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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전3: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
1. 허무성한 인생에 대한 구절들
성경을 보면 우리 인생의 길이가 얼마나 짧은지에 대해서 많은 구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90:10-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89:47-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기본적인 수명이 70이고-강건하면 80이라고 말씀하시면서-인생은 마치 무엇과 같은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고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 인생은 길 가는 나그네와 행인 같다
대상29:15-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시119:54-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히11: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벧전2:11-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요한3서1:5-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이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목적지(죽음)를 향해 가는 나그네와 행인과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인생 길 가다가 죽음이 없는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인생은 하루살이와 같다
욥4:19-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
욥25:6-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모든 사람들은 하루살이처럼 잠깐 살다가-죽어버리면 그 육체가 부패되어 벌레와 구더기가 박실거리게 되니 육체의 가치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 인생은 바람과 들풀 같다
시78:39-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시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라-달도 차면 기울 듯이- 10년 가는 권세가 없고-열흘가는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울 듯이- 인간이 누리는 그 부귀영화가 극에 달할지라도-한해살이 풀처럼.... 잠깐 피었다 없어지는 꽃처럼- 형체도 자취도 없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허무성과 무가치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와 같다
약4: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을 살다보면 어제까지 나와 같이 얘기하며 즐겁게 놀았는데 하루 밤사이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찌 그리 허무하게 떠나버리는지... 여러분들도 그런 체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부모가 그랬고- 남편이-아내가 그랬고-자식이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잠깐 보였다가 없어져 버리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인생들은 안개와 같기에 서로 같이 있는 동안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야겠지요.
▶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
대상29:15-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정권을 이양해 주면서 했던 기도 내용입니다.
욥17:7-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욥14:2-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8:9-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시39:6-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144:4-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109:23-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가오며
시102:11-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전6:12-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8:13-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는 저절로 없어져 버리듯이-인간 생명끝나면 부귀영화도-큰 권력도-다같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이가 얼마나 짧은지- 그 허무한 인생에 관하여 성경은 [그림자 같은 인생]으로-[정처없이 다니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으로 [쉽게 무너져 버린 흙집같은 인생]으로 [불면 날아가 버린 티끌같은 인생]으로 [하루 밖에 못사는 하루살이 인생]으로 [잠깐 불다가 사라져 버리는 바람같은 인생]으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같은 인생]으로- [벌레와 구더기 같이 가치없는 인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길게 살아봐야 7~80년입니다. 그리고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삼아 살아볼 수도 없고-경험삼아 살아볼 수도 없고- 연습 삼아 살아 볼 수도 없고-장난삼아 살아 볼 수도 없고- 임시로 살아 볼 수도 없는 것이 단 한번의 인생인 것입니다.
2.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언제부터 생겼나?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은 언제부터인가? 창조 당시 부터인가? 아니면 아담부부가 저주를 받고 추방된 후부터인가? 아니면 아담의 후손들부터인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시기]를 보면 아담이 창조되어 코로 숨을 쉬고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아담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모든 피조물에 있어 본능이라는 말입니다. 그 근거는 창2:17입니다. 뱀의 유혹을 받기 전- 아담부부가 선악과에 손을 대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한 말씀 때문인 것입니다.
즉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뱀이 유혹하기 전까지는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던 것입니다. 만약 들짐승 뱀이 “그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영생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면 절대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따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고 영생할 뿐만 아니라-오히려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따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아담 창조 당시부터 내재돼 있었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이용해서 선악과에 대한 계명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금단의 나무를 통해서 아담이 원하고 원하던 영생을 주기 원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지?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지금의 아름다운 그 모습으로 ...나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지? 그러면 선악과만 따 먹지마. 내 말에 순종해. 불순종만 하지마. 네 계명만 잘 지키면 네가 원하는 그 영생을 줄께“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영생은 기본]이고-그 위에 덤으로 [하나님과 같은 동등한 위치]에 있게 될 것이라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저주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아담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위치와 신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뱀의 말에 귀를 기울린 것입니다. 그후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인생 허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의 질문 속에서“ 허무한 인생 속에서- 허무하지 않는 것- 가장 가치있는 것-영원한 것이 뭘까? 짧은 인생의 만족한 삶을 떠나-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뭐지?” 스스로의 질문을 통해서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스스로 대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죽지 않고- 늙지도 않고-병들지도 않고-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영원히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길은 없을까? 영생을 주는 약초는 없을까? 방법은 없을까? 길은 없을까? ”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이런 생각을 하고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10년 동안 천하를 통일하고- 죽지 않고 늙지 않는 불사약을 구해 천년만년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진나라 시황제도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영생을 얻지 못한채- 5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부와 권력을 누린 사람일수록 영생을 추구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활동하던 1900년 당시 이성봉 목사가 지은 노래가 있습니다. 곡은 [주의 피로 이룬 샘물 깊고도 깊도다]에 맞춘 가사입니다
1. 꿈결 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인생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상 고난풍파-일장춘몽이 아닌가-슬프도다 인생들아-어디로 달려가느냐
2. 이팔청춘 그 꽃다운 시절도 지나고-혈기방장 그 장년도 옛말이 되누나
성공실패 꿈꾸면서-웃고 우는 그 순간에-원치 않는 그 백발이-눈서리 휘날리누나
3. 해와 달과 별같이도 총명하던 정신-안개구름 듬뿍 끼여 캄캄해지누나.
모든 정욕 다 패하고-아무 낙도 없어지니-땅에 있는 이 장막은-무너질 때가 되누나.
4. 인삼녹용 좋다 해도 늙는 길 못 막고-진시황의 불사약도 죽는덴 허사라
인생 한번 죽는 것을-누가 감히 피할 손가-분명하다 이 큰 사실-너도 나도 다 당하리(5절 생략)
노인들에게 “어서 죽으라”고 하는 말처럼 싫어하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 나는 죽어야 돼! 죽어야 돼!” 본인이 그렇게 말을 해도 그 마음속에는 젊은 사람들보다 더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든 불신자든-타 종교인이든-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 것입니다.
3. 자살자들에게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떤 사람이라도 죽고 싶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진짜 죽고 싶어서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답답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자살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살하려다 실패를 본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 했든-제초제를 먹고 죽으려 했든-목을 매서 죽으려했든-물에 빠져 죽으려 했든- 여러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다 한결같이 “ 내가 왜 죽으려 했지? 왜 내가 약을 먹었지. 자살할 결심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못 살 것도 없었는데... 누가 날 구해 줄 사람이 없나 난 살고 싶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의 자살 행위를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사람에게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면 새로 태어난 것처럼 너무너무 기쁘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있었는데–그 딸이 속을 썩이니까-그 엄마가 야단을 쳤더니 그 앞에서 “죽어버리겠다”고 제초제를 먹어버렸답니다. 제초제는 농촌에서 풀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농약으로 –인간의 혓바닥에 한 방울만 떨어져도 의사들이 손을 떼버릴 만큼 치명적으로- 위와 간 등 창자가 다 타서 녹아 버리면서 죽어 가는 농약인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나서 고통가운데 몸부림을 치면서 “엄마! 나 좀 살려줘! 나 좀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몸부림을 쳐 가면서 죽어갔답니다.
자살하기 전에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선택을 했지만- 막상 선택해 놓고 보니까- 일을 저질러 놓고 보니까...“내가 이런 결심을 갖고 살았더라면 못 이길 시련이 없고... 못 이길 고통이 없고... 못 이길 고민이 없었는데... 내가 왜 자살을 택했지? 왜 죽으려 했지?“하면서 죽어간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누가 나 좀 살려 주었으면 하면서 죽는 것이지요.
4. 사형수들에게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사형수들도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사형대가 있는 일직선을 놔두고-곡선 길을 선택해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피우라고 주면 손이 타 들어갈때까지 피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만큼 생명에 대한 애착이---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는 얘기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이 있다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그 길을 택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 없지만- 일단 한번 태어나면 늙지도 않고-죽지도 않고-병들지도 않고-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살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상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5. 모든 인간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각은 달라도-사상은 달라도-하고 있는 일은 달라도-인생 목표는 달라도-인생철학은 달라도-모든 인간들에게는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 늙지도 않고-병들지도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을까?“ 이런 마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다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잠깐만 살다가 죽고 싶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모든 종교를 떠나서-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이런 생각에 이의(異意)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현실적인 만족한 삶에 그치지 않고-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고- 영원한 삶(영생)을 갈망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시대의 사람들도 “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권주가도 만들었을 것입니다.
불초로 술을 빚어 만년배(술잔 이름)에 가득 부어 잡수신 잔마다 비나이다
이 잔 곧 잡수시면 만수무강 하오리라.
잡수시오 잡수시오 이 술을 한 잔 잡수시오.
이 술이 순이라니라 한무제 숭로반(술잔)에
이 술 받은 술이오니 이 술 한잔 잡수시면 천년만년 사오리라
약신 동대 멀어진 바위 꽃을 꺾어 주를 놓아 무진무진 먹사이다
인생 한번 돌아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권할 적에 잡수시오 백년가가 인인수라
오락을 충분히 백년을 권할 적에 잡수시오
최희준이가 부른 [하숙생]이란 노래 가운데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의 인생은 잠깐 와서 머물다 간 하숙생이요, 길 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그 종착역은 바로 죽음과 무덤입니다. 지구촌 모든 인류는 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길고 긴 행렬입니다. 그 속에 나와 내 가족이 끼어 같이 가고 있는 겁니다. 살아가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고-생각이 다르고-사상이 다르고-직업이 다르고-배움이 다르고-얼굴 생김새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남녀노소가 다르고- 크고 작은 인생 문제들이 달라도- 그 종착역은 오직 하나 바로 죽음입니다.
이 죽음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말했지요.
"이 세계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죽음만은 확실하다."
이러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피해-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시켜 보았습니다. 한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撤-BC156년~BC87년]은 장생불사하겠다고 숭로반(술잔이름)에 이슬을 받아먹고 살았지만 결국 69세에 죽었습니다.
인간이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고려 말, 단양의 사인암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면서 인생무상을 느꼈던 역동우탁의 탄로가(嘆老歌)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문득 불고 간 데 없다
잠깐만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늙지 않으려고 다시 젊어보려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여라.
지금은 과학이 최첨단을 달리면서 [늙은 사람의 목]을 베어 [젊고 건강한 사람의 몸]에 붙여 보려고 시도하여 많은 동물들이 죽어갔는데-그 기술이 성공을 거두어 사람에게도 가능하다는 보고서가 나왔다고 합니다. 왜 이런 시도를 할까요?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만큼 인간은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입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기 때문에-젊고 건강해서 오래 살고 싶은 생각 그 자체가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 마음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6.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개든, 소든, 닭이든, 살아 코로 숨 쉬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에 있는 짐승들이든- 땅에 있는 생물들이든-강과 바다에 있는 생물들이든-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이든-육지에 있는 식물들까지도 죽고 싶어 하는 피조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을 귀찮게 만든 파리까지도 파리채만 들면 안 죽으려고 도망쳐 버립니다. 개나 소나 양이나 염소나 닭이나 사람에게 안 잡혀 죽으려고 괴성을 지르면서 “살려 달라”고 몸부림을 치면서 도살장에서 죽어 갑니다. 도살장에 순순히 끌려 들어간 짐승은 없습니다. 소도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면 눈물을 흘리고-동네 개 장수가 들어와도 모든 개들이 이상한 신호를 보내면서 짖어 댑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동물들도 죽지 않고-늙지 않고-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주의 자유도 없는 식물들도 죽지 않고-병들지 않고-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식물들이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여러 종류의 화분들을 쭉 놓고 기르면서- 전자파로 실험을 하는데 그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인지-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사람인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화분들을 구경하다가 화분을 땅에 떨어뜨렸는데- 식물학자가 “ 자기를 괴롭힌 사람이 지나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앞을 지나가게 했는데 식물이 파르르 떨더라는 겁니다. 마치 집짐승들이 백정을 알아보고 치를 떨 듯 말입니다. 꽃 한 송이를 꺾어도 그 사람이 지나가면 치를 떤다는데... 하물며 영혼을 가진 사람이겠습니까?
7. 영생을 위한 인간의 눈물어린 노력들
현대의학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을 이용하여-[생명연장씨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곧 냉동인간입니다. 러시아 인체 냉동 보존회사 크리오러스에는 250구의 인간이 영하 75도로 냉동되어 있고- 미국에는 '알코르 생명 연장 재단'이 있는데 그 냉동캡술 안에 100여구의 인간이 냉동돼 있는데 지금도 그것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조직은 1972년에 에프엠 에판디어리라는 과학자가 세웠는데-그는 자기가 100세가 되는 2030년이 되면 냉동 보존술이 성공할 것이라 믿으며 이름을 'FM 2030'이라고 명명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2000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 지금은 냉동 캡슐 속에 들어 있습니다.
현대의학으로 치료불가능하거나 노령으로 사망 직전에 있는 인간을 액화질소 속에 살아있는 채로 얼려놓고-세포가 노화되지 않도록 보존하여-의학이 발달한 어느 미래에 가서 다시 소생시켜-병을 치료하여 보다 오래 살도록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게 과학자들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2018년 2월 냉동 인간 보관 서비가 한국에도 상륙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노력이 심히 눈물겨울 지경입니다.
8. 모든 인간에게 묻는 하나님의 질문
“ 인간들아 ! 진정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대답하라! ”
이 세상에는 [답]이 없는 [문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것을 찾지 않거나-또 찾았을지라도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너무 강하여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있는데 답이 없는 삶을 살고 말 것입니다. 인간 본능에 따라서 영원히 늙지 않고-병들지 않고-가장 아름다움 모습으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했습니다(시49:20). 영생에 대한 가치를 모른다면 짐승과 같다는 말입니다.
전6:6-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찌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여기서 낙이란 육체의 향락같은 것을 말함이 아니라 진정한 낙-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낙을 말합니다. 신앙의 낙이란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육신으로 나무 수목처럼 천년-이천년을 살아도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을 모르고 죽는다면-진정한 낙을 누리지 못한다면-그는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도-모든 만물들도- 모든 생물들도=- 모든 동물들도-다같은 마음이 있다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기독교인들에게 묻습니다.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돈과 재물이냐? 권력과 명예냐? 많은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이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세상에 관한 것들이냐? 영원히 늙지도-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영생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시 90:10처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말씀처럼 허무한 세상에서 일시적인 부와 권력과 재물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진정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영생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만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버리고 성경대로 순종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인간들에게-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 많은 돈과 재물. 권력과 명성. 건강과 지혜를 택할래? 아니면 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병들지 않고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수천만년-수억만년 영원히 살래? 어떤 것을 택할래? 너는 말하라 ” 하나님의 물음에 우리들은 분명하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부귀영화보다도- 드높은 명성과 인기와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건강한 몸보다도-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영생]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아무리 좋아도 잠시 잠깐일 뿐입니다. 일장춘몽입니다. 영원히 늙지 않고-병들지 않고-죽지 않는 그 영생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도 없고- 바뀔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곳은 마귀도 없고, 귀신도 없고, 악인도 없고, 죄인도 없고, 도둑놈이나 살인강도도 없고- 사람을 해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가장 행복한 상태입니다.
신천신지에서는 모든 식물에 각종 농약을 칠 필요도 없고, 영양제를 칠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최초에 만들었던 에덴동산과 같이 100% 자연산에 100% 제 맛을 내는 각종 과일들을 먹게 될 것이고- 만물을 소생케 하는 생명수 강은 신천신지 온 지면을 적시면서 도도히 흐를 것이며- 천사들은 우리들을 시종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만물도 이 날이 어서 오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습니다.
롬8: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본문을 보면 사람들도 모든 사물들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타락한 인간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면서 탄식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언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우리들도 해방될까?” 만물도 그런다는 겁니다.
개가 죽고 싶어 하겠습니까 닭이 죽고 싶어 하겠습니까 소가 죽고 싶어 하겠습니까 사람이 죽고 싶어 하겠습니까. 말 못하는 식물까지도 다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인간의 죄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첫째- 하나님과 인간과의 회복을 위해서
둘째- 인간성 회복-도덕성 회복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서
셋째- 만물 회복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3가지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철저한 회개와 성경대로의 거룩하고 정직한 삶입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으면- 성경에서의 어긋남이 없는 삶으로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그것(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9.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면...
전3:12-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여기서 [선]이 바로 뭡니까. 어떤 선을 말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선의 개념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선의 개념은 천국과 지옥차이가 납니다. 이 세상에서의 선의 개념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많이 하는 것인데 바로 윤리도덕적인 선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선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선]이고 불순종하면 [악]인 것입니다. 그것을 창2:17에서는 ‘선악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먹는 날(불순종하면)에 정녕(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것이 악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선이요- 불순종하여 마귀의 말을 들으면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선은 아무리 행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윤리도덕적인 선입니다. 자기 몸을 불태워 이웃을 구했을지라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선과 악의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분명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롬6:23-죄의 삯(결과)은 사망(지옥)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악’이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윤리도덕적인 세상적 선은 구원과 상관이 없는가.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큰홍수에 떠밀려 가고 있는데-어떤 사람이 그 사람에게 와서 옷을 주고-밥을 주고- 권력을 주고-명예와 인기를 주고-돈과 재물을 준다면 그 사람이 기뻐할까요? 사망의 물결에 휩싸인 그 사람은 “누가 나를 구해 주었으면... 제발.. 어서 나를 구해 주었으면... ” 하는 마음뿐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이 옷이겠습니까. 고대광실 높은 집이겠습니까. 부귀영화겠습니까. 권력과 재물이겠습니까. 오직 사망의 길에서 구해 주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 선은 이런 사람에게- 즉 죄악의 홍수에 밀려 지옥을 향해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통해 일단 구해 놓고- 그 다음 윤리도덕적인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선은 홍수에 밀려 떠내려 가고 잇는 사람에게 물과 떡과 돈과 물질을 제공해 주고 있는 선입니다. 근본적인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에도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윤리도덕적인 선을 강조하고 있지만 제2차적인 선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선만 강조한다고 보면 안됩니다. 최고한 도덕률도 같이 강조하고 있지만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적인 선과 성경적인 선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혼구원이 최우선이고-그 다음이 윤리도덕적인 선입니다. 전3:12-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은- 그 순종의 결과가 바로 인간이 그렇게 원하던 그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119:60를 통해서 “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28:1-14까지는 순종하는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 신28:15-60절까지는 불순종한 자들이 받을 저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세상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선(성경대로)을 행해야 되느냐 - 내가 원하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왜 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싸워야 하느냐 – 내가 원하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왜 거룩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느냐 – 내가 원하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왜 혈기 감정 교만을 죽여야 하느냐 – 내가 원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영원을 사모하는 그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죄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죄 문제를 해결되려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했기 때문에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는 휘장 한 가운데를 찢어 하나님을 대면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잘못도 빌고-용서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막15:38-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그래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빌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철저하게 회개하고-성경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원하던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것보다-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보다 –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그렇게 원하는 것을 줄게. 성경대로 한 번 살아봐.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온전한 십일조 드리고- 우상숭배·미신행위 다 버리고- 십계명에서 하자가 없이 살아 봐라. 성경대로 살아봐.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그것을 줄게. 영원한 행복을 너에게 줄게. ”
세상에서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그렇게 원하던 영생을 얻는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과거에 우리가 지은 죄, 미래에 우리가 지을 죄, 현재에 우리가 짓고 있는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할 필요도 없고- 그저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고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자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주신 것은 지켜 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이론으로만- 지식적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소설책도 역사책도 교과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그것을 주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의 삶을 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구원만큼은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바꾸거나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그 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460장-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가까워.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이 찬송을 내게 주시는데 이제 나도 주님께 갈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오른 겁니다. 죽음이란 뭡니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민 가는 겁니다. 나쁜 집에서 좋은 집으로 이사가는 것이지요. 사는 날보다 죽는 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어서 가서 주님을 뵙고 싶지요. 우리는 지금 그 날을 향해- 그렇게 원하든 영생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라도 하나님께 버림당하면 실패 인생이요,
판·검사라도 하나님께 버림당하면 실패 인생이요,
재벌의 총수라도 하나님께 버림당하면 실패 인생이요,
석·박사라도 하나님께 버림당하면 실패인생인 겁니다. 왜 실패 인생입니까.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죽거나 또한 죽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생을 얻는 방법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거지 나사로처럼 부자 대문에 누워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살찌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멸시와 무시를 당하면서도 신앙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사2:22-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2018년 6월 26일 (화) - 그리운소리 -
첫댓글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