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보빙사(報聘使)-세계 일주 기록
1883년 7월 16일.
미국의 아세아 함대(Asia Squadron)소속 USS Monocacy호가 제물포항을 출항했다.
이 군함은 일본에서 석탄을 적재 할 계획이었는데 마침 Foote 주한 미국 공사의 요청을 받고 함장 Cotton 중령은 보빙사(報聘使) 일행을 승함시키기로 결심한다.
USS Monocacy호는 1370톤, Steam Engine으로 시속 11.2 낫트, 6문(門)의 포(砲)를 탑재하고 신미양요 때는 강화도 포격전에 참전했던 바로 그 군함이다.
USS Monocacy
배 위에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갓을 쓴 조선의 최고 엘리트로, 전권 대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무관 천흥택, 무관 최경식, 서광범, 유길준, 중국인 통역관 우리탕, 수행원 고영철, 등등이 타고 있었다.
1882년 5월 22일 조미 우호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비준서를 들고 서울로 부임한 미국공사 General Foote 의 요청으로 고종의 국서를 전달할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들이다.
보빙사 일행(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 통역 미야오카,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중국인 통역관 우리탕)
Monocacy호 출항에 앞서 Foote 공사는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한 유력 친지들에게 조선의 보빙사 일행을 특별히 환대 해 주도록 미리 전문을 보냈다.
일본의 개항은 우리보다 30년이 앞섰다.
1853년 6월 페리 제독의 흑선이 우라가 앞바다에 출현한 후, 1858년 미일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1860년 2월 9일 가쓰카이슈를 비롯한 후쿠자와 유키치, 죤 만지로등 사절단이 칸닌마루(感臨丸)호 편으로 태평양을 횡단했다.
칸닌마루는 일본 막부가 네덜란드에서 건조한 300톤급 증기선으로 시속 6.4 낫트로, 태평양 횡단에는 11명의 미 해군 장교와 의사가 칸닌마루에 동승하였고 USS Powhatan호가 동행했다.
통역을 맡은 죤 만지로는 14세 때 조업 중 조난을 당했으나, 무인도에서 살아남아 미 포경선에 구조되었다.
포경선 선장의 호의로 미국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10년 만에 귀국한 인재였기 때문에 일본의 사절단은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다.
반면에 조선의 보빙사 방미는 언어장벽이 큰 문제였다.
우리가 중국어로 통역하면 중국인이 이를 받아 영어로 옮겨야 했다.
때로는 일본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Kanrin maru (感臨丸)
Monocacy함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General Foote의 전보를 받은 미 해군 아세아함대 사령관 Pierce Croby 제독은 USS Monocacy 편으로 요코하마까지 귀빈들을 모시겠다고 제안했으나 일행들은 정중히 이를 거절하고 정기(定期) 우편(郵便) 증기선을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건넜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보빙사 일행들은 주미 미국공사가 추천한 미국인 통역관 Percival Lowell과 그의 일본인 보좌관 미야오카를 합류시켰다.
Percival Lowell은 당시 하버드 대학 총장의 친동생이었다.
Lieutenent General H. Sheridon
1883년 9월 2일, 일행들은 22일간 태평양을 횡단한 끝에 San Francisco 항에 도착하여 John M. Schofield 장군을 비롯한 고위직 영접을 받았다.
그 다음날은 이 지역 상공회장을 비롯한 무역업자들을 만나고 철도편으로 9월 12일 시카고에 도착, 남북전쟁 때의 명장 Sheridon 육군 사령관이 영접하면서 지역 내 산업 시찰에 동행한다.
Baltimore의 유명한 교육자이며 Goucher여자 대학 설립자인 Goucher와는 같은 열차를 탔다.
이런 인연으로 감리교 교회를 조선에 짓기로 하고 서울에 첫 감리교 전도사들을 파견하게 된다.
9월 13일 워싱톤을 향해 시카고를 출발했다.
Sheridon 장군은 그의 참모 Gregory 대령을 안내장교로 동행시켰다.
9월 15일 와싱턴에 도착하여 Arlington Hotel에 머물면서 국방장관 대행인 Mr Davis의 영접을 받았다.
미 해군사관학교 졸업반 시절의 George C. Foulk (1876)
워싱턴에는 미 해군의 젊은 장교 George C Foulk 소위가 근무하고 있었다.
Foulk 소위는 1876년 해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Asia Squadron에서 4년간 근무하면서 일어와 중국어를 배우고 조선어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력들을 참조하여 미국 대통령은 직접 Foulk 소위를 해군 정보국의
Theodore B. Mason 중령과 함께 조선의 보빙사들을 보좌하도록 명령한다.
이들은 보빙사 일행들의 미국 동부지역 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그즈음 Chester C. Arthur 대통령은 뉴욕에 체재 중이었다.
따라서 Davis 국무장관 보좌관은 이들을 뉴욕으로 안내하여 Frelinghuysen 국무장관을 만나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하도록 일정을 조정하고 있었다.
상봉 장소는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뉴욕 23번가 Fifth Avenue Hotel의 접견실이었다.
뉴욕 Fifth Avenue Hotel, Chester C. Arthur 대통령 접견 New york Herald 신문기사(큰절을 올리고 있다.)
9월 18일 오전 11시경, 대통령이 접견실에 입장하여 문 입구를 향해 방 한 가운데 섰다.
대통령은 정장을 한 양복차림이었다.
그 오른쪽은 국무장관 Frelinghuysen, 좌측에 장관 보좌관 Davis, T B. Mason 대위, Foulk 해군소위 그리고 약간의 인사들이 뒤에 섰다.
보빙사 일행들은 일렬로 숙소를 나와 복도를 따라 대통령 앞으로 걸어갔다.
서열에 따라 민영익이 앞에 서고 나머지 일행들이 뒤를 따랐다.
모두가 최상급의 비단 관복에 관모를 섰다.
대통령과 일렬로 마주하게 되자 민영익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무릎을 꿇고 엎드린 다음 일어서서 손을 머리위에 까지 올렸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몸을 앞으로 천천히 꾸부린 후,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왔다.
대통령 일행들은 보빙사들이 방에 들어 올 때 깊은 절로 화답했다.
그런 다음 국무장관이 앞으로 나와 특명전권대사 민영익을 대통령께 소개했다.
대통령과 그 일행들은 한동안 다정한 눈으로 사절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고 통역을 통해 몇 마디 덕담을 주고받았다.
홍영식이 대통령에게 대표단을 소개한 다음, 민영익이 모국어로 국서를 읽고 대통령이 영어로 답사를 했다.
국서에는 한글본이 추가되어 있어서 조선이 문자를 가진 문명국임을 과시했다.
Fall River Line
9월 18일 같은 날, 보빙사 일행들은 앞서 안내장교들과 함께 “Fall River Line"편으로 다음날 아침 7시에 Boston에 도착했다.
이들은 당시 보스톤 최고급 호텔 Vendome Hotel에 묶었는데 호텔 게양대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첫 사례다.
Boston Vendom Hotel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그날 중으로 Boston세계 박람회와 산업시설들을 시찰한 다음, 9월 19일, 최신 농업기술과 Lowell지방의 섬유 공장을 시찰했다.
9월 22일, Butler 마사츄세트 주지사, Boston 시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을 접견하고 Percival Lowell의 보스턴 저택에서 개인적인 환대를 받았다.
9월 24일, 뉴욕으로 돌아왔다.
뉴욕에서는 해군 공창장 John H. Upshur 준장과 상선 협회, 병원, 전신 전화국, 소방서, 우체국, Evening Post와 New York Herald, 육군 사관학교 등을 시찰했다.
9월 29일 토요일, 뉴욕을 출발해 그날 오후 워싱턴에 도착했다.
보빙사들이 움직일 때 마다 화려한 조선의 관복은 많은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빙사 일행들은 미리 조를 짜고 시찰중 수집한 정보를 밤마다 분석하여 귀국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이 귀국시 지참한 각종 샘플과 보고서는 200여 궤짝이나 되었다.
이들을 안내했던 Mason 대위의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 기사가 남아있다.
“나는 이들의 빡빡한 시찰 일정 속에 너무 힘들어 지쳤다. 하지만 이들은 매일 강행군 속에서도 한 번도 지치거나 힘들어 하지 않고 불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10월 12일, 대통령 관저에서 국무장관의 안내로 각료들 배석 하에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특명 전권대사 민영익은 보빙사 일행이 미국체재 중 공사(公私)로 베풀어 준 환대에 감사한다는 작별 인사를 드렸다.
이 자리에서 국무장관이 대통령께서 특명 전권대사 민영익과 수행원 두 명에 국한하여 지중해와 스에즈 운하를 경유하여 극동으로 떠나는
미국 군함 Trenton 호에 승선해 줄 것을 정중히 제의 한다고 알려왔다.
비용 일체는 미국에서 부담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Foulk 소위를 서울의 미국 공관 해군 무관으로 임명하여 민영익 일행을 수행토록 지시했다.
미국 군인의 해외 근무는 터키-러시아 전쟁 때를 제하고는 영국에 연락 장교 파견이 처음이었고 무관 근무는 Foulk 해군 소위가 두 번째였다.
물론 청국이나 일본에도 주재 무관이 없었다.
민영익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서광범, 변수가 동행하고 세 사람을 제외한 대표단은 바로 San Francisco를 경유하여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유길준은 민영익의 배려로 미국에 남아 조선의 첫 해외 유학생으로 기록된다.
Foulk 소위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속의 USS Trenton
(앞줄 가운데 함장 대령 Robert L. Phythian)
1883년 12월 1일, USS Trenton 호는 뉴욕 항을 출항하여 동쪽으로 제물포항을 향해 떠났다.
Trenton호가 지중해의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에 입항 하자 민영익 일행은 17일 동안 프랑스, 영국, 특히 파리와 런던을 여행하고 1884년 1월 25일 배로 돌아왔다.
낙타를 탄 보빙사-민영익으로 추정된다. (Foulk 소위 촬영)
Foulk 소위가 이들을 수행했다.
2월 29일 이들은 수에즈 운하의 카이로에 도착, 4일간 체류하면서 피라미드를 관광한 다음,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홍콩, 나가사키를 거쳐 1884년 5월 31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Foulk 소위와 조선의 사절단은 제물포항에 도착할 때 까지 5개월 동안 좁은 선실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신뢰를 쌓아갔다.
항해 중 서광범과 변수는 유용한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하느라 지칠 줄 몰랐다.
반면 많은 비용을 들여 서구 문명에 대한 체험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영익은 일관되게 그가 지참한 유교 서적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이가 비슷한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여 군함이 제물포에 도착 할 때쯤에는 Foulk 소위는 한국어 구사능력과 조선정부의 정치적 현실을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다.
Trenton 호가 느린 속도로 동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빠른 속도로 지구의 반대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12월 중순 서울에 도착하여 국왕에게 귀국 보고를 하였고,
이때 Lowell은 고종으로부터 국빈 대접을 받았다.
Trenton 호가 제물포항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관리들이 이들 일행을 맞이하러 한양에서 내려왔다.
괄목할만한 일은 Foulk 소위에게 일어났다.
고종의 명에 의해 서울 중심가에 특별히 꾸민 집 한 채를 하사 받았다.
먼저 도착한 홍영식은 이미 개설된 우정국 총판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해 있었다.
Foulk 소위가 집으로 보낸 편지 속의 제물포(1884년)
보빙사를 둘러싼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라를 개화의 길로 이끌었어야 할 보빙사 일행은 기득권에 안주한 민영익 세력과 진보적인 혁명세력으로 갈라져 결국은 피비린내 나는 갑신정변을 불러 왔다.
그 결과 진보 측에 가담한 홍영식 서광범등이 역적으로 몰려, 보빙사에 관련된 기록들이 모두 폐기되면서 조선인 최초의 세계일주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미국인 Lowell과 Foulk 등이 편지나 저서로 남긴 기록들과 당시의 미국신문에 실린 기사들이 최근에 발굴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은 Lowell의 작품이다.
Google 의 "George Clayton Foulk" Homepage
America's Man in Korea, (The Private letters of George C. Foulk)
George C. Foulk:The First Naval Attach' to Korea(Col. John F. Prout. CIA)
위 문서들을 참조하여 필자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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