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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있는 풍경」아우내
천안 병천의 매봉산 자락 아우내장터다. 지금은 병천순대로 순대의 대명사가 되어 외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리지만 90여 년 전에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를 외친 곳으로 전형적인 조그마한 시골의 장터이다. 쫓기며 숨어서 지내고 온갖 핍박을 받아가며 만세를 불렀다. 고문을 받아가며 민족의 아픔을 대신했다. 그 자랑스러운 모습을 재현하듯 아우내장터 인근에 억새들이 모여 두 손 번쩍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친다. 냇물이 흐르고 제방에 억새가 하얗게 피었다. 마치 무지렁이들이 다시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지 싶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데 유관순 열사의 혼령이 되살아나고 남북이 혼란스러운 때 국력을 모으고 있지 싶다.
우리는 이따금 억새가 된다. 정말 살아가기 힘들다면서 세상 온갖 고난을 다 짊어진 듯 헐떡거리며 힘들게 끝도 보이지 않는 기나긴 언덕을 오르고 오른다. 꾹꾹 참고 견디며 가다보면 어느 순간 목표지점에 도달한다. 넘치는 기쁨에 젖어들다가 방랑자처럼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한 곳에만 안주하거나 마냥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삶이다. 다시 원점인 듯이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속에다 야심찬 희망을 장전한다. 결코 함부로 꺾이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뚜렷한 주관에 꿋꿋한 줏대를 세운다. 살아가며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잔잔한 날에 꽃 피고 감미로운 새소리도 덤으로 묻어온다. 억새가 억새와 어울려 한판 춤을 춘다.
매봉산자락 아우내장터에는 지금도 유관순 열사 만세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나라가 어지러워 갈팡질팡 하면 일깨우려 일침을 놓는다. 흰 두건 무지렁이 억새가 제방에 빼곡히 모여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다 밑바닥 서민의 소리 경청할 일이다. - 아우내 억새
억새는 봄날 새싹이 돋을 때는 아주 부드러운 풀이었다. 여름날 억센 줄기를 세우고 가을날 꽃을 피우며 대궁이 벌겋게 물이 든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끝내는 누우런 빛깔로 메말라가고 천천히 한 세대를 마무리 짓는다. 억새는 다년생 풀이면서 뿌리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일년생 풀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두름이나 두려움이 없다. 낙엽으로 지거나 줄기로 그냥 질 수 없어 그대로 서서 겨울을 나면서 마감한다. 억새는 태어나 험난한 과정을 거쳐 온 것처럼 그 일 년을 떳떳하기 위해 사그라지는데도 그냥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모진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꼬장꼬장한 모습에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에 자리를 내준다.
억새는 눈치를 보지 않는다. 주변에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에 만족해한다. 먼저 떠나는 것들에게 지나는 길손에게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준다. 그래서 어수선한 가을에 저리 태연할 수 있나 보다. 나무가 빈 몸뚱이로 겨울잠에 들어갈 때 억새는 뜬 눈으로 부딪쳐야 한다. 이미 영양분도 수분도 모두 끊겼지만 이에 원망하거나 아쉬움으로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남은 일을 깔끔이 마무리 짓고 있다. 하얀 옥양목 차림으로 함성을 지르는 저 외침의 소리가 들리는가? 몸은 자꾸 메말라서 비척거리지 싶어도 본성을 잃지 않고 만세의 물결이 번지고 있는데 무심한 한 쪽에서는 순대를 구겨 넣으며 순대만 채우고 있다. - 201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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