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형 저 취직 되었어요. 강원도 사북으로 발령이 났거든요. 내일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가야 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전라북도 정읍 시골 촌놈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수많은 집들이 즐비했지만 내 육신 하나 뉘일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땅히 잘 곳이 없던 나는 매형 댁에서 잠시 머물렀다. 배운 것도 없고 습득한 기술도 없었기에 선뜻 나를 채용하겠다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밥만 먹으면 취업을 위해 서울 거리를 누볐다. 전봇대에 적힌 사원모집 종이쪽지를 뜯어서 전화를 해 보면 이미 채용되었다는 소리뿐, 아직 자리가 남아있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구로 공단 거리에 봄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공단을 적시는 빗줄기를 뒤로하고 공단역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남이 읽다 올려놓은 신문 한 장이 선반 위에 올려져있었다. 나는 잽싸게 신문을 내려서 손에 들었다. 정치면이 지나고 사회면이 지나자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써있는 사원모집 광고 하나가 내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원모집, 업무부00명 경리부00명 주,00서관" 한참 신혼생활을 하시는 누님에게 피해가 갈까싶어 나는 일부러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선택한 곳이 바로 강원도 사북 탄광촌이다.
서울을 떠날 때 매형께서 조그만 가방하나와 양복 한 벌을 사주셨다. 철자 틀린 프로스포츠 가방이지만, 나는 그 가방하나에 내 인생을 담고 다시 사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시린 겨울은 혼돈의 세상에서 꽁꽁 얼어붙어, 하늘을 보면 하늘에서 땅을 보면 땅에서, 그렇게 하얀 눈덩이가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내 나이 스무살 때인 1987년 봄, 처음 가 본 탄광촌은 생기가 돌았다. 느릿느릿 기어가던 통일호 열차가 사북역에 정차했을 때 스피커를 울리는 멘트가 겨울을 더 시리게 만들었다.
"승객 여러분! 잠시 후 5분 후면 여러분의 목적지 사북, 사북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미리 여장을 준비하셨다가 열차가 플랫포옴에 완전히 정차한 후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가시는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허스키한 남자 분의 안내 멘트는 쓸쓸한 시골길의 정감 있는 울림으로 느껴지곤 하였다. 지금 열차는 녹음된 여성의 반복되는 멘트에 그 구수함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사북역에 발을 내려놓았다. 보도블록위로 탄가루가 날렸다. 검은 탄가루가 북풍의 냉기를 호흡하여. 메케한 냄새가 났다. 배경을 감상할 여유를 가지고, 내려온 상황이 아니었기에 마음은 착잡하고, 조금은 떨리고, 조금은 서글픈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잠시 먼 산으로 눈길을 던져보았다. 시커멓게 파헤쳐진 산 중턱엔 커다란 기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기계를 건너서 조그만 선이 연결되어있고, 그 선으로 케이블카가 흔들리며 내려왔다. 케이블카 안에는 사람대신 석탄이 손님이다. 먼지 풀풀 날리며 한가득 실린 석탄은 도르래의 규칙적인 파열음에 감전이 된 듯 또르르 소리를 내며 그렇게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사북읍내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현란한 네온사인에는‘묻지마 다방’‘킹카 가라오케’ ‘강원 스탠드바’등등 지역 색 물씬 풍기는 간판으로 춤을 추었고, 얼기설기 엮어진 포장마차에선 시커먼 복장을 한 광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세월을 술잔에 타서 삼키고 있었다.
탄광촌은 크게‘동원탄좌' 와 '강원탄좌’로 나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가장 활발하게 연탄을 사용하던 시기라서 탄광촌은 활기가 있었다.
인생의 쓴잔 단잔 다 맛보고. 결국은 갈곳이 없어 허우적거리다가 밀리고 밀려서 들어온 곳이 이곳 탄광촌이었을 것이다. 광원들의 집은 딱히 집 모양을 갖춘 집이 없었다.
포로 수용소처럼 그렇게 얼기설기 컨테이너가 연결되고, 컨테이너 한 개가 한 가족이 살아가는 집이 되었다. 그 컨테이너가 쭉 연결되어 마을을 이루고 컨테이너조차 지을 땅이 부족해 산을 깎아 계단식 컨테이너를 지어서 아래서 보면 계단식 밭을 연상시키는 구조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을‘새마을 사택’이라 불렀다.
새마을 사택은 하루 3교대로 일을 나갔다.
갑, 을, 병, 반으로 나뉘어져 어떤 집은 한낮이 취침 시간이었고, 어떤 집은 한밤중이 활동하는 시간이 되었다. 책을 팔러 다니다 보면 온 가족이 쿨쿨 자는 집이 있었다.
“실례합니다.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문을 노크하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쉿! 우리 아이 아빠 자요. 나중에 오세요"
이것이 밤에 일을 나가는 사람들의 탄광촌 인사였다. 잠을 자야 밤에 탄광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훗날을 기약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못살기 때문에 더욱 자식은 잘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은 잘 사주는 편이다. 집집마다 커다란 오디오는 기본이며 귀한 29인치 텔레비전도 서너집 건너 한 대씩은 설치되어있었다. 목숨을 담보로 일을 하는 탄광촌이라 월급은 그래도 많고 딱히 워낙 시골이라 돈을 쓸 곳은 그리 많지 않았나 보다.
눈이 펄펄 내리는 4월 어느 날, 시내버스에 책 박스를 싣고 식당에 이야기를 하였다.
“아줌마! 인원이 한 열 명 되는데 점심때 여기서 식사하는 조건으로 책박스 좀 식당 옆에다 놓겠습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허락을 하면 우리는 거기가 하루 사무실이 되어버렸다.
"출발!"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 일행은 제각각 책을 팔러 가정집을 방문하였다. 산꼭대기쯤 올라가 사택 한 채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예방 접종 하는 어린아이 있죠? 유아 교육 상담실에서 나왔습니다.”
우아한 칭찬과, 상큼한 말솜씨, 확실한 매너로 가정에서 일하는 주부나 혹은 집에 계시는 아이 아버지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장장 두시간에 걸친 유아교육에 대한 상담을 한다.
아이 엄마의 눈이 상담 내용에 푹 빠지면 먼저 말을 하신다.
"그렇게 좋은 교육자료예요? 호호 한번보고 싶은데요!"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기 아래에 책이 있거든요. 지금 가지고 와서 설명해 드릴게요!”
나는 책 박스가 있는 식당까지 쏜쌀같이 달려 내려갔다. 하얗게 눈이 쏟아지는 겨울에 모처럼 책을 팔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뛰어내려오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계단식 사택이라서 일반 길보다도 훨씬 미끄럽고 길은 거의가 빙판 길이었다.
“어이쿠 누구 본사람없지?”
나는 낯이 뜨거웠다. 창피해서 벌떡 일어나 옷을 털었다. 옷은 검은 탄가루가 지도를 그려놓고 있었다. 서둘러 이십 여만 원어치의 책 박스를 낑낑 메고 산꼭대기 그 집까지 뛰어올라갔다. 이마에 땀이 비 오듯했다.
“엄마 바로 이 책입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는 반드시 세 살인 지금부터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재미있게 회사에서 주지시킨 그 교육방법을 총 동원해서 설득을 하였다.
그러나 꿈은 야무진데 돈이 없었다. 이젠 아이 엄마가 날 설득하고 있었다.
"나도 이 책 꼭 사서 아이 교육시키고 싶어요. 그런데, 울 아이 아빠가 서울서 장사하다가 쫄딱 망했지 뭐예요. 가산 다 탕진하고, 빛까지 나 앉아서 .할 수 없이 이곳까지 흘러온 걸요. 내 빛만 갚으면 이 책 꼭 살게요 아셨죠?"
눈물 콧물을 범벅이며, 지나온 세월을 하소연하는 아이 엄마에게 이십 여 만원이나 되는 책을 선뜻 사라고 더 이상 나는 설득할 용기가 없었다. 결국, 아이 엄마의 설득에 내가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세요 그럼, 나중에 형편이 피면 그땐 꼭 아이를 위해서 구비하세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무거운 책 박스를 낑낑 메고 다시 터벅터벅 내려왔다. 시커먼 탄광 물이 철철 흐르는 개울가를 지날 때, 그 시리 운 눈물을 수없이 쏟아 붓고 말았던 그 시절, 3일씩은 공칠 때가 많았던 그 아득한 시절이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그로부터 10년 후
사무치게 그리운 나의 첫 직장이 서럽도록 보고싶어서 아내에게 채근을 하였다.
'우리 여행갈래? 나의 첫 직장 생활하던 그 사북에 꼭 한번 가고 싶어 '
‘그래 가자. 그렇게 많이 생각이 나는 거야? 여행하면 나도 좋지 뭐 호호’
철부지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렇게 여행을 떠났다. 10년 만에 가보는 사북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생기발랄하게 도시가 살아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텅 비어버린 상점들의 간판만이 삐딱하게 드러눕고 있었다. 책박스 낑낑 메고 올라가던 그 새마을 사택엔 귀신 울음소리만 들린 채 허물어져 있었다. 사람들 떠나간 자리에 거미줄이 주인이 되었다. 내가 묵었던 그 숙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내가 책을 판매하던 집은 반쯤 허물어져있었다. 추억은 기억너머에서 저토록 질척거리게 심금을 파고드는데, 현실은 또 다른 미래를 만들기 위한 몸부림으로 저렇게 허물어져 가고있었다.
그로부터 또 시간이 흘러 지금은‘강원 랜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카지노가 생겼지만 이젠 다시 가고싶지 않다. 묻어두어야 할 그리움은 묻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지금도 그때 매형께서 사주셨던 철차틀린 프로스포츠 가방이 창고에 있다. 낡고 색바랜 가방이지만 나는 멀리 여행을 떠날 때면 어김없이 그 가방을 가지고 떠난다. 바람이 아픈 날이나 혹은 눈보라 매운 날이라도 어김없이 내 곁에서 나의 의지가 되어준 가방하나, 내 인생을 보자기에 쌀 수만 있다면 아마 이 가방이 딱 그 보자기가 아닌가싶다.
사북을 생각하면 가방이 떠오르고 가방을 생각하면 또 그 시절 첫 직장이던 사북이 떠오른다.
첫댓글 취ㅣ업에 흔적 잘 보고 갑니다..늘 평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