는 공연을 통해 아이들도 좀 어렵지만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고 조용한 공연을 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제 공연이 그런 기회를 줄 수 있으면 좋겠지요."
'평문'에 '현답'이라... 거기서 인터뷰는 접혔다(?). 예리하게 답변한 후 그는 곧 바로 고속철을 타고 같이 온 '은조'라는 예쁜 이름의 딸과 함께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다.
여운이 석양의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다.
[참고] 이두성씨의 마임공연은 정읍시립도서관이 여름방학을 맞는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프로그램으로 마련한 것. 책읽는사회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후원을 받아 관람료는 무료. 이번 행사는 어린이들에게 예술가들을 직접 만나보게 함으로써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마련된 「문화예술의 순회대사」행사의 일환.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중견 작가, 시인, 놀이연구가, 화가 등을 초빙, 전국 공공도서관을 순회하며 실시하는 문화예술프로젝트로서 전북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정읍시가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