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의 작품과 접하는데 주저없이 행복을 느끼는 이라면 국내에 발간된 킹의 소설중 가장 최신작일(그의 소설창작론에 관한 책이 김영사에서 조만간 발간된다고 하나) 이 작품을 읽으며 킹적 세계의 오롯한 구현에 다시금 기쁨의 탄성을 내지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 작품의 내용을 보면, 결국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내건 이의 모험담이다
(예컨대, <IT>에서 빌리와 그 친구들이 데리를 덮치는 '그것'(it)과 싸우기위해 돌아가고 싶지않은 고향으로 돌아가며 <불면증insomna>의 노인 랠프가 크림슨 대왕과 사투를 벌였듯이).
이 소설에서도 헨리, 존시, 비버, 피트는 그의 어릴 적 친구이자 다운증후군환자였던 더디츠와 함께 지구를 침략한 외계세력-미스터 그레이-에 대항하여 그들의 목숨을 바쳐 지구를 구해낸다.
(소설 속에서 외계인과의 싸움에 회의하는 오언이 헨리에게 "이렇게 싸워서 우리가 뭐가 되는거요?"라고 묻자 헨리는 웃으며 답한다. "영웅이 되는거죠." 또는 다른 대목에서 "자 영웅이 되기위해 떠납시다"라고 말한다).
이 소설의 구성과 얼추 비슷한 <IT>도 그랬듯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내면의 지옥에서 허덕이다가 그들이 직면한 지옥의 물리적 실체 -악마, 외계인, 마왕-와의 싸움을 통해 그들은 구원받는다. 이 지옥의 묘사-내면의 세계든 외면의 고통-와 구원의 과정이 바로 스티븐 킹의 소설의 고갱이이며 그 고갱을 고통스레 맛보며 킹에게 탐닉하게 되는 게 아닐까.
최근 누군가와 핸폰 메세지를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킹의 <내마음의 아틀란티스>(문학세계사)를 다시 읽게 되며 묵은 슬픔이 술렁거리고, 덮어둔 상처가 헤지며 가슴을 압박해와 회복하기 힘들다.
p.s.1 <내마음의 아틀란티스>를 보니 2000년 5월 15일에 읽었음을 알 수 있다(난 내가 읽은 책에다가 내 싸인-예전에 雄이라고 흘려썼고 지금은 한솔로라고 쓴다^^ 혹자는 이런 짓을 보고 유치하다며 비웃기도 하지만 책에 밑줄긋는 거조차 함부로 못하는 나로선 그나마 내가 읽었음을 기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는, 독서일기를 쓰려고 애쓰나...).
군 입대를 두달도 채 안 남겼던 이 시기에 나는 이 책을 읽었고(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고 책에서 언급된 <파리대왕>, 역시 이즈음에 읽었음에 틀림없고), 잡에 글 두 개, 관악교지에 하나, 모학보사에 3주연속으로 글을 썼던 게 기억난다. 글의 함량은 평소보다 더 떨어졌을 테지만 그래도 입대전까지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기특해한다. 그리고 군입대니 뭐니 하며 자기 할일을 미루고 있는 이들이 괜시리 얄미워진다.
p.s.2 잡에 썼던 스티븐킹에 관한 글을 여기에 부기해놓는다.
만리타향 손군에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너와 내가 지긋한 시간을 보낸 바 있는 편집실. 다음주면 - 정확히는 6월 5일이라 말하고 있다 - 책이 나온다며 편집실엔 약간의 흥분과 조바심의 흔적이 여기저기 배어있다. 화이트보드에 기획사 전화번호가 적혀있고 원고료 책정을 촉구하는 총무의 일갈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어느 한 번도 책이 정확한 날짜에 나와 본 적이 없기에 그러려니 믿는 시늉만 할 뿐이다). 밖에선 다행하게도 풍물치는 치들이 없지만 (굳이 김석기적 견성(犬性)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게다) 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민중가요 (긴장감을 억지로 고조시키며 시종일관 힘차게 부르는 법밖에 모르는 남자 목소리, 어줍잖은 바이브레이션 따위는 절대 사양한다고 각오나 한 듯 청승맞게 한 톤으로만 부르는 여자 목소리, 그리고 떼창. 소위 민중가요라 하는 대체의 노래들과 북한 가요와의 차이를 난 구분하지 못한다)를 계속 듣기에 내 미감은 용납하지 못한다. 편집실에서 절대 흘러나와 본 적이 없을 베르디의 '아이다' 씨디나 들으며 내 속물적인 교양의식이나 자랑해볼 셈이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니 편집실 창가에서 언제나 보이는 이름 모를 나무 밑 벤치에서 몇몇 치들이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다. 흉물스레 배꼽을 드러내고 있는 치도 보이지만 그래도 그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은 잠깐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래, 여기는 벌써 여름의 기운이 밀려오고 있다. 내가 여름이면 남들의 따가운 시선에 관계없이 반바지 차림으로 줄창 견뎌왔듯이 오늘도 30℃에 근접한 날씨가 예고되자 여지없이 반바지 차림이다. 영국은 어떤지 모르겠구나. 여권 만들어 보는 게 소원이라고 농담 삼아 떠들어 왔던 내가 타국의 기후 따위를 짐작할 나위가 없구나. 그저 의료보험이란 걸 상기할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번에 네가 <아이즈 와이드 샷> 보고 많이 실망했다고 했었지? 어제, 드디어 나도 보고 말았다. 물론 한국에서는 빌어먹을 검열/심의 문제 때문에 개봉을 못하고 있어 극장에서 본 건 아니지만 말이다. 네 말대로 많이 지루하더구나. 스탠리 큐브릭이 죽지 않았다면 저 채로 넘기지 않았을 성싶더라. 30분 정도 잘라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맘은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싶더군. 너무 길다는 게 아니라 영화가 느슨하다는 말이다. 조금 속상해진 나는 다른 비디오를 하나 빌려와 보기 시작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조지 클루니의 표적>, 원제는 Out of sight지. 미국에서는 98년도에 개봉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비디오로 나온 지 한참 전인 영화인데 벼르다가 어제야 보게 됐어. 한때 영화를 향해 청운의 꿈을 품었던 인간으로서 '그래 저런 영화를 만드는 인간이 있는데 영화 안 하길 다행이지' 하는 맘을 마냥 들게 하는 영화였다. 스톱모션과 플래쉬 백의 능수능란한 구사도 사람 환장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싸구려 감성의 일관이야말로 내 맘에 흠뻑 들었단다. 쿠울(coooool!)한 인물들의 군더더기 없는 행동들과 재기발랄한 대사들은 얼핏 타란티노의 <재키 브라운>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럴만도 한 게 원작자가 같은 사람이다. 엘모어 레너드, 자세히는 모르지만 미국 펄프픽션계에서는 거의 제왕과 같은 존재라고 하더라.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은 헐리우드에서도 꽤나 각광받는 모양이지. 이것들 말고도 베리 소넨필드가 <아담스패밀리> 이후의 부진을 <겟쇼티>를 통해 성공적으로 만회하였고 엘모어 레너드가 소설을 쓰는 족족 영화화 판
권을 따내기 위해 굉장한 경쟁이 붙는다고 하더라. 이 사람의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몇 권 번역이 됐어. 내가 읽은 거로는 고려원에서 나온 세 권이 있지. 고려원이 한때 외국 번역소설로 쏠쏠한 재미를 봐서(시드니 셀던 류의 소설들! 무지하게도 잘 팔렸었지) 외국 소설, 특히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책들을 곧잘 출판했는데 아마 엘모어 레너드의 책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세 권씩이나 번역 됐던 거 같아. 물론 엘모어 레너드의 책은 고려원의 기대를 배신하고 거의 팔리질 않았고 그러다가 마구잡이 출판으로 인해 지금은 부도가 나 겔겔 거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대개의 출판사들은 막연한 정보를 통해 입수한 외국작품을 두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출판을 하게 마련이야. 대체적으로 이 '혹시나?'가 '어머나!'로 바뀌는 경우란 콘돔 두겹 낄 때의 임신 가능성보다 조금 낮고 세겹의 임신 가능성 보다 조금 높을 꺼야(그냥 해본 소리다. 아무튼 아주 드문 경우라는 거지. 그렇다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취합하고 시장조사를 정밀히 한 뒤 출판을 한다고 한들 대박이 터질 가능성 역시 그리 높지 않겠지). 물론, 그 희박한 가능성에도 한 번의 적중이 가져올 막대한 성공은 막말로 갈퀴로 돈을 긁어모으게 된다니 출판사들은 포기를 못하고 매달리는 것일 테고(어느 출판사가 한 권의 메가히트로 빌딩 지었다는 소문은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에 대한 소문만큼이나 질기고도 유혹적이지. 하긴, 모 출판사는 격월간지로 돈 벌어 조선일보 사옥을 인수하겠노라고 까지 하고 있는데-_-;).
어쩌다가 경마(競馬)판 같은 출판사의 현황까지 말이 흐르게 됐나? 아, 엘모어 레너드. 영화 <재키 브라운>을 보면 어디까지가 타란티노적인 것인지 애매할 정도로 소설 그 자체에 아주 충실하게 영화화 해놓았다 (타란티노는 자신이 엘모어 레너드의 팬임을 공공연히 밝혀왔었어). 그럴 만도 한 게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은 한 편의 각본처럼 많은 대사들이 기관총 쏘듯이 난사 (등장인물 모두 다가 천부적인 말재주꾼인 듯 대사를 쏟아 붓는다) 되고 복잡한 내러티브 없이 일면적으로 사건이 진행됨에도 개별적인 사건들이 하나같이 후추 향 쏘듯이 자극적으로 다루어져 흥미롭게 금새 읽힌다. '영화 같은 소설'이란 게 이른 바 신세대 문학을 가리킬 때 흔히 표현되어 왔지만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은 영화 같다기 보다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빵 효모 같은 (언젠가는 맛있는 빵이 되기에 부풀어오를) 매력이 넘치지. 사실 그런 면으로 따지자면 스티븐 킹이 더한 듯해. 이 양반 작품은 영화로든 티비로든 그 대부분의 작품들이 다 극화되었으니까 말야.
그래. 사실은 내가 요새 들어 스티븐 킹의 소설에 굉장히 매료되어 있다. 아마 전에도 한 번 본 적 있을 거야. 작년 중순쯤 내가 스티븐 킹의 <스탠 바이 미 Stand by me>를 읽고 넋나간 표정 지었던 거. <스탠 바이 미>는 영화로 더 유명하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유명한 로브 라이너 감독(이 사람은 스티븐 킹과 인연이 많어. 캐시 베이츠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선사한 <미저리>도 연출했고,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영화사 이름이 스티븐 킹의 고향인 '캐슬락'이야)이 연출하고 어릴 적 리버 피닉스가 등장했던 그 영화. 나도 아주 우연히 봤어. 집에서 뒹굴대고 있는데 유선방송에서 나오고 있는 거야. 영화를 보고 있는 내내 입안에 자두 씨, 하나 물고 있는 기분이었다면 설명이 될까. 미묘한 시큼한 향이 입안에 침을 고이게 만들면서도 씨앗의 성긴 표면에 입천장이 자꾸만 까칠해지는 느낌. 네 명의 짓궂고 장난끼 넘치는 소년들이 유치한 공명심 (행방불명된 소년의 시체를 찾아내서 신문에 나오자!)으로 시작된 1박 2일동안의 모험. 유쾌한 흥분으로 출발했지만 허기에 지치고 진탕길에 빠지며 밤의 어두움이 자아내는 공포에 떨며 그들의 의도와는 자못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지. 그리고 지친 발걸음 끝에 소년의 시체와 조우한 순간, 그들은 신문 속의 영웅이 아니라 일생에 있어 가장 극명한 흑백사진의 피사체가 되었음을 느끼게 돼. 소년들은 쓸쓸히 발걸음을 옮기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아마 다시는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될 일이 없지 않을까 하는 처연한 예감을 느끼며. 소설에서는 영화 속에서 미처 표현되지 못한 소년들의 여린 상처들을 읽을 수 있어. 그 상처를 읽는다는 것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나의 어린 시절의 씁쓸한 기억과 다시 만나는 듯한 고통과 유사한 거 같애.
원래 이 <스탠 바이 미>는 <defferent season>이라고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각각의 단제로 나뉜 단편집에 실려있어. 그 중 봄 편은 영화로 역시 유명한 <쇼생크 탈출>의 원작이야.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보니까 재미있는 추측과 평을 하더라. 원작을 읽으면 <쇼생크 탈출> 속의 주인공은 사실은 그 부인을 죽인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야. 그 근거로 자신의 소년원 경험을 들어. 범죄를 저지른 놈 치고 자신의 유죄라고 하는 놈이 없는 법이며, 치밀한 탈옥 계획 자체가 자신의 범죄사실에 대한 도피나 마찬가지라는 데서 말야. 그럴싸하지? 이 단편집이 스티븐 킹이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썼다는 걸 알고 우리나라 작가들은 모두 넥타이 공장에 가야한다(즉, 목매달고 죽으라는 거지)고 말해. 마냥 동조할 수만은 없는 발언이지만 마스터베이션과 같은 치졸한 자기 토로로 가득찬 수많은 국내 단편 따위에 견줄 바가 아니지.
<스탠 바이 미>가 단편을 통해 소년기의 처연한 상처를 표출했다면 <잇 It>(나는 <신들의 도시>라는 괴상한 제목의 책으로 읽었어)은 장편으로 그 주제를 심화하여 다뤄. 데리(Derry)라는 (가상의) 도시에서는 25년을 주기로 끔찍한 살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 그것도 소년, 소녀를 대상으로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사건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시간이 흐르면 그 사건들을 가위로 오려낸 듯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거야. 말더듬이 빌, 뚱땡이 벤, 유태소년 스탠리, 천식환자 에디, 깜둥이 마이클, 안경쟁이 리처드, 이 다섯 소년과 한 명의 소녀, 멍투성이 비벌리가 그 주기적인 학살의 시기에 악의 근원과 만나 싸우고, 25년 후 되돌아온 악과 싸우기 위해 데리로 돌아오는 이야기. 그들은 성인이 되어 잊어버렸던(또는 억지로 지워버렸던) 소년시절의 고통(별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각자 무언가 결락 됐거나 일반적이지 못한 상처를 지니고 있지)과 다시 만나게 돼. 그 고통은 그저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실재로서 그들에게 다가왔었고 성인이 되서도 그 물리적 실재로서의 악들은 다시 부활하여 다가와. 이렇게 거칠게 축약해서 말하고 나니까 싸구려 오컬트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또 안 그럴 이유도 없지. 스티븐 킹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그러하니까) 읽는 내게 있어서는 다른 생각이 들었어. 억지로 명제로 표현하자면 <인간에게는 모두 각자의 지옥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할까. 흔히 말하는 성장통이란 게 사람에 따라 감기처럼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말기 암의 고통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잖아? 그 때의 병치레는 건 모든 이의 몸 어딘가에 생채기 자국을 남기게 마련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잇 It>은 많은 생각 꺼리를 안겨줬어.
이렇게 시작된 스티븐 킹에 대한 탐닉은 제법의 책들을 읽게 만들었지. 최근에 영화화하여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까지 된 <그린 마일 Green Mile> (영화는 아직 못 봤다. 책을 먼저 읽고 봐야지 했는데, 벌써 극장에서 내려졌더구나), 제목이 가물가물한 이상한 단편집 (파피루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기억되는데 쓸데없는 거만 기억난다. 번역자가 이경덕이라는 치인데 이 사람은 같은 출판사에서 멋대로 편집한 하루키의 단편도 책도 번역한 적 있거든? 결국 이 스티븐 킹의 단편집은 중역한 것이라는 거겠지), 부도난 고려원에서 권 당 2000원에 판매하고 있던 <불면증> (한 노인이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인간의 생을 관장하는 괴물과 만나게 된다는 내용인데 노인들의 로맨스는 스티븐 킹이 즐겨 사용하는 소재인 듯해) 출판물로는 가장 최근작인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Hearts in atlantis> (스티븐 킹이 교통사고를 중상을 입고 작품활동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들게 했는데 지난 3월 인터넷 온라인상으로만 <총알 올라타기>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건재를 알렸어. 이 작품이 인터넷에 뜨자마자 약 2백만 명이 접속해서 서버가 다운됐다고 하더라. 대단하지?), 그리고 지금 한참 읽고 있는 <로즈 매더 Rose madder> (지금 프롤로그만 읽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에 벅차. 남편에게 끔찍하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묘사해 놨는데, 어휴, 사타구니가 스물스물 저려오더라니까)까지. 이중에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의 뒤를 보면 어느 미국 평론가가 다음과 같이 평해 놨더라. "감동, 기지, 지성, 그리고 도덕적 성찰이 있는 이 작품은 바로 스티븐 킹의 최고의 작품이다." 좀 호들갑스런 평이긴 한데 실제로 읽어보면 그럴만도 해. 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모두가 긴밀히 연결이 돼 있어. 특히 상권 전체에 실려 있는 <노란 코트를 입은 험악한 사나이들>의 경우는 앞서 내가 말한 <스탠 바이 미>나 <잇>의 주제를 정말 가슴 아련하게, 아름답게 다루어내. 감동의 진폭으로 따지자면 내게 있어 최고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 거의 맞먹는 정도야 (이 정도 호들갑이면 어느 정도인지 너라면 충분히 짐작 가능하지?).
플로베르 (알지? <마담 보봐리>의 작가)가 그런 말을 했다지? "하나의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에 있어 가장 적합한, 단 하나의 단어가 있기 마련이다"라고. 이 테제를 실천하기 위해 플로베르는 퇴고의 퇴고를 거듭했다고 하는데 스티븐 킹의 소설은 이 명제를 인스턴트화 하면 딱 들어 맞는 경우라는 생각이 들어. 사실 극히 미국적인 표현들이 많아서 이걸 내가 검증해낼 수 없지만 그의 소설을 읽다가 어떤 문장을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짜릿 다가오는 경우가 있어서 그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비행기 안에서 승객들의 손에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 있기 마련이다 라는 말로 스티븐 킹의 엄청난 대중성을 설명하기도 하지. 그만큼 싸구려 작품이라는 폄하도 품어 있을 테고. 뭐, 싸구려면 어때? 내가 가장 즐겨하는 사용하는 성씨가 부박(浮薄)아니겠어? 심성이 가볍고 경박한 기웅에게는 스티븐 킹 정도면 지나치게 훌륭할 따름이야.
너에게 쓰는 편지가 어쩌다보니 초등학생의 독서 감상문이 돼 버렸구나 (부분 줄거리 서술, 그리고는 "저는 이 부분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또는 "참 슬펐습니다 ng" 식의). 다음 편지는 언젠가 예고한대로 나의 풍요롭고도 다채로운 성 생활에 대해 쓸 수 있으면 좋을려만, 난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군대가는 끔찍한 그날까지 편지 자주 하마. 글마다 하는 말이지만 이국에서 아픈 일만큼 서러운 일이 없다고 하더라. 건강, 건승 해라.
2000년 5월의 마지막날,
군대가기 32일전, 고문 편집실에서 쓰다가 정동 사무실에서 기웅.
p.s. 편집실 선배 중 잘난체 왕, 안모씨가 신세대 마크라고 했다가 쪽팔림을 당했던 피스마크 있지? 스티븐 킹의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표제작을 보니까 그 유래가 나오더라. 그대로 인용해 볼께.
네이트가 일어서 맨발의 뒤꿈치를 모아 붙였다. 그리고 왼팔을 천장을 향해서 똑바로 펴들고 오른팔은 바닥으로 펴서 수직선을 그렸다. "이건 N자야." 다음에 네이트는 두 팔을 몸으로부터 45도 각도로 벌려 펼쳤다. 그 두 가지를 겹치면 스토크가 그의 낡은 더플 코트의 등에다가 검은 잉크로 그려놓은 그 그림이 된다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이건 D자야." 스킵이 말했다. "N-D. 그게 뭐지?" "핵무장 해체(Nuclear Disarmament)의 약자야. 버트란드 러셀이 50년대에 고안 것이래." 그가 공책에다가 그 기호를 그렸다. "스토크는 이걸 평화 기호라고 불렀어." "멋있다." 스킵이 말했다. 네이트가 미소를 짓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았다. "동감이야. 정말 딱 들어맞는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