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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왕의 계보
신당서「발해전」을 보면
1대 고왕은 조영 본명 대조영(大祚榮). 고구려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의 영주(營州) 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와 거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하여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오자, 걸사비우의 말갈족 집단이 먼저 교전하였으나 대패하였다. 그러자 대조영은 휘하의 고구려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의 예봉을 피하여 동으로 달아나면서, 한편으로 흩어진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 등을 규합하였다.
당나라군사가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 (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그뒤 계속 동부 만주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그때가 대체로 699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당시 대조영 휘하의 집단은 오랜 억류생활과 계속된 이동과정에서 겪은 시련으로, 강력한 결속력과 전투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대조영은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그 집단을 기반으로 급속히 동부 만주일대에 세력을 확대하였다. 당시 그 지역은 별다른 유력한 토착세력이 없었고, 국제적으로는 일종의 힘의 진공지대로서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과 고구려유민들이 각지에 산재하여 있었다. 새로운 힘의 구심점으로 대조영 집단이 등장하자, 그들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이 귀속하여 들어왔다.
건국 후 곧이어 당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몽고고원의 돌궐(突厥)과 국교를 맺고 신라와도 통교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다. 나라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는데, 그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719년 고왕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 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고왕이 어느 민족 출신인가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이 서로 달라 견해가 분분하였으나, 고구려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
2대 무왕은 인안 :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다. 발해국의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713년(고왕 15) 당나라가 고왕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할 때, 대무예도 같이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719년(무왕 1) 3월 고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발해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722년 송화강(松花江)하류에서 흑룡강(黑龍江)유역에 걸쳐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당나라는 그곳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는 흑수말갈이 외교관계를 취할 때는 발해의 사전양해를 얻었던 전통을 파기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통모하여 복배(腹背)에서 발해국을 공격하려는 심산으로 단정하고, 아우인 대문예(大門藝) 등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일찍이 볼모로 당나라의 수도에 머무른 바 있었던 대문예는 발해국의 국력으로서 당나라와 겨루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을 고구려의 예를 들어 간(諫)하였으나, 무왕이 듣지 않자 국경선에 이르러 다시 간하였다. 그러자 무왕은 크게 노하여 종형(從兄) 대일하(大壹夏)로 하여금 교체하게 하고 대문예를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니 당나라는 그에게 좌요위장군(佐驍衛將軍)직을 주었다.
무왕은 당나라에 대문예를 죽이도록 외교적 교섭을 폈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무왕은 723년에 장군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해적을 이끌고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이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무왕은 예상되는 당나라와의 충돌에 대비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72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때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밝히고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에 가서 군사를 모아 발해를 치게 하고, 한편으로는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신라는 732년 발해의 남쪽 국경지역을 공격하였으나, 추위와 눈으로 반 이상의 병사를 잃고 돌아왔다. 당나라의 앞잡이로 전락한 대문예를 제거하기 위하여 무왕은 자객을 보내어 그를 살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무왕은 당나라와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수말갈족의 토벌을 결행하지도 못하고 병사하였다.
3대 문왕은 대흥 : 이름은 대흠무(大欽茂). 무왕의 아들이다. 1980년에 발견된 정효공주묘비(貞孝公主墓碑)에 의하면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 (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의 존호를 사용하였다 한다. 737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였고, 774년(대흥 38) 보력(寶曆)으로 개원(改元)하였다가 다시 대흥의 연호를 쓰게 되어 병몰할 때까지 그 연호를 지켰다. 1948년 돈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에서 출토된 정혜공주묘의 비문을 보면 ‘보력’이라는 연호가 7년 이상 쓰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왕은 고왕 대조영(大祚榮)이래 30년간의 수도였던 지금의 돈화분지(敦化盆地)안에 있는 오동성(敷東城)의 비좁은 지역을 벗어나 두만강 하류로 흘러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유역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목단강(牧丹江)유역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그리고 지금의 혼춘현(琿春縣) 반랍성(半拉城)에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를 구축하여 천도를 거듭하였다.
《신당서》 발해전에 ‘구국(舊國)’으로 적혀 있는 오동성은 주위의 길이가 1,000m에 못 미치는 넓이이므로 이미 그 부근뿐 아니라 무왕 때 연해주 남부까지 합쳐 해상으로 일본과 통교하던 발해국의 수도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747∼751년경에 천도하여 755년까지 수도였던 중경현덕부는 철과 포(布)·쌀의 생산으로 발해국의 산업중심지였으며, 755년에서 문왕이 약 30년간 수도로 하였던 상경용천부 뒷날 다시 수도가 되어 발해국이 멸망할 때까지 약 130년간의 수도가 된 곳이다. 그리고 다시 785년경에 천도한 동경용원부는 《신당서》 발해전에 일본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상교통의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왕 때의 천도는 발해국의 성장에 따라 그에 상응한 보다 넓은 지역에 자리 잡은 수도의 건설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경·상경·동경의 위치가 동부 만주지역인 것은 곧 발해국의 발전방향을 나타내주고 있다. 문왕 대흥 25년(762)에 당나라가 종래 ‘발해군’이라고 호칭하던 것을 ‘발해국’으로 바꾸고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던 것은 그러한 발해국의 성세를 인정함이었다. 문왕의 재위기간중 일본과 수차례에 걸쳐 사신이 내왕하였다.
4대 폐왕은 원의 : 문왕 대흠무의 친척동생〔族弟〕이다. 794년 문왕이 죽자, 그의 적남인 굉림(宏臨)이 일찍 죽어 대원의가 왕위를 이었으나 의심이 많고 포학하였으므로 즉위 직후 수개월 만에 살해되었다.
5대 성왕은 중흥 : 이름은 대화여(大華璵). 할아버지는 문왕이며, 아버지는 대굉림(大宏臨)이다. 폐왕 대원의(大元義)의 뒤를 이어 즉위, 수도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고 중흥(中興)이라는 연호를 세웠으나 곧 죽었다.
6대 강왕은 정력 : 이름은 대숭린(大嵩璘). 제3대 문왕의 막내아들이다. 794년에 즉위한 제5대왕 대화여(大華璵)가 그해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정력(正曆)’이라는 연호를 썼다. 당나라에서는 즉위 이듬해인 795년 2월 대숭린에게 ‘발해군왕’의 책봉을 내리고, 798년에는 다시 ‘발해국왕’의 책봉을 내렸다. 15년간에 걸친 치적은 네 차례에 걸친 당나라에의 사신파견과 빈번하였던 일본과의 사신내왕이 알려져 있을 뿐, 특기할 만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7대 정왕은 영덕 : 이름은 대원유(大元瑜).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의 아들이다. 영덕(永德)이라는 연호를 세웠다. 재위기간이 4년에 지나지 않았으며, 치적으로서 특기할 만한 것이 전하지 않는다.
8대 희왕은 주작 : 성명은 대언의(大言義)이며, 제7대 정왕의 아우이다. 주작(朱雀)이라고 건원(建元)하였으며, 재위 동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냈다. 814년에는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발해 불교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이밖에 특기할 업적은 없다.
9대 간왕은 태시 : 이름은 대명충(大明忠). 제7대 정왕의 둘째아우이다. 형인 제8대 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태시(太始)’라고 건원(建元)하였으나, 즉위한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정치·행정·외교면의 업적은 별로 없다.
10대 선왕은 건흥 : 이름은 대인수(大仁秀). 대조영(大祖榮), 즉 고왕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국을 중흥시킨 군주이다.
발해국은 제6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이 809년에 죽은 뒤 그를 이은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부터 희왕(僖王)·간왕(簡王)에 이르는 3대왕의 재위기간이 너무 짧아 정치적 불안을 나타내며 국세는 도리어 위축된 느낌마저 보였는데, 818년(선왕 1) 선왕대에 이르러 침체된 국세를 회복하였다.
《신당서》에는 선왕이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크게 영토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국과는 예로부터 대립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송화강(松花江)하류에서 흑룡강(黑龍江)유역에 걸쳐 살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815년(희왕 3)에 다시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의 독자적 움직임을 보이다가, 선왕대 이후 당나라와의 조공관계가 단절되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증해 주고 있다.
선왕에 의하여 넓혀진 영토의 구체적인 지역은 밝힐 만한 자료가 없으나 발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가리켜 5경(京) 15부(府) 62주(州)라 하고 또 그 번영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표현하리 만큼 대내외적인 치적을 남겼다. 당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819∼820년의 2년간에 무려 16회의 조공사를 보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뒤에도 매년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한편, 일본과의 사신교환도 매우 활발하여 마치 종주국이나 된 기분으로 들떠 있는 일본에서도 이들을 맞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기에 827년에 이르러는 12년마다 한번씩 사신을 받기로 제한할 정도였다. 이것은 발해가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을 이용하여 관·사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에 따른 것이었다.
11대 이진왕은 함화 : 연호는 함화(咸和)이며, 시호는 전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신덕(新德)이며, 할아버지는 제10대 선왕(宣王)이다. 즉위하자 여러 사신과 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는 등 선왕에 이은 율령제국가 수립에 노력하였고, 당나라와의 경제·문화 교류에 힘썼다. 왕자 명준(明俊)을 832·836·837년 세차례에 걸쳐 수십인과 함께 당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왕자 광성(光晟)· 연광(延廣)· 대지악(大之) 등도 833·839·846년에 각각 당나라에 파견하여 당나라의 문화수용에 적극성을 띠었다. 이때 학생 해초경(解楚卿)· 조효명(趙孝明)· 유보준(劉寶俊)· 이거정(李居正)· 주승조(朱承朝)· 고수해(高壽海) 등도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당나라에서는 장건장(張建章)이 서적을 가지고 발해에 들어오는 등 발해와 당나라의 문화적 교류는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일본과도 빈번한 내왕이 있어, 선왕 때 이어 왕문구(王文矩)가 계속 파견되었고 하복연(賀福延) 등도 파견되었는데, 그 목적은 주로 신라 견제와 경제적 이해관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2대 대건왕 : 제11대왕 대이진(大彛震)의 동생이다. 연호와 시호는 전하지 않으며,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당나라와의 교섭은 당나라 내부의 농민폭동과 관련하여 빈번하지 못하였던 데 반하여, 일본과의 교섭은 계속되었다.
858년 겨울 정당성좌윤(政堂省左允) 오효신(烏孝愼) 등 104인을 일본에 보냈으며, 860년에도 이거정(李居正) 등 105인을 일본에 보냈는데, 그 목적은 주로 신라에 대한 견제와 경제적 이해관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3대 대현석 : '현석왕'이라고도 한다. 제12대 왕인 대건황(大虔晃)의 아들이다. 《신당서》 발해전(渤海傳)에는 당나라 의종(懿宗)때 세차례나 당나라에 조공의 사신을 보낸 것으로 적혀 있으나 믿기 어렵다. 그것은 경왕이 즉위한 872년에서 겨우 1년반이 지나 당나라의 의종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교류는 매우 활발히 전개하여 877년(경왕 6)에는 공목관(孔目官) 양중원(揚中遠)을 비롯한 105인으로 된 사절단을 보냈고, 882년에는 배정(裵) 등 105인으로 된 대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처럼 대규모의 사절단을 자주 일본에 보냈던 것은 평화적인 무역으로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며, 정치·군사·문화의 교류에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14대 대위해 : 연호와 시호·가계 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있다. 일본에는 전대의 현석(玄錫)때도 다녀왔던 문적원감(文籍院監) 배정(裵)을 894년에 파견하였으며, 905년 당나라에 오소도(烏炤度)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대위해는 발해왕계에서 빠져 있었으나, 김육불(金毓)의 노력에 의하여 《당회요 唐會要》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발해의 제14대왕으로 밝혀졌다.
15대 대인선 : 대인선은 발해의 제15대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재위 시절의 발해는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팽창주의에 두려움을 느끼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 대원수 요골(堯骨) 등을 이끌고 친정(親征)을 감행하자, 발해는 저항다운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다음해 정월에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포위되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건국 후 229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해 7월에 있었던 거란군의 회군시에 그는 왕후와 더불어 거란 본토로 끌려갔다.
그 뒤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다. 그 뒤 사용한 이름은 거란이 내린 오로고(烏魯古)였으며, 왕후는 아리지(阿里只)였다. 이 이름은 《요사 遼史》 국어해(國語解)에는 야율아보기와 그의 왕후가 대인선으로부터 항복받을 때 탔던 말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대인선은 발해 제13대왕인 대현석(大玄錫)을 계승한 제14대왕으로만 알려져 내려왔다. 그러나 김육불<金毓이 《당회요 唐會要》에서 895년(乾寧 2) 10월 발해왕 대위해(大瑋)에게 칙서를 내린 기사를 찾아내게 되어 이 대위해를 현석왕을 계승한 제14대왕으로 하고, 대인선은 대위해를 계승한 제15대왕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을 《발해국지장편》에서 밝힘으로써 결정이 되었다.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협계태씨족보』를 보면 발해의 개국조인 대조영 역시 '천통'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즉, 발해는 건국자 대조영을 비롯하여 모든 임금들이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한단고기』 「태백일사」 역시 발해의 역대 제왕들이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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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묘호 연호 시호 이름
1 태조(太祖) 천통(天統)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 조영
2 광종(光宗) 인안(仁安) 무황제(武皇帝) 무예
3 세종(世宗) 대흥(大興)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 흠무
4 원의
5 인종(仁宗) 중흥(中興) 성황제(成皇帝) 화여
6 목종(穆宗) 정력(正歷) 강황제(康皇帝) 숭린
7 의종(毅宗) 영덕(永德) 정황제(定皇帝) 원유
8 강종(康宗) 주작(朱雀) 희황제(僖皇帝) 언의
9 철종(哲宗) 태시(太始) 간황제(簡皇帝) 명충
10 성종(聖宗) 건흥(建興) 선황제(宣皇帝) 인수
11 장종(莊宗) 함화(咸和) 장황제(莊皇帝) 이진
12 순종(順宗) 대정(大定) 안황제(安皇帝) 건황
13 명종(明宗) 천복(天福) 경황제(景皇帝) 현석
14 위해
15 청태(淸泰) 애제(哀帝) 인선
발해 문왕(3대 임금)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에는 발해가 황제국임을 증명하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무덤입구에 발견된 묘지석을 보면 문왕을 가리키는 말로 '황상(皇上)'이라는 단어가 있다. 황상은 곧 황제로, 당시 발해인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황상(황제)으로 부른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한 것으로, 말갈 소수민족이나 북만주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해 발해 중앙 정부를 황제국으로 예우하도록 요구하고 그에 대한 답례를 한 사실로 뒷받침 된다.
발해국에서 최고 군주를 황제로 보고 관료기구를 편성한 것은 3사 2공 제도와 앞에서 제시한 독특한 연호 사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게다가 발해의 태자를 왕으로 봉한데에서 발해의 임금이 스스로를 황제(또는 고구려처럼 태왕)라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책부원구』권 1,000 외신부 수원조에 "발해군왕 무예는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그의 아버지 조영이 동쪽에서 계루의 땅을 차지하고 새 나라를 세워 자신은 그 나라의 왕이라 하고, 무예를 계루군왕에 삼았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황제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아들들을 '왕'으로 책봉하고, 손자나 조카 등은 '군왕'으로 책봉하는 것이 당시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런점으로 볼 때 대조영은 자신의 장자 대무예를 계루군왕이 아니라 '계루국왕'으로 책봉했을 것이다. 책부원구에서 군왕이라고 한 것은 이전 당나라 시기의 역사사료 등이 그 시기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 고쳐 씌여진 것을 옮겨놓은 것일 수 있다. 대무예가 아버지 대조영으로부터 계루왕의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발해국이 대왕국가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협계태씨족보를 보면 "야발(대조영의 동생, 『단기고사』를 저술했다 알려짐)이 검교태위 반안군왕(盤安郡王)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 역시 대조영으로부터 왕의 책봉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발해국의 관제 중에는 제국에서만 나타나는 3사 3공제가 있다. 요사를 보면 발해가 망한 다음 해인 927년 간은 발해국의 사도(司徒)였던 대소현을 동란국의 좌차상에 임명한 기록이 있다. 사도는 태위(太尉), 사공(司公)과 함께 3공의 하나로서, 3공제가 발해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공제는 3사제와 병존하는 만큼 3사제(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輔) 역시 발해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국왕에게 스승의 대우를 받는 3사는 최고의 벼슬로서 국왕에게 충고를 하며, 3공은 모든 관청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제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제후적 존재가 발해국에 있었다는 것은 발해국이 제국으로서의 제도와 틀을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인 군주 밑에 작은 왕들이 제후로서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일본 구라시키시의 오오하라 미술관에는 발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발해가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유물은 함화 4년명 비상(碑像)으로, 함화란 발해 11대 임금인 왕 이진(이름, 묘호는 전해지지 않음, 다만 한단고기에 의하면 이진왕의 묘호를 장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묘호는 장종, 또는 장왕이 된다)의 연호로 834년(함화 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비상은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둔 불제자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의 이름이다. 이는 발해에 왕으로 봉해진 이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해보면 왕부는 황제국(정확히는 황제를 주장하는 국가나 황제의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개설할 수 있다. 허왕부라는 명칭의 등장은 발해가 황제 국임을 주장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4. 아시아의 네트워크: 교역으로 부(富)를 장악한 발해
흔히 발해가 차지한 땅이 만주, 연해주, 한반도 북부지방이라 하여 발해가 사람 살기 힘들고, 경제가 낙후된 국가라 오인하기 쉽다. 하지만 발해는 경제대국이었다. 당시 발해는 교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발해는 당~일본~북방유목민족을 잇는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발해에는 다섯 개의 교역로가 있었다. 바로 영주도, 조공도, 신라도, 일본도, 거란도가 그것이다. 영주도는 육지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가는 교역로이고, 조공도는 해로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가는 교역로, 신라도는 발해 남경에서 출발하여 신라로 가는 교역로, 일본도는 일본과의 교역로, 거란도는 거란을 비롯한 북방유목종족과 발해와의 교역로이다. 발해는 땅이 안 좋은 대신 교역으로 땅에서 얻는 부족분을 채우고 있었다.
발해의 교역상대국인 일본과 비교해볼 때 발해측에서 많은 흑자를 남기고 있었다. 발해는 일본에 발해 특산물인 가죽, 모피를 수출했는데, 이 물품들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있는 상품이었다. 그래서 일본왕실은 발해사신을 통해 가죽, 모피, 발해 특산물을 받으면, 사신들에게 많은 면, 비단, 황금, 수은, 우산 등을 선물로 주었다.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들은 교역에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발해 사신들은 일본에서 무역을 전개한다. 첫날은 관리들과, 둘째 날은 수도 사람들과, 셋째 날은 시장상인들과 거래를 한다. 기록에 의하면 871년 발해 사신들은 첫날의 관 무역에서 일본화폐로 40만 냥을 얻었다고 한다. (발해 수도에서 당시 일본 화폐인 화동개진이 출토되는데 이는 발해 사신들의 무역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 40만냥은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 화동개진의 가치가 가장 높을 때는 700엔, 가장 낮을 때는 33엔이다. 대략 150엔으로 잡아도 40만냥은 요즘 돈으로 6억 6천만 원이다. 이를 통해 당시 발해가 교역으로 얻어 들이는 수입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와 일본의 무역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일본 시장에서 발해산 담비나 가죽을 금지시킨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발해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왕족 하나가 담비 가죽 여덟 벌을 입고 나와 자신을 과시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발해 가죽옷이 신분을 과시할 만큼 일본에서의 인기가 컸음을 말해준다. 발해와 일본과의 교역만으로도 당시 발해의 경제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샤프쿠노프 박사는 기존의 실크로드 외에 사마르칸트에서 치타를 지나 발해의 수도 상경성으로 가는 제2의 동서 교역로가 있고, 이 교역로는 담비의 길이라 한다. 소그드 및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모피를 사들였고, 이를 위해 발해의 모피를 수입했다. 게다가 발해 지역에는 중앙아시아의 은화가 많이 발견됨을 볼 때 당시 발해와 중앙아시아 간의 교역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교역로인 발해 5도(영주도, 조공도, 일본도, 신라도, 거란도)는 거란, 중국, 신라, 일본으로 이어진 국제 교역로였다. 그리고 상경에서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담비의 길은 발해의 여섯번째 국제 교역로였다. 이는 발해가 구축한 아시아 네트워크다. 발해 5도와 담비의 길, 이 길을 통해 발해는 국제무역을 펼치고 부를 얻었다. 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은 발해가 해동성국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이었다.
참고문헌- 서병국, 발해제국사
서병국, 발해 발해인
박선식, 한민족 대외정벌기
KBS 역사스페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
송기호, 발해를 다시 본다
유득공, 발해고
첫댓글 아구 아구 너무 어려워서.......대충 보게되네요^^
정말 아까운 우리 땅...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