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산] 을 보다보면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극 중 성송연으로 출연하는 '의빈 성씨' 와의 갈등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견미리가 분하고 있는 혜경궁 홍씨는 사사건건 성송연을 궁지로 몰아 넣으며 정조의 총애를 빼앗아 가려하고 '지체 낮은 도화서 화원' 따위가 자신의 아들을 홀린 것에 대해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심각한 고부 갈등 중 하나로 보이는데 과연 실제로도 혜경궁은 의빈 성씨를 구박했던 것일까?
[이산] 속 혜경궁 홍씨는 정조와 성송연의 관계를 떼어 놓기 위해 '원빈 홍씨' 와 '화빈 윤씨' 를 궁궐에 들여 놓는다. 명문가의 여식들을 궐 안에 들여 놓음으로써 상대적으로 성송연의 입지를 약화 시키려는 혜경궁의 '전략' 은 [이산] 의 또 다른 갈등축으로 긴장감까지 자아내고 있다. 혜경궁의 계략에 맞서 정조의 총애를 받는 송연의 고군분투와 그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고 있는 효의왕후의 모습 또한 드라마답게 아주 극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드라마와는 달리 실제 혜경궁은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 홍씨' 의 입궐을 적극적으로 만류하던 사람 중 한명이었다. 혜경궁은 <한중록> 에서 "스스로 원빈이라고 칭하는 것부터 요사스럽더니...." 라는 글귀로 홍국영과 누이 원빈 홍씨를 싸잡아 비난한다. 홍국영이 자신의 아비와 숙부인 홍봉한과 홍인한의 제거에 앞장 섰던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혜경궁은 홍국영이 누이를 통해 권세를 누리려 하는 점을 대단히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니 정조와 성송연을 떼어 놓고 홍국영의 뒷배를 봐주기 위해 원빈 홍씨를 스스로 천거하는 [이산] 속 혜경궁의 모습은 '완벽한' 픽션으로 봐야만 한다. 원빈 홍씨의 이른 죽음과 그와 함께 몰락하는 홍국영의 처참한 최후를 보면서 가장 기뻐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혜경궁,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혜경궁에게 마땅히 '제거' 해야 할 대상은 성송연이 아니라 오히려 원빈과 그의 오라비 홍국영이었던 것이다.
이번 주에 송연의 '라이벌' 로 등장한 '화빈 윤씨' 역시 혜경궁에 의해 궐 안으로 들어 온 후궁은 아니었다. 화빈 윤씨는 14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한 효의왕후 김씨가 직접 천거해 올린 후궁이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상상 임신까지 했었던 효의왕후는 '대통을 이어야 한다' 는 책임을 지기 위해 후궁을 들여야 겠다고 생각했고 여기서 간택 된 사람이 바로 화빈 윤씨였다. 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 은 효의왕후로서 반드시 사수해야만 하는 절대 반지였다. 즉, 화빈 윤씨의 입궐은 혜경궁이 아니라 효의왕후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실제 역사 속에서는 화빈 윤씨의 나인으로 들어간 것이 바로 '성송연' 이고, 정조는 화빈의 처소에 들락거리다 성씨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산] 에서는 화빈과 송연이 정조를 사이에 둔 라이벌로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송연이 화빈의 침방 나인이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간에 송연을 '제거' 하기 위해 화빈 윤씨를 일부러 소개하는 혜경궁의 모습 또한 작가가 만들어 낸 완전한 '허구' 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명문가 출신의 두 후궁과 달리 일개 나인 출신이었던 의빈 성씨에게 '출신 컴플렉스' 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확인된 바 없으나 혜경궁은 화빈 윤씨만큼이나 의빈 성씨를 사랑했다. 오히려 의빈 성씨의 미천한 신분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는 평가를 받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고 이것에 대해 혜경궁 역시 공감했다. 의빈 성씨가 아들을 낳았을 때, 혜경궁은 정조와 효의왕후 만큼이나 기뻐했다. "왕실의 흥복" 이라며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던 혜경궁이 의빈 성씨를 구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의빈 성씨는 '투기' 하지 않음으로 하여 효의왕후와 혜경궁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나인 출신의 태생적 배경 때문인지 검소하고 겸손했던 의빈 성씨는 아들을 낳고서도 모든 공을 효의왕후에게 돌리는 미덕을 발휘했다. 혜경궁이 의빈 성씨의 온화한 성품에 감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 후 의빈이 죽은 뒤에도 "하늘도 무심하시도다." 라고 한탄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의빈 성씨의 자애로운 성품 덕에 혜경궁이 그녀를 '미워할 이유' 도 없었겠지만 더욱 깊숙이 들어가보면 효의왕후와 의빈성씨, 그리고 혜경궁은 지금의 시각처럼 '고부 관계' 로 바라볼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혜경궁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효의왕후의 시어머니인 것은 확실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대비' 가 아니었다. 즉, 대비와 같은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내명부 수장은 누가 뭐래도 중궁인 효의왕후 김씨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강직하여 '내유외강' 의 기품을 품고 있던 효의왕후 김씨는 내명부의 수장으로 흔들리지 않는 '중심' 으로 자리했다.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의빈 성씨의 입궐 또한 '승인' 하고 '결제' 할 수 있었던 사람은 효의왕후 김씨, 단 한사람 뿐이었다.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도, 정조의 모후인 혜경궁도 실질적 위계 권력 관계로 따지자면 효의왕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금이 총애하고 중궁이 '승인' 한 후궁의 일에 대해서 궐 내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례를 따져봐도 대비가 임금의 후궁을 내치거나 벌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숙종조에 명성대비 김씨가 장희빈을 궐 밖으로 내친 일이 있기는 하나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며 대부분은 중전의 손에서 '즉결 심판' 식으로 처결 되는 것이 '원칙' 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혜경궁은 '사도세자를 죽인' 풍산 홍씨 가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이었다. 남편이 죽음으로 몰릴 때까지 침묵하고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것은 혜경궁 그 자신이었고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그 날부터 그녀는 그 '원죄' 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혜경궁이 실질적인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거세게 행사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정조에게나, 효의왕후에게나 혜경궁은 도의적으로 '섬겨야' 할 인물이었지 명을 받들고 따라야 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명부의 수장으로 모든 일을 관장하는 효의왕후에게 더더욱 중요시 되는 원칙이었다. 효의왕후는 혜경궁과 정순왕후 모두에게 성심을 다함으로써 '효부' 소리까지 들었으나 내명부의 일만큼은 자신이 관장하며 혜경궁과 정순왕후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양보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효의왕후가 중궁으로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자존심이었다.
그러니 [이산] 에서 '성송연' 을 구박하는 혜경궁의 모습은 실제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혜경궁은 품성 고운 의빈 성씨를 미워할 정도로 모난 인물이 아니었고, 실제로 미웠다고 해도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강력한 비호가 있는 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기도 힘들었다. 만약 혜경궁이 다시 살아 돌아와 [이산]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떤 말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