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긴 한데요. 그 작업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생각합니다. 제3세계문학을 얘기할 때 아직까지는 신선함의 프리미엄이 많이 작용하고 있지만 그것이 축적되면 그런 프리미엄은 없어질 텐데, 처음 소개할 때 실제로 그 나라의 최고 작품을 선정해서 소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봐요. 예를 들면 말레이시아의 문학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 우연히 읽게 된 작품이 문학적인 성취도 면에서 별 것 아니다 싶으면 '말레이시아의 작품은 아무래도 아니구나, 역시 서양 것이 나아', 이렇게 손쉽게 단정지을 수 있으니까요.
설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우리가 저번에 좌담준비로 두 번째 모였을 때 최선생님이 그런 지적을 하셨죠? 우리나라의 어떤 소설이 가령 불어로 소개됐을 때 그게 작품의 수준은 별개라 치더라도 번역이 잘못돼서 작품의 맛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라고 하면 그 때문에 불란서 독자들은 한국소설에서 영영 멀어지고 만다는 거죠. 그러니, 가령 말레이시아 소설을 새로 소개한다고 할 때도 우리나름의 기준을 세워 제대로 평가해서 정말 좋은 물건을 좋은 물건을 좋은 번역으로 소개하지 않으면 그 나라 작가들에 대한 대접이 아니거든요. 우리도 딴 나라에서 똑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는 거죠.
성 그건 사실 문학연구자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죠.
설 그렇죠. 이건 좀 다른 예지만 미국흑인소설만 해도 랄프 엘리슨의『보이지 않는 인간』같은 작품이 일찍이 번역·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미국쪽에서 많이 읽히고 높이 평가받는 작품이지만, 사실 미극흑인의 인종적 체험을 다분히 실존적인 인간존재의 부조리라고 할까, 이런 차원으로 추상화해버리는 경향이 커서 흑인들 자신의 체험을 실감있고 절절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같은 흑인작가인 리처드 라이트의『토박이』에 비해 떨이지는 면이 많죠. 연구자들이 그런 작품을 섬세히 평가해서 소개하는 작업을 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참고로『토박이』는 창비에서 나왔는데 드물게 만나는 꼼꼼한 번역인데다 해설도 훌륭하더군요.
최 이런저런 이유로 수용과정에서 배제된 영역의 문학들만큼이나 문학적으로 난해하도고 평가되는 작품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도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조이스를 누가 골치 아파서 읽겠어요? 그런가 하면 많은 독자들을 획득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도 있습니다. 번역하기도 어렵고 상업적으로도 전망이 없으며, 여러 전공자들을 귀찮게 하는 작가의 작품들이 생소한 기법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배제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역시 부당한 것이지요.
설 사실 조이스의『율리시즈』같은 경우 저는 시험 필독서 목록에 들어있으니까 잔뜩 각주 붙은 것을 가지고 읽있는데, 읽고 나면 그 나름대로 재미는 있어요.
최 그건 선생님 전공인까 그렇죠
설 그렇죠. 그런데 시험 아니었다면 과연 제가 그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그 작품을 읽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자격미달인가 하는 반성 아닌 반성을 해본 적도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한번은 토론토대학에서 영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인 교수에게 물어봤어요. 『율리시즈』어떠냐고요. 그랬더니 그 양반 왈, 이런저런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했ㅆ더라면 더 생산적이었을 것 같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무릎을 치면서, 당신도 영문학자로서 자격미달인 모양이다, 그랬죠. 그렇긴 하지만 저도 그런 쪽에 관심있는 전공자들이 있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다시 얘기를 정리해 보지요. 서양사람들의 자기나라 작품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문제가 있다는 데에 일단 동의를 한 상태이니까, 요컨대 서양소설들을 우리의 처지에서 어떻게 해석해내고 소개할 것인가 하는 얘기로 돌아와서, 좀 어렵긴 하겠지만 대강의 방향 정도는 거론해볼 수 있지 않나 싶은데---
성 아까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지만 일반독자들이 서양소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문제는 서양에서 서양소설에 대한 비평적인 논의까지 따라와서 수용되는 게 아니라 일정하게 왜곡되면서 부당한 보편성의 논리로 수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소설이 지니는 전파력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그것이 우리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면, 작품을 낳은 현실에 대해서 그 작품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응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당대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일단 살려놓고 그 안에서 그 작품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에 대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논의를 추상적인 보편성의 논리로 차단해버리면 그 작품을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도 추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 저도 성선생님과 같은 견해입니다. 한 작품을 당대적인 맥락 속에서 보아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품의 현대적인 재해석은 분리해서 다루어주어야지요. 맟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그 작품이 태어나던 당시의 맥락과 지금의 수용 맥락이 같을 수는ㄴ 없거든요.
김 반복되는 얘깁니다만, 서구의 문학을 우리가 수용할 때는 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작품을 그 시대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어떤작품이 1930년대에 산출되었다고 한다면 그 작품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그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설 그러니까 한 작품을 배태한 역사적 조건, 지금 현재 서양사람들 사이에서 그 작품이 읽히는 맥락, 그 다음에 우리와의 연관, 이런 것들이 가능한한 복합적으로 고려돼야겠다는 말씀이죠? 또 한가지, 그 작품들을 우리말로 제대로 잘 옮기는 번역의 문제도 올바른 소개의 필수조건일 텐데요, 실제로 어떻습니까?
미흡한 번역의 실상, 그 해결책은
최 이번 좌담을 위해 번역 작품들을 보면서 번역에서의 언어수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각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언어습관이나 서술의 어조를 우리말로 재창조해주는 노력이 결여된 것을 보았습니다. 명령문을 평서문으로 바꾼다거나 흔한 오역의 예들도 많이 지적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디킨즈의 유머나 발자끄의 씨니시즘이 번역에서는 묻혀 버려 독서의 재미를 감소하는 측면이 있었구요.『고리오 영감』은 제목부터 그런데, 이름 앞에 아버지라는 뜻의 '뻬르'를 붙일 때 들어나는 촌놈기질이 있는 조금은 멍청한 가장이라는, 오히려 '아범'이나 '아재비' 정도로 번역될만한 비아냥거리는 문화적 어감이 '영감'에서는 감소되어 있지요. 그 다음으로 심각한 것은 텍스트의 확정 문제에요. 역시『고리오 영감』의 경우 어떤 번역판은 원문과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도 있어요. 작품 서두의 인용문이 없어지거나 독자의 편의를 위해 가제를 붙여 몇 개의 부로 나눈다거나 더욱이 채택한 워 본이 밝혀져 있지 않아, 연재본을 묶은 단행본인지, 가필과 형식이 조금 변모한 『인간희극』에 포함된 판본인지 알 수가 없어 일반독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연구자료로 참조하기에 부적당했습니다.
김 텍스트를 확정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최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런 뒤에야 당연히 번역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그 텍스트를 번역해야 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번역의 관행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생들이 학비조달을 위해 혹은 스승의 재촉을 뿌리치지 못해 번역하거나 교수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래서는 좋은 번역이 나올 수가 없지요. 이제는 번역 전문가의 육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번역 전문가는 외국어 해독능력도 많아야 하지만 작품해석능력도 많아야 합니다. 물론 이거야말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만큼 외국어 해독능력이 많은 사람의 공동번역이 적극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쉽습니다. 후자에는 작품의 사회적·문화적 ㅁ맥락에 대한 통찰력이 강한 이가 의당 포함되어야 하겠지요.
성 사실 우리나라에서 번역이 문학 혹은 문학 연구 풍토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정도로 인식되고 있잖아요? 고급인력이 거기에 뛰어들려고 하지 않고, 아무도 거기에 투자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봐요. 또 국경을 넘어 이해하기 힘든 작품도 있고 혼자서는 처리하기 힘든 작업들이 있는데, 그런 고차원적인 수준뿐만 아니라 최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아주 낮은 차원에서도 문제가 많죠. 조금만 진지하게 점검하면 가능한 것도 제대로 안 되거든요. 이런저런 풍토가 서양고전에 대한 인상을 아예 망쳐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대개의 독자들이 어차피 한글로 번역한 고전을 읽게 되는데, 다들 훌륭하닥고 하니까 읽는 것이지 사실 명성만큼 실감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나 싶어요.
설 중요한 말씀들을 해 주셨는데, 지적된 문제들의 해결방안도 나와야겠죠? 세계문학전집이 어느 출판상에서 나왔다고 하면 그 출판사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새끼를 쳐서 새로 출판사를 차리면서 그걸 거의 베껴서 새로 내놓는다든지 하는 문제들은 현재의 여건에서는 해결하기 힘들지 않나 싶어요. 지적 소유권 문제와 관련해서 서양 고전소설들의 경우도 임의로 번역출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닥치게 되면 억지로라도 그런 관행이 고쳐질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조건에서도 가능한 작업들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김태현선생이 공동번역 얘길했는데, 대개 공동번역이라고 하면 한 작품을 둘, 셋으로 나눠서 번역하는 게 대부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번역이 될 수 없죠. 작품 전체를 두 사람이 다 번역한다는 자세로 하면서 한 사람이 번역을 하고 그 번역된 것을 딴 사람이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든가,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창비의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데 결국 원고료 문제 번역료 문제가 걸리게 되죠. 그렇다고 대다수 출판사가 번역료를 이중을로 지급할 처지는 아니구요. 장기적으로는 번역 출판사의 관행을 전면적으로 개선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겠지만, 관행이 바뀌기까지손놓고 기다리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러니 여기 모이신 분들처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번역을 해나갈 필요가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그걸 개개인 연구자들이나 번역자들에게 맡겨서는 제대로 되기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 가진 사람들을 어느정도 장기적인 기획 아래 조직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봅니다.
김 좋은 의견입니다. 번역과 통역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시행하는 기관을 설립하고 육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독려하고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야겠구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정적 지원이 필수적이겠지요.
설 재정지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물론 모색해야겠지만, 그 재정지원이란 게 아시다시피 요즘처럼 인문 영역이 홀대받는 처지에서 그냥 덥썩 주어지길 기대하긴 어렵지 않아요? 관심있는 사람들이 찬찬히 조직적으로 작업을 해나가고, 또 그러는 가운데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재정지원의 길도 뚫리고 그렇지 않겠어요?
최 제가 듣기로는 박사학위를 끝내고 온 사람들 중에도 번역에서 출구를 찾다가 영세출판사들의 악습과 횡포로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아직 미미한 수준이지만 조금씩 전문 번역가들의 연대가 형성되고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부 차원에서 교수의 번역업적 인정제의 기준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도 번역의 질 향상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지요.
설 네,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럼, 번역 문제는 그 정도로 하고 작품 논의로 넘어가야겠는데요. 사실, 다루기로 한 작품들 가운데는 번역본을 놓고 작품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뜻이 훼손된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작품을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부분적으로는 거론이 되겠지만 이 자리에서 원문과 번역본의 관계를 일일이 밝히면서 얘기를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원문과 번역본을 대체로 동시에 읽은 저희 전공자들의 논의가운데 번역본만으로 작품을 대하는 일반독자들의 독서체험과 다소 동떨어진 해석이나 주장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충실한 번역본이 좀더 많이 보급되길 기대하면서, 이 점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 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지금까지 서양소설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고 있고, 그것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또 어떤 방식으로 그런 작품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런 문제들을 검토해봤습니다. 자, 이제 지금까지 얘기를 토대로 삼으면서, 우리 독자들 사이에서 고전으로 읽히고 있거나 혹은 고전·명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뭐하지만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 중에서 상당한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노골적인 상업중의 소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작품들을 구쳊적을로 검토해 보가로 하죠. 다루기로 한 작품은 디킨즈의『위대한 유산』, 발짜끄의『고리오 영감』, 토마스 만의『토니오 크뢰거』와『베니스에서의 죽음』, 카프카의『소송』, 카뮈의『이방인』, 로렌스의『연애하는 여인들』, 그리고 시기를 건너뛰어서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사벼움』, 움베르또 에꼬의『장미의 이름』, 이런 작품들입니다. 논의 순서도 대강 열거한 대로 했으면 합니다. 독자들께 작품 선정 경위를 말씀드려야죠? 몇차례 준비모임 과정에서, 우리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작품, 가령『제인 에어』나『테스』『올리버 트위스트』『여자의 일생』등을 넣엉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마는, 서양소설을 두고 오늘 같은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기회가 드문만큼, 일단은 좌담참석자의 전공영역을 감안하고 작품의 문학적 성취도를 위주로 하되, 토마스 만의 경우는 분량을 고려해서 비교적 짧은 작품으로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대신 쿤데라와 에꼬를 포함시켜서 최근 서양소설의 단면도 짚어보는 한편 독자들의 대중적인 관심에도 다소나마 부응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먼저 발찌끄의『고리오 영감』에 대해서 최선생님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발짜끄의 사실주의 특징 돋보이는 『고리오 영감』
최 당시 사회의 거대한 벽화를 그리겠다는 야심으로 발짜끄가 남긴 90여권의『인간희극』을 구성하는 작품군 중에서『고리오 영감』은 발짜끄를 반박의 여지없는 사실주의의 대가로 만든 작품이죠.『고리오 영감』에는 작품의 시간적 무대인 혁명 후의 왕정복고기(1819년경)와 작품이 씌어진 루이 필립하의 7월 왕조 당시 (1934년경) 부르조아 계급에 의해 주도된 자본주의의 강력한 부상 과정에 드러나는 사회구조의 갈등이 인물들과 드라마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을 형성하는 인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귀족이나 부르조아들이 배경에 드러나 있는 데 반해, 고리오, 라스띠냑, 보트랭 같은 중심인물들은 모두 퇴락한 상류나 하위계층 출신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상승을 추구하는 인물들이죠. 노년의 고리오가상징하듯 비상승, 즉 사회적인 정체는 작품 속에서 꼭 병처럼 고려되지요. 투기, 고리대금업, 타산적 결혼, 범법, 노름 등 단시 자본주의 사뢰의모든 축재 방식이 아주 냉소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당시 팽창하는 사회의 복합구조를 그대로 작품의 내용과 구성 속에 드러내는 점 때문에 사실주의 논의의 핵심에 발짜끄가 놓여 있는 거지요.
불란서 문학의 경우 소설 속에 사회 전체를 담겠다는 사고가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를 거치면서 발전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회를 마치 거울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듯 보겠다는 스땅달식의 낭만적 사실주의에 대해 발짜끄는 회의를 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순진한 단계를 벗어난 발짜끄의 사실주의의 특징을 만들고 이것이『고리오 영감』에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불란서 전체 혹은 빠리 전체를 그리는 대신, 그는 보께를 하숙집 속에 빠리 사회를 불러들입니다. 인물들을 사실적임적한 인물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을 완수하는 어떤 힘들로 드러나지요. 어떻게 보면 초기 사실주의가 지향하는 사회와 소설의 직접적 반영관계를뒤집은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바로 이 걸러진 사실주의가 이 작품의 인물의 전형성 논의를 가능하게 하고, 소설적으로 잘 형상화된 설득력있는 작품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설 제가 총기가 부족한 탓인지 말씀하신 것 가운데 이해가 잘 안되는 점이 있는데요. 발짜끄가 당새 빠리 사회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보께르의 하숙집에 여러 유형의 인물들을 끌어들여옴으로써 그 사회를 형상화했다. 그러니까 초기 사실주의의 '직접적인'반영관계를 뒤집은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제가 알기론 니얼리즘론에서 얘기하는 반영이나 재현---논란이 많은 개념입니다만---이게 그냥 평면적으로 사회적인 현실에 거울을 들이대서 파노라마처럼 비춰가는 걸 뜻하지는 않잖아요? 오히려 진정한 재현은 그것만으론 안 된다는 것이 리얼리즘 논의에서 전형 개념이 소설의 제한된 공간에서 가능한한 사회적인 삶의 핵심적인 면모를 여실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반영 개념과 늘 붙어다니게 마련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최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빠리 사회를 거울 들이대듯 묘사하지 않고, 보께르의 하숙집에 당대 사회를 특정지을 만한 인물을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축도를 그려낸 것이야말로 도리어 반영개념의 참뜻에 더 가까운 게 아닌가요?
최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론적으로 수월한 일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의 맥락에서 이 점은 아주 중요한 전환점인 것 같고, 실제 수많은 사실주의 문학이 이후 씌어졌음에도 당시 발짜끄가 지녔던 사실주의적 견해가 그다지 널리 실천되지도 않은 현실인 것 같습니다. 광의의 반영을 얘기할 수도 있지만 반영이라는 단어가 발음되자마자 논의의 초점은 소설에서 사회로 옮겨가지요. 제가 주목하고 싶은 점은 사실주의에 연관된 많은 논의에서 간과되었던 것으로 발짜끄가 사회의 형상화 문제를 소설적 현실의 문제로 이끌고 간 점입니다. 예를 들면 이 작품에서 사회적인 모델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인물응 고리오가 아니라 당시 실존잉물 비도끄에서 끌어낸 보트랭이고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타락한 사기꾼에서 경찰서장까지 이르는 이 인물의 예외적 삶이 관심거리였습니다. 반면 시간이 지나면서 독자에게 부각되는 것은 산업사회의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왜소해지고 거기서 도태되어 죽어가는 민중 유형 고리오의 고통입니다. 또 다른 전형적인 인물인 라스띠냑과 더불어 고리오는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소설적인 인물이지요. 그 때문에 이 인물들이 오래 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 최선생님께서 거울을 들이댄다는 비유에 집착하시는 바람에 반영 개념을 약간 좁게 설정하고 계시다는 게 저하고 생각이 갈라지는 까닭인 듯 하군요. 사실주의와 리얼리즘도 제가 알기로는 좀 다른 개념인데...... 아무튼 제 얘기는 반영 개념의 일반적인 용례에 비춘다면『고리오 영감』이 반영관계를 뒤집은 것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냐는 거죠. 그건 그렇고 보트랭의 경우 당대의 실재 인물에서 취재해왔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라고 하셨는데, 그 인물이 당대의 사회적인 삶에서도 예외적인 존재라고 봐야 할까요?
최 당대에서도 역시 예외적인 인물이죠.
설 보트랭은 불법조직의 우두머리로서 1차 왕정복고시대의 사회적인 조건에서 기존 체제의 어느 계층에도 끼이지 않는 일종의 탈락계층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지배계급이건 피지배계급이건간에, 특정한 계급에 속하면서 그 계급의 관점을 내면화하고 있는 인물보다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탈락계층이 경우에 따라 현실을 계급적 환상 없이 더 냉철하게 볼 수도 있다는 얘기도 흔하잖아요?
최 그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 예외적인 영웅이 존재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 또한 당시 사회의 특징이지요. 저는『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은 생생한 인물처럼 모든 인물을 지배하고 돌아다니는 돈,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돈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 아닐까요? 당시 부르조아 사회의 주인공이 돈이었듯이요.
설 재미있는 말씀이신데, 보트랭이야말로 탈락계층 특유의 직관으로 다른 어떤 인물보다 그와같은 돈의 논리를 핵심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죠. 그러니까 그는 최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런 의미에서는 예외적이지만, 소설의 공간에서는 당대 삶의 여러 결들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자기 삶에 활용하는 인물이고, 그런 의미에서 작품에 빠리 사회의 핵심적인 면면을 끌어들이면서 작품의 리얼리즘적 성취랄까, 그런 점에서 중요하게 기여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 그런 면에서는 전전으로 동의합니다.
김 저도 최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이 소설의 주제는 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소설은 염상섭의『삼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박완서의『휘청거리는 오후』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봤어요. 이 두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각각 1930년대와 1970년대이지만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그 시대에서의 돈의 위력을 크게 부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우저, 루카치, 엥겔스 등이 일사분란하게 칭송한 발자끄의 대표적인 작품이『고리오의 영감』인데 그들이 이 작품을 그토록 높이 평가한 것도 일단은 돈의 위력을 혹은 자본주의의 초기 증세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 아까 고리오영감이 여러 가지 계층의 삶을 다 거치면서도 결국은 자본주의 이전단계의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소멸하는 인물이라고 하셨는데, 좀 엉뚱한 얘긴지는 모르겠습니다만,『으제니 그랑데』에 나오는 으제니 아버지와 함께 놓고 보면 두 사람의 성향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핵심에서 통하는 것 같아요. 맞이하는 결말을 다르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라든지 돈을 물신화한다든지 이런 건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저는 고리오영감의 경우는 돈의 논리에 끝까지 충실하지 못하고 돈에 대한 집착을 자식에 대한 집착으로 옮겨놓은 인물이라면,『고리오 영감』은 그 전단계로 그 집착이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을 때......
최 이 작품의 또다른 문제, 즉 계층과 그 계층의 모랄과 관계된 것이죠. 돈의 윤리는 어느것 하나 순수한 상태로 남겨놓지 않는 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다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교환과 착취의 논리에 의해 파괴된 가족관계, 신분상승의 도구로 바뀌어버리는 가족관계가 여실히 풍자되고, 고리오와 라스띠냑, 보트랭과 라스띠냑 관계에서 일종의 회복될 수 없는 전시대적인 가족윤리의 도착적인 모방 또한 관찰할 수 있겠지요.
설 그렇죠. 돈을 통해 자식의 신분상승을 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의 신분상승욕을 대리충족하려 했던 셈이죠.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가 일정하게 상승하는 시접에서 돈의 가치와 신분제의 가치 양쪽에 걸치고 있는 인물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런 정리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디킨즈――중산층적 가치와의 거리
성 『고리오 영감』의 특징은 정말 돈 얘기가 무진장 나온다는 거죠. 어떤 인물이 등장하면 무엇보다 그 사람의 금전적인 상태, 1년 수입이 얼마냐, 1년 하숙비를 얼마나 내느냐 등등의 상황이 그 사람의 신분뿐 아니라 심성과 분위기마저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묘사되고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서 자본의 논리, 돈과 신분 상승의 관계를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돼요. 이 작품은 디킨즈의『커다란 유산』과 비교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데요. 『커다란 유산』의 경우는 중심어를 하나만 고르자면 젠틀맨(신사)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신사라는 말은 신분제적인 개념의 성격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디킨즈 시대에는 돈의 힘으로만도 충분히 달성 가능한 것이 됐었죠. 고아인 핍이 미지의 시혜자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받아서 신사가 되고자 하는 데에 다른 제약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핍은 유산은 못받게 되지만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신사가 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죠. 발자끄 식으로 풀면 유산이 없어지면서 동시에 신사가 될 길도 막혀버리는 것이 당연한데, 디킨즈는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 거죠. 엄청난 유산 때문에 신사가 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훌륭한 신사가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니까요. 따라서 젠틀맨이라는 그 당시의 지배적인 이상에 대하여 작가가 얼마나 근본적인 비판을 보여주느냐에 의문에 여지가 생기는 거죠. 그런데 발자끄 작품과는 달리 그걸 독자들이 받아들일 때 '마음이 신사여야 신사'라는 식의 교훈을 얻으면서 뭔가 마음편해하는 구석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유산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에 자기를 키워준 대장장이 죠와의 연대감을 통해서 핍이 신사가 되는 거니까, 사실상의 신사는 열심히 일하고 착한 대장장이 죠였다, 이렇게 풀어요. 그런데 그런식으로는 작품에 엄연히 드러난 젠틀맨의 이상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가 사상돼버리는 거죠. 그 결과 우리 독자들에게 디킨즈가 발자끄보다 좀더 중산층적인 감수성에 편안하게 와닿는 작가로 부각되어 있는데, 그건 디킨즈의 참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설 얘기가 문득 디킨즈로 넘어가버렸는데, 좀 다른 얘깁니다만, 시중에서는 '위대한 유산'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성선생님이 '커다란 유산'이라고 하시는 데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말 나온 김에 다른 번역상의 문제를 짚어주셔도 좋고―
성 이 작품의 제목이 일역본 그대로 '위대한 유산'으로 되어 있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great라는 말은 엄청나게 많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지 유산의 가치를 평가하는 개념이 아니고요, expectation도 정확히 말하면 '유산을 받을 예정'이라는 의미이지 유산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에요. 결국 핍이 유산을 받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매그위치로부터 정신적인 면에서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도 없거든요. 이 작품의 제목은 변호사 재거즈가 핍이 '커다란 유산을 받게 될 예정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오고 핍이 '커다란 기대'를 안고 런던으로 가는 1부의 마지막에도 나오는데, 이때 이것을 '위대한 유산'이라고 번역해서는 앞뒤가 맞지 않아요. 또 디킨즈의 경우 문장이 상당히 길고 복잡한 경우가 많아요. 사실은 이 작품의 처음 몇 단락에서도 디킨즈의 특유의 시적인 리듬이 드러나고,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려면 상당한 수고가 드는데, 긴 문장은 무조건 잘라버리고, 작가가 일부러 같은 구문을 사용한 부분도 서로 다르게 임의로 고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또다른 예를 든다면 가저리 부인이 남편을 마구 대하는 억센 여자로 설정되어 있는데도, 우리말 번역의 관습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극존칭을 쓰고 남편은 하대하는 어투로 되어 있어 어색한 경우도 있구요.
설 다시 작품 얘기로 돌아가보면, 젠틀맨들의 부정적인 면모, 예컨대 해비셤부인의 유산을 받으러 모여 있는 친척들의 속물성, 에스텔라와 결혼하는 드러믈의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생활행태, 그런 것이 나와 있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젠틀맨이라는 신분을 다소 감싸고 돈다는 혐의는 전혀 없는 건가요?
성 사실을 그 부분이 아주 애매해요. 젠틀맨이라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 즉 성실성·정직·책임감 등의 가치들은 특정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이고, 정작 신사라는 신분을 자랑하는 이들에게서는 그런 덕목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신사'라는 이상 자체를 놓지는 않는 것이니까 그런 혐의를 둘 수도 있겠죠.『커다란 유산』의 경우에는 그래도 디킨즈의 비판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국내에 소개된 그의 다른 작품들, 가령『두 도시의 이야기』나『크리스마스 캐럴』,『올리버 트위스트』등과 연결시켜서 보면 그런 혐의를 둘 가능성은 훨씬 커진다고 봐요. 그렇지만 국내에 번역돼 있는 작품들이 비판적 리얼리스트로서의 디킨즈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생각이에요. 거의 번역 불가능한 1850년대의 장편들에 대해서는 좀 다른 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김 그 시기에 나온 작품 중에서 디킨즈의 작품만큼 당시 사회의 움직임을 풍성하게 그린 작품이 있는가 하는 차원에서 보자면 저는 디킨즈의 작품이 좋은 작품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발자끄의 작품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디킨즈 소설의 유머러스한 표현과 해피엔딩에서 비롯되는데, 독자들은 그런 표현과 해피엔딩을 좋아하고 치밀한 세부묘사가 많은 소설들이나 출구가 없는 답답한 소설들은 대체로 싫어하는데 디킨즈가 당시에나 지금에나 대중적 각광을 받은 주된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싶어요.
성 『커다란 유산』만 해도 자세히 보면 전형적인 해피엔딩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요. 전형적인 해피엔딩은 아니면서 독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마무리는 안되게 하려고 굉장히 고심을 한 작품이죠.
설 해피엔딩 문제를 포함해서, 디킨즈가 독자층의 요구에 영합했다는 비판이 많이 나오잖아요? 만일 그렇다면 그 결과 작품에 하자가 남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텐데요.
성 디킨즈가 분명히 독자들의 요구를 의식한 면은 있지만 오히려 부각되어야 할 점은 중산층 독자의 요구와 사회적인 검열을 뚫고 나가 이 정도의 소설적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점이라고 봐요. 물론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다 보니 분명히 하자를 가진 작품들이 있죠. 가령『올리버 트위스트』경우에는 전형적으로 당대 중산층의 요구와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죠. 그러니까 '한번 신사는 영원한 신사다' 식의......
최 발자끄와 다른 점이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발자끄에 경우 돈의 논리를 냉소적으로 파헤치죠. 반면 디킨즈의 경우에는 이쪽 저쪽의 비위를 두루 맞추어주거든요. 마치 다른 출구가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주면서요. 이야기의 구성에서는 비판세력의 비위를, 그리고 결말에 가서는 양식있는 주도계층의 비위를 맞추어주어, 어떤 독자들은 작품의 결론이 허구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설 그런데 그 문제는 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발자끄가 『고리오 영감』에서 다루는 시점이 역사적으로 어느 한 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지 못하는 시점이란 얘긴 앞에서 이미 했죠. 혁명과 왕정복고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부르조아왕정이란 묘한 권력형태로 가는 전환기였잖아요? 귀족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는 돈을 확보해야 자신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고, 부르조아지 쪽에서는 신분상승을 통해 자신들의 금권을 보장받으려 하고, 그런 과도기죠. 발자끄가 귀족과 부르조아 양쪽 모두를 비판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특정한 역사적 조건도 무관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디킨즈가 다루는 당대 영국의 상황은 부르조아지의 지배적 지위가 상당히 확보되어 있는 경우죠. 그러니 디킨즈가 젠틀맨 됨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가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겠죠.
성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가 신사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라는 것은 너무나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고, 더구나 디킨즈의 전성기인 1850년대, 60년대는 영국의 산업자본주의가 정착되고, 공황도 겪고 노동운동도 다소간 겪고난 다음에 소위 빅토리아 여왕 치하의 전성기로 가면서 만국박람회도 하고, 그래서 이제는 아무 문제도 없으며 이것이 다 신의 섭리라고 외치는 그런 시기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의 비판을 견지하고 그러면서 10만 이상의 고정독자를 확보했다는 게 예삿일은 아니라고 봐요.
설 그런 사정을 감안하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 독자들이 신사된 사람은 그 개인이 마땅히 신사될 만한 자격이 있어서 된 거라든지, 재벌된 사람은 그 개인이 잘나서 된 거라든지 그런 식으로 새겨서는 작품을 제대로 보는게 아닌 셈이군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이 작품에서 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좀 상투적으로 표현해서, 역사적인 조건의 문제성이 작품의 문제성으로 각인되는 그런 예의 하나가 된다고 할까요? 김태현선생님. 무슨 하실 말씀 없습니까?
발자끄, 과연 '리얼리즘'의 승리인가
김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일동 웃음) 발자끄가 '리얼리즘의 승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 자체에 의문을 갖고 있어요.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말은 발자끄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진부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통상 쓰이고 있는데, 이는 사람은 시원찮아도 그의 작품은 좋을 때 그 작품을 살리기 위한 궁여지책의 말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작가라도 그의 작품이 진보적이라면 '리얼리즘의 승리'가 자동적으로 보장된다는 식으로 이를 확대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죠. 사람도 괜찮고 작품도 괜찮은 것이 제일 바람직한 경우 아니겠어요. 따라서 발자끄의 보수성과 그의 작품의 진보성의 불일치는 무슨 상찬의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고리오 영감』을 포함한『인간의 희극』의 리얼리즘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였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저로서는 발자끄를 너무 그렇게―
설 높여주지 말자, 그거죠?
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발자끄의 작품을 호평하였던 터라 저도 큰 기대를 갖고 이 작품을 찬찬히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마디로 말해 이 소설이 저의 기대지평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과장되고 극적인 인물묘사라든가 고리오 영감이 라스띠냑과 자기의 딸을 맺어주려는 시도에서 보이듯이 잘 납득할 수 없는 일도 적지 않게 나오고 또 사건전개의 우연성도 더러 누에 띄더군요. 그 때문에 현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 작품도 상당한 비판에 시달릴 여지가 있어요.
설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엥겔스의 판단이 맞다고 가정할 때도,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하니까 아, 승리한 작품이구나, 이렇게만 정리하고 넘어갈 게 아니라 발자끄의 정치적 입장이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작품에 어떤 문제가 담긴 측면은 없는가, 이런 점을 한번 짚어보는 게 어떨까요? 엥겔스 얘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말할 건덕지도 없겠습니다만. 가령 하우저는 발자끄가 귀족집단이 하는 싸움이나 부르조아지가 하는 싸움이나 결국은 동일한 싸움이다, 라는 식으로 그렸다고 비판했더군요. 요컨대『고리오 영감』이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과 역할을 지닌 집단들의 다툼을 동질화함으로써 계급투쟁을 탈역사화한 점은 없을까요?
최 작가의 피상적인 전기 사실을 우위에 두고 작품을 판단하는 엥겔스의 그런 관점이 그 당시 시대정황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언제까지 문학논의에서 유효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정치성향은 진보적이었는데, 작품에서는 정치성이나 역사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작가들은 어떻게 판단해야 되는 건지...... 그리고 가령 두 계급의 갈등 양상에 대해서는 작품의 세부에서 드러난다고 보는데, 이 작품에서 가장 우습게 변해버린 것은 귀족계급입니다. 그들의 윤리적인 구차성은 보트랭의 비윤리성이나 인간적인 구차성과 평행선상에 놓인다고 보거든요. 드 레스또, 드 보쎄앙, 드 랑제 같은 귀족부인들을 통해 라스띠냑이 배우는 것은 불륜의 비밀, 가짜 우정, 관료적인 오만 같은 것뿐이지요.
설 그렇다면 라스띠냑이 담아내는 경향은 역사적으로는 어떻게 이해되는 거죠?
최 라스띠냑은 새롭게 등장하는 전형적인 야심의 유형이죠. 그러면서도 중간적인 부분에 대해 인식하고, 돈 자체를 희화화해버리는 부분도 있어요. 고리오와 그의 관계, 모두가 고리오를 버렸을 때 끝까지 곁에 남아 결국은 자기형성과정을 거치는 라스띠냑은 아직은 찾아지지 않은 어떤 대안 앞에 서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발자끄가 어디에선가 당시의 부르조아 자유체제 내부에서 일어나는 위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래의 대한 조바심"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닐는지요. 그런 면에서 그는 스땅달의 줄리앙 쏘렐과 모파상의 벨 아미의 중간쯤에 서 있는 인물인 것 같아요. 그는 오직 부르조아의 손아귀로 돌아가버리면서, 그들이 내거는 보편성의 가치들이 소외의 장으로 이전되는 혁명후의 세계관을 의문에 부치고 있다고 봐요. 게다가 라스띠냑은 자신이 추구하는 야심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이 있다고 봅니다. 맨 마지막에 자신이 그토록 몰입했던 상승의 구도라는 것이 얼마나 비윤리적인가 하는 것을 고리오 영감에 가까워지면서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거죠.
설 그렇다면 라스띠냑은 귀족적 삶과 부르조아적 삶의 문제성을 모두 일정하게 체득한 인물이니까, 그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은 결국 그 두 가지 삶의 문제성을 모두 지양한 어떤 경향을 띠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가 될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고리오 영감』은 정말 탁월한 작품이 되는 셈이죠? 글쎄...... 라스띠냑을 그렇게까지 볼 수 있을는지, 김태현선생님께서 아까 리얼리즘의 승리와 관련해 문제제기한 데 이어 아무래도 한 말씀 안 하실 수 없겠네요.
김 이 작품이 대립하는 계급들이 일정한 균형을 이루던 역사적 전환기의 상황을 반영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리얼리즘적인 입지가 있다고 봐요. 그러나 이 작품이 그런 상황의 모순을 지양하는 경향성을 보였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 해요. 7월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계급의 가능성이 나타내는 열기 같은 것을 예감하고서 그와같은 입장의 세계관을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당대의 다른 작품들과 견주어서 일정하게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은 분명 리얼리즘의 성취지만, 조만간 닥칠 역사적인 격변을 담지 못했다는 면에서 아쉬운 점도 있다고 봐요.
성 그런 면에서 보면 흔히 디킨즈의 온정주의적인 측면으로 비판되는 부분이 발자끄의 치열함이나 가차없음에 비해 좀 미온적이고 촌스럽게 보일지언정 오히려 사줄 만한 점이 아닌가 싶어요. 디킨즈는 자기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을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밀려난 사람들, 가령 그게 귀족계급일 수도 있고 민중계급일 수도 있는데, 그런 인물들에게서 새로운 사회가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가치, 새 시대의 주도권을 잡는 계층이 도저히 담지해낼 수 없는 가치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설 구체적으로 말하면『커다란 유산』의 경우 죠 같은 사람일 테죠?
성 그렇죠. 죠나 비디 같은 경우지요. 죠나 비디는 구시대의 인물 같은 성격이 짙고, 그런 사람들이 런던이라는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는 도시에 왔을 때 어떤 식으로 무능하게 되는가가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게 잘 그려져 있어서, 핍이라는 주인공이 그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제기되는데, 그러면서도 결국은 다른 신사들이 갖지 못하는 핍만의 미덕이라는 것이 근원을 따지자면 거기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계층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그런 면을 찾아내서 그것이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희망의 씨앗이 될 거라는 생각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발자끄에게는 없는 미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옹호만 한 건가요?
설 글쎄요, 디킨즈 전문가께서 제 논에 물 대는 성싶기도 한데...... (일동 웃음) 하지만, 옹호할 만하면 해야죠. 디킨즈나 발자끄는 독자와의 관계라는 면에서 봤을 때 20세기 벽두의 작가들과 비교해 썩 행복한 조건에 있었죠. 작품을 읽어주고 그에 대해 그때그때 반응해주는 독자들이 넉넉했잖습니까? 그런데 소위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오면 예술가가 진지한 자세로 창작에 임하면 임할수록 일반적인 독자로부터 경향적으로 유리되는 형국이 벌어지죠. 그런 경향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가 갖고 있는 특정한 성격과도 역사적으로 결부될 텐데, 아무튼 20세기초에 오면 작가의 사회적인 존재랄까, 예술과 사회적 삶의 연관이랄까, 그런 문제를 고민하는 작품들이 두드러지지 않습니까? 토마스 만뿐만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뜨 같은 작가들이 모두 그런 문제를 다루었죠. 그럼 그런 시대적 정황을 염두에 두면서 토마스 만 얘길 시작해봅시다.
「토니오 크뢰거」――예술가 소설?
김 루카치가「프란쯔 카프카냐 토마스 만이냐」라는 글에서 카프카와 만을 각각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가로 대비시킨 것은 유명한데 이 좌담에서도 하필 이 두 작가가 선정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거론되는 만의「토니오 크뢰거」와「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리얼리즘을 잘 구현한 작품인 것으로 여겨질 것 같아 한마디 해둬야겠습니다. 이 두 작품은 만의 초기작으로서 예술가소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의 출세작인『부란덴부로크 일가』라든가 이를 계승한 야심작인『마의 산』같은 대작들과 판이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카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리얼리즘적 성취를 거론할 때는 주로 전자가 아닌 후자를 그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다룰 두 작품은 리얼리즘적 성취보다는 예술가소설로서의 고유한 매력 때문에 애호되는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두 작품에는 약간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지요.「토니오 크뢰거」는 작가가 작가의 문으로 들어서기 전후에 겪는 고뇌들을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예술가의 현실적 갈등과 번민을 조형하고 있고,「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이미 성공한 작가가 더 나은 예술적인 성취를 위해서 고민하는 양상을 아름다운 소년에의 이끌림을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체험이 크게 반영된 이 두 편의 자전적 소설들은 예술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예술의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겪는가를 다루고 있는 예술가소설로서의 기품을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설 저 역시 이 작품들이 탁월한 리얼리즘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만, 예술가소설이기 때문에 널리 읽히는 거지 리얼리즘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다고 미리 전제하셨는데, 전 거기에 좀 유보를 달고 싶어요. 이 소설이 기법적인 면에서 사실주의소설이 아니다, 이런 주장이라면 저도 어느정도는 동의하겠습니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작품을 읽자고 할 때는 특정한 서사방식이나 소재 또는 기법이 문제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중요한 건 현실에 대한 작품의 연관이 얼마나 핵심적이고 설득력이 있느냐, 이거 아니겠어요? 이 두 작품의 경우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예술가소설이니까 리얼리즘은 아니다, 이렇게 미리 잘라 말해버리고 나면 얘기가 잘 안 풀릴 것 같군요. 뿐만 아니라 가령「토니어 크뢰거」경우, 토니오가 부르조아적 성격을 띠는 삶으로부터 유리되는 과정이 작품 전반부에 나오잖아요?
김 청소년 시절에 문학을 좋아했던 주인공이 그렇지 않은 친구들과 정서적 불화를 보이는 것을 그렇게 부르조아적 삶으로부터의 유리로 읽는 것은 다소 비약된 읽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설 구체적으로 그렇잖습니까? 토니오가 한스한테『돈 까를로스』라는 작품에 관한 얘기를 건네려고 하는데 한스는 승마에만 관심을 보일 뿐 문학 얘기는 귓등으로 듣죠. 그러다 또다른 친구가 와서 말타러 가자니까 토니오 혼자만 남기고 가버리는데, 이건 예비작가 토니오에게는 일종의 원초적인 체험인 셈이죠. 부르조아적 감수성과 관심을 가진 예비독자가 문학적 관심에서 멀어지는 모습이 다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김 한스와 잉에를 부르조아지로 규정하고 이들과 예술을 애호하는 토니오의 불화를 부르조아지와 예술가의 불화로 곧장 치환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토니오도 부르조아임을 고려할 때 이들의 불화는 동일한 계급에 속하는 이들의 이질적인 취향과 인생관이 빚어내는 불화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할 것 같은데......「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도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돈도 갖고 있는 성공한 예술가 혹은 부르조아이지 탈락한 부르조아도 아니고 부르조아로부터 소외된 예술가도 아니거든요. 요컨대 만의 작품은 예술가의 삶이 직면하는 각종 어려움과 괴로움을 묘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 리얼리즘의 척도로 해석하는데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심지어 이 두 작품을 비롯한 토마스 만의 초기작품은 데까당한 요소마저 지니고 있고「베니스에서의 죽음」같은 경우는 예술지상주의적인 경향마저 다분히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리얼리즘적 성취는 더욱 의심스럽지요.
최 저도「토니어 크뢰거」를 그런 맥락에서 본다는 것은 잣대의 월권이 아닌가 생각해요. 전반적으로 그 유형의 예술가소설들이 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타나는지 의문을 던져야 할 것 같아요. 그 이전까지 있어온 예술에 대한 외적 지배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확대해보려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 아닐까요.
설 글쎄요, 작가의 핵심적인 관심이 부르조아지적 삶의 방식과 예술의 관계라는 건 작품의 말미에서 선명히 확인되지 않아요? 작가로서 입신한 토니오가 한스와 잉에를 우연히 다시 만나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마구 이끌리다가 리자베타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 입장을 정리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거기에 이렇게 돼 있어요. 요즘 세상에서 예술가로 행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르조아라고 경멸하고 부르조아는 또 자기를 배척하지만, 자기는 부르조아적 양식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이른바 예술가적인 천재성이나 무절제를 경계하고, 단순하고 평범한 것을 동경한다는 거예요. 오만한 예술가들이 뭔가 거창하고 악마적인 미(美)를 추구하면서 평범한 인간의 삶을 비웃지만, 자기는 인간적인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부르조아적 애정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건 예술가가 부르조아적인 삶으로부터 유리되어가는 과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의 현실을 예술가로서 외면하지 않겠다는, 일테면 반예술지상주의적 언명으로 읽힌단 말이죠. 예술가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피폐한 고국 아일랜드를 떠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경우와 비기면 만의 이런 면이 오히려 돋보인다고 볼 수도 있겠고요. 이런 얘기도 환원론자의 월권적 주장이라고 하신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만.
성 「토니어 크뢰거」를 대개는 예술가의 길과 그것에 적대적인 세속적인 것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김선생님도 그렇게 정리하시는 듯한데, 예술가 내면의 갈등과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당대의 역사적 삶의 모습이 자세하게 드러나 있지 않더라도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지향과 자신의 계급적 배경을 결정적으로 적대적이라고 인식하게 되고, 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예술가의 핵심적인 고민으로 등장한 이유가 있고, 그 대립양상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보거든요. 토니오의 경우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라는 맥락일 수도 있구요. 쓰여진 말들이 다소 관념적이라거나 혹은 내면의 갈등에 치중하고 있다고 해서 작품의 역사적 맥락을 짚을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김 리얼리즘을 그렇게 넓게 해석할 경우 이 세상의 문학치고 리얼리즘문학 아닌 것이 없을 것 같은데요. 어쨌건 이 소설에는 당시 풍속이나 현실 따위보다는 예술가의 고뇌가 압도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혹시 이 작품이 당시의 예술가가 보편적으로 부딪혔던 문제를 그렸으면 리얼리즘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 그것도 아니거든요. 구태여 이 소설에서 리얼리즘적 성취를 찾으려면 이 작품의 진실한 세부묘사에서 찾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술가 소설, 리얼리즘 소설의 경계
설 얘길 듣다보니 김선생님이 리얼리즘을 특정한 서사의 방식이나 소재의 차원으로 좁혀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지만, 그 문제는 일단 접어두죠. 하지만 제가 토마스 만으로 들어가면서 언급했다시피, 이 시기 서양의 중요한 작가들이 예술가의 삶의 방식이란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는 경향도 감안해야잖아요? 영문학의 경우 이런 경향은 대충 산업자본주의의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낭만주의시대부터 시작됩니다만, 독자와 작가를 이어주던 공유된 가치라는 고리가 끊어져가는 현상과 결부되거든요. 이와같은 역사적 경향을 염두해 둔다면, 한 예술가의 그런 체험이 특정한 작품에서 다소 개인적이고 관념화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해서 작품을 예술가소설이라는 범주에 격리시켜서만 봐서는 곤란하단 얘기지요.
김 우선 작가와 독자의 유대가 강했던 시절이 한때 있었다는 주장이나 19세기말 혹은 20세기 들어와 그런 유대가 급속히 파괴되었다는 주장에 저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술가의 현실적·대중적 소외는 유서깊다고 봅니다. 그건 그렇고 또다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만의 작품에 나오는 예술가의 현실이 특정 시대보다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현실에 훨씬 가깝다는 겁니다.「토니오 크뢰거」나「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이 직면하는 예술가적인 현실이란 것이 그 시대에만 특별히 볼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예컨대 최인훈의『화두』나 이문열의『금시조』같은 작품에 나오는 현실과도 유사해요. 말하자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예술가들이 직면하는 현실, 즉 세속적 질서에 잘 편입되지 못하고 그러나 자기의 예술적 세계를 위해 애쓰는 예술가가 겪는 심리적 고뇌라든가 현실적인 어려움들, 이런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 만의 작품은 이를 주로 드러내고 있다고 봅니다.
설 대중으로부터의 소외를 예술가의 초역사적 존재조건으로 보자는 말씀은 아닐 테죠? 발생자체가 공동체적 제의 또는 축제의 성격을 띠었던 희랍극의 경우는 더말할 나위도 없지만, 봉건적 사회관계 속의 예술가도 어떤 독자가 자신의 작품을 읽을 것이며 그들이 뭘 기대하는지를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독자와 공감대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죠.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도 자신의 진지한 예술적 관심을 지켜내면서 예술가와 독자가 행복한 공감대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역사적으로 적잖게 존재했죠. 셰익스피어의 시대가 그랬다는 건 문학사가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아까 우리가 얘기한 발자끄나 디킨즈 같은 경우에도 그런 공감대가 상당히 두터웠지요. 특정 작가의 개인적 능력과 다소 무관하게, 사회적 삶의 성격이 그와같은 공감대를 좀더 쉽게 형성하게 만드는 역사적 시기가 있었던 거죠. 물론 저도 예술가의 창작행위가 일상적인 삶과는 어느정도 떨어진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창작행위에 따르는 고뇌도 단순히 동서고금을 막론한 초역사적인 현상으로 돌릴 일이 아니고, 그 고뇌의 역사적 규정성을 두루 따져야만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대응이 얼마만한 깊이와 폭과 진전성을 지니는지가 제대로 드러날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토마스 만이 이처럼 역사적 성격을 지닌 작가의 고뇌를 추상적인 형태로 제시했다면 그건 작가의 한계겠죠.
최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겠죠.
김 저로서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특별히 직면했던 고민을 담은 작품은 아니라고 거듭 생각합니다.
설 초지일관이시군요. 또 한가지,「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예술지상주의적 작품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저는 그 점도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군요. 노년기에 접어든 아셴바하가 빠져드는 탐미적 경향에 대해 작가가 적잖은 거리를 두고 있는 거 아닌가요? 탐미적인 인물을 다룬다고 해서 모두 탐미적이라고 얘기할 순 없을 테니까요. 아셴바하가 미소년에게 끌리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지닌 온전성이 와해돼나가는 과정이죠. 베니스에 콜레라가 창궐해서 외지 사람들이 피해나간단 사실을 알면서도, 타지오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려 그들을 구하기보다 그걸 감춤으로써 타지오를 지켜보는 시간을 연장하려고만 하잖아요? 이 대목에 가면 독자로서는 아셴바하로부터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겠죠. 작가도 그걸 유도하는 것 같고요. 그렇다면 이건 탐미주의 소설이 아니라 탐미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을 담을 소설이라고 봐야 되지 않겠어요? 너무 과격한 해석인지는 모르지만.
김 과격한 해석인 것 같은데요. (웃음) 하여튼 토마스 만의 초기작품들에는 전반적으로 '예술가 만세'같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베니스에서의 죽음」처럼 아름다움을 위한 죽음조차도 긍정하고요. 그런데도 이 작품의 죽음을 그렇게 해석하시니 경이롭습니다. '이런 해석도 가능하구나' 하는 놀라운 느낌이 드는데.......(웃음)
설 경이롭다고 '칭찬' 해주시니 황송합니다. 전문가의 '유권적' 해석이 그러하고, 부득부득 우기는 게 사회자된 도리도 아닌 성싶고, 여하튼 그 정도로 해두죠. 얘기를 하다 보니 우리끼리도 구체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작품해석에 만만찮은 의견 대립이 생기는데 일반독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일동 웃음) 오늘 좌담이 시의적절하다는 게 여기서도 확인되는 셈입니다. 토마스 만은 그쯤에서 그치기로 하고 아까 토마스 만 얘길 하는 첫머리에서 김선생님이 루카치가 제기한 만과 카프카의 대립구도에 문제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번에는 카프카의 경우를 얘기해봅시다.
카프카――막힌 현실의 출구 모색
김 『소송』에는 사실 기억에 남을 만한 뚜렷한 줄거리가 없죠. 은행원인 요제프 K가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잡혀가서 법정에 서는데, 그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묻지만 아무도 그의 죄목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 죄를 추궁받다가 죄목도 없이 유죄선고를 받고 마침내 집행관들에게 찔려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평범한 개인이 법 또는 이를 관장하는 이들이나 국가의 폭력에 의해 비참하게 파괴되는 과정을 해부하고 있는 거지요. 이는 물론 표면적인 분석에 불과하고 이 작품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카프카 문학의 이런 다의성 혹은 모호성이 그의 문학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의 원동력이구요. 그 때문에 까뮈 같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극찬하는가 하면, 루카치 같은 사람들은 혹평을 하지요. 그런데 카프카의 문학이 근래에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는 사례가 있고 심지어 그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적극 옹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카프카 문학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거나 다의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이해함으로써 그의 문학에 좀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듯하여 그의 환경을 조금만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그는 프라하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가정적으로 불운했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아들딸이 예술가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웃음) 하여튼 카프카는 그의 부모를 싫어했습니다. 특히 그와 아버지의 관계는 몹시 냉랭한 사이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문학적 활동을 펼치던 때의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으며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죠. 게다가 그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늘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환경이 그의 작품의 암울한 분위기, 거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봅니다.
설 루카치는 카프카의 작품을 사회적인 전망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앙스트(Angst), 그러니까 불안과 혼란이 지배하는 병적인 결과물이다, 그 결과 거기에는 극단적 주관주의가 배어 있고 현실에 대한 작품의 연관이 정태적이다, 이렇게 논단했죠? 그런 주장이 무리라고 보시는가요?
김 아뇨. 루카치의 카프카에 대한 의견 자체가 무리하다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 만과 카프카를 둘로 나눠서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구도로만 그들을 안이하게 조망하는 것은 그들의 문학세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설 만을 비판적 리얼리스트로 보고 카프카를 아방가르드 또는 모더니스트로 보는 구도에는 반대지만 카프카의 작품을 전망 부재의 병적 소산으로 보는 덴 동의하십니까?
김 루카치의 카프카에 대한 평가에 전폭적으로 동의하지만은 않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일차적인 해석으로는 그와같은 것이 유효하다고 봐요. 이 작품에는 루카치의 지적대로 불안과 혼돈이 가득하고 그것으로부터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거든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작품에 갑갑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이나 탈출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작품의 묘한 매력이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그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력을 담은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런 전망부재가 당대의 사회적 현실과 민족적 정황이라든지 카프카의 개인이 직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도 불가능하지는 않지요.
최 부르조아 자본주의가 정착한 단계의 사회구조 속에서 경제적 측면보다는, 점점 커지는 제도적 통제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위협, 본성이 변질되어버려 파악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둔갑하는 일상의 묘사들은 설득력이 있지요. 습관화되어 길들어진 위협들을 다시 보게 해 주거든요.
설 흔히 카프카 소설의 특성을 얘기하면서 디테일의 섬세함과 전체적인 의미의 모호함, 이 둘을 결합해놓은 게 독특한 효과를 낸다고들 하잖아요? 발터 벤야민의 얘긴데, 카프카는 자연과학자가 자연과학적 관찰대상을 기술하듯 일상사를 묘사한다는 거죠. 예컨대, 일상적인 호흡운동을 두고, 어떤 분자로 구성되어 있는 대기 중의 어떤 물질이 어떤 분자로 구성된 인체의 어떤 부분을 어떤 역학적 작용을 통해 통과하고 그동안에 어떤 화학적 작용이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카프카의 서술이 이루어진다는 거죠. 말하자면 사실적인 묘사의 극한까지 밀고 갔다는 얘긴데, 그런 것이 독특한 성취라면 성취랄 수 있겠죠. 그런 성취의 측면과 루카치가 제기하는 비판을 연관지어 보면 어떨까요.
성 디테일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디테일의 잉여라고나 할까? 굉장히 자세하고 사실적이면서도 그것이 다 남아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상황 속에 들어가 있는 주체로서 그것을 통제하거나 파악할 여지가 전혀 없는 디테일로 꽉 차 있으면서, 개인적인 주체가 움직일 공간을 거의 전무 수준으로 축소해버리는 분위기가 가장 큰 특징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건 좀 엉뚱한 문제제기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아까 카프카의 개인사적 배경에 대해 김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생각이 났어요. 그러한 개인적 상황과 역사적 특수성이 그런 분위기를 낳았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그런 배경 지식 없이 소설을 읽다보면 왜 이런 분위기가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 소설 속에서 읽혀지지가 않아요. 그냥 이 소설 속의 상황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거고, 앞으로 영원히 그럴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그런 역사적 맥락이 다 증발한 상태에서 아주 추상적이고 밑도끝도 없는 불안만이 작품에 드러나거든요. 이걸 어떻게 평가해야 할 거냐가 문제인 것 같아요. 이렇게 나오면 카프카에게 전혀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발자끄나 디킨즈 식으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부딪히면서 접근을 해야 되지 않았냐 하는 식의 요구를 하는 셈이 되어서 우스꽝스러운 꼴이지만,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해보는 것이 때로는 카프카의 위상을 설정하는 데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다시 읽으면서 느낀 것은 거의 그로테스크하게 변모되는 세부묘사 속에 숨어 있는 희화화를 통해 그는 인간이 잃어버린 어떤 것을 일깨주어 주고, 바로 그런 과정에서 가해의 원천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생각이 되던데요. 밑도끝도 없는, 대안 없는 불안의 묘사라는 느낌보다는 그가 상실했음을 인정은 하지만 어떤 세계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그의 작품을 지탱해주는 것 같아요.
설 저는 다시 읽으면서 역시 대안은 없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아까 김태현선생님이 묘한 매력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 매력의 성격이라는 것이, 카프카가 처했던 개인적·사회적 정황과 연관되는 건 물론이고, 카프카가 사용한 독일어의 특수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있더군요. 염무웅선생님의 글에 나오는 얘긴데, 당시 프라하의 독일어는 체코민중들로부터 고립되어 언어의 창조적 가능성을 상실한 문어로 전락한 상태였고, 이런 언어적 빈곤을 일반 문사들은 공허한 수사와 대변으로 메우려 했는데, 카프카는 오히려 간결하고 객관적인 언어로 그와같은 곤경에 대응했다는 거죠. 그렇다면 민족적·인종적, 심지어는 언어적 제약 등 여러 어려움이 겹친 상황에서 카프카가 추호의 타협도 없이 그 상황을 예술적으로 천착한 결과가 이런 묘한 형태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테죠. 전 그런 철저함만큼은 높이 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 문제는 수용의 양상 같아요. 그 당시에 출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카프카 혼자의 게으름으로 넘기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카프카 수용의 역사적 맥락은 삭제한 일종의 탐닉적인 수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존주의 몇몇 작품들이 우리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요.
설 그러니까, 카프카가 처한 정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할 길이 정말 없었던 것인가도 잘 따져봐야겠지만, 카프카 나름으로는 그런 방식이 가장 엄격하고 치열한 대응이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면 그건 카프카 개인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가 처한 정확의 한계와도 결부돼 있다. 이런 점들을 두루 감안하는 것이 작가에 대한 대접이겠죠. 그리고 우리 처지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카프카의 작품의 여러 맥락을 제쳐버리면서, 최선생님이 잘 표현하신 것처럼, 탐닉하는 경향만큼은 충분히 경계해야겠다, 이렇게 정리가 되겠죠?
카프카가 이처럼 꽉 막힌 현실에 감금당한 채, 그것을 비타협적으로 천착하는 가운데 독특한 예술의 길을 뚫어나갔다면, 가령 제임스 조이스의 경우는 식민지 아일랜드의 현실이 예술가로서의 자기 삶을 질곡한다고 판단하고 예술을 위해 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까? 조이스의『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이와 같은 선택의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요. 이렇게 보면, 모더니즘소설의 대표 작가에 드는 이 두 작가의 작품들은 삶의 전망이 부재 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 그 자체의 예술적 변용이라는 성격을 띤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은 루카치가 지적하는 모더니즘문학의 일반적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겠구요. 그런데 로렌스의 경우는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작품활동을 했으면서도 이런 의미의 모더니즘 소설과는 여러모로 대립되는 성향의 작품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적 경지를 이룩한 작가로 볼 만한 측면이 많지 않습니까? 이런 각도에서 로렌스 얘길 잠깐 하고 넘어가죠.
새롭게 읽어야 할 로렌스
성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구도에서 보면 로렌스는 아주 묘한 작가입니다. 루카치도 로렌스를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남녀간의 성이라는 문제에만 집착한다는 면에서 모더니즘 소설가의 예로 든 적이 있지요. 물론 영문학에 대한 루카치의 이해 부족도 작용했겠지만, 영미비평계에서도 로렌스를 선뜻 리얼리스트라고 하는 평자는 별로 없습니다. 일반 독자에게도 로렌스는 남녀간의 성문제 등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을 다룬 작가로 알려져 있고, 좌담의 초반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심지어 외설물의 일종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 또한 로렌스가 다루고 있는 현실의 역사적 의미를 간과한 데서 나온 오해가 아닌가 합니다.
『연애하는 여인들』은 기본적으로 어슐라와 구드런 두 자매를 중심으로 한 남녀관계의 이야기이긴 한데,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어슐라와 버킨, 구드런과 제랄드의 관계와 그 발전과정이 사실은 그들의 계급적 위치나 당대 사회의 분위기와 아주 밀착되어 있습니다. 가령 한 개인으로 보면 굉장히 매력있는 인물인 제랄드와 구드런이 왜 결국 둘다 말하자면 실패하게 되는 가를 해명하려면, 결국 현대자본주의사회를 주도하는 제랄드 같은 계급이 지니는 매력과 한계를 설명해야 되거든요. 제랄드의 제1원칙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광부들과 기술자들이 그에게 반발하지만, 결국 행복이니 희망이니 다 사라져버렸다고 여기면서도 '새로운' 종류의 '만족감'을 얻게 됩니다. 말하자면 제랄드의 의지가 노동자들의 삶에서도 관철되고 마는 셈이죠. 이러한 제랄드가 왜 알프스의 눈 속에서 죽게 되는가, 또 그와는 아주 대조적인 듯 보이는 버킨이 왜 제랄드와의 관계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고도로 진전된 산업 자본주의 문명이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고려해야만 설명 가능하지요. 그런 고려가 없이는 제랄드와 버킨의 관계도 좀 수상쩍은 동성애 정도로 비쳐질 수 있고, 여자에 관한 한 어슐라로 충분하지만 남자와의 관계도 필요하다고 고집스럽게 되풀이하는 버킨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설명이 안 될 것입니다.
최 가령 카프카나 조이스의 경우와 견줄 때 이 작품의 어떤 점이 두드러진다고 해야 할까요?
성 로렌스가 카프카와 조이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묘사하는 언어의 애매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설명이 잘 안 되는 느낌 하나 하나가 모두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문제제기이고, 나아가서 그 문제의 해결이 그 현실 자체가 아닌 다른 차원으로 전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쉬운 대안을 대뜸 내놓는 건 아니면서도, 영국의 현실 속에서 어떤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지요. 로렌스가 씨칠리아·호주·뉴멕시코 등을 전전하는 시기의 작품에 대해서는 좀 다른 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물론『연애하는 여인들』에서, 가령 1차 세계대전의 분위기나 당대 노동계급의 실상 등을 읽어내긴 어렵고, 발자끄나 디킨즈 식의 폭넓고 자유로운 시선도 기대하긴 힘듭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무대는 광부와 교사와 예술가와 산업부르조아가 서로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 속의 공동체입니다. 애정관계로 서로 얽힌 남녀들이 비록 당대 삶의 아주 제한된 일면을 대변하는 계층이지만, 결국 그들은 남녀관계를 진전시키면서 등장하는 사소한 디테일 하나 하나가 현대 서구 문명 전체에 대한 로렌스의 비판적인 인식과 닿아 있다는 점이 중요하겠지요.
설 사실, 고도 산업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데 성공한 작품이야 간간이 있죠. 하지만 그 영향이 개개인의 내면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고 아울러 인간들끼리의 진정한 유대를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가를 그려내는 한편, 그와같은 곤경을 불가해한 삶의 조건으로 추상화, 절대화하지 않으면서 바람직한 삶에 대한 예술적 탐색을 집요하게 밀고나가는 작품은 이 소설이 나왔을 당시에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드물지 않나 싶군요.
『연애하는 여인들』은 이처럼 명실상부한 현대의 고전인데, 일반독자들이 번역본을 통해 이 작품의 진면목을 얼마나 맛볼 수 있을지 적잖이 걱정스러워요. 번역본으로 읽어나가다 좀 이상하다 싶어 원문을 대조해보면 십중팔구는 문제가 있더군요. 결국은 번역본 읽기를 포기하고 말았어요. 제가 본 번역본이 제목을 『연인들』이라고 바꿔 단 것까지 이해한다 치더라도, 목차에 나오는 소제목도 원제목과는 거의 전부 달라요. 제목이 어떤 의미에서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제목을 바꾸는 건 주제를 왜곡하기 십상 아니겠어요? 소설 첫머리는 어슐라와 구드런 자매가 제가끔 남성관, 결혼관을 피력하는 가운데 두 자매의 성격과 앞으로 전개될 소설의 갈등이 암시되는 대목인데, 이 부분만 해도 오역이 만만찮아요. 가령, 어슐라가 추상적으로는 남자들과 결혼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다가 "막상 닥치면 유혹조차 못 느낄(When it comes to the point, one isn't even tempted)"뿐 아니라 오히려 "하지 않고픈 유혹을 느낄 따름이야(I'm only tempted not to)"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이 번역본에는 "남자들이 때가 무르익어 결정적 시기가 도래해도 유혹돼지 않더라구......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할 유혹만 받아왔던 거야"라고 돼 있어요. 어슐라의 말을 받아서 구드런이 "유혹이 그처럼 강하다는게 놀랍잖아, 하지 않고픈 유혹말야! (Isn't it an amazing thing…how strong the temptation is, not to!)"라고 하는데, 이게 또 번역본에는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지만, 그 유혹이란 게 정말 놀라우리만큼 강하잖아!" 이렇게 돼 있어요. 번역본에 따른다면 두 자매는 한시바삐 결혼 못해서 안달하는 꼴로 비치기 십상일 텐데, 실은 결혼에 대한 이들의 태도가 상당히 복잡하고, 이 복잡한 태도가 작품 전개의 중요한 축이거든요. 이와 비슷한 오역들이 자주 보이더군요. 힘들여 번역했을 역자에게 미안한 지적입니다만, 작가는 물론이고 독자에세 대접이 너무 소홀하구나 싶었어요. 로렌스는 그쯤 하고, 우리나라에서 카프카와 함께 실존주의 계열의 작가로 한데 뭉뜽그려져 소개된 까뮈의『이방인』으로 넘어가죠.
『이방인』――식민주의 문제와 무관한가?
최 이 작품은 1942년 이차대전의 와중에 발표되어 절제된 문장, 감각성, 주인공의 선동적이기까지 한 무관심과 부조리해 보이는 살인...... 이런 매력족 요소들로 단번에 각광을 받았죠. 세상의 일상사에 대한 무관심에 반비례하는 원초적인 감각성에 새한 언급이 늘 이 작품에 관한 한 따라다닙니다. 제 생각에 우리의 독자들에게는 그 작품의 알제리적·지중해적 정서가 굉장히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진 면도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당시의 실존주의적 상황과 우리 상황 사이의 대비적인 유사성도 작용했을 테고, 한편으로는 작품이 벗겨내는 유럽문화의 가치들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가 젊은 독자들에세는 매혹적이죠. 그러나 제가 이 작품에서 민감하게 본 석은 법이라든가, 교회·가족·관습 샅은 유럽이 기대고 있는 가치들의 탈신화화 경향이었습니다. 이건 물론『이방인』한 작품만 다루기보다는 전체 작품세계와의 연관에서 나오는 해석인데, 물신화나 교환의 양적 가치체제, 제도 등 인간을 왜소하게 하는 압박적 상황에 대항하는 일차적인 전략으로 무관심이나 거부 혹은 부조리를 해석하는 것이죠. 나는 모른다...... 베버 식으로 말하면 판단할 만하지 않은 것에 대한 뫼르쏘의 판단중지와 거부적인 행동 양식에 초점을 두는 것도 이 작품의 다른 면을 드러내줄 것 같아요.
설 아까 우리 독자가 카프카를 읽을 때 중요하게 경계해야 할 점이 삶에 대한 소위 실존주의적인 태도를 복합적인 맥락에서 때내서 일어나가고 거기에 탐닉하는 경향이라고 했는데,『이방인』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질테죠? 이 작품이 제도라든지 일반화된 삶의 관습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 다시 말해 사회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을 일단 사주면서도, 남는 문제들은 없을까요? 가령 알제리적 정서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예컨대 작품에서 아랍사람이 사실 죄없이 죽지 않습니까?
최 오히려 거꾸로 생각할 부분이 있죠. 어떤 사람은 작품이 씌어지던 당시 프랑스령 알제리의 상황에서 프랑스인이 아랍인을 죽인 것으로 사형에까지 처해지는 것이 비현실적인 반면에 작품에서는 뫼르쏘가 사형을 감수함으로써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속죄의 의미가 있다는 시점으로 보기도 하지요.
설 까뮈가 정치적인 성향이 보수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당대 최고의 진보적 지식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싸르트르와도 가까웠지 않아요? 싸르트르는 프란츠 파농의『대지의 저주받은 자들』발문에서 격앙된 어조로 식민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죠. 이런 사정을 생각해보면, 알제리 태생인 까뮈가 불란서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었을 법하진 않은데, 알제리를 무대로 한 이 작품을 식민주의 문제와 관련지어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해볼 여지는 없을까요?
성 저는 이 작품을 리처드 라이트의『토박이』와 대비시켜 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토박이』의 패턴은 사회 전체에 대한 조망이 전혀 없고 자신의 현실에 완전히 파묻혀서 그날그날 즉자적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말도 안되는 계기로 살인을 하게 되고 감옥에 가서 심판을 받고 죽게 되는 과정이지요. 살인 당시의 심리묘사나 감옥 안에서 비거가 혼자 생각하는 과정 등은『이방인』과 대비할 만하다고 봐요.『토박이』 경우에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도 그렇고 주인공이 그 상황에 대해서 전혀 전체적인 파악을 모사고 있고 왜 그랬는지도 제대로 설명 못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데『이방인』과 차이가 있다면 그 살인사건이 미국사회의 핵심적인 갈등과 닿아 있다는 것이죠. 비거라는 흑인이 자기에게 해꼬지를 한 적도 없고 오히려 잘해주려고 노력을 했던 주인집의 딸을 얼떨결에 죽이고 토막을 내어 보일러에 집어넣는 식으로 잔인하게 처리하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결국은 미국사회의 핵심적인 갈등인 인종문제로 다가가게 되거든요. 상황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매우 부조리해서 왜 이렇게 됐는지 논리적으로 설명 안되는 데가 있지만, 그래도 현실 자체는 핵심적인 갈등에 닿아 있는데,『이방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뫼르쏘가 살인을 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라든가, 어머니의 죽음, 이웃사람 등 여러 상황이 당대의 일상적인 현실에 들어가 있기는 하면서도, 그가 겪는 일들이 그 당시 알제리 상황의 핵심적인 문제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뫼르쏘 본인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읽고 난 독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가당치가 않아요.
최 불란서의 맥락에서는 평균적으로 받아들이는 전제들이 있는 부분이죠.
성 그 전제를 한국독자들이 몰라서 이해를 못하는 측면도 있겠죠. 그래서 필요하다면 그런 맥락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이 필요할 테지만, 구체적으로 해명을 해서도 이해가 안 되는 측면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설 『이방인』이 『깡디드』같은 불란서 풍자문학 전통에 속한다거나『걸리버여행기』와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잖아요? 요컨대 어떤 인물을 전혀 낯선 가치체계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 놓음으로써 특정한 가치체계를 풍자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해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불란서령 알제리의 가치체계에 전혀 낯선 뫼르쏘라는 이방인의 눈으로 알제리 사회를 그려나감으로써 작가가 그 사회의 가치체계를 극렬하게 풍자한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최 까뮈의 초기 에쎄이나「추방과 왕국」의 단편들 같은 나머지 작품들과의 연관관계도 중요한 것 같아요.『이방인』발표 20년 후 알제리 전쟁에 프랑스가 패하고 알제리 독립으로 이어지면서 반식민 담론이 대부분의 작가들에게서 크게 일어나는데, 약 한 세대 앞서 씌어진 그의 작품 곳곳에서 그 문제제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설 불란서 본토를 무대로 이런 소설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아까 최선생님이 이 작품에서 알제리적 정서가 중요하단 말씀도 하셨다시피,『이방인』의 작중 상황이 알제리적 색채를 강하게 환기시키고 있다는 건 충분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식민지 알제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정하게 알제리적 특성을 띠는 체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제도의 부조리성이라든지 이런 점들이 극대화된 모습으로 형상화된 측면은 없나요? 가령,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뫼르쏘가 죄없는 아랍인을 죽이는 행위는 불란서의 알제리 식민지배가 지닌 비이성적 성격을 환기시키는 면은 없을까요? 제도와 관습을 인정하지 않는 뫼르쏘의 태도를 그런 맥락에서도 이해해보고요. 예컨대, 식민지배체제 그 자체가 범죄적 제도니까 뫼르쏘로서는 그 제도의 틀 안에서 자신의 행위가 범죄로 규정되는 것을 인장할 수 없는 거죠. 작품 전반부에서 매사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던 것과는 달리, 후반부에서 그가 기독교에 대해 격렬한 반발을 보이는 것도 기독교가 식민지배에서 결과적으로 담당했던 인종주의적 기능을 염두에 두면 좀더 실감나게 읽을 수도 있겠죠. 제 얘기는 이 작품을 꼭 그렇게 읽자는 게 아니라, 작품의 구도가 그런 방향으로 뻗어나갈 만한 소지를 담고 있다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서도, 저는 김태현선생께서 금방이라도 "경이로운 해석!" 하고 '칭찬'하실까 조마조마합니다만. (일동 웃음)
최 『이방인』에서 그런 오묘한 의도성을 투사해서 읽는 것은 무리인듯싶고...... 나중에 『배교자』같은 작품에서는 기독교전파자가 아프리카 토착종교 앞에서 겪는 갈등양상을 그리면서 그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지요.
설 제가 고의로 좀 도식적인 해석을 내놔봤습니다만, 이 작품이 과연 현대사회의 문제, 또는 적어도 소재나 배경의 수준에서 작품에 들어와 있는 식민주의 문제를 제대로 다뤘느냐라는 의문과는 별개로,『이방인』을 두고 막연하게 인간조건의 근원적 부조리 운운하는 건 문제가 있다, 이건 여러분들께서 대체로 동의하는 바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자, 그럼 시대를 건너뛰어서 최근 작품들을 논의할 순섭니다. 아까 카프카 얘길 하면서 여러모로 꽉 막힌 당시 프라하의 삶을 거론했는데, 쿤데라도 체코 작가고『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또한 프라하가 주된 무대죠? 우리나리에서 흔히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사례로 거론되기도 하는 이 소설과 카프카의 경우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관심거립니다.
'존재의 가벼움'――초역사적 인간조건
김 쿤데라는『소설의 기술』에서 자신의 소설론을 펼치고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소설의 목표는 '실존의 탐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을 잘 뒷받침하는 작가가 카프카라고 말하고 있구요. 쿤데라의 소설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1988년인데 이때는 북방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동구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우리나라에서 각광받은 데 이런 관심이 일조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프라하의 봄」이 이 소설의 대중적 수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다가 이 소설의 독특한 서술과 내용이 수요를 유인하였습니다. 어떤 연유로 이 소설이 널리 읽혔건간에 이 작품은 우리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죠. 가령 황동규의 시 등 여러 작가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고, 90년을 전후하여 한참 거론된 욕망론이나 신세대문학론에서 쿤데라와 무라까미 하루끼의 소설이 자주 언급되고 심지어 어떤 작가의 소설은 이들의 소설을 표절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성적 자유라는 '가벼움'을 옹호하는 소설로 거의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 소설을 기존의 성에 대한 관념의 해체를 보여줌으로써 서구문화의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에 신빙성이 있는 지를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러기 전에 제가 느낀 것은 이 소설이 성의 해방만을 예찬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토마스와 테레사의 사회로부터 고립과 그 비극적 귀결인 이들의 죽음은 이를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존재의 가벼움이란 게 뭘까요?
최 직역을 하면 받쳐들 수 없을 정도로 가볍다는 뜻일 텐데 성, 정치, 미와 추, 성과 속 등 서구의 이분법적인 틀의 재조정의 시도로 씌어진 작품 아닐까요? 전체적으로 늘 폄하되던 한쪽의 가치들을 부각시키는 반면, 전래적으로 중력을 지녔던 가치들이 현대사회 속에서 의미를 잃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랄까요?
설 제가 보기에 이 작품에는 가벼움, 무거움이라든지 그런 이분법적 구도가 추상화된 모습으로 철학적 사유의 대상처럼 나오는 한편, 그것이 토마스를 비롯한 작중인물들의 특정한 현실사회주의 경험과 관련되는 면도 동시에 제시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토마스나 사비나가 인간들끼리의 진정한 유대관계에 이르지 못하고 보기에 따라 쾌락주의적인 행태를 벌이는 것은 사회주의가 대변한다고 간주되어온 가치들이 와해되는 과정에 의해 일정하게 조건지어지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면이 작품의 도처에서 나타나죠. 말하자면 정치적 선택이나 결단의 무의미성, 의탁할 만한 가치의 부재,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측면이 크다고 생각되요. 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가벼움"의 의미를 추상화하는 것은 작품의 한 면만 보는 것이거나, 아니면 예컨대 작품의 화자가 서두에서 니체의 영원한 회귀라는 명제를 인용하면서 펼치는 사변 따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닐까요? 물론 역사적 상황 속에서 조건지어진 '존재의 가벼움'을 작품이 초역사적인 인간조건으로 몰아가는가 아닌가는 따로 짚아봐야겠죠. 저로서는 가령 사비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이으로 사귀게 되는 프란쯔 등이 캄보디아 평화대행진을 떠나는 과정의 처리가 부조리극이나 블랙코미디를 전형적으로 떠올린다든지 하는 부분을 보면서 그런 혐의를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프란쯔를 위시하여 행진 참가자들의 죽어가는 방식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요.
최 개인적으로 행동을 할 때마다 죽어버리죠.
성 의탁할 수 없음이라는 상황에 대해서 의탁할 것이 있었는데 못했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정말로 의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냐 하는 논의는 사실 제일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논의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카프카의 작품들과 비교를 해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만한 여러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애요. 일단 소련의 프라하 침공이라는 역사적으로 주요한 사건이 배경으로 깔려 있고, 등장인물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상황과 깊이 연루되어 있고, 게다가 그런 역사적 상황이 남녀관계 같은 은밀하고도 개인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보면 정신병리학적으로 드러나는 데서 오는 재미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결국에 보여주는 정서는 말하자면 카프카에 대해서 우리가 얘기했던 맥락과 연속성이 있는 듯 해요. 단지 카프카에 비해서 훨씬 사실적인 면에서 자극적인 요소들을 결합시키면서 역사적인 상황이 개인의 아주 은밀한 부분에까지 어떻게 작용을 하고 그것이 추상적인 사고의 측면에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줬다는 것이죠. 이 자극적인 측면의 효과를 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을 읽게 된 과정이 다른 분들과는 조금 달라서...... 이 작품을 흉내냈다고 말하면 욕이 될지도 모르지만 쿤데라한테 영향을 받아서 발표된 우리나라의 작품들을 먼저 읽었어요. 그리고 정작 이 작품은 나중에 보게 됐는데, 아주 불쾌한 감정은 아니죠. 그러니까 소설가가 여러 가지 차원의 현실을 각각 그려내는 데 있어서 역사현실에 대한 이해의 불철저함을 개인적인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세밀한 묘사로 커버하고, 또 남녀간의 문제조차도 끝까지 천착하지 못하는 것을 역사적인 배경으로 커버하든가 관념적인 사색으로 커버하는 식의 작품을 양산하는 빌미를 제공한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최 동일한 사건들을 다른 단면으로 비추어준다거나 하는 구성에서 브레히트의 영향도 보이고, 단장식의 전개라든지, 부담없는 사색 같은 것이 이 작품의 패스티쉬를 용이하게 하는 함정인 것 같습니다. 성선생님의 불쾌감을 이해할 만하고, 저도 책을 덮는 순간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영화화되었다든지, 또는 동구가 이념적으로 몰락한 후, 동구사회의 일상을 작품을 통해서 보겠다는 호기심도 이 작품이 인기를 얻는 데 작용했으리라는 혐의를 두는데, 어떻습니까?
설 그렇죠. 그런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떠도는 자신의 삶을 토마스가 그래도 붙들어매고자 하는 가치랄까, 이런 게 결국 테레사와의 관계 아니겠어요? 성선생님이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작가들이 남녀관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그것을 사회적 맥락과 적당히 섞어서 넘어가려고 하는 불철저한 경향이 보인다는 지적을 하셨는데, 정작 이 작품 자체는 어떻습니까? 작품에 나오는 남녀관계를 여성론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최 여성인물의 형상화에는 실패했다고 느낍니다. 여성에 대한 아주 진부한 편견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많아 그 부분은 아예 접어두고 읽었죠. 이 작품의 결정적인 흠이지요.
설 그리고 또 한가지. 가령 프란츠 같은 인물을 끌어들임으로써 사회주의 체험과는 다른 체험을 겪어온 사람의 자본주의적인 사고, 자본주의적인 경험, 이런 것이 나타나기는 하죠. 그런데 작품의 구도가 프라하에 중심을 두고 있고, 얘기도 프라하에서의 체험을 근간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사회주의적인 제도의 억압적이고 문제적인 성격과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문제성에 대한 인식이 어느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볼 만한가요?
최 미국도 비판을 하죠.
설 하긴 하는데 그 비판의 수준이란 것이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비판에 적어도 버금가는 정도라도 되는 건지가 의문이에요.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해설한 어느 글을 봤더니 반공주의자들이 이 소설을 반공소설로 선전하는 건 터무니없는 짓이다, 이랬더군요. 그런데 굳이 반공주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반공소설로 읽힐 소지는 있는 것 아닌가요.
성 반공소설이죠. (웃음)
최 쿤데라가 이 작품을 쓴 것이 1984년인가요? 그 작가가 프랑스로 이주한 지 근 10년이 가까워오는 시점인데, 그 즈음에 사실 유럽의 분위기에서, 그리고 그 전의 쿤데라의 작품경향으로도 반공·친미 등의 사안에서는 멀리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는 거대하게 해석을 붙여주는 것보다는 일상성의 여러 양상에 대한 가벼우며 부담없는 재해석 정도로 보고 싶은데요. 토마스란 인물이 조금 재미있는데, 그는 방어적이기는 하지만 의사에서 농군으로 전락할 때까지 자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아니에요? 문학 속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인물이죠. 체제에 대한 강한 미움이 있는 반면 자신이 어차피 체코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 사람이란 걸 여러번 강조하기도 하죠.
설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당시 유럽의 정황이 그랬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죠? 그런데 제가 반공주의를 들먹이는 건 이런 뜻입니다. 요컨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그게 그거다, 둘다 헛된 가치에 인간을 감금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다, 아니 인간의 삶이 워낙 그렇고 그런 거니 공산주의면 어떻고 자본주의면 어떠냐,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거지, 뭐 이런 태도를 조장한다면 그건 결국 지금 현실이 자본주의니까 그걸 그대로 인정하고 주저앉는 태도인데, 이건 경우에 따라 극우반공주의 찜쪄먹을 만큼 친자본주의적인 태도로 귀착될 수 있거든요. 극우반공주의의 논리적 모순이야 사실 뻔히 들여다보이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이런 허무주의적 친자본주의는 거창한 존재론적 기반을 깔고 나오거든요. 이 작품이 만약 그렇다면, 카프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카프카의 자기 삶에 대한 비극적이지만 비타협적인 천착에 비하면 상당히 격이 처진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성 그런 면은 있어요. 그리고 동구권 출신 작가가 쓴 것이기 때문에 동구의 몰락과 결부되어 우리가 관심있게 본 것이기는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역사적인 배경이 굳이 동구의 몰락과정이 아니라도 상관없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애요. 그러니까 체코 역사의 특수한 맥락으로부터 현대사회의 일상성의 참을 수 없음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또 삶의 보편적 양상이란 식으로 부당하게 추상화하고, 그런 느낌이에요.
설 쿤데라는 그 정도로 하고『장미의 이름』으로 갈까요?
『장미의 이름』의 허와 실
최 저는 이 작품이 탐정소설로만 읽히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대중소설이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고 쿤데라의 사색조와는 비교가 안되게 유럽문화를 형성한 철학적 논의의 장을 열고 있는 작품이라고 봐요. 영화가 마치 그중의 알아볼 만한 부분에 밑줄을 그어주듯이 재현해주었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어려운 부분을 참고 읽게 만드는 면이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도 영화 덕을 본 작품이죠. 물론 지적 유희도 없지 않지만, 일생을 문화기호론자이자 문학이론가로 보낸 사람이 소설을 쓸 때 그가 누적한 세상독법을 끝까지 밀고나가 보고 싶은 작가적 욕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성 일반 독자들에게 수용되는 측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죠.
최 이 작품이 무대로 하고 있는 14세기는 어찌 보면 세계의 기호적 재현이 아주 복합적으로 태어나는 시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것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에 대한 논쟁이 복합적으로 제기되는 지점이라는 말과 같겠지요. 그 논의의 방대함과 다양함을 잘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은 주인공을 통해 단지 질문만을 던질 뿐입니다. 소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품어온 서구의 최근 분위기에서 소설을 쓰는 자의 입장은 매우 불편했을 것입니다. 이때 대답을 주는 인물이 아니라 질문만을 던지는 주인공이 태어나는 것이 아닐지요. 윌리엄은 마치 14세기에 서구에서 일어났던 기독교와 철학과의 관계, 타락한 심판자, 성경 외적 지식에 대한 탄압, 성경의 번역을 둘러싼 세계해석의 문제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결과적으로는 당대 기독교문화의 어떤 맥락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은연중에 드러나요.
설 독점적 지식의 횡포랄까 그런 것에 대한 비판은 일정하게 사줄 만하지요. 그런데, 기호 얘기를 하셨지만, 기호를 굳이 거론해야 작품의 중요한 측면들이 부각되는 건지, 전 그게 좀 의문스러워요. 예컨대 바로 도입부에서 당나귀 발자국을 보고 윌리엄이 자기가 그 당나귀 이름을 알아맞춘 과정을 기호 개념을 동원해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건 사실 탐정소설에서 흔히 단서라든가 추리라는 용어로 다 써먹은 거잖아요? 그걸 구태여 기호학 운운 하면서 의미부여를 하는 게 전 좀 어리둥절했어요. 기호학이 이 작품에서 하는 구실이 어떤 걸까요?
최 기호의 작동을 통해 세상을 보는 에꼬의 시선이, 그의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이 작품의 서술구조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서술이 이 작품의 열쇠인 듯 합니다. 잠정적으로 제시되는 답변은 모두 그른 반면에 이 작품
에서는 질문만이 옳다고 얘기하면 어떨 지요. 14세기 이후 약 6세기에 걸쳐서 축조되고 또 재축조되면서 조금씩 답변될 철학적 답론들에 대한 질문을 이 작품은 바로 14세기의 질문처럼 한자리에 모읍니다. 실제로 그런 질문을 던질 여지들이 이미 그 시기에 산발적으로 나타나 있기도 했겠지요.
설 사실,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와 세부적인 대목대목에 기호학자의 관심이 스며 있는 건 분명하다고 생각돼요. 그런데 그런 면을 너무 의식하다보면 정작 봐야 할 게 안 보일 수도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죠. 상업적으로 그 면을 은근히 부각시키는 경향도 없잖은 것 같은데, 자칫하면 독자들을 미망에 빠뜨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 (웃음)
최 글쎄 에꼬가 꼭 상업성을 고려해 그 면을 부각시켰다기보다는 그의 성향의 결과겠지요, 유럽에서의 그의 오랜 명성이 작품의 유통에 도움을 준 점은 있겠지요. 오히려 대중성의 측면은 이 작품의 여러 층의 대중에게 여러 독법으로 읽힐 가능성의 여지를 주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설 그렇죠. 여러 층의 독자들을 끌어당길 요소가 있다, 바로 그 점도 한번 짚어보죠. 제가 잘 아는 교수 몇 분이 이 소설을 호평하시기에 제가 물어봤어요, 어떤 점이 좋으냐구요. 그랬더니 이유가 몇 가지 있더군요. 하나는 그 안에 방대한 문헌학적 인용이 담겨 있다는 거죠.
최 그 안에는 그만큼 가짜 인용도 많고 그의 박학이 유머러스한 여유를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설 두 번째 이유는 여러 가지 코드로 읽힐 수 있다는 거였어요. 지금 최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논리일 텐데 저는 그 점을 이모저모 검토해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여러 독자층에게 동시에 읽힌다고 하는데, 문제는 여러 독자층에게 동시에 읽히면서 독자층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고 했을 때 그게 반드시 바람직한 것인지는 따져볼 문제라고 봐요. 문학에 깊은 관심이 없는 독자는 추리소설로 받아들이고 관심 있는 독자는 학문적인 관심이나 문학적인 관심으로 읽는다고 했을 때, 만약 그 둘을 결합하는 접점이 헐겁다면 문제 있는 작품일 가능성이 없지 않을 테죠. 뭐,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 점을 한번 짚어보자는 겁니다.
최 우리 독자들에게는 영화 때문에 분명히 추리소설로 읽혔을 가능성이 많겠죠. 게다가 우리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은 무의식의 수준에 이를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데다가 기독교적 지식과의 대립에서 수많은 담론이 태어나는 그들의 역사와는 엄연히 거리가 있으니까요.
설 제 얘기는 이 작품에 추리 소설적 관심과 문헌학적,역사적 관심이 온전히 통일되지 않은 채 절충적으로 병존하고 있다면, 이건 일종의 양다리 걸치기 아니냐, 이쪽에도 추파를 던지고 저쪽에도 추파를 던지는, 뭐 그런 셈 아니냐는 거죠.
최 문헌학적,역사적 지식을 적당히 장식해서 만들어진 추리소설이 서구에는 숱하게 많지만 이 작품의 경우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추리화되어 있는 것은 연쇄살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추리-어원적 의미로서의-는 담론의 추리지요. 기독교계의 비리, 기독교 분파 사이의 권력관계, 아리스토텔레스적 지식과 성경적 지식의 대립등에 던지는 질문에 대한 추리가 윌리엄을 따라 독자의 몫으로 남으니까요.
성 그런데 전 이 소설이 추리소설 기법을 원용한 탓에 허술해진 구석도 없진 않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좀 지엽적인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서고가 불타기 직전, 범인이 호르헤르도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와 윌리엄이 최종적으로 맞딱드리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윌리엄이 호르헤에게 이건 어찌된 거고 저건 어찌된 거냐고 묻고 또 헤르호가 득의에 차서 자상히 답하고 하는 과정이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사실 웬만한 독자는 다 알고 있는 얘길 두 사람이 주고받거든요. 결과적으로 작품의 파국에 해당하는 부분이 늘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말하자면 추리소설의 장르적 타성이 발목을 잡은 거죠. 아마 추리기법을 사용한 데서 오는 문제는 잘 따져보면 이것 말고도 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 영화 애길 하셨는데, 마지막 부분 처리가 재미있어요. 소설에서는 수도원이 불타자 종교재판관 일당이 탈없이 수도원을 벗어나는 걸로 돼 있는데, 영화에선 사하촌 민중들이 재판관 일당이 탄 마차를 뜬금없이 기습하고, 심지어 화형 당할 여자를 구하잖아요? 그리고는 그 여자와 앗소가 포옹까지 해가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는 멜로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처리되죠. 전 그걸 보면서 영화를 너무 처절하게 끝내지 않아야겠다는 헐리우드 특유의 상업주의적인 계산이 소설에서는 패배로 끝난 과거사실들만 처리돼버린 민중의 저항을 현재진행형으로 살려놓았구나, 하고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어요. 영화의 그런 처리가 물론 실감은 없어요. 요컨대 저는 중세에서 자본주의를 거쳐가는 역사적 변화의 과정에서 민중들이 담당했던 역할을 꿰고 있는 현대의 작가가, 이미 자본주의적 기운이 싹튼 14세기 이태리를 소설로 다루면서 당대 민중들의 모습을 거의 철저하게 무력한 존재로 그렸다는 걸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 이런 문제도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출신배경으로 봐서 수도원 안에서 유일하게 하층민중에 속한다고 할 살바토레는 외모부터 기형적이잖아요?
현재성 결여, 역사적 허무주의의 일면
성 이 작품의 배경이 중세의 기독교가 더이상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 1327년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 시기에 인문주의적인 사유랄까, 그런 사유로부터 종교적인 내용을 지키려는 노력이 각 교파마다 다른 입장으로 충돌하는 묘사가 흥미롭게 읽히기는 했어요. 그런데 그런 것이 끝까지 천착되지도 않았고, 종교와 정치권력의 좀더 물질적인 연관성이 끝까지 추적되지는 않고, 없어진 책에 대한 추적이 나중에 가서는 진리의 추구라는 문제로까지 확대되는데, 전해지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대한 일방적인 설명만으로는 그런 큰 주제를 다 소화해내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면 모든 논의가 제목처럼 '장미의 이름'으로, 제일 마지막에 인용된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덧없는 이름뿐" 하는 식으로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이름에 대한 사유, 우연히 촉발된 사건이라든가 남아있는 자취, 유물의 파편이 현재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를 어떻게 추적해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는 것으로 작품의 중심이 설정되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설선생님 말씀처럼 중세 역사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천착에 작품의 중점이 아예 가 있지를 않는 것 같아요.
최 [장미의 이름] 서문에 에꼬가 "나는 이 원고를 만들면서 현재성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 얘기를 주목해볼 수 있겠지요.
설 그런데 사실 그 서문은 일반적인 저자서문이 아니잖아요? 작품의 화자인 앗소의 수기를 이태리어로 번역한 에꼬가 쓴 서문으로 돼 있으니까, 이때 에꼬는 이미 소설구도 속에 들어가 있는 허구 인물인 셈이죠. 그러니까 현재성에 관심 없다는 서문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게 못되죠. 실제 이 소설은 금세기말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 현재 특유의 관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저는 이 소설이 푸꼬가 말하는 초역사적 권력의 편재성이란 주제를 소설화했다는 인상을 대뜸 받았어요. 작품에 나오는 여러 개인이나 집단은 입장과 신분의 차이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들이죠. 정치적,종교적 지배집단이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한 투쟁, 그 나름의 이상을 지니고 기득권 세력에 도전하는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의 투쟁, 그리고 생존을 위한 하층민의 투쟁마저 추상화된 권력투쟁으로 한데 뭉뚱그려지고 있어요. 이처럼 지배자의 투쟁과 피지배자의 투쟁을 추상화, 동질화 해서 보는 건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인간들의 노력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데로 통하기 쉽죠.
성 중세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력들과 그들의 형태를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으니까, 그들이 수행하는 역사적 역할의 차이를 부각시킬 수 있는 소지는 스스로 제공하고 있으면서도 작가는 그런 부분은 그다지 파고들지 않는 것 같아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의미를 추적해서 진리를 발견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가, 또는 그와 같은 진리의 발견이 과연 가능하기나 하는가, 이런 문제에 작품의 중심을 놓고 작품의 영역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그런 부분이 좀더 현실적으로 부각될 수 있는 여지가 실제로 작품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능성이 차단되어 버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요.
설 그런 의미에서 전 [장미의 이름]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크게 보면 깔려 있는 전제가 통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적인 태도죠. 작품의 사줄 점을 충분히 사주면서도, 우리 처지에서는 조심해서 읽어야 할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닌 작품인 듯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열 한시에 만났는데 지금이 여덟십니다. 바야흐로 장장 아홉 시간에 걸친 좌담을 끝막음할 때가 오긴 오는군요. 원래 계획하기로는 우리 문학계의 상황에 비추어 서양 고전소설에서 취할 점이 있다면 무얼까, 그런 점도 거론해 보기로 했습니다만, 다들 너무 지쳐서 그 얘길 본격적으로 하자고 했다간 사회자가 엄청난 지탄을 받게 생겼습니다. 다음 기회로 돌리는 게 순리일 듯하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간단히 한 말씀씩 하시면서 자리를 마무리하죠.
남겨진 과제들
최 대찬성입니다. 그 얘기를 하려면 다시 아홉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를 뿐 아니라, 고전작품과 그 수용을 둘러싼 문제점들을 점검해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문학의 향방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드높고, 그럴만한 위기요인도 두루 언급되는 시점에서 외국문화의 마구잡이식 유입보다는 우리 문학의 맥락에서 올바른 '수혈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당한 수용의 통로와 연관제도가 하루 빨리 재정비돼야겠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번 좌담 덕분에 작품들을 다시 읽었을 뿐 아니라, 훌륭하신 좌담자들 사이에 끼여 솔직히 맘껏 즐겼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오늘 좌담이 오래 전에 읽었거나 여태 읽지 못했던 소문난 서양문학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 기회를 잘 살리지 못해 마음 한구석에 회환과 자책이 남습니다. 최근 우리 문학계의 영토는 나날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온갖 작품이 난립하고 문학에 관한 의견도 분분합니다. 어떤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좋을지를 잘 몰라서 방황하거나 통속적인 문학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독자들이 상당히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풍문과 상업주의에 의한 서양문학의 무분별한 수입이 이런 사태를 부추기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서양문학의 줏대 있는 수용은 요즘 더욱 절실합니다. 외국문학의 전공자들이 해당 분야에서 거둔 학문적 성과를 동업자들에게만 공개할 것이 아니라 이를 비판적으로, 대중화하는 작업은 그 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국문학에 대한 탄탄한 이해에 공헌함으로써 결국 우리 문학을 풍요롭고 깊이 있게 하는 데도 기여할 것입니다. 이 좌담에서 제가 다시금 크게 느낀 것은 그런 일을 위한 토론의 필요성입니다.
성 오늘 작품 논의를 하면서 작품에 대한 일반독자들의 선입견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했는데, 사실 고전소설 한 권을 집어들고 읽는다는 일 자체가 독자들에게는 큰 부담이거든요. 그러니까 독자들에게 직접 이것저것 고려하면서 읽으라고 주문하는 게 참 무리한 일입니다. 그럴수록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제대로 된 번역과 충실한 해석에 힘을 써야겠고, 그 작품이 우리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유명한 작품이니까 알아서들 읽어라,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읽는 사람이 무식한 소치다, 이런 식의 태도는 우리 문학의 풍토를 척박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설 사실 전 천성이 소심한 편이라 웬만해서는 남 흠잡기를 꺼리고 말도 쪼심 조심하는 편인데, 너무도 점잖은 분들 사이에서 사회를 맡다보니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트집도 잡고 또 때로는 좀 도식적으로 나간 것 같기도 해서 개인적으로는 좀 손해본 기분입니다. 다들 양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논의가 여러모로 미진한 구석이 있습니다만, 사실 그 미진함의 상당부분은 학술적인 지면이 아닌 어느 정도 대중적인 장에서 외국문학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해볼 기회가 그만큼 없었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반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래 미뤄두었던 이런 논의와 작업들이 이번 좌담을 계기로 복돋워지길 기대합니다. 오랜 시간 애들 많이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