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
박래여
격월 수필잡지인 그린에세이를 받았다. 책 속에 꽂힌 원고청탁서를 뽑아내고 책갈피를 휘리릭 넘겼다. 딱 멈추는 자리를 폈다. 익숙한 수필가의 이름에 꽂힌다. 그 수필가의 글을 단숨에 읽었다. 나도 모르게 ‘선생님!’ 울컥 목젖이 울었다. 많이 미안하고 많이 보고 싶다. 어떻게 지내실까. 거동은 하실까. 소통은 되실까. 전화를 걸어보고 싶다가도 ‘집 사람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선생님의 부군께서 보내주신 문자를 기억한다. 그 분께 무슨 말을 하겠는가. 가슴만 아프게 할 것 같아서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나 근황을 알 수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뒤지기도 했다. 선생님의 홈을 열어봤지만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아직 생존하시는구나. 다행이다. 병문안조차 부담스러울 것 같아 접었다. 몇 년 전, 선생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문우 몇이 병문안을 다녀온 것이 마지막 뵌 모습이다. 말씀도 잘 못하시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병원에서 두 번째 쓰러지셨고, 수술 후 서울 큰 병원으로 옮겨 재활치료를 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면 만날 수도 있고 수다도 떨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들리는 소식은 암담했다. 재기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면서 병문안 가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나 역시 장거리 여행은 어려워지면서 선생님은 늘 마음속에 있었다. 가끔 병문안 가서 찍은 사진을 열어볼 때가 있다. ‘선생님, 뵙고 싶어요. 힘내세요.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해지셔야 해요.’ 기도한다. 선생님의 따님이 수필가로 거듭나면서 가끔 글을 만났다. 은연중에 비치는 따님의 글 속에서 선생님을 추억할 수 있길 바랐다. 역시! 친구처럼 가까웠던 모녀의 모습이 선명하다.
선생님과 처음 맺은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어민 신문사에서 전국 농어촌 여성문학회를 발족하면서 선생님을 지도교사로 모셨었다. 단아하고 고운 분이셨다. 호탕하고 속이 깊은 분이기도 하셨다. 선생님과 제자가 아니라 같은 길을 걸어가는 선후배로 허심탄회하게 정이 들었다. 선생님은 다른 도에 사셨지만 경상도 문우들과 더 돈독했던 것은 선생님도 경상도 태생이었기 때문이리라. 전국 농어촌 여성문학회 회원들은 일 년에 두 번 1박2일로 모인다. 정기 문학모임은 서울에서 한다. 여름 하계 문학기행은 각 도별로 돌아가며 장소를 정해 모이지만 경상도 문우들과 선생님은 더 자주 만났고, 자주 오갔다.
선생님의 건강한 모습을 뵈었을 때가 오륙년 전, 진도에서 가진 하계 문학기행지였지 싶다. 바닷가 펜션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짭짜름하고 비릿한 바다냄새보다 더 진한 글 사랑이고 촌부사랑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사십여 명의 문우들이 가져온 지역별 특산물을 펼쳐놓았지만 이야기보따리에 비할 수 있을까. 밤새도록 한방에 이부자리를 펴고 선생님과 조곤조곤 삶의 이야기를 나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었었다.
선생님은 참 따뜻한 분이다. ‘래녀 씨, 잘 지내?’ 항상 먼저 근황을 물어 주셨다. 힘든 문우에게 경제적 도움도 주셨다. 때로는 언니 같고 때로는 인생의 대 선배 같았던 선생님, 힘들다고 푸념하면 다들 그러면서 살아간다고 ‘래녀 씨는 잘 하고 있잖아. 힘내’ 힘을 실어주셨다. 선생님이 주신 사랑과 애정에 대한 보답을 전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미안하다. ‘선생님, 힘내셔야 해요.’ 선생님이 계신 곳을 향해 간절함을 전한다.
따님의 글에서 선생님 근황을 알게 되어 반갑고도 눈물 난다. 따님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걱정하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외손자를 안아보셨구나. 얼마나 뿌듯하실까. 외손자 사랑이 넘치는 글을 쓰셨을 텐데. 삶의 희로애락을 글로써 푸는 글쟁이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는 작가만의 고통이 아닐까. 선생님도 그런 아픔을 속으로 삭이고 계시지 않을까. 이제 다 내려놓고 편안하게 손주들 재롱 보며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아니, 선생님 미안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알고 계실 것 같다.
책장에 꽂힌 선생님의 수필집을 꺼낸다. 너덧 권의 수필 집 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수필집은 선생님의 첫 수필집 ‘돼지일기’다. 선생님은 내게 참 소중한 인연이다. 촌부로 산다는 것도, 글쟁이로 산다는 것도, 내 속에 든 아픔과 외로움, 사랑과 그리움을 풀어내는 일이다. 또한 삶의 순간순간에 깃드는 깨달음을 글로서 풀어내고 가다듬는 것이리라. 선생님은 그 길의 동반자이자 길라잡이셨다.
문득 ‘미안하다’는 말과 ‘죄송하다’는 말의 뜻과 쓰임새를 생각한다. 두 말의 뜻은 비슷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손아랫사람을 대할 때, 죄송하다는 말은 손윗사람을 대할 때 쓰는 말이다. 손윗사람이라도 친근한 사이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 미안할 수도 죄송할 수도 있지만 더 소중한 것은 살아있음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그린에세이 2022.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