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메의 산
평창-영월 붉은봉(724.8m)
붉은 바위 많은 깡촌 봉우리
정보화 시대에도 암하노불(岩下老佛)의 깡촌 깊숙이 숨어 이름조차 세상에 들어 내놓기 꺼려했던 붉은봉.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평창군 미탄면 경계에 솟은 그를 찾아가는 여정은 시선 김병연이 금강산을 보며 읊조린 '송송백백암암회(松松栢栢岩岩廻)하니 수수산산처처기(水水山山處處奇)하도다'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미탄면 창리에서도 택시요금 4,000원을 내고 더 들어가야 겨우 가르마 같은 하늘이 빠꼼한 한탄리 버스정류소다(좌표 N 37 18 54.7 E 128 31 06.4 해발 277m).
정류소 삼거리를 기점으로 태백에서 온 이서규, 박흥신, 이영숙, 권영희씨는 남쪽으로 깊게 패인 재치마을로 향한다. 물골로 들어서는 길이다. 바위가 튀어나온 한갓진 모퉁이를 돌아드니 농가 한 채가 아직 새벽잠을 자고 있다. 밤새 울었을 속독새 소리를 들으며 협곡을 돌아나가니 오른편 멀찌감치 농가가 보인다. 이 계곡에는 띄엄띄엄 4채의 농가들이 보인다.
한동안 무인지경을 걷는다. 길가의 은사시나무잎이 미풍에 뒤척이고 까투리를 찾는 장끼의 신호음이 가깝게 들린다. 검은등뻐꾸기도 덩달아 "홀딱벗고, 홀딱벗고" 하는 소리를 낸다. 고즈넉한 선경에 발걸음도 가볍다. 정류소를 떠난지 1시간쯤에 분지 속 듬성듬성 지붕이 보이는 한탄리 4반 재치 마을 입구 삼거리다(좌표 N 37 17 49.3 E 128 30 27.0 해발 456m).
숲에 쌓인 폐교된 미탄초교 한탄분교장에서 풍금소리에 마춰 합창하는 아이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풍정이다. 1969년 3월1일 기화초등학교 한탄분실로 인가 받아 개교하여 150명을 배출하고 24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1994년 3월1일 폐교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대처로 보따리를 싸고 현재 재치마을에는 5가구 15명 정도가 살고 있다.
삼거리에서 낡은 담배건조장 흙집이 보이는 오른쪽 마을길로 올라간다. 산행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오지산행 때는 마을을 지날 때 동네 사람들과 인사도 하며 안면도 트고, 궁금증도 풀어주고, 옛이야기도 듣고 하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습관이 생겼다.
밭일을 하고 있던 이건재(74세)씨 부부에게 감자골재를 물으니 손으로 방향을 짚으며 "이 길로 쭉 가다가 외딴집 앞에서 도랑을 따라 가면 돼요. 그리로 가다 재를 넘으면 영월 문산리 감자골이야" 라고 답한다. 재치골 도랑 끝으로 감자골재가 오목하게 보인다. 마을 중앙을 가르는 경운기 길에는 작약, 오갈피나무, 음나무, 드릅나무, 복사나무 등과 냉이, 흰민들레가 피었다. 서너 채의 농가를 지나 물도 없는 재치골 도랑을 건너니 마지막 농가다.
도랑으로 길이 났다. 도랑으로 가지 않고 고추밭머리를 기고 감자골재 오르다 밭일을 하고 있는 주민에게 또 길을 묻는다. "감자골재 왼쪽 봉 말입니까? 그러 붉은봉이라 하지요. 거기 가면 붉은 바위가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불러요. 우리집은요 아래 바로 저기에요. 지붕이 살짝 보이잖아요" 재치골 마지막 농가 주인 심윤재(63세)씨다. 재치마을 지명 유래를 물었더니 조리 있게 설명한다.
"일제 때 미탄면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저기 보이는 장자터에 살았다고 하여 재물 재(財)에 산우둑할 치(峙) 자를 써 여기를 재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저 집 뒤에 마차리로 넘어가는 박달재가 있겠네요?"
"네 맞아요. 거기에 당이 있습니다. 장자터는 음부를 닮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때 우물이 있습니다." 배낭을 열어 가져온 술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심윤재씨 말대로 잠자골재로 오르는 길에는 붉은봉의 이름을 낳게 한 붉은색 돌들이 널브러져 있다. 밭이 끝나고 길은 왼편 산허리를 끼고 이어진다. 분꽃나무 향이 콧등에 앉고 각시붓꽃, 미나리아재비, 줄딸기, 쥐오줌풀, 지느러미엉겅퀴, 애기똥풀들이 꽃을 한껏 피운 꽃길이다.
일본이깔나무, 소나무, 굴참나무들이 있는 감자골재 나무그늘 아래 소복한 김의털을 깔고 앉아 수통을 꺼내는데 청아한 목소리로 검은등뻐꾸기가 덥다고 옷을 벗으란다. 아줌씨들 있는데서... 그놈 참 "홀딱벗고 홀딱벗어"
감자골재에서 왼편(동) 능선으로 올라선다. 어느 산이던 능선에서 희미한 길이 있게 마련인데 여기는 초장부터 아예 길도 없는 된비알이다. 게다가 신갈나무와 섞여 있는 가시달린 나무를 움켜잡기도 한다. 바위턱을 오를 때는 호보법을 구사하며 땀을 쏟기를 40여분에 군사호 깊게 파이고 철쭉나무에 둘러싸인 삼각점(402 복구, 77.6 건설부)이 있는 붉은봉 정상이다.
철쭉나무 사이로 겨우 뚫린 북쪽 조망은 재치산 뒤로 불끈 솟은 솥뚜껑산이 하늘을 찌른다. 동남쪽은 첩첩산릉 아래 동강이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어림짐작 뿐이다. "붕붕 붕붕" 벙어리 뻐꾸기 권주가에 정상주 한잔...
하산은 평창군과 영월군 경계선을 따라 동으로 세번째 봉에서 북으로 방향을 잡아 고마루마을에 이른 다음, 재치마을에 닿는 원점회귀코스로 하산할 계획이다. 정상에서 북으로 잠시 능선을 따르니 능선은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10분쯤에 안부에 닿았다. 자작나무가 조림되어 있고 고마루 방향으로 희미한 길이 보인다. 그대로 직진한다. 소나무를 머리에 잔뜩 꽂은 둥글게 생긴 봉을 목표로 삼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 약 15분쯤에 소나무가 많은 묘잔등처럼 생긴 봉우리다.
다시 내려가 또 한번 올라선다. 정상에서 3번째쯤 되는 봉우리다. 이쯤에서 군경계를 버리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형도를 체크하며 고마루마을 쪽으로 향한다. 묘잔등 같이 생긴 봉에서 25분쯤 거리다. 사방이 돌리네 지형이라 능선도 자기 마음대로다. 나무들은 빼곡히 하늘을 가렸고 길도 없다. 고마루마을 방향으로 지도 정치를 확실히 하고 작은 능선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간다. 돌리네 웅덩이로 내려서면 다시 올라서야 하기 때문이다. 사방이 음나무다. 음나무 가시를 조심하며 약 1시간15분 소요에 미로를 빠져 내려서니 분지 속에 자리잡은 고마루마을이다.
왼편으로 이어진 마을길을 따르니 얄궂은 푯말이 있다. '평창군 미탄면 한탄리 161, 163번지 면적 10,731㎥ 동강 유역은 희귀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여 생태적 가치가 높고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생태보전지역입니다. 이곳은 동강 생태계보전지역 보존을 위하여 국가에서 매수한 토지로 이 지역의 토지를 경작하고자 하는 자(취득 당시 토지소유자 또는 영농행위자)는 사전에 원주지방 환경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허가 없이 경작 등에 사용할 경우 국유재산법 제58조에 의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2005 11 원주지방 환경 청장'
마을 사람들은 농사 붙여 먹을 땅뙤기 없이 거의 다 마을을 떠나고 이 넓은 땅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서쪽 경운기 길을 따라 고마루마을을 가로질러 분지를 벗어나 구불구불 15분쯤 올라서니 '한탄지 27R73' 전봇대가 서있다. 재치마을로 가는 고개마루다(좌표 N 37 18 04.0 E 128 31 11.6 해발 755m).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옛길, 수렛길로 약 15분쯤 내려가니 양쪽 땅이 꺼진 사이를 지나는 오른쪽 땅속에 배꽃이 하얗게 핀 원두막에 개다리 소반 하나 달랑 앉아 있다.
무릎 관절을 혹사시키는 내리막길, 빙글빙글 돌아가는 길, 은사시나무 가로수길, 고갯마루에서 갈지자를 쓰며 약 30분을 내려가니 재치마을의 뻐꾸기 소리를 뒤로 하고 터덜터덜 재치천을 50여분 걸려 빠져나오니 한탄리 버스정류소다. 가르마 같은 하늘에 붉은 구름이 걸려 있다.
*산행길잡이
한탄버스정류소-(1시간)-재치마을-(30분)-감자골재-(40분)-붉은봉-(2시간)-고마루-(45분)-재치마을-(50분)-한탄버스정류소
깡촌 깊숙이 숨은 산, 붉은봉(724.8m)이다. 산이름은 붉은 바위가 많다 해서 연유한다. 산 전체가 땅이 꺼진 돌리네 지형이기 때문에 독도에 무척 신경을 써야 하며, 두메의 산 특유의 개척산행은 충분히 각오해야 한다. 땅이 함몰된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재치마을까지 또는 고마루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다. 들머리인 버스정류소부터 걷는다면 두메의 산 참맛을 느낄 것이다.
*교통
미탄에서 정선 방면 42번 국도로 2.6km 지점에, 정선에서는 미탄 방면으로 42번 국도 따라 비행재터늘 지나 17.6km 지점에 동강(문희, 기화, 마하)으로 가는 이정표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동강 방향으로 가면 한탄리버스정류소가 나온다. 미탄에서 마하리 왕복하는 버스를 이용해 한탄리에서 하차한다. 미탄면 창리를 출발해 마하리로 갔다가 다시 창리로 나오는 버스는 1일 4회(06:00, 10:20, 14:40, 19:00) 운행한다.
영월버스터미널(033-374-1231~3)에서 미탄행 버스는 1일 11회(10:15~22:00) 운행한다. 평창버스터미널(332-2407)에서 미탄행 버스는 1일 4회(06:30, 10:00, 15:30, 18:20) 운행한다.
미탄리에서 한탄리까지 택시로 이동하면 4,000원 정도의 요금이 나온다. 미탄-마하 10,000원, 미탄-재치 8,000원, 미탄-기화 7,000원. 미탄콜택시 김정진씨 017-377-9899.
*잘 데와 먹을 데
재치마을 심윤재씨댁(332-5515, 010-6436-5100), 한탄버스정류소 앞 수하빌민박(334-2176), 평창시장의 토속음식이 저렴하고택배주문 가능한 가고파분식(333-5841, 010-2292-5841)은 메밀부침과 전병, 메밀칼국수, 만둣국, 올챙이국수 등이 일품이다.
미탄의 순흥여관(332-3964), 막국수숯불갈비(332-3738), 현대식육점(332-3961), 금광장여관(332-1959), 영춘민박가든(334-9934), 미탄휴게소식당민박(333-3229).
*볼거리
동강 어라연계곡 영월읍에서 북동쪽으로 12km 떨어진 동강의 만지나루터 위쪽에 있다. 영월이 자랑하는 경승지로, 맑은 물과 주변의 경치가 수려하다. 예로부터 물고기가 많아 강물 속에 뛰노는 물고기들의 비늘이 비단같이 빛난다 하여 어라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어름치가 서식하며, 조선시대 단종의 슬픈 사연이 담긴 '낙화암 전설' 및 '어라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글쓴이:김부래 태백주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