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열방을 품는 무릎 선교사
이재환 선교사
“저는 주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네요. 선교사로 나가지 못하고 이렇게 남아서 먹고만 사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과감하게 현장으로 가는 선교사님들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이는 신실한 성도들로부터 종종 듣는 말이다. 정말 모두가 선교사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못가는 사람은 이런 괴리감에서 사는 것이 정당한가? 이런 분들에게 가지 않아도 훌륭하고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선교사적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을까? 이런 일로 고통당하는 분들에게 바른 선교관을 알려드리기 위해 시작한 것이 ‘요나선교학교’다. 이 학교에서는 ‘선교지로 가야만 선교’라고 이해하는 성도들에게 가지 않더라도 진정한 영적 선교사가 될 수 있는 길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 훈련을 통해 선교의 큰 그림을 보게 되며 훌륭한 ‘무릎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된다. 무릎 선교사를 또는 ‘골방 선교사’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이 진정한 중보 기도선교사(Intercessory Missionary)들이다.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골방기도를 하기가 편리하게 되어있다.
어느 집이나 작은 골방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골방은 방이 아니고 옷을 걸어두는 클로셋(closet)이다. 그러나 이곳은 기도하기에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미국의 유명한 키네스 헤이건이라는 목사님도 이곳에 옷을 걸지 않고 기도의 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장롱을 사용하기에 그런 작은 방은 없을찌라도 조용한 곳이 있으면 기도방이 되는 것이다.
이 작은 골방이 우리의 지성소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세상의 문을 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곳이다. 아무도 모를 때 그분은 아시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그분은 나를 보시는 곳이다. 아무도 듣지 않을 때 그 분은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 이 골방은 작은 곳이 아니다. 세계를 다 품을 수 있는 곳이다.
세계 어디나 갈 수 있는 곳이다. 우주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과 나만이 있는 곳이다. 무릎으로 온 세상 구석구석들을 다 갈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기도의 응답이 만들어지는 산실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방이다. 왕상 22장에는 아합왕을 따르는 400여명의 가짜 선지자가 있었다.
이들은 아합왕에게 아첨하였고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생명을 걸어놓고 진실을 예언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가짜 선지자 시드기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골방은 비밀의 방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받는 묵상, 향심 그리고 관상할 수 있는 곳이다. 내 안에 골방이 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지성소가 있다.
우리는 이 성령님이 계시는 지성소에서 무릎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를 놓고 기도한다. 특히 미전도종족 중에 한 종족을 나의 종족으로 품고 땀과 눈물과 그리고 아픈 마음을 가지고 해산의 수고를 하며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참된 예배자로 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이들이야 말로 하나도 부끄럼이나 모자란 점이 없는 순결하고 귀한 선교사님들이다. 이들의 입술의 기도는 구약의 송아지나 살진 어린양처럼 제물로 드려 지는 것이다.(호14:2) 하나님은 이들에게 선교사들의 기도의 짐을 나누어 준다.
에베소서 1장 17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열어서 보여 주신다. 이들의 기도로 선교사들의 사역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짊어지며 일하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무릎 선교사였다. 그는 외국에 가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열방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고 그의 기도의 입술 위에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었다. 예레미야 1장 10절 “보라 내가 오늘날 저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그 입술 위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릎 선교사, 골방 선교사의 능력의 기도이다. 이들은 영성이 깊어진다.
골방의 기도는 깊은 하나님과의 독대의 기도이다. 이들의 기도의 능력에 따라 미전도 종족이 없어진다. 선교사들이 힘을 얻는다.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나라 교회는 모든 성도가 무릎 선교사가 될 수 있다. 모든 성도가 선교사적 삶을 살 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바울의 선교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돕는 무릎 선교사들 때문이었다. 로마서 16장을 보아라. 그들이 다 바울을 위한 무릎 선교사들이다. 바울이 온 세상을 발로 걸으며 복음 전하는 여행을 할 때 그들은 같은 시간에 골방에서 무릎으로 바울을 좇아간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바울의 사역은 가능하지 않았다. 안디옥에는 성령에 붙잡힌 무릎 선교사들인 성도들이 있었다.
이들의 금식기도와 철야기도, 변치 않는 사랑과 관심이 없었으면 그 일을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골방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다. 환상을 보았다. 실제처럼 기도했다. 선교 여행은 한 없이 멀지만 기도의 무릎으로 갔다. 성경의 안나 여선지자는 결혼 생활 겨우 7년을 하고 남편을 잃었지만 신랑 예수를 기다리며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나이 84세 되어서야 어린 주님을 만난다. 그의 기도가 실현되었다.
이 땅에는 무릎선교사로 헌신하여 금식을 밥 먹듯이 하며 시간과 정신을 모아 전심으로 중보 기도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이들이 선교지에 나간 선교사들보다 훌륭하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대한의 성도들이여 무릎 선교사로 헌신하라! 골방에 들어가 온 세상을 품고 기도하라. 하늘 보좌를 움직여라. 한 번도 본적이 없고 가본 적이 없는 종족일지라도 가슴에 품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도하라! 마치 닭이 병아리를 품고 기어코 부화를 시키듯이…….
선교사의 영적관리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 되는 것은 매일 다가오는 새로운 도전들 앞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적인 답을 제공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최우선순위이다.
1. 일에 밀려 뒤쳐지는 주와 동행..묵상과 기도생활
갑자기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구했다. 주님은 항주에서 한달간 기도하게 하시더니 갑자기 '인천,상록수'란 괴상한(?) 응답을 주시더니 날 그 곳에서 몰아내셨다. 다른 지체들로부터 결려오는 전화는 선교사님 언제 가셔요? 사실 항주에 가서는 아내의 유치원짐만을 정리하고 오려했지만 기질상 직업상 나는 그곳을 탐내기 시작했다.
살기에 좋고 사람들도 그럭저럭 그래서 그곳에 더 머물고자 했을 때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거기가 아니라고 압력을 넣으신 것이다.
서 있어야 할 곳,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 밀리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분주해져서 주와 동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는 영적인 어두움이고 마귀와 사탄의 공격에 노출되어 또 다시 힘겨운 광야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다가 당하고 죽고 만 결과다.
너무 바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하며 때때로 아무 일없이 주님과만 머물러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예수님이나 선지자들이 그저 머물러 있는 때에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며 새로운 영감과 비젼을 받았다. 선교사여 바쁜가? 지금 그대가 하는 일은 누구를 겨냥한 일인가를 생각하라...
2. 예배 생활의 회복..진정한 교회는 내 안에
우리는 선교사가 때때로 지역교회와 연합하여 항상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잘 안다. 실제로 위험지역에서는 찬송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흔히 생각하는 '제단'앞에서 예배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교회-한국교회가 이 점을 이해하긴 쉽지 않다. 아마도 미주나 기타 다른 지역..불교권이나 이슬람권 사역자..혹은 배 안에서 예배해 본 분들...등등 정말 주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안 가신 곳이 없다. 그런데도 선교사에게 한국적인 예배 스타일이 머리와 몸에 박혀있어서 무언가 모여서 의쌰의쌰하고 박수도 치고 제단을 향해 통성기도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실제로 선교지에 오래 있으면 그 갈망은 점점 더 깊어진다. 태국선교사들 얘기다.
그 동안 언어한다고 태국어로만 하다보니 영성이 떨어져서 10년 쯤되니 다시 모국어로 예배가 그립고 실제로 개인영성은 한국어 예배로 드려야 한단다. 결국 어떤 선교사님은 한인교회도 하게 되고 나중엔 선교사와 한인교회 목회자간에 '선교사 규정'에도 문제가 나온다. 선교사란 해외의 타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데두 가지를 다 하고 싶은 것이다.그래서 욕심이 생기고 그것들 안에서 교회 안의 분쟁과 다툼이 선교지에 까지 이어진다. 나 자신도 방콕한인교회를 임시담임하 동안 '두 개의 밥그룻'에 빠져 깊은 시름을 했다. 결국 주님은 다시 원주님선교에 매달리게 하셨다.
예배란 로마서12장1~2에 있듯이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인데 우리는 때때로 예배 매너리즘에 빠져 실제생활에서는 딴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지요. 주님은 우리의 율법적인 생활을 미워하십니다. 은혜로운 삶은 결국 깊은주님과의 만남인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소멸치 않고 그 은혜에 붙들리고 그 은혜에 겨워서 만족하고 풍족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선교'가 의무가 되거나 우리에게 기쁨을 빼앗아 가는 일을 하면 그것도 마귀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이 될 수 있습니다. 선교를 빙자하여 하나님을 속이는 선교사들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 있고 그의 은혜 안에 머물도록 깊은 주님과의 만남인 삶의 예배를-산제사-를 그쳐선 안 될 것이다.
3. 신약적교회와 초대교회의 회복...장소초월,사무실,현장업소예배등
우리공동체교회는 어제 주일에 송탄 외국인지원센터 사무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늘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바라고 희망한 우리들은 사도행전2,42~47을 생각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예배)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교제)또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니(봉사)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선교,전도)"고 하였습니다.
봉사나 선교보다 앞서야 할 것이 있습니다. 크리스찬의 교제역시 만남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즈 교회들이 식사나 만남을 통해 교제하지만 거기에도 함정은 있습니다. 성령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대화를 나누어도 성령 안에서 할 때 사람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건강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처럼 우리가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해 '신약적 교회'로 은사를 회복하고 '초대교회적인 교회'로 사랑을 회복하고'개신(개혁)교적인 교회'로 믿음을 회복하면 됩니다.
시편51편 10~13에 다윗은 자신이 범죄함으로 잃었던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고 정직한 영을 부어달라고 기도합니다. 특별히 자신에게서 성신(성령)을 거두지 말 것을 탄원합니다. 자워하는 심령으로 전도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하고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자칫 성령의 탄식을 듣지 못하고 영에 민감하지 못하므로 주님의 일을 방해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항상 진실하게 주님 앞에서 서는 날까지 내 손에 든 검을 놓지 말고 말씀으로 이기고 기도로 이기고 승리하시는 선교사들이 되었으면 하고 글을 드립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