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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1593)에 명 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행인사 행인(行人司 行人) 사헌(司憲)에게 백관을 대표하여 정문으로 서애 유성룡이 작성한 글입니다.
서애집 9권에 실려 있습니다. 유성룡의 글인데 역문을 먼저 본문을 뒤에 싣고 송강 정철 관련 부분을 3항으로 적었습니다,
정문 역문
백관(百官)이 사천사(司天使) 헌(憲) 에게 올리는 진정문(陳情文) 계사년(1593, 선조26) 겨울
조선국 배신 원임 의정부 영의정 정철(鄭澈) 등은 삼가 진정하는 글을 올립니다.
삼가 살피건데, 우리나라가 복이 없어서 이러한 변란을 당하자, 성명(聖明)하신 천자께서 크게 노하셔서 흉악한 무리들을 죽여 위난(危難)에서 건져 주시니, 저희 백성들은 도탄에서 벗어나고 종묘사직은 다시 완전히 보전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고, 그 공덕은 지난 역사보다 더 높으며 덕의(德意)의 두터움이 천지에 가득하니, 우리나라 군신들이 몸을 갈고 뼈가 가루가 되어도 갚을 수 없습니다.
또한 노야(老爺) 태좌(台座 재상)께서 천자의 밝으신 명령을 받드시어 전화를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느슨함을 경계하고 타이르시며 우리나라를 위해 선후책(善後策)을 도모하려 하시며 화색을 띠시고 웃음지으시니,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고 편안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덕성스러운 모습과 지극하신 가르치심을 우러러보고 듣고서야 시원하게 되살아난 듯합니다. 다시 절박한 사정을 구구하게 때맞추어 사명을 띠고 계신 앞에 부지런히 여쭈어서 하늘의 태양처럼 밝으신 천자께 알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옵건데 노야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잘 살펴 주십시오.
우리나라 사정을 더듬어 보면 앞서 신묘년(1591, 선조24) 여름에 일본 괴수가 요승(妖僧) 현소(玄蘇)를 보내서 변장의 관문을 찾아와 편지를 전했는데, 그 말씨가 몹시 거슬려 우리나라를 협박하여 자기들을 따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이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골치를 앓으며 반드시 적의 변란이 있으리라 여겨 바로 사신을 북경에 급히 보내어 아뢰었습니다. 또한 순찰사 김수(金睟)를 경상도, 이광(李洸)을 전라도, 윤선각(尹先覺)을 충청도, 순변사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경기도와 황해도에 나누어 보내어 군정(軍丁)들을 점검하고 병기를 만들며, 성지(城池)를 고치고 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상도는 전에 적의 침입을 받았던 곳이므로, 부산, 동래, 밀양, 김해, 다대포, 창원, 함안 등의 성을 증축하고 참호를 깊이 팠습니다. 그 내지로 성이 없는 곳인 대구부ㆍ청도군ㆍ성주목ㆍ삼가현ㆍ영천군ㆍ경산현ㆍ하양현ㆍ안동부ㆍ상주목 같은 데는 모두 백성들을 징발해서 성을 쌓게 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이 편안한 데 빠져 게을러질까 염려하여, 국왕은 근신, 승지 등의 관원을 계속해 보내 시찰하여 따지며 독촉하고 그 가운데서 잘못하고 게을러 기회로 놓친 자는 정도에 따라 벌을 주었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25) 3월에는 부산 첨사 정발(鄭撥)이 “대마도 괴수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와서 포구에 정박하고 첨사에게 편지를 보내 길을 빌린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말을 듣고 놀랍고도 분해서 그 편지를 되돌려 보내고, 변방 관원에게 신칙하여 국경 밖으로 몰아내어 머물러 대기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의지(義智)는 부산포ㆍ해도ㆍ절영도로 며칠 동안 배를 되돌려 정박했다가 성이 나서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4월 13일에 적이 변경을 쳐들어왔습니다.
부산이 함락되자 첨사 정발이 힘써 싸우다가 죽었고, 다음날에 동래가 또 함락되자 부사 송상현(宋象賢), 교수(敎授) 노개방(盧蓋邦),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 이하 장수 군민(軍民)들의 죽은 이가 수만 여 명이었습니다. 밀양 부사 박진은 군사를 거느리고 양산과 밀양 사이에서 이어 싸웠으나 모두 패하여 밀양도 함락되었습니다. 이때 적병들은 대단히 날래어 이틀길을 하루에 걸으니, 민심이 놀라 동요하고 여러 진영들이 미처 서로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순변사 이일은 상주성 밖에서 맞아 싸웠으나 진을 치기도 전에 적군이 밀어닥쳐 조총으로 사면에서 공격하니, 군영이 무너졌습니다. 이일은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종사관 홍문관 교리 윤섬(尹暹)ㆍ수찬 박지(朴篪)ㆍ상주 판관 권길(權吉) 등이 모두 죽었습니다. 상주 백성들은 그곳에서 모여서 힘써 싸우며 한 사람도 투항하는 이가 없어 죽은 사람이 더욱 많았으니, 온 경내가 이렇게 부서졌습니다. 이일은 군졸을 수습하여 조령으로 물러나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이 순변사로 충주에 있다가 이일을 맞아 함께 충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방비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서 밤새워 조령을 넘어 곧바로 진격하여 성을 에워쌌습니다. 이에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고, 우리 군사들은 적에게 밀리어 모두 금탄강(金灘江)에 빠지니, 물이 이 때문에 흐르지 못했습니다. 충주는 서울의 상류에 있으므로 충주를 잃게 되면 서울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에 앞서 도성 사람들은 이일과 신립이 모두 많은 군사로 험한 목을 지키고 있다고 여겨 승전 소식을 날마다 바라고 있었는데, 패했다는 소식이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또한 도성 안의 정예 장정들은 앞서 신립ㆍ이일 및 여러 장수들이 뽑아가 버렸고, 각도의 원병도 미처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저희 임금은 형세가 벌써 다급해진 것을 아시고 왕자 및 재신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으로 군사를 모으게 하고 몸소 서쪽으로 피란하여 좀더 상국(上國) 땅 가까이 가서 천자의 조정에 정성을 다하여 은혜를 빌어 회복을 도모하였습니다. 비록 이것이 나라를 지키는 바른길은 아니지만 일의 경중을 헤아린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천지가 낳고 키워 주는 것과 같은 은혜를 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적의 변란이 있은 후 사정의 대강입니다.
지난해(1592, 선조25) 6월에 저희 임금께서 의주에 계시면서 군량미가 떨어져 군용에 댈 수 없을까 매일 근심하시어, 판중추부사 유성룡을 보내 이조 정랑 신경진(辛慶晉), 제용감 정 홍종록(洪宗祿) 등을 데리고 일로의 군량을 점검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ㆍ예조 참판 성수익(成守益)ㆍ동지중추부사 이노(李輅)ㆍ전성군(全城君) 이준(李準)을 잇달아 보내 각기 관할하는 역참에서 마초와 군량을 감독하고 독촉하도록 하였습니다.
금년(1593, 선조26) 정월 8일 명의 대군이 평양을 수복하자, 특히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을 보내 좌랑 김계현(金繼賢)ㆍ이자해(李自海)를 데리고 함께 종군하면서 군량과 마초를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박충간(朴忠侃)을 독촉해서 군량과 마초를 실어 보내는 일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분호조 판서 권징(權徵)을 보내 종사관 황치경(黃致敬)ㆍ권협(權悏), 중추부 경력 신암(申黯)을 데리고 강화의 교동으로 들어가 공사 간에 모아 둔 것을 모두 풀어서 군량을 보태고, 계속해서 충청도ㆍ전라도의 해로로 조운을 독려해서 끊임없이 개성으로 실어 나르도록 하였습니다. 다시 사간원 정언 황극중(黃克中)을 보내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조사하도록 하고, 또한 대신 의정부 우의정 유홍(兪泓)을 시켜서 모든 일을 총괄하고 밤낮없이 독촉하여 시각을 늦추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4월 20일 적군이 서울을 떠나자 그날로 대군이 입성하였고, 5월에 대군이 적군을 쫓아 남하하자, 호조 판서 이성중이 계속 대군을 따르며 군량을 관리했는데, 뜻밖에도 7월에 이성중이 함창에서 병으로 죽었습니다. 조도관(調度官) 흥문관 정자 윤경립(尹敬立)을 불러서 잠시 그 임무를 주관하게 하고, 국왕께 급히 아뢰어 바로 호조 참의 정광적(鄭光績)을 보내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 조도사(調度使) 강첨(姜籤)을 충청도, 검찰사(儉察使) 김찬(金瓚), 조도사 변이중(邊以中), 임발영(任發英) 등을 전라도로 나누어 보내 군량을 거두어 모으게 하였습니다. 이어 홍문관 교리 박홍로(朴弘老)를 보내 충청 전라의 수송을 독촉하고, 그 다음 절차는 경략(經略)의 비책을 받들어 온당하게 선후책(善後策)을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공조 참판 이노를 보내 공조 좌랑 최흡(崔洽)과 함께 요충지에 방어 시설을 설치하는 등의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그중에 군사를 훈련하는 한 가지 일은 제도 도순찰사 권율에게 맡기어서, 총병 유정 군영에서 삼도의 군민과 장정들을 모두 동원하여 병영에 가서 훈련을 받도록 했습니다. 다음에 의정부 좌의정 윤두수를 보내 총무를 맡아 모두 잘못을 저지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만 광해군은 지난해 변란 후로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시다가 감기가 들어 기혈이 상하여 오래도록 낫지 않아 잠시 해주에 머무르시어 의원을 찾아 치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어 성지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황공하고 감격하시어 병중이란 말을 못하시고 힘을 다해 급히 서울로 가셨고, 아침이나 저녁 사이에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십니다.
그 밖에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미약해서 한 번 미친 도적들에게 쫓기자 스스로 막지 못하고 명군들에게 노숙하는 괴로움을 끼친 지 벌써 1년이 됩니다. 번병으로서의 저희 소임을 거두지 못하고 거듭 성명하신 천자께 동쪽을 돌보시는 걱정을 끼치니 그 죄 벌써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나라로서는 이 적들에 대해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요, 만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사직을 무참히 짓밟았고, 우리 선왕의 능을 파헤치고, 우리 백성들을 도륙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잡아가고, 우리의 재물과 곡식을 다 없애 버렸습니다. 이 나라의 혈기 있는 이들은 절치부심하며 나가 적과 싸워 죽으려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물며 천자의 위력에 의지해서 후환을 막으려 하매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며, 어떠한 기회이기에, 또 어떤 마음으로 흥청흥청 늦장을 피우다가 스스로 멸망의 함정으로 달려가서 다시 살려 주는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그러나 하지 못하는 일은 다만 적을 물리치지 못한 것뿐입니다. 적을 물리치지 못한 까닭에 힘쓸 겨를이 없고, 힘쓸 겨를이 없으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백성을 모으고 훈련시켜 늦게나마 수습하려 하나 정말 스스로 해낼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가 밤낮으로 걱정하는 바입니다.
이제 적이 경상도에 남아 있는 곳은 울산의 서생포(西生浦), 동래ㆍ부산, 양산의 상룡당(上龍堂)ㆍ하룡당(下龍堂), 김해ㆍ웅천ㆍ창원이고, 바다로는 가덕(加德)ㆍ천성(天城)ㆍ거제의 영등포ㆍ장문포(場門浦)입니다.
우리나라의 용맹하고 정예로운 장병들이 전후해서 함안ㆍ진주 사이에서 힘껏 싸우다가 죽은 이는 무려 수만 여 명이지만, 적들은 경상좌우도 수백 리를 앞뒤로 잇대어 뻗어 가면서 번갈아 나타나 노략질했습니다. 다행히 명군이 대구와 경주에서 막고 있었으므로 울산의 적은 경주를, 동래의 적은 대구를 넘어 서북쪽으로 오지 못하였습니다. 본국의 여러 장수 이빈, 고언백, 홍계남, 선거이(宣居怡) 등도 범이나 표범이 산속에 있는 듯한 위세를 힘입어 패잔한 군졸들을 거두어 의령ㆍ울산ㆍ경주 사이에서 각기 지키면서 날마다 혈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거제에 있는 적군이 바다로 전라도 변경을 침범하기가 아주 쉬우므로 삼도 수군 장수 이순신ㆍ원균ㆍ이억기(李億麒) 등을 시켜 수군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한산도에서 지키게 하여 서쪽으로 쳐들어오는 길을 방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적을 방비하는 형세의 대강입니다.
그 외에 선발한 군졸은 다 총병 유정의 병영에 보내어 훈련을 받게 했으며, 군량을 나르고 거두는 일은 모두 전라도 한 도에 맡겨서 변통하게 했습니다. 비록 온갖 방법으로 조처하여 밤낮으로 독촉하였으나 길은 험하고 먼 데다가 사람의 힘은 지치기 쉬우므로 가끔 이어지지 않았지, 어찌 고의로 게으름을 피워 늦추었겠습니까. 협박을 받고 있는 백성들을 조처하여 이럴까 저럴까하는 망설임을 안정시키는 일은 더욱 오늘의 급한 일이므로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대대로 성주(聖主)가 동쪽을 돌보아 주시는 덕화를 입어 보살펴 주시는 가운데 조금은 편히 생업을 즐겨왔으며, 저희 임금께서는 번복(藩服)을 스스로 지키고 여러 정사에 힘쓰셔서 감히 위대한 척하시지도 않고, 사냥하는 즐거움도 끊으시며 편안히 유악(遊樂)에 빠지는 실수도 없으시니, 마음을 다하신 것은 첫째 대국을 섬기는 일이요, 둘째로 백성을 보살피는 일이셨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27년 동안에 백성들은 날마다 번창하고 농토는 날마다 개간되어 길에서 굶어 죽는 이가 없었습니다. 불행히도 갑자기 흉악한 칼날을 받아 오래도록 백 년 동안 넉넉하게 살던 세업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아, 차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려운 걱정 끝에 일이 혹 느슨해져 기회를 놓친 것은 정말 신자들이 잘 받들지 못한 죄이지, 저희 임금께서 애태우시고 뼈에 사무쳐서 국치를 설욕하려 하신 것이야 어찌 잠시인들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낮이나 밤이나 침식을 잊으시며 한결같이 부지런하시니, 천지 귀신이 함께 굽어보신 바가 오직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민심은 옛날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의사들은 망해 갈 때에 분기하여, 적이 서울을 함락한 뒤에 의분에 복받치는 눈물을 머금고 제각기 의병을 불러 모아 부흥을 꾀한 일은 곳곳에서 일어나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힘을 다해 싸우며 굽히지 않다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절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람도 많습니다. 예컨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첨지중추부사 고경명ㆍ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ㆍ거제 현령 김준민(金俊民)ㆍ충청 절도사 황진(黃進)ㆍ경상우도 절도사 최경회ㆍ원임 좌랑 조헌ㆍ원주 목사 김제갑(金悌甲)ㆍ회양 부사(淮陽府使) 김연광(金鍊光)ㆍ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ㆍ판관 성수경(成守慶)ㆍ옥천 군수 권희인(權希仁)ㆍ의승장(義僧將) 영규(靈奎)ㆍ해미 현감 정명세(鄭名世)ㆍ경상우도 절도사 유숭인(柳崇仁)ㆍ절도사 김시민(金時敏)ㆍ동래 부사 송상현ㆍ첨지중추부사 유극량(劉克良)ㆍ상운 찰방(祥雲察訪) 남정유(南廷蕤)ㆍ보령 현감 이의정(李義精) 같은 이는 고립된 성을 지키거나 적의 보루를 쳐들어가다가 몸이 칼날에 문드러져도 욕되게 살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적들이 우리나라에 머문 지 두 해가 되었지만, 실로 지방 수령이나 세족 집안 선비는 한 사람도 몸을 더럽혀 투항한 자가 없었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이나 비렁뱅이와 천한 종들이라도 한번 붙잡히면 빠져나올 수 없는데도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으면 급히 도망쳐 왔습니다.
서울에 사는 백성들은 적군이 들어온 뒤로 칼을 갈면서 날마다 지방의 병사들을 기다려 내응하려 하였습니다. 적들은 끝내 자기들을 위해 쓸 수 없음을 알고 정월 24일에 거짓말을 꾸며 마구 죽여서 성안에 가득하게 피가 흘렀습니다.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ㆍ황해도ㆍ평안도 백성들은 안으로 조세를 바치고 밖으로는 전투에 종사하여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뼈를 부수어 불을 때는 극에 달한 곤궁과 재난을 당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 명령이 내려지면 길거리로 기어 나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고 지고 따르면서 조금도 원망함이 없었으니, 민심의 소재도 알겠거니와 나라를 부흥하는 근본이 여기 있지 않겠습니까.
걱정은 태평스러운 지가 이미 오래되어 기율은 해이해졌고 무기는 무디어졌으며 군졸은 단련되지 못하고 장수는 그 재목이 아니어서, 어지러운 변란이 갑자기 눈앞에 다다라 어찌할 겨를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천자의 위엄이 떨치자 추악한 무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바닷가로 도망쳐서 머뭇거리며 들락날락하니, 비록 음흉한 꾀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대세는 이미 꺾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좀 더 얼마 동안 망하지 않고 지탱하여 병졸들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모아 최후의 효과를 도모한다면 진실로 더 없는 큰 다행이겠습니다.
또 바라옵건대, 천조는 이 대은을 마무리하여 멀리 천자의 위엄과 덕을 펴서 졸졸 흐르는 작은 물이 산을 덮고 언덕을 올라가서 하늘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옛사람의 말에 “의견을 묻는 것이 사신의 큰 임무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비옵건대, 노야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낱낱이 조정에 알리시어 우리나라가 죄를 면하고, 바다 위에 있는 요사스러운 기운을 깨끗이 씻어 삼한(三韓) 수천 리에 사는 백성들에게 길이 구제해 주시는 은택을 입게 하시면 어찌 다행스럽고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번거로운 말씀을 줄이지 못하고 존위(尊威)를 욕되게 하니 거듭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C-001]사 천사(司天使) :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1593)에 명 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사헌(司憲)을 가리킨다.
[주D-001]자식을 …… 때는 : 곤궁과 재난이 극도에 다다름을 뜻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15년에, 초(楚) 나라가 송(宋) 나라를 포위하여 오래 머무를 뜻을 보이자, 화원(華元)이 밤에 초 나라 진중에 가서 자반(子反)에게 자기 임금의 뜻이라 하면서 “우리나라는 지금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해골을 쪼개어 불을 때는 형편이나 성하지맹(城下之盟)은 따르지 못한다.” 하였다.
[주D-002]물이 …… 올라가서 : 작은 일을 처리하지 않고 두어 큰 재난이 됨을 비유한 말이다. 《서경》 요전(堯典)에 “넘실거리는 홍수가 널리 해를 끼쳐 산을 덮고 언덕에 오른다.[湯湯洪水方割蕩蕩懷山襄陵]” 하였다.
2. 정문 원문 서애집 9권
呈文
百官呈 司天使 憲 陳情文 癸巳冬
朝鮮國陪臣原任議政府領議政鄭澈等。謹呈爲陳情事。竊照小邦不祿。遭此禍變。欽惟聖天子赫然震怒。討誅兇醜。拯濟危困。小邦生靈。免於塗炭。而宗廟社稷。更得完保。斯固事絶前聞。功隆往牒。而德意之厚。際天塞地。非小邦君臣糜身粉骨。所能報稱。卽又老爺台座。奉承天子明命。慰撫瘡殘。戒勅疎緩。欲爲小邦謀善後之圖。載色載笑。莫非出於終始全安之意。小邦之人。傾瞻德範。仰聆至敎。洒然如獲再生。不得不更以區區悶迫之情。及時奔走。徹聞於諮諏之聽。以求導達於天日之明。伏乞老爺哀憐照察焉。謹査小邦。前於辛卯夏。日本賊酋遣妖僧玄蘇。來叩邊門投書。其言絶悖。䝱小邦以從己。小邦君臣。爲之痛心疾首。知必有賊變。卽差使臣馳奏京師。又分差巡察使金晬于慶尙道。李洸于全羅道。尹先覺于忠淸道。巡邊使申砬,李鎰于京畿,黃海道。點閱軍丁。修造軍器。繕築城池。又以慶尙道前所受敵之地。增築釜山,東萊,密陽,金海,多大浦,昌原,咸安等城。鑿深壕塹。其內地無城處。如大丘府淸道郡星州牧三嘉縣永川郡慶山縣河陽縣安東府尙州牧。悉發民築城。又慮人情狃安怠慢。國王連發近臣承旨等官。閱視催督。其違慢失機者。以輕重行罰。至壬辰三月。釜山僉使鄭撥飛報。對馬島酋平義智船來泊浦口。投書僉使。有借道等語。小邦聞之。益駭且憤。斥還其書。而飭邊吏驅出境上。不許容留等候。義智回泊釜山浦海島絶影島數日。怏怏而去。旣而四月十三日而賊已犯境矣。釜山陷。僉使鄭撥力戰而死。翌日東萊又陷。府使宋象賢,敎授盧盖邦,梁山郡守趙英珪以下。將官軍民死者數萬餘人。密陽府使朴晉。率軍連戰於梁山,密陽之間。皆敗。密陽又陷。時賊兵銳甚。倍途兼行。人心駭動。列鎭不及相援。巡邊使李鎰迎戰於尙州城外。未及布陣。而賊奄至。以鳥銃四面衝之。軍潰。鎰僅以身免。從事官弘文校理尹暹,修撰朴篪,尙州判官權吉等皆死之。尙州民所在相聚力戰。無一投降者。死者尤多。闔境爲之殘破。鎰收卒欲退保鳥嶺。有申砬以巡邊使在忠州。邀鎰共守忠州。賊詗知無備。連夜踰嶺。徑進圍城。砬出戰敗死。我軍爲賊所擠。悉赴金灘。江水爲之不流。忠州在京都上流。忠州已失。則京城不可守矣。先是都人。以李鎰,申砬皆以重兵扼險。日望捷音。而敗報奄至。且城中精壯。先爲申砬,李鎰及諸將官抄領帶去。諸道援兵亦未及召聚。於是。寡君知事勢已急。分遣王子及宰臣。召募四方。身自西遷。欲稍近上國地方。得投誠乞恩於天子之庭。以圖恢復。雖非守國之經道。亦揆事之權宜也。而果蒙天地生成之恩。得有今日。此賊變以來事情梗槩也。前年六月。寡君在義州。日憂糧餉匱乏。不足以接濟軍興。差判中樞府事柳成龍。帶同吏曹正郞辛慶晉,濟用監正洪宗祿等。點閱一路糧餉。又連遣商山君朴忠侃,禮曹參判成守益,同知中樞府事李輅,全城君李準。各在管領驛站。董草催糧。今年正月初八日。大軍克平壤。又專差戶曹判書李誠中。率佐郞金繼賢,李自海隨軍一行。句當糧草。又催朴忠侃。仍應管察轉運。又差分戶曹判書權徵。帶同從事官黃致敬,權悏,中樞府經歷申黯。入江華喬桐。盡發公私藏蓄。添補軍餉。仍督忠淸,全羅海路漕運。陸續輸到開城。又遣司諫院正言黃克中。按視勤慢。又令大臣議政府右議政兪泓。總督諸務。並晝夜催儹。不許時刻稽緩。四月廿日。賊離都城。其日大軍入城。五月。大軍追賊南下。戶曹判書李誠中仍隨大軍管糧。不期七月。誠中在咸昌病故。召調度官弘文正字尹敬立。暫管其任。馳啓國王。卽遣本曹參議鄭光績往代。又分遣吏曹判書李山甫,調度使姜韱于忠淸道。檢察使金瓚,調度使邊以中,任發英等于全羅道。搜括軍糧。續遣弘文館校理朴弘老。催督兩道轉輸去後。節次承奉經略秘計。料理善後事宜。速遣工曹參判李輅,同佐郞崔洽。句當設險等事。其中操練軍兵一款。已委諸道都巡察使權慄。在劉總兵營下。悉發三道民丁軍壯。赴營聽調。又遣議政府左議政尹斗壽提總。竝不敢違慢。只有光海君自前年變後。跋涉山川。蒙犯霧露。致傷榮衛。久不痊可。未免暫留海州。尋醫下藥。繼聞有聖旨。惶恐感激。不敢言病。已力疾赴都。朝夕南下外。因竊伏念小邦微弱。一爲狂寇所乘。不能自振。勞王師暴露。已浹一年。藩屛之任不效。重貽聖天子東顧之憂。罪已無所逃矣。第以小邦於此賊。有不共戴天之讎。萬世必報之怨。旣殘夷我社稷。發掘我丘壠。屠戮我生靈。係累我子女。蕩盡我財穀。邦域之內。凡有血氣之倫。莫不腐心切齒。欲前死於賊。况倚仗天威。圖毖後患。是何等大事。何等機會。亦何心而泄泄寬縱。以自趨於覆亡之域。辜負再造之恩哉。然而未能者。特以賊未退耳。賊未退。故力未暇。力未暇。故事不逮。雖欲生聚訓鍊。以收桑楡。而顧未能自振。此小邦之日夜所憫也。今賊之在慶尙道者。蔚山之西生浦也。東萊也。釜山也。梁山之上下龍堂也。金海也。熊川也。昌原也。海中則加德天城也。巨濟之永登浦也。塲門浦也。小邦猛將精兵。前後力戰。而死於咸安,晉州之間者。無慮數萬餘人。賊首尾連亘於左右道數百里。迭出搶掠。猶幸天兵壓臨於大丘,慶州。故蔚山之052_180b賊不得踰慶州。東萊之賊不得踰大丘而西北。本國諸將李薲,高彦伯,洪季男,宣居怡等。亦得藉虎豹在山之威。收拾零殘之卒。分頭把截於宜寧,蔚,慶之間。逐日血戰。又以巨濟之賊。水犯全羅之境甚易。故令三道舟師將李舜臣,元均,李億麒等。領水軍萬餘。把截於閑山島。以備西犯之路。此小邦今日備賊形勢大槩。而其他調發之軍。悉赴總兵營下。聽候訓鍊。至於糧運所出。則皆倚辦於全羅一道。雖百計措置。晝夜催督。而道旣險遠。人力易竭。往往不敷。豈敢故行怠緩。若夫計處被䝱之人。以安反側。尤係今日急務。不容少忽。且念小邦人民。世被聖主東顧之化。稍安耕鑿於覆燾之中。寡君自守藩服。憂勤庶政。不敢滿假。絶遊畋弋獵之娛。無宴安流連之失。其所盡心者。一則事大。二則恤民。以此二十七年之間。生齒日繁。田野日闢。道無餓莩。不幸猝被兇鋒。百年殷庶之業。一敗塗地。嗚呼。尙忍言哉。艱虞之後。事或疎緩。未及期會。此實臣子不能奉承之罪。寡君之所以焦心切骨圖雪國恥者。曷嘗斯須忘哉。日不遑食。夜不設枕。一念惓惓。天地鬼神。所共監臨。惟其如此。故民心切於思舊。義士奮於垂亡。自賊陷都城之後。慷慨飮泣。各自呼聚。以圖興復者。在在蜂起。不可殫記。往往力戰不屈。以身殉國。節義表著者。亦多有之。如倡義使金千鎰,僉知中樞府事高敬命,金海府使李宗仁,巨濟縣令金俊民,忠淸節度使黃進,慶尙右道節度使崔慶會,原任佐郞趙憲,原州牧使,金悌甲,淮陽府使金鍊光,晉州牧使徐禮元,判官成守慶,沃川郡守權希仁,義僧將靈奎,海美縣監鄭名世,慶尙右道節度使柳崇仁,節度使金時敏,東萊府使宋象賢,僉知中樞府事劉克良,祥雲察訪南廷蕤,保寧縣監李義精等。或捍禦孤城。或衝犯賊壘。糜身鋒刃。而不思偸生。賊在小邦。今已二年。而實無一介守土之臣。世族之士。汚身迎降者。雖無知愚民。庸丐賤隷。一時爲其係累。不能自拔。而少有間隙。旋卽逃還。京都之民。自賊入城。莫不淬礪刀劍。日望外兵。以圖內應。賊知其終不爲己用。乃於正月廿四日。設詐屠殺。滿城流血。至於慶尙,全羅,忠淸
黃海,平安之民。內供調度。外事征役。易子折骸之困。無不備有。而一聞命下。匍匐道路。老少男婦。負戴追隨。而少無怨咨。民心所在。亦可見矣。而興邦之本。其不在玆乎。所患昇平旣久。以言其紀律則解弛。以言其器械則不利。以言其軍卒則未鍊。以言其將帥則非材。搶攘之變。驟到目前。而不遑於措手足耳目。今天威已震。醜類禠魄。退遁沿海。徘徊前卻。雖其兇謀有難測度。而大勢已挫矣。少邦若稍假日月支撑不亡。得鍊兵聚糧。以圖後效。固萬萬大幸。亦望天朝畢此大恩。而遠布威靈。勿使涓涓之微。又至於懷襄而已。古人云。諮訪。使臣之大務。伏乞老爺將此事情。一一轉報朝廷。使小邦得免罪戾。而海上妖氛。一擧廓淸。三韓數千里生靈。永被拯濟之澤。豈不幸哉。豈不快哉。辭煩不殺。冒瀆尊威。死罪死罪。
3. 계사년 1593년 2월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준 것에 감사의 표시로 송강 정철이 사은사로 명나라로 출발하여 11월에 돌아와 回啓회계 하였다.
정철은 사신으로 출발하여 중간에 정황을 보고하였고 9월에 명의 병부상서 석성에게 조선의 전황을 보고하면서 왜적이 서생포 등에 잔류하고 있음을 말하였고 당시 상황은 떠나 온지가 오래되어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이런 내용도 회계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산해 유성룡 등이 명에 가서 원병이 필요없는 것처럼 말하였다고 하자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 당하여 강화 송정촌으로 우거하였습니다. 그런대 바로 이 시기에 명의 사신 司憲이 오자 呈文을 바치면서 “ 원임 영의정 정철” 운운한 유성룡의 저의는 무었일까요?
당시 영의정 이산해는 명망이 없으니 끌어 대기 싫었을까? 백관을 대표한
송강이 명나라에 화전을 주청하였다고 파직케 하고 명나라 사신에게는 송강을 앞세워 글을 작성한 유성룡의 이중성(교활하다고 하여야 할까?)이 징비록 화면과 겁처 떠오르는 것은 어찌 그런 것인지 알 수 없군요? 변명만 되풀이하고 구체적 협조 요구사항이 없는 이 글이 갖는 의미는 무었일까요?
또한 징비록에서는 진주성 2차싸움(1593.6월)에 패전의 책임이 모두 창의사 김천일이라고 폄하해놓고 명나라에 대하서는 절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신하라고하며 또 그싸움에서 제목을 다하지 못하여 진주의 창렬사등의 배향인물에 끼지도 못한 서례원을 공적인 정문에 올려 군공이 있는 듯 사사로히 함은
그의 심중을 헤아릴 만 합니다.
관련 내용( 송강 년보) 계사년조
前略
九月初十日。臣以界碑事進兵部。石尙書問曰。你來時賊在何處。答曰。尙在釜山等處。又問你何時起身。答曰。五月。曰。然則你國九月消息。必不得知。吾當說與。近接海上將官印信塘報。說稱賊盡渡海。只有平行長一陣。留在西生浦云。西生浦原你國土疆乎。臣等備陳西生浦所在及賊謀叵測之狀。又問曰。今欲留兵五千。與你國協同防守。未知何如。答曰。賊盡歸巢之後。則一萬兵猶可也。倭奴變詐萬端。非一萬六千則不可也。試擧臣兵部呈文一二條言之。有曰。下歸之賊。屯聚於釜山,東萊之間。益造房屋。安下營寨。又曰。賊旣以釜山東萊一帶。爲伊土地。又要侵奪全羅等道。許多辭說。無非兇賊屯據恣肆之狀。則賊退之說。何暇出諸口乎。且尙書旣據經理所報。謂爲賊退。繫是九月以後之事。則臣在萬里已久。 後略
첫댓글 당시 호남이 국가지 보장이 된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성룡의 글입니다.
송강을 화의의 주법으로 국내에서는 탄핵하고 중국에서 대고는 송강을 팔아 글을 올리는 서애의 모습이 가소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