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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사에서
누구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매일을 기억조차 못할 번잡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기에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탈행위라고 할 수 있는 여행을 꿈꾸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떠난 여행도 결국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돌아온 그날부터 또 일상으로부터 떠날 날을 그리며 산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한사람으로 일본 에도시대 전기(前期)의 하이쿠(俳句, 5-7-5조의 일본정형시) 시인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라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여행은 그의 하이쿠 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1689. 3. 27. 제자 가와이소라와 함께 에도 후카가와에 있는 바쇼암을 떠나 그해 9. 6. 이세까지 여행을 하고 ‘오쿠노 호시미치(奧の細道)’라는 여행기를 썼다.
그중에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여행기 서문이 있다.
해와 달은 백년 과객이며, 오고 가는 해 또한 나그네다. 뱃전에 생애를 띄우며 말고삐를 붙잡은 채 늘그막에 접어든 사람은 날마다 여행이며, 여행길이 내 집이다. 옛사람도 여행길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나도 언젠가부터 조각구름에 이끌려 방랑생활을 동경해 마지않았다.
위 여행기 쓴 후 그는 또다시 여행을 다니다가 5년 후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며 다닌다.’(旅に病ん で夢は枯野を かけ廻る) 라는 하이쿠를 끝으로 여행지 오사카에서 병이 들어 50년 생애의 막을 내렸다.
나는 간혹 내가 친일파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일본에 관심이 많았다. 역사소설 등 각종 소설이나 역사서, 시집, 정치평론집 등 각양각색의 서책을 접하면서 일본 여행을 꿈꿨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내가 다니는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민족공동체 지도자 과정 11기에서 현지연수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간다고 했다.
가을 휴가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휴가 간다고 하기에 뭐해서 주저하고 있던 중, 11기 회장이신 박주선 전 국회의원님께서 내가 꼭 참가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바람에 20년 장기근속휴가10일 중 5일을 빼내서 아내와 함께 여행에 참가하게 됐다.
가기로 마음먹고 나니,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항상 그러하듯 여행 전 ‘에도의 여행자들’(다카하시 치하야 저, 김순희 옮김, 효형출판사 간)을 비롯하여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물’(사카이야 다이치 저, 양억관 옮김. 자유포럼 간), ‘오사카 상인들’(홍하상 저, 효형출판사 간)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강재언 지음 한길출판사 간)등 이미 읽었던 책들의 먼지를 털고 다시 읽었다.
2005년 11월 16일, 수요일 아침 6시 10분 무악재 역 부근에 정차하는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7시30분 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회장 박주선 전 의원님을 비롯하여, 지도교수 유길재 님, 조교 서정범 군, 김종만 목사님 부부, 일본여행 중 ‘영사마’로 불리게 된 행정자치부 배영준 과장님, 박중윤 국군 모 부대장님 부부, 나완수 변호사님 부부, 임시총무 박영상 님, 여행사의 최미강 실장님 등 일행 15명을 만나 인사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한 후, 10시 대한항공편으로 우리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잠깐후인 낮 12시 경 나리타(成田)공항에 도착했다. 멀고도 가깝다던 일본을 2시간 만에 도착하니 싱거웠다.
나리타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친 후, 미리 준비된 관광버스에 승차하여 오후 2시 45분 경 나리타 공항 인근의 고기 부페 식당으로 가,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 4시 15경부터 5시까지 아사쿠사(淺草)의 센소지라는 절을 관광했다.
센소지는 동경에서는 보기 드문 큰 관광지라고 한다.
동경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설립한 이후 사실상의 수도역할을 하면서 1700년대에는 인구가 100만이 넘는 세계최대규모의 도시였고, 따라서 일본의 수도가 되어 많은 문화유적이 있을 것 같지만 세 차례의 재난으로 문화재급 건물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세 차례의 재난은 1600년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1차 폐허가 되었고, 두 번째는 관동대지진 때 또다시 타격을 입었으며, 세 번째는 2차대전 때 미군의 공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그런 중에도 아사쿠사의 센소지 만큼은 파괴를 면해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었다.
센소지는 스미다가와(隅田川)에 사는 어부형제가 스미다가와에서 불상을 건져 올려 그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절을 지은 것이 출발이라고 한다.
절의 본전은 관음전이다. 아내와 나는 관음전에 들어가 참배하고 나왔다. 절 경내를 둘러보았는데, 규모가 큰 절이고 절 안에는 대통을 흔들어 그곳에서 나오는 얇고 작은 막대기에 적힌 번호를 보고, 그 번호에 담긴 글로서 점을 치는 것이 있었다.
재미삼아 대통을 흔들어 보니 44번이 나왔고, 44번 점쾌를 봤다.
점쾌는 길(吉)하다고 나왔는데, 만약 흉하다고 나오면 그 점쾌를 점치는 기구 옆에 묶어두고 오는데, 흉한 기운을 절에 모두 두고 온다는 뜻이라고 한다. 점쾌는 이런 내용이었다.
반중흑백자(盤中黑白子) 일착요선기(一着要先機)
천룡강감택(天龍降甘澤) 세출구근기(洗出舊根基)
절 정문 뇌문까지는 각종 음식물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 수 십 군데가 나란히 일렬로 배치되었고, 많은 관광객들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기념품을 구매하기도 하고, 간식을 사먹기도 했다.
절 안에서 장사를 하는 모습이 특이했다.
센소지의 정문은 뇌문(雷門)이라는 이름이, 뒷문은 이천문(二天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달리 이천문에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천왕상이 모셔져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아사쿠사 인근은 요시하라라는 지역으로서 에도막부시대 때 공창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라 한다.
공창제도가 마련된 것은 에도막부 시대의 지방 번주(藩主)들의 세력을 막기 위해 산킨고타이(參勤交代)제를 시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에도막부 시절에는 지방 번들의 반란이나 막부타도 움직임을 예방하기 위해 지방 번의 다이묘들의 가족들을 모두 에도(江戶)에 살게 하여 인질을 잡는 정책을 펼치는 한편, 참근교대제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는 지방의 번의 영주 즉 다이묘(大名)들은 가족들을 모두 에도에 살게 하면서, 1년씩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번갈아가면서 정무를 보게 했던 제도다.
1년씩 근무지를 바꾸게 하면서 오고가는 비용이나 도쿄의 지방번 근무지 유지비 등 막대한 비용을 번 자체에서 해결하게 함으로써 번의 경제력의 축적을 막아 에도막부에 대항할 재정적 독립을 막는 방책을 쓴 것이다.
참근교대제에 따라 지방번 다이묘들이 에도로 상경할 때는 큰번의 경우 2,000명 정도의 번의 관리와 무사를 대동하고 상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럴 경우 가족을 두고 와 1년간 혼자 생활하게 된 무사나 관리들은 그들의 성적인 욕구를 풀 방법이 없어, 처음에는 성범죄가 발생하는 등 치안에 문제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공개적인 유곽을 만들어서 무사들과 관리들의 욕구를 해결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요시하라 지역이 막부의 허가를 받은 합법적인 공창이 되었다.
그 후 1964년 일본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하여 매춘금지법을 제정하여 매춘을 단속하게 되었다.
다만 1964년 이전에 허가를 받아서 매춘을 하던 곳은 예외로 하고 있어 지금도 요시하라 지역에서는 1964년 이전에 허가를 받은 업소에서의 매춘은 하고 있고, 현재 단속이 되는 곳은 그 이후 허가 없이 매춘을 하는 경우라고 한다.
이천문 바로 옆에 아사쿠사 신사가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절과 신사가 함께 있는 것은 일본인 특유의 생활관이자 종교관이라고 할 수 있는 습합(習合)사상 때문이라는 설명을 했다.
책으로만 읽어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습합사상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됐다.
일본인의 습합사상이라는 것은 쇼도쿠 태자가 창안 한 것이다.
불교의 전래를 두고, 당시 실력자이던 배불파 모노노베씨와 숭불파 소가씨 간의 종교전쟁을 벌어지게 됐다.
그 전쟁의 결과, 숭불파 소가씨가 승리하여 정권을 쟁취하였는데 당시는 불교뿐 아니라 유교도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역성혁명사상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천황가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손인 진무(神武)천황의 후예라는 신화에 의해, 천황가에서만 천황을 배출할 수 있다라는 신도사상이 당연시 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을 바꾸어서 천명을 새로이 한다’는 역성혁명사상(易姓革命思想)을 수용한다면,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천황가의 존엄과 권위가 무너지게 될 뿐 아니라, 천황가가 아닌 다른 성씨에서도 천황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 천황가의 존립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시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던 독실한 불교도인 쇼도쿠 태자가 17개조의 헌법(제1조에 ‘화합은 가장 고귀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대화로 정해야한다’로 되어 있다고 함)을 반포하는 한편,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불교를 포교하고 연구하면서도, 일본 고래의 신을 인정하는 경신의 조칙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태자는 개인적으로 불교도이면서도 정치가로서는 천황가의 일족으로 신도 신화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타종교까지 수용해야 하는 모순을 이론적으로, 윤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소위 신-불-유(神-佛-孺) 습합사상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결국 일본인 특유의 에에토코도리(좋은 점만 취한다는 뜻) 정신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와 같은 정신들이 바로 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게 되었고(和魂洋才), 신사와 불교사찰이 같은 경내에 있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됐다.
아사쿠사의 센소지 관광을 마친 후, 숙소인 이케부쿠로(池袋)에 있는 선사인시티 프린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선사인 프린스 호텔은 스가모라는 감옥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전후에는 2차대전 전범들을 구금하고 있던 장소로서 이 감옥에 있다가 에이급 전범으로 처형된 사람은 3명 있었다고 한다.
요즘 일본의 고이즈미 고이치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많은 문제가 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명치천황 2년에 만들어진 신사로서, 처음 그 신사는 막부파와 토막파간의 보신전쟁 때 희생된 영혼을 달래기 위한 신사로 출발했다.
그런데 그 신사에 2차대전에 희생당하고 산화한 250만 일본 군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사실상 국립묘지 역할을 하고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신사참배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전범으로 처형된 14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를 참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후 문제처리를 위한 협정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큰 피해를 본 중국이나 한국, 기타 2차대전 참전국들의 정서와 감정을 무시하고 있기에 국제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런 설명을 들으니, 스가모 감옥이 있던 자리에 신축된 선사인시티프린스 호텔에 묵게 된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짐을 풀고, 그 호텔 인근 상가건물 58층에 있는 선샤인크루즈크루주레스토랑이라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도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전망이 아주 좋았다. 저녁을 먹기 전, 일본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 부학장 한동성이라는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사실 조총련계에서 만든, 조선대학교 교수의 강연을 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강연 내용 중 인상적인 내용은 북한에서 2002년 아리랑 공연을 한 이유는 북한의 표현에 의하면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국제관계를 개선하여 동북아 중심의 강성대국을,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자주통일강성대국을, 경제문제를 해결하여 실리의 강성대국을 이룩하고자 했지만 미국 등의 방해책동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2005년에 들어와, 기존의 내용에 아무런 개작 없이 아리랑 공연을 다시 하는 것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한 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에 아리랑 공연을 함으로써 앞서 말한 2002년의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매년 북한을 방문하여 황해도 사리원등지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는데, 2002년 고난의 행군시절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북한이 어려웠으나, 최근에 북한을 방문한 결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눈에 띌 정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체제를 옹호하고 선전하는 듯하여 신경이 많이 거슬렸다.
그의 강연을 듣고 난 후, 회장이신 박주선 의원은 이제 와서 보면 백성을 굶주리게 하는 북한체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체제경쟁을 한 결과, 사회주의체제인 북한체제가 잘못됐다는 것이 명백히 입증되었는데도 아직도 북한체제가 우월하다고 보는 까닭이 무엇이고, 남한을 폄훼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에 대해 한 교수는 한마디로 북한체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세력에 의해 정권이 수립되었고, 친일청산 작업을 통해서 민족적 정통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도 질문을 하나했다. 즉 지금 조총련 계 대학의 교수로 근무하고 있어, 대한민국을 방문하는데 지장이 있느냐고 묻고,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하는 답변을 들은 후, “언필칭 학문을 하는 사람은 가치중립적인 시각에서 학문의 대상이 되는 자료들을 바라봐야 하는데, 한 교수는 한국에는 한번도 가지 않고, 대한민국에 관한 자료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등 학자로서 기본자세인 가치중립적인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강정구 교수사건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고 있다시피 학자로서 부탁하건데 대한민국에도 가보고, 자료를 접근할 때 가치중립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는가?” 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조만간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저녁은 간단히 맥주 몇 병을 마시면서 끝내고, 저녁 식사 후에는 일부는 빠징고 장이나 술집을 찾아가고, 또 나와 아내를 비롯한 일부는 이케부쿠로 거리를 걷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정말 일본의 호텔방은 도시락(벤또?)처럼 오밀조밀하게 작았다
특히 화장실과 욕실이 붙어있는데, 정말 비좁게 만들어 두고 있었다.
또 특이한 것은 칫솔을 준비하여 두고 있었는데, 정말 작게 만들어 오히려 자원의 절약이라든지 하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땅에 처음으로 와 누웠다는 감회에 젖어 혼곤히 잠이 들었다.
게이오 대학
11. 17. 목요일 아침 식사를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마친 후, 미리 정해진 대로 경응(게이오)대학으로 향했다.
학교로 가는 도중, 시내 곳곳에 납골당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에서는 천황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화장을 한다고 한다. 화장을 한 후 두 사람이 젓가락 한개 씩을 들고, 뼈를 함께 집어 들어 항아리에 넣고, 준비해 둔 납골당에 그 항아리를 보관하는데, 납골당에 따라 가격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주택단지 안에 여러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납골당이 곳곳에 있는 모습들이 특이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실낙원을 쓴 와타나베 준이치(渡邊淳一)의 ‘눈물항아리’라는 단편소설을 읽었던 생각이 났다.
그 소설은 아내가 병으로 죽은 후 아내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아내의 뼛가루를 섞어 항아리를 만들어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중 남편이 재혼의 하려고 하면서 생기는 갖가지 사연들을 소재로 한 소설로서 처음 읽을 당시에는 엽기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일본에 와서 보니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쓸법하겠다 싶었다.
주택가 한가운데 납골당을 만들어 두고 있다는 것은 삶 가운데 죽음이,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는 일본인의 사생관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9시50분 게이오 대학에 도착했다. 게이오 대학은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했고 조선말 우리나라 개혁파에 강한 영향을 미친 일본 근세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설립한 대학으로 정식이름은 경응의숙 대학(京應義塾大學)이다.
동경시내에 4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경영학부가 유명하며, 우리나라로 치면 연세대학교와 같다고 한다.
현재 게이오 대학에는 한국유학생이 약 50명 가량 있고, 입학절차가 까다로운 편이어서 그렇게 많은 유학생이 있지 않다고 한다.
우리 일행에게 강연을 할 사람은 오코노키 마사노부 교수로서 법학부 학부장이며, 우리나라 연세대학에서도 일년간 공부해 한국어도 제법 했다.
현재 일본 수상 고이즈미의 게이오 대학 3년 후배로서 고이즈미 총리의 브레인으로 일본의 대북정책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최근 그의 주장중에 눈에 띄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의 전범 위패를 분리하여 별도의 신사에 안치하자고 주장하고 있다는데, 그런 주장 때문에 일본우익인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한 핵문제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이라는 측면에서 강연을 했다.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법, 즉 군사적인 해결방법과 외교적인 수단으로 해결하는 방안의 장단점을 설명했고, 연대기적으로 미국이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을 클린턴시기와 부시 1기와 부시 2기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또한 김대중 정부시절과 노무현 정부시절의 북한문제에 대한 구도를 설명했다.
그리고 일본외교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일본외교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두 가지 시나리오라고 한다.
첫 번째는 미중간의 수교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북한이 전격적으로 수교를 하여 일본이 고립되는 상황이고, 두 번째는 미국이 갑자기 북한을 선제공격하여 동북아의 경제위기가 초래되고, 전쟁 후 복구 문제가 대두되며, 난민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재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일본외교의 목표로서 6자회담과 관련하여 일본 측 대표의 제안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6자회담을 일본 측 입장에서 보면 핵심적인 과제는 첫째 북한의 핵 포기와 그에 대한 검증의 문제, 둘째 북한에 대한 경제와 에너지 지원문제, 셋째 북 일간의 수교 및 관계정상화 문제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해결가능성이 높은데, 해결의 방법은 패키지로 일괄 타결해야 하며, 해결의 시기는 일본 국회의 내년 3월 예산국회가 종료되고, 고이즈미 총리의 임기만료시기인 9월까지 해결해야 하는데 그 시기는 미국에도 중간선거를 의식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강연을 듣고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교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6자회담에서 북-일간의 수교문제가 중요한 축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의 몇 차례 질문을 하였고, 이에 대해 오코노끼 교수의 친절한 답변을 들은 후, 오코노끼 마사오 교수와 우리들은 게이오 대학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고,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게이오 대학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후쿠자와 유끼치의 흉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음 예정지인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황거로 향했다.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333미터의 도쿄타워 철탑 옆을 지났다.
도쿄타워는 보통 철탑이 볼트와 넛트로 연결되지만 지진에 대비하여 리벳으로 연결했다고 한다.
즉 탑을 올리면서 철판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리벳을 넣고, 화로로서 리벳을 달군 다음, 망치로 때려 연결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정치와 경제, 행정의 중심지인 가스미가세키(霞ケ關)로 갔다. 지금은 재무성으로 바뀐 대장성 건물과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법무성 건물 곁을 지나갔다.
법무성 건물 옆에 일본 최고검찰청(우리나라로 치면 대검찰청)이 있다고 하는데 보지 못했다.
황거(皇居)인근 넓은 잔디광장에는 보기 좋은 소나무들이 광장 곳곳에 심어져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광장을 가로질러 황거 쪽으로 갔다. 넓고 큰 해자에 둘러쌓인 황거는 한때는 현인신(現人神)이었던 천황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천황에게 신비와 존엄을 높여주는데 적합해 보였다.
황거의 니쥬바시(二重橋)아래, 넓고 깊은 해자에 몇몇 오리들과 백조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중교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그리고 다시 관광버스로 돌아오던 중 말을 탄 채, 멋지게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게 하고 있는 역동적인 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말의 눈이나 코, 그리고 무사의 눈동자 등 하나하나의 동작이 정말 탁월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는 구스노끼 마사시게(楠木正成)라고 하는 무장이었다.
그는 고다이고천황을 도와 가마쿠라 막부를 쓰러뜨리고, 오랫동안 무사들의 손에 장악되었던 정치를 개혁하여 천황친정체제를 세우고자 했던, 소위 건무신정을 도운 사람이다. 물론 건무신정체제는 무로마치 막부체제가 들어서면서 실패했지만....
황거 주변에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체제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구스노끼 마사시게 동상을 세워 둔 의미가 무엇일까? 일본국민들에게 구스노끼 마사시게 동상을 통해, 천황의 존재의의를 교육하고 있는 것 같아,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섰다.
혹시 전전(戰前)의 체제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창하게 지어진 동경도청사로 갔다. 시청사 2개동에 도의회건물 1동까지 3개동으로 이루어진 동경도청은 일본경기가 최고조에 올랐을 때, 흘러넘치는 돈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물론 동경도청에는 18,000명가량의 많은 공무원들이 근무하고 있어, 큰 건물이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까지 큰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일본인의 특성 중에 하나가 그들은 체구가 작은, 왜소(矮小)콤플레스 때문에 건물을 크게 지어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어령 선생은 일본인의 성격을 축소지향이라고 보지만 어제 본 아사쿠사 센소지나 동경도청 건물을 생각하면 꼭 축소지향만 아닌 것 같다.
43층 전망대에 올라가 동경시내를 둘러봤다. 멀리 후지산(富士山)도 있었지만,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동경도청 전망대를 구경하고, 동경의 번화가 신쥬쿠 거리로 갔다.
아내는 다른 여자 분들과 백화점등을 구경하겠다고 가고, 나는 일행과 떨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신주쿠 지하철역 안에도 들어가 보고, 서점에 들어가 책 구경도 했다.
요즘 일본에서는 대장금이라는 우리 드라마가 인기인지, 한국의 궁중요리나 대장금에 관한 책자 등을 파는 코너가 따로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한때는 한국관광객들을 아키하바라(秋葉原)에 내려주면 전자제품을 싹쓸이하다시피 사가, 한집에 적어도 소니 제품 하나쯤 있는 것은 당연했고, 일본제품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자랑하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소니 제품을 찾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오히려 소니나 나쇼날 등 일본 전자회사는 우리나라의 삼성이나 LG를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했다.
거리를 거닐다 보니, 건물마다 광고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 볼만했다.
이것도 문화려니 싶었지만, 그런 모습을 우리도 배워서 우리나라도 어지럽게 간판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다음 목적지인 아따미(熱海) 해변의 온천지역으로 가기 위해 관광버스를 탔다.
아따미 해변의 온천지역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온천지역이고, 일본 신혼여행객들이 많이 찾았는데, 이제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여 위험하다고 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졌다고 한다.
아따미(熱海) 온천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태평양을 끼고 가는 길이었다. 태평양 바닷물이 해변 바위를 치는 가운데, 쏜살처럼 버스는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창밖을 내다보자, 동녘 바다위로 노랗게 익은 달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시간은 정확히 오후 5시 47분이었다.
파도가 넘실대고 있는, 광대한 태평양 위로 떠오른 달은 색다른 정취를 남겼다.
태평양 바닷물이 해변 바위를 치고 있는, 그 곁을 쏜살같이 달려가면서 감회에 젖다보니, 일본의 시인 기타하라하쿠슈(北原白秋)의 ‘세월은 가네’라는 시가 생각났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을 지나가듯
곡물창고에 번득이는 석양빛.
검은 고양이의 아름다운 귀울림 소리처럼.
세월은 가네. 어느 결엔가, 부드러운 그늘 드리우며 가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김연수 저 ‘청춘의 문장’에서)
아따미 해변에 인접한 이께다(池田)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로 온천욕을 하러갔다.
일본식 옷인 유까다를 걸친 채 1층 온천탕으로 들어갔다.
짭짤한 맛이 나는 것으로 봐서, 해수온천(海水溫泉)탕인 것 같았다.
탕 안에 몸을 담그고 땀을 흘리다가, 노천탕으로 옮겨서 땀을 식혔다. 기분이 상쾌했다.
온천욕을 마친 다음, 유까다를 입은 채, 호텔 내 다다미가 깔린 방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써빙하는 가운데 저녁을 먹었다.
가이세끼 요리라고 했다. 한 사람당 동일한 메뉴를 한상씩 차려주는 일본 고유의 메뉴라고 한다.
술잔을 권커니 잣거니 하다가, 그곳에 설치된 노래방 기계로 노래도 한곡씩 했다.
주흥이 도도해지자, 우리 일행 중, 다른 사람의 방으로 가서 박주선 회장님 이하 남자들이 모여서 다시 몇 잔씩 술을 마시면서, 조선대 한 교수의 강의내용과 게이오 대 오코노끼 교수의 강의내용을 자연스럽게 화제로 삼았다.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는데, 숙소는 동경의 프린스호텔보다 훨씬 넓고 욕실도 넓어 여유가 있었다.
달빛이 부서지는 아따미 해변의 다다미 깔린 호텔방에서 달빛에 취해 잠이 들었다.
아시호수와 후지산 오합목
11. 18. 금요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온천탕 안으로 들어가 땀을 흘리며 목욕을 했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그 자리에서 아침을 간단히 마친 후, 여장을 꾸려 호텔을 나왔다.
한적한 아따미 해변에 차를 주차하고, 아득히 먼 태평양 수평선을 바라봤다.
아따미 해변은 일본작가 오자키고요(尾崎紅葉)라는 작가가 쓴 ‘금색야차(金色夜叉)’라는 소설의 무대가 된 곳이다.
그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는 조중환이 ‘장한몽’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했던, ‘이수일과 심순애’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곳 해변에 일본소설에서는 이름이 뭣인지 모르겠지만, 김중배의 꼬임에 빠져 사랑의 맹세를 배신한 심순애를 이수일이 발길질 하는 모습을 조각품으로 만들어두고 있어 그것을 구경하면서 사진도 찍었다.
다시 관광버스를 승차하여 아따미 해변을 떠나 아시(芦ノ)호수로 향했다.
아시호수를 가는 도중, 멀리 머리에 흰눈을 이고 있는 후지산(富士山)이 바로 보였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정말 사진으로만 보던 후지산이 눈앞에 펼쳐지니 그 경이로움과 감흥이 색달랐다.
조선시대 때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간 신유한(申維翰, 그는 서얼로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한 인물로서 대단한 문장가였다고 한다)은, 일본기행문 중 가장 탁월한 기행문으로 평가받는 해유록(海遊錄)이라는 기행문에서, 지금까지 본 산은 시시한 산 즉 잔산(殘山)이었다고 하면서, “만일 진시황이 낭야대에서 이 광경을 보았다면 실로 다시 창해(蒼海)를 기뻐하며, 신선을 불렀을 것이다.....그것이 지금 이미 내 눈 안에 있다. 다른 나라의 모든 산을 생각해 봐도 후지산에 견줄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썼는데, 홀연히 나타난 후지산을 보고 있노라니 틀린 표현은 아닌 것 같았다.
항상 후지산을 바라보고 사는 일본인들에게 후지산이 주는 감흥은 더욱 각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상징이 후지산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시호수로 가는 도중 산 곳곳에는 골프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시호수를 포함한 이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하려고 하는데, 골프장이 너무 많고, 원 상태가 훼손되어 등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아시호수에 도착했다. 이 호수는 해발고도 724미터에 있는 호수로서 호수 가장 깊은 곳은 45미터 정도 된다고 한다.
가미야마(神山)가 폭발하면서 북쪽 계곡을 막는 바람에 만들어진 것이다.
물이 맑고 깨끗했다. 호수에는 정말 팔뚝만한 잉어들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고, 빙어들도 보였다.
그곳에 있는 관광선인 해적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아시호수로 들어갔다.
해적선 타는 곳 바로 옆에 있는 고건물이 에도막부시대의 도까이도(東海道) 마지막 세키쇼(關所)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막부시절에는 그곳 관소에서 에도로 무기, 특히 철포가 반입되는 것을 막는 한편, 에도에 있는 제번(諸藩)의 인질들이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오는 철포, 나가는 여자(入鐵砲出女)라는 말이 검문소의 검문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에도막부는 철포를 비롯한 무기가 에도로 들어오는 것과 인질로 잡아둔 다이묘의 아내와 딸들이 고향으로 도망가는 것에 과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결국 막부의 안위와 직결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호수 위에 간혹 작은 거룻배를 타고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이드에게 낚시를 마음대로 해도 되는지 물어보자, 2개월가량의 기간만 허가를 받고 낚시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시 호수의 신을 모시는 신사를 하코네(箱根) 신사라고 했다.
신사 정문의 색깔이 다른 곳과 달리 유난히 밝은 주황색이어서 왜 색깔이 저렇게 붉은 지 가이드에게 물어봤다.
가이드는 붉은 색은 악마가 싫어하는 색이고, 또 벌레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붉게 칠한다고 했다.
호수 동쪽 사면에는 스기목들이 많이 심어져있고, 간혹 좋은 자리마다 풍경에 어울리는 낮은 호텔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호텔 중에 한 곳에 영국의 블레어총리가 묵어간 곳도 있다고 했다.
얼굴로 찬 바람을 맞으며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해적선을 타고서, 멀리 후지산을 완상하며 가는 흥취가 대단했다.
해적선에서 내려 관광버스로 이동하여 해발고도 1,070미터에 위치한 오와쿠다니(大涌谷)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흰 수증기가 곳곳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어 화산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유황냄새가 코를 찔러 머리가 아팠다.
입구에는 불교 지장보살을 안치한 불단을 만들어두고 있었고, 온천 원수(源水)가 올라오고 있어 손을 씻었다.
약 200미터쯤 걸어 올라가, 그곳 유황 물로 삶아(실제로는 유황 물로 삶지 않는다고 한다) 껍질이 검게 변한 구로다마꼬(黑玉子)라는 계란을 사서 먹었다.
한 개를 먹으면 7년의 수명이 연장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후지산을 배경으로 몇 통의 사진을 찍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 중에 몇몇 사람이 박주선 의원님을 알아보고 인사를 청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저사람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가기도 했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공인이라는 사람은 행동에 많은 제약이 있어 불편함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후지산으로 출발했다. 관광버스 뒤편에서 우리의 관광일정을 순 전라도 말로“아따메(아따미), 항꾸네(하코네) 가봉께 영 후지(후지산)네”농담을 하자, 모두 박장대소 했다.
후지산으로 가는 도중, 명품 아웃렛 매장에 들려 세계명품들(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었음)을 팔고 있는 매장을 구경하고, 잠시 틈을 내서 각자 알아서 식사를 했다.
나는 일본식 우동을 사먹고, 아내는 라면이 새롭게 조리한 음식을 먹었는데 일본 음식 맛은 기본적으로 밋밋하고 덤덤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울렛 매장을 출발하여 후지산을 향했다. 후지산은 해발고도 3,776미터로서 화산 폭발이 여러 차례 발생하여 화산의 용암과 화산재들이 차례차례 쌓여 평지에서 산 하나가 불쑥 올라온 현재의 모습이 됐다고 한다.
1708년에 최종폭발이 있었는데, 그 이후 아무런 활동이 없어 사화산이나 휴화산이 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몇 년 전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일본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후지산은 300년 주기로 대폭발을 한다고 하여 다가오는 2008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밑에서부터 천천히 돌아 올라가고 있어 마치 산 옆으로 돌아들어가는 것 같았다.
해발 고도 2,305미터인 후지산 오합목(五合目)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에 올라가 살펴보니, 북쪽 저 먼 곳에 3,000미터의 고봉들이 머리에 눈을 이고, 즐비하게 서 있었다. 일본의 기타(北)알프스였다.
고개를 들면 후지산 정상이 솟아있고, 고개를 숙이면 후지산을 끼고 있는 다섯 개의 호수 후지고꼬 중의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곳, 그런 곳이 바로 후지산 오합목이었다.
후지산은 넓은 평야지역에 단봉(單峰)으로 치솟아 있는 산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후지산 산 아래의 모습을 맨살을 드러내듯 보여주고 있어 특이했다.
이런 곳에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내려가면 좋을 듯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기념품 가게에 들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천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을 웃기는데 쓸만한 선물을 600엔을 주고 하나 샀다.
손에 잡힐 정도 크기로, 몰랑몰랑하게 만든 여자 유방을 본 딴 것으로, 우리 일행들에게 보여주자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성인용품 가게에서 은밀하게 팔만한 물건을 후지산 오합목에서 팔고 있다는 것이 좀 별스러웠지만, 웃으라고 이런 물건을 파는 모양이다 생각했다.
다음 예정지인 도요하시(豊橋)를 향해 출발했다. 회장님을 비롯한 술꾼 원우들이 모두 뒷좌석으로 옮겨와, 팩에 담긴 소주, 먹다 남은 양주, 맥주 등을 마시며 간간히 우스개 소리도 섞어 지루함을 달래면서 버스 여행을 했다.
도요하시 역 부근의 아소시아 호텔이라는 곳에 짐을 풀고, 호텔 부페에서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 후 도요하시 역 부근의 선술집을 찾아 어슬렁거렸다.
일행들과 좀 떨어져 서 있었더니, 머리에 물을 들인 젊은 여자가 다가와, 살며시‘마사지 운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씩 웃어주자,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일본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려니 싶었다.
나와 5미터쯤 떨어져 서 있던 우리 일행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궁금해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저만치 서있는 아내를 가르키면서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고 나서 다시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자, 당황해 하면서 저만치 물러났다.
모두 웃다가 우리 일행 중 다른 한분이 자기도 한번 서 있어보겠다면서 내가 서 있던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지만, 더 이상 재밌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들어 갈만한 빈자리가 있는 술집을 찾아내, 오뎅국물 등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회장인 박주선 의원님께서는 내일 나고야 공항에서 귀국해야 한다고 하면서 함께 일정을 끝까지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남은 3만엔을 주면서 귀국할 때, 대학원 관계자들의 선물을 사라고 줬다.
흥겹고 요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파안대소하는 동안, 도요하시의 밤은 점점 깊어갔다.
금각사와 청수사
11. 19. 토요일 아침 7시에 일어나 호텔 내에서 식사를 하고, 09시2분 도요하시 역에서 교토 행 신간선 고속철도를 탔다.
신간선 고속철도는 1964년도에 개통했다고 한다. 우리의 고속철도인 KTX를 여러 차례 타본 사람으로서, 비록 속도 면에서는 우리 고속철도보다 좀 떨어지지만, 훨씬 편리하고 넓은 의자, 정확한 도착과 출발 등 그 엄격함 등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왜 우리 고속철도는 그렇게 불편하게 되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0시 20분 칼같이 교토 역에 도착했다. 교토는 1,100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교토의 하늘조차 고풍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높은 건물도 보이지 않는 예스런 도시였다.
이곳에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의 20퍼센트가 있고, 1,600여개의 사찰과 440개의 신사가 있다. 염색과 견직물의 고장으로 지역 특산물이라고 한다.
다음 목표지인 청수사(기요미즈 데라)로 가는 도중, 크기가 장대한 절이 있어 현판을 보니 혼간지(本願寺)였다.
가이드는 교토의 대표적인 절중의 하나로서 아께찌 미스히데의 공격을 받아, 오다 노부나가가 불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했던 혼노지(本能寺)와 더불어 한때 세력이 막강했던 절이라고 한다.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에 도착했는데, 그 절 안에 있는 지주신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는데, 표를 보여주기만 하고 들어갔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처럼 입장권에 날짜가 인쇄되어 있지도 않았고, 절에 들어가면서 표의 일부 떼어내지도 않고 단지 손에 들고 높이 치켜들어 표를 샀음을 알려주기만 했다.
다음에 와서 또 써먹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한 무리의 남녀가 하얀색 천위에 무슨 글자를 새긴 겉옷을 통일하여 입고, 깃발을 들고 청수사 안으로 들어갔다.
일본 전국의 유명한 사찰들을 집단으로 순례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청수사는 절 뒤편에서 흘러나오는 세 줄기 폭포수 중에 한줄기 물을 골라 마시면, 건강이나 재물 등의 복락중 하나를 누린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물이 좋고 맑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물을 마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절의 구조는 11면천수천음관음상을 모시고 있는 금당본당(대웅전), 사리탑,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의 풍상이 내려앉은 듯 검게 변한 금당본당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곳에 안치된 11면 천수천음 관음상은 30년에 한번씩 개방할 뿐이어서 평소에는 관음상을 볼 수 없다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절에 갈 때마다 참배를 하곤 하던 아내는 법당 안을 한참 들여다 보고나서, 너무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를 영 마음에 안 들어했다.
본당 사방을 빙둘러가면서 각종 민예품과 부적 등을 파는 가게가 본당에 붙어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금당을 보고나서 절 뒤편으로 돌아가니, 금당의 모양을 그대로 본뜻 작은 전각이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금당을 돌아보았다. 금당은 언덕 중간쯤에 굵은 나무기둥을 끼워 맞춰 쌓아 올린 다음, 기반을 만들고 그 위에 건축을 한 모양새였다. 독특한 건축술이 돋보였다.
금당 옆으로 돌아가자, 청수사의 지주를 모신 지주신사(地主神社)라는 곳이 나타났다. 그곳을 참배하면 인연을 맺어준다고 하여 젊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신사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신사들과 달리 화사하고, 붉게 채색까지 하고 있었다. 분위기도 많은 선남 선녀들이 시끌벅적 떠들어 근엄하고 정숙하며 적막한 다른 신사들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좋은 사람 만나게 해 달라고 빌고 있는 것을 바라보니, 마치 봄날 나른한 햇살을 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금당아래를 지나 다시 정문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커다란 탑이 있었고, 탑에 새겨진 글은 조동종태조상제대사현영비(曹洞宗太祖上濟大師顯影碑)라는 것이었다.
청수사가 일본 조동종 계통의 절이려니 싶었다.
길옆에는 탁발승인 듯 싶은 승려가, 검정색의 일본 승려복장을 하고, 삿갓을 둘러쓴 채 반듯하게 서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궁시렁 거리듯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승려가 앞에 둔 작은 그릇에 동전을 던져 넣어 주곤 했다.
청수사 앞, 쭉 늘어서 있는 민예품점이라든지, 교토 니시진 견직물로 만든 갖가지 물품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 기념품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재미도 괜찮았다. 아기자기한 일본풍의 기념품들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회전 초밥을 파는 식당으로 가, 점심을 먹었다.
회전초밥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이미 들어와 있는데, 원래 오사카에서 겐록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던 시라이시 요시아키라는 사람이 1947년에 인근의 가난한 직공들이 값이 싸면서도 배불리 먹을 음식을 원하고 있는 것에 착안해서 고안했다고 한다.(홍하상의 ‘오사카 상인들’ 참조)
우동 한 그릇에 초밥 7개를 먹으면 1,000엔이라고 하는데, 돌아가는 갖가지 초밥 중에서 7개를 맞춰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후에는 교토의 또 하나의 명물이자 유명한 관광지인 긴가쿠 로쿠온지(金閣鹿苑寺)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교토에 상경했을 때 묵기 위해 지었다는 니죠성(二條城)이 보였다. 해자의 폭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봐서 에도 막부가 창건되어 감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도전할 세력이 없어진 후에 지어진 성이기에 해자가 비교적 작은 것이 아닐까 생각됐다.
긴카쿠 로쿠온지는 간단히 말해서 금각사라고 한다.
금각사는 임제종 쇼코쿠지 파의 선종사찰로서 가마쿠라 막부시절, 사이온지 긴쓰네의 별장인 기타야마(北山)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몹시 좋아하자, 사이온지 가문에서 요시미쓰에게 증여했다.
그러자 요시미쓰는 당시 쌀 100만석을 들여 누각을 만들고 2층과 3층에 금을 얇게 펼쳐 붙인 금각을 만들고, 금각을 중심으로 정원을 지어 극락정토를 현세에 표현했다고 한다.
그 후 요시미쓰는 사망에 즈음하여, 위 별장을 절로 만들라고 유언하여 절이 됐고, 절 이름은 요시미쓰의 법명인 로쿠온인전(鹿苑院殿)에서 두자를 따와 로쿠온지가 됐으며,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입장권을 사자, 다른 입장권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입장권에는 역시 운이 트이고 복이 오며, 집안이 두루 평안해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도 발행일자 같은 것이 전혀 인쇄되어 있지 않았고, 입장하면서 표 일부를 뜯어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단지 표를 들어 보이자, 안내 팜프렛 하나를 줄 뿐이었다. 모두 구경하고 나서, 그 표를 가지고 다시 들어와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교코이케(鏡湖池)라는 인공호수위에 2층과 3층 누각에 노란 금박을 붙인 3층 누각이 나타났다.
눈이 부실정도였다.
경호지 안에는 아시하라시마(葦原島)라 불리는 인공 섬 등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고, 요시미쓰에게 지방의 다이묘들이 바친 명석들과 호수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이 노랗게 빛나는 금각을 위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밝은 햇살에 비쳐 금각사가 선명하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그 뿐 아니라 호수면 위로 비치는 금각의 모양은 바람이 호수면을 스치면 흔들렸다가, 바람이 잠자면 그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곤 해서 참으로 일품이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는 어떤 모양일까를 상상했다.
대 그림자 밤새 섬돌을 쓸어도 먼지하나 일지 않고(竹影掃階塵不動),
달빛은 밤새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도 남지 않는다(月穿潭底水無痕)
는 야부도천(冶父道川)의 선시(禪詩)로 상상의 새는 날아갔다!!
가이드의 말로는 금각사가 가장 아름다울 때가 맑은 11월 오후 2시라고 하는데, 우리가 관람하는 때가 바로 그 때였다.
미시마유끼오(三島由紀夫)의 소설중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각사가 생각났다.
그 소설은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헤어날 길 없던 말더듬이 청년이 금각이 자신의 인생진로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불을 질러 금각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방화를 하기에 이른다는 줄거리다.
아름다움의 상징인 금각을 태워버리려고 했던 것은 무슨 심리라고 해야 할까?
텔레비전에서 실황중계를 하는 가운데, 천황중심의 국가부활을 외치면서 일본도로 할복 자결한 미시마 유끼오의 심리상태가 바로 금각을 태우는 말더듬이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됐다.
한없이 금각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예정된 시간이 있어 할 수 없이 자리를 떴다.
소롯한 오솔길을 인파에 떠밀려 걷다보니, 은하천(銀河泉)이라고 표기된 곳에서 맑은 물이 흘렀다.
요시미쓰가 그 물을 찻물로 사용했는지 의만공다수(義滿公茶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이윽고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일본식 정자가 하나 나타났다.
이곳을 셋카테이(夕佳亭)정자라고 한단다.
이곳은 에도시대 때, 다도인으로 유명했던 가나모리 소와(金森宗和)가 선호한 다실(茶室)이다.
저녁노을의 경치가 특히 아름다워 셋카테이 정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번잡하게 다니지 않는다면, 가을날 조용히 이곳에 앉아 차를 한잔 마셔도 좋을 법 해보이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니겠는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니 후도도(不動堂)라는 불당이 나타났다. 이곳의 불상은 석부동명왕(石不動明王)이라는 비불(祕佛)로 서민들의 신앙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법당에 예불을 드리기 전에,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부처님께 알리기 위해 징을 친다더니, 과연 많은 사람들이 법당 앞에 달아둔 징을 두 차례 치고 합장하곤 했다.
후도도 불당에도 점쾌를 뽑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100엔짜리 동전을 집어넣고, 점쾌를 뽑았다.
점괘는 길(吉)하다고 되고, 이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구곤점능안(久困漸能安) 운서강인권(雲書降印權)
잔화종결실(殘花終結實) 시형록자천(時亨祿自遷)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정말 아름다운 곳으로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를 금각사가 있는 기타야마의 이름을 붙여 기타야마 문화라고 한다는 뜻이 이해됐다.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으로 둘러보고 말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하루 종일 있어도 될만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관광버스에 다시 올라 나라(奈郞)로 향했다.
나라는 인구가 37만 정도이지만 일년에 찾아오는 관광객은 140여 만 명에 이르는 관광도시다.
약 70년간 일본의 수도이기도 했다. 이곳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금당벽화로 유명한 법륭사와 세계에서 가장 큰 비로자나불을 모신 도다이지(東大寺)다.
나라로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곰곰이 청수사나 금각사에서 받은 입장권을 생각했다.
그들의 입장권에는 발행한 날짜도 인쇄되어 있지도 않고, 입장을 할 때 표를 일부 뜯어내거나 표시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와 비교가 됐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액을 막고, 귀신을 막기 위한 부적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 생활화된 것 같다.
입장권 마다, 다 부적으로서 구실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일 뿐 아니라, 각종 액막이 물건이나 부적을 법당에서 파는 것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유치하지만, 세상살이 중 두려운 것이 너무 많기에 조상신이었든, 위대한 인물이었든, 아니면 거창한 호수나 산, 바위 등 갖가지 인물과 물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을 달래거나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각종 부적이나 액막이를 사서 지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세상살이에 겸손한 것이 일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로 가는 도로 양편에서 도로수선공사를 하거나, 나뭇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현장이 여러 군데 보였다.
조경공사를 하는 사람이든지, 도로수선공사를 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공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 모자를 쓰고, 그들이 입고 있는 겉옷 위로 한 뼘 정도 폭인 노란 비닐 띠를 양쪽 어깨에서 허리로 가로질러 두르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뭔가 자기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표시를 내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나라나 교토 인근은 모두 낮은 야산에 둘려 쌓여 우리나라의 풍경처럼 낯익었다. 사실 일본은 외국에 와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곳이다. 사람들의 외모도 그렇고, 문화도 우리와 유사했다.
나라의 동대사(東大寺)로 가는 길이 막혀 오후 4시15분 경에야 동대사에 도착했다. 동대사 쪽으로 걸어가니, 사슴들이 곳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는 과자를 얻어먹으려고 졸졸 따라다녔다.
동대사 대불전의 헌걸찬 모습도 그러려니와 압도적인 크기의 비로자나불이 당당하게 우리를 맞았다.
대불전은 높이가 48. 7미터에 이르고, 대불전안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은 높이가 약 15미터, 눈의 길이가 1.02미터, 귀 길이가 2.54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불상이다.
법당은 신발을 신고 들어가 빙 둘러볼 수 있는데, 비로자나불 양편으로 허공장보살, 여의륜관음보살, 광목천왕, 다문천왕이 시위하듯 서 있었다.
빙 둘러보다가 대불전을 기초가 되는 기둥에 구멍이 뚫려있고, 그 구멍을 통해서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갔다 나오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
기둥의 구멍 부근이 반질반질한 것으로 봐서 동대사를 참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비로자나불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일부 사람들이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좌대위로 올라가 있어, 나도 한번 올라가보려고 했지만 가이드가 그곳은 오늘 이 동대사에서 행사를 갖는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해서 포기하고 대불전을 나왔다.
근엄하고 조용해야 할 법당 안이 시끌벅적하여 낯설었다. 절의 법당이라기보다,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대불전을 나와 다시 대불전을 뒤돌아보니 정말 웅장했다.
현판을 써 붙였으면 좋으련만 현판이 없었다. 아무래도 대불전 크기에 걸 맞는 붓이 없어 현판글씨를 쓸 수 없어서 현판을 못하고 있지 않나 싶어졌다.
걸어 나오면서 이곳이 화엄종의 대본산이고, 명치천황의 행재소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오사카로 이동했다. 오사카는 일본의 제2도시로 많은 수로와 840여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수향(水鄕)이라고 할만한 곳이다.
그리고 일본 상인들의 대표라고 할 만큼 상인들의 도시다. 그리고 오사카를 천하의 부엌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오사카 사람들은 천하태령으로, 먹고 노는데 귀신들이고 오사카 사투리가 우스워. 코미디언중에 오사카 출신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도 놀란다.‘ 는 일본의 속언이 있듯이 비록 동경이 일본정치를 주무르는 본산이라고 하지만, 그런 정치 권력자들을 주무르는 것은 오사카 상인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아침인사는 마이도 오오끼니(‘오늘도 거창하게’ 라는 뜻이라고 한다)라고 하며, 상인들끼리 하는 이야기로 모까떼마까(‘돈 좀 벌었냐?’ 라는 뜻으로, 정직을 바탕으로 오늘도 돈을 좀 벌었냐는 뜻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오사카 상인정신을 비유하고 있다고 한다.
오사카 사람들은 도오쿄오 사람들에 대해 강한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어, 도쿄의 요미우리자이언츠 프로야구 팀과 오사카의 한신타이거즈 프로야구 팀이 경기를 할 때면, 온 도시가 야구열기에 휩싸인다고 한다.
그리고 오사카 상인은 신용을 제일의 재산으로 여긴다.
오사카의 음식점이나 주점, 도소매점 심지어는 백화점에 까지 점포나 회사의 문양이 새겨진 무명천인 노렌(暖簾)이라는 것을 입구에 걸어두고 장사를 한다.
노렌은 무명천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점포나 회사의 신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하늘이 두 쪽 나도, 자신이 만든 음식이나 상품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품질을 지킨다는 신용정신이 그 안에 모두 들어있다.
그러므로 오사카를 관광하는 사람은 점포 앞에 걸려있는 노렌을 유심히 살피며 관광할 필요가 있다.
내가 노렌을 보고 유명한 가게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가이드에게 묻자, 마(麻)로 된 노렌이 걸린 집이 그만큼 유명한 집이라고 답했다.
오사카에 도착하여 우선 식사부터 하기로 하고, 8시부터 2시간 동안 각종 쇠고기의 각종 부위를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다는 식당에서 일본소주와 맥주를 마시면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고기 육질이 쫀쫀하고 맛이 있었다. 실컷 배를 채우고, 리가 나카노지마 호텔이라는 곳에 여장을 풀고, 노래방으로 갔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몇 곡씩 부른 후 헤어졌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호텔에 들어가 잠이나 자고 말 수 없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박중윤 님, 박영상 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오사카의 번화가로 데려다 달라고 해서 어딘지 모르지만 번화한 곳에 내렸다.
거리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구경 다니다가, 재일동포가 하는 광광식당이라는 곳에서 소주를 몇 잔하고, 다시 일풍(一風)이라는 일본식 정종 대포 집에서 오뎅을 안주 삼아 따끈한 정종을 마셨다.
재일동포가 하는 식당인 것 같아, 광광식당이라는 곳에 들어갔지만 같은 동포라고 마음을 놓아서인지 모르지만 친절함에 있어서는 일본인 식당보다 많이 떨어졌다.
일풍이라는 일본인 식당의 오뎅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 기품이 있어 보이는 주방장의 모습도 인상에 남았다.
호텔로 들어가니 새벽세시였다.
오사카 성과 코리아 타운
11. 20. 일요일 아침7시에 기상해서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오사카 성을 구경 갔다.
도쿠가와이에야스 및 에도막부의 2대 장군인 그의 아들 히데다다의 군대가 오사카 성을 포위하고 전쟁을 벌인 오사카 1, 2차 전쟁을 하는 와중에 해자를 매웠다가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깊고도 넓은 외(外) 해자와 내(內) 해자가 얼마나 오사카성이 거대하고 견고한 성이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성벽도 일자형으로 쭉 뻗은 것이 아니라 모서리마다 큰 돌을 칼 같이 잘 깍아서 지반부에서 미끄러지 듯 올려쌓은 것이 아름다웠다.
이 멋진 성을 쌓고,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면서 온갖 영화를 누리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죽으면서는 세상살이의 허망함을 알고, ‘이슬로 떨어지고, 이슬로 사라지는 인생이로다. 나니와(浪花)의 영화는 꿈속의 또 꿈’이라는 시를 짓고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척 미워하지만, 일본인들은 서민적인 그를 영웅으로 여기고,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중국을 여행하면 삼국지의 무대가 관광지이듯, 일본을 여행하면서 살펴보니, 곳곳이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들의 발자취와 관련된 관광지였다.
이렇게 된 것은 ‘삼국지’를 쓴 나관중이나, ‘대망(大望)’을 쓴 야마오까 쇼하치(山岡莊八)라는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영화나 소설 등 문화가 미치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기에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를 널리 알리는 좋은 소설작품이나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더욱 절실해 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장대하게 높이 솟구친 천수각(天守閣)을 올려다보며 찬탄하고 있지만, 무심하게도 오사카 성 천수각 위에는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고 있었다.
성곽을 따라 성을 한바퀴 돌면서 대망이라는 소설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수많은 인물들-히데요시의 본처 기다노만도코로, 첩 요도기미, 히데요시의 독자 히데요리, 이시다 미쓰나리,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에 대한 기억이 명멸했다.
잘 정비되어 아름답기 그지없는 오사카 성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산천은 의구하건만 오사카 성을 배경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정말 삶이 뜬구름 같았다.
관광버스를 타고 오사카의 번화가 신사이바시(心濟橋)거리로 가, 즐비한 가게에 잔뜩 쌓인 상품들을 구경하고 다녔다.
마쓰다시키 칠기점(增田漆器店)이 상당히 오랜 칠기점인 것 같아 그곳에 들어가 곱게 옻칠을 한 젓가락과 차 받침대를 구경하다가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내가 읽은 ‘오사카 상인들’이라는 홍하상씨의 책에는 오사카 상인의 말 중에 옷소매 아래의 가격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마지막 협상에서 최대한 싸게 할 수 있는 가격을 뜻한다고 하는 내용이 생각났다.
그리고 가이드의 안내에 의하면, 오사카 상인은 물건값을 깍아 달라면 깍아 줄 수 없는 것처럼 하다가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깍아 줄 수 있는 가격이 얼마인지 궁리를 하는 척, 쇼를 하다가 물건을 깍아 준다고 설명한 것이 생각나, 값을 깍아 달라고 해 봤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노인장 주인은 깍아 주기를 거절하여, 할 수 없이 물건값을 치루자, 먼지를 닦아내고 소장하고 있던 보물을 내어주는 듯, 신주단지 모시듯 정성스럽게 물건을 포장해 주었다.
정성을 다하는 그 자세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을 나와 고서점에 들어가 각종 판화작품들을 구경하고, 에도시대 서민을 위한 나무판화 작품 중에 카즈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의 36가지 절경’ 중 두 점, 안도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에 있는 53개의 역들’ 중 3점을 바탕으로 한 엽서 다섯 장을 샀다.
다시 관광버스에 올라 도톤보리(道頓堀)에 있는 쓰루돈탄이라는 일본식 우동전문점으로 가, 일본 우동으로 점심을 먹었다.
우동그릇들이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세수대야만 하다고 할만했다. 면발도 그렇고, 육수도 독특한 맛이었다.
일본인들은 같은 맛을 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자신이 만든 음식에 강한 자부심을 가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동육수 맛을 어제와 같게 하기 위해 오늘 만들어 판 육수의 마지막 한 그릇을 남겨 보관했다가, 내일 다시 육수를 만들 때 오늘 만들었던 육수와 맛이 같은지 비교한 다음, 육수를 만들어 우동을 팔고, 또 마지막 육수 한 그릇을 남겨 그 다음날 육수를 만들 때 비교해 본다고 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아버지 대(代)에 만들었던 육수 맛과 아들 대(代)에 만들었던 육수 맛이 같을 수밖에 없다고 하니, 그 음식에 쏟는 정성과 그런 정성에서 비롯한 신용은 믿을 만 하지 않겠는가!
어제 먹은 술 때문에 입맛이 당기지 않았지만 억지로 한 그릇을 먹고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서 우동을 사먹으려고 온 사람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상당히 유명한 식당이구나 싶었다.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오사카 이쿠노(生野) 구에 있는 재일동포 코리아 타운을 찾아갔다. 지금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는 약 60여만 명이고, 그중에 20여만 명이 오사카에 산다고 한다.
코리아타운 백제문(百濟門)을 통해서 시장 안으로 들어가자,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 상점을 지키며 장사를 하고 있고, 상점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너무 친숙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도 신라면 등 우리나라 상품이 대부분이었고, 족발이나 김치 등을 팔고 있어, 우리나라 어느 시장에 온 것 같았다.
아무리 한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이 비슷하다고 해도 조금씩 외모가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그중에서 특히 일본사람에 비교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확실히 잘생기고 키도 크다는 것이 느껴졌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그곳 코리아타운 시민단체의 김광민이라는 사무국장이 마중을 나와 우리를 데리고 코리아타운 소학교로 데리고 갔다.
현재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학교의 현황을 설명하면서, 비록 조총련계에서 만든 학교지만 조선대학교가 민족교육과 국어교육에 많은 업적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일본인과 일본국의 탄압과 멸시, 차별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운다는 목표하나로, 대학교로서 인정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일교포가 조선대학교를 보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조선대학교를 비롯한 재일교포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들이 재정적인 면 등에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음을 유념하여, 아낌없는 지원과 격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코리아 타운 이곳저곳을 걸으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태극기 표시와 재일거류민단이라는 표기가 되어 있는 집이 있는가하면 그런 표시가 없는 집도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 사무국장을 따라 사무실에 가고, 나는 인근 찻집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셨다.
오후 2시30분 일본에서 모든 행사를 끝내고, 간사이(關西) 공항으로 출발했다.
간사이 공항은 새로 섬을 하나 만들고 공항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조금씩 지반이 침하되고 있고, 허브공항으로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끝마무리가 제대로 안되어서 수선을 자꾸 하고 있는 인천공항에 비교하여 치밀한 계획과 확실한 투자, 철저한 관리 때문에 개항한지 11년 정도 됐지만, 거의 수선이 없는 간사이공항을 보면 일본인의 특질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짧은 4박5일의 일본관광이 끝났다.
너무 주마간산 격으로 구경한 듯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관광버스 안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한 듯 했다.
다음에 일본에 다시 올 기회가 온다면 한 지역에서 며칠씩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서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받고, 17:15분 발 인천행 대한항공편으로 일본을 출발하여 19:10 귀국했다.
여행을 통해 더욱 가까워진 원우들과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고, 출발할 때처럼 공항버스로 되돌아왔다.
4박5일 휘달려 온 여정이 참으로 꿈속의 또 꿈이려니 싶다.
그러기에 마쓰오 바쇼의‘방랑에 병들어(다비니얀데) 꿈은 마른 들판을(유맹와가레노을) 헤매며 다닌다.(가게마와루)’ 라는 하이쿠(광주지검 양부남 부부장검사의 일본어 실력에 의존했음)에 무릎을 치고, ‘조각구름에 이끌려 방랑생활을 동경해 본다.’ 는 오쿠노 호시미치 여행기 서문이 머리 속을 삼삼하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 2005. 11. 27. 일요일 저녁, 잔뜩 적어온 메모를 대조하면서 여행기 쓰기를 마쳤고, 북한대학원대학교 민족공동체지도자과정의 저술로 써서 제출했는데, 졸업할 때 꽤 괜찮게 썼다고 생각했는지 저술상이라고 기념패를 주더군
첫댓글 오다 노부나가가 저항하는 불교 신자들을 괴멸하기 위해 산 전체를 불살라 버렸다는 대목이 생각나는구려. 그 히에이 산이 어찌 생겼나, 크기는 얼마마 큰지 궁금한데 다음에 일본을 여행할 일이 생기면 자세히 둘러보고 형세와 정황을 여행기에 적어주면 좋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