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년(1638, 인조 16)에 차자를 올려 백성의 힘을 퍼지게 해야 하니
강도를 보수하되 남쪽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며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
너무 넓고 크게 하지 말며 포를 거두고 쌀을 운반하게 할 때에
모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필 것을 청하였다. 대제학에 배수되었다.
7월에 이조 참판에 배수되어 경연에서 강할 때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고
백성의 원망을 풀어 주고 세금과 부역을 경감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이날 《시경》을 진강하였는데 “화락한 군자여, 천자의 나라를 안정시킬
것이로다.(樂只君子 殿天子之邦)”라는 대목에 이르자, 인조 임금이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공이 이공 시백(李公 時白)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니,
보는 자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당시 유석(柳碩), 박계영(朴啓榮), 이계(李烓)
등이 청음을 헐뜯었는데,인조 임금은 평소 동계(桐溪) 정온(鄭蘊)과 청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라 그 말이 제법 먹혀들었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김상헌과 정온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되니,
현혹되지 마소서.”하였다. 그리고 사직하여 이조 참판이 교체되었다.
기묘년(1639) 봄에 이조 판서에 올랐다.
경진년(1640) 봄에 비밀상소(密疏)를 올렸다.
당시 승려 독보(獨步)를 중국에 들여보냈는데 공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과 은밀히 상의한 것이었다.
공은 독보를 밀실로 불러들여 타이르고는 울면서 보냈다.
이해 3월에 사직하여 대제학이 해임되었다.
이때 청나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볼모로 보낸 것을 힐책하였는데
공 또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겨울에 특별히 서용되어 이식(李植)과 함께 논의하여 국서(國書)를 지었다.
도헌에 배수되었다. 당시 조석윤(趙錫胤)이 일을 논하다가 파직되었고
허계(許啓) 등이 청음이 심양에 들어가 죄를 받는 것을 늦추고자 하였다.
공이 이 두 가지에 대해 선처를 건의하니 상이 즉시 따랐다.
신사년(1641, 인조 19) 봄에 우참찬에 배수되었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여름에 날씨가 크게 가믈었는데 공이 "옥사를 결정하는 일이 온당치 못하기
때문에 억울함이 풀리지 못해서 가믐이 든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인조 임금은 공을 불러 사수(死囚) 4인을 석방하도록 했다.
가뭄이 더 심해지자 또 죄수를 소결(疏決)하여 풀어 주고 중앙과 지방에서
형옥(刑獄)을 남용하지 말게 하며, 내옥(內獄)을 혁파하고 내공(內貢)을
없애고 집을 짓는 것을 중지할 것이며, 신료들을 접견하고 백성의 고통을
조사하여 상하의 마음이 통하게 하며,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지 말아서
더욱 경계하고 삼갈 것을 청하였는데,상이 가납하였다.
가을에 수 이사(守貳師)가 되어 심양에 갈 때 상이 인견하여 세자를
잘 보도할 것을 권면하였다. 공은 심양에 도착하여 날마다 서연을 열어서
빈객(賓客)으로 하여금 교대로 진강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일에 따라 직언으로 극간(極諫)하니, 세자도 공을 공경하고 예우하였다.
일찍이 비밀히 글을 올려 세자의 잘못을 극론하였으나 원본을 폐기한
탓에 전하지 않는다.
청인이 식량의 공급을 꺼려 여러 볼모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어 자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농정(農丁)을 데려올 것을 재촉하자 공은 불가하다고 극력 다투어
말하기를,
“내가 직임을 받고 왔다. 진실로 국가에 유익하다면 감히 일신을
돌아보겠는가.” 하니, 청인도 감히 억지로 하지 못하였다.
청인이 또 갖은 방법으로 힐책하였는데 주선하여 무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청음이 박황(朴潢), 조한영(曺漢英)과 오래도록 갇혀서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공이 심양에 들어가고 나서 3일째 되는 날 은밀히 세자에게 아뢰어 처벌의 화를
늦추도록 도모하였다.세자가 공과 함께 모의하여 당로자에게 뇌물을 주니
청주(淸主)가 세자를 불러서 묻고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하고 이사(貳師)로
하여금 함께 나가게 하였다.
제공이 끝내 아무 탈이 없었던 것은 모두 공이 힘쓴 덕분이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임오년(1642, 인조 20) 3월에 다시 심양에 들어갔다가
여름에 조정으로 돌아왔고 7월에 다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중국의 선척이 선천(宣川)에 이르렀는데 방백 정태화(鄭太和)가
그대로 돌려보낸 일이 있었는데 청인이 뒤늦게 이를 알고 공을 보내
핵문(覈問)하게 하였다.
8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그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공으로
하여금 남아서 조사하게 하고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감사 심연(沈演)과 병사 김응해(金應海)만 파직하고 공에게 돌아가
보고하도록 재촉하니, 공은 어쩔 도리가 없어 9월에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 보고하였다.
청인이 노하여 변방 수령과 장령(將領)들을 두루 잡아다가 심양에서 조사하려고 하자
공이 극력 변호하여 선천의 수령만 조사에 응하게 하였다.
청인이 또 공이 중도에서 지레 돌아왔다고 하면서 자주 와서
힐책하자 공은 조정이 허물을 입게 될까 봐 그 실상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
청주가 마침내 명을 전달하지도, 왕을 만나지도 않고 돌아왔다고 하여
동관(東館)에 가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황성(鳳凰城)으로 보내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가두었다.
당시 세자가 청의 장수를 따라서 먼저 봉황성에 도착하여 그 일을
조사하고 있었기에 공이 도착하여 세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대신 이하로 구금되어 있는 자가 많았다.
각자 재물을 기부하고 화를 늦추고자 하였으나
공만 홀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필시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세자의 스승이 뇌물을 쓰는 것이
나로부터 시작될 수는 없다. 냉산(冷山)과 북해(北海)는 본디
달게 여겼던 바이다.” 하였다.
뒤에 제공들이 모두 돌아왔으나 공만 홀로 가장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12월에 풀려나 우리나라로 돌아왔지만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신도비의 명(銘)
해석문
세 임금을 섬긴 나라의 원로요, 한 시대의 지성스러운 신하였으며,
나라를 위해 집안일을 잊었고, 임금을 위해 일신은 돌아보지 않았네.
붉디붉은 정성은 하늘의 해처럼 빛나고, 깨끗한 절개는 서릿발보다 매서워,
험하고 험하여 어렵고 어려운 일은, 또한 이미 두루 겪었다네.
지극한 믿음은 신뢰를 사, 돈어(豚魚)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고,
덕이 온전하고 행실이 높아, 사책(史冊)에 누차 기록되었네.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 어느 세상이나 듣는 사람이 있는 법,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 지라,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내가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숭정 갑신후 58년 우리(조선)숙종즉위 29년(1702년 壬午), 월 일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홍문관 제학 박세당 지음(撰)
원문
銘 曰
三朝元老一代忱臣 國忘其家主不顧身 丹誠炳日素節凌霜 險阻艱難亦旣備嘗
至信所孚能感豚魚 德全行高彤管屢書 姿僞肆誕世有聞人 梟鳳殊性載怒載嗔
不善者惡君子何病 我銘載石人其來敬
崇禎 甲申後 五十八年 我 肅宗 卽位之 二十九年壬午 月 日(1702년 임오)
崇政大夫 行吏曹判書 兼 知經筵事 弘文館提學 朴世堂 撰
이상은 서계 박세당이 찬술한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명 일부에서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