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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의 정신사와 불교사
우리는 불교라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하는 것이 불교사죠. 그러나 불교라는 관점에서는 불교사를 볼 수 없다는 게 또 문제가 됩니다. 즉 중국 전체의 정신사라는 면에서 불교가 어떻게 작용해왔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불교사인데, 불교사가 아닌 이것은 중국불교사이니까요. 중국역사의 한 범주이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불교사를 보면서 자꾸 불교를 독립시켜서 보려는 경향 때문에 중국역사와 동떨어진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가. “천강”과 “북화엄”
여하튼 중국불교는 처음부터 말씀 드린 대로 남천태가 되고 북화엄이 될 때, 이때부터 이미 남천태는 일종의 그 외부에 있어서 ‘음양신’, ‘일월신’ 또는 ‘명주’ 개념이 이미 있었고요. 북화엄에는 이미 천강 개념이 있었습니다.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천강의 이름이 엄청나게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로 천강이라고 하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천강이라는 말보다는 칠성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죠. 그리고 한국이 만약에 정도전을 앞세워가지고, 최영장군을 앞세워가지고 중국을 먹었다면 한국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는데 ‘八星’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죠.
칠성은 ‘七聖’으로 쓰기도 하지요. ‘팔성’뿐만 아니라 요즘은 ‘聖’으로 쓰는 데가 더 많아요. 절에는 별 星자 쓰는 데보다는, 별 성자 쓰는 데는 이름없는, 대물림 하는데 쓰고, 약간 그래도 아는 척 하는 데는 ‘聖’자 썼어요. ‘星’자를 쓰면 너무 미신적으로 보이잖아요. 그 다음에 또 하나 오는 것이, ‘大雄’, 聖人이란 개념이 있잖아요. ‘大聖’ 개념이 있는데, 여기다가 무얼 붙이느냐, 북방의 함경도 쪽에 있다고 합니다. ‘天地大聖’, 그리고 이것이 함경도 이외의 지역에 오면, 이름이 어떻게 바뀌느냐? 중국에서는 ‘大聖殿’이 있습니다. ‘天地大聖殿’도 있고 많습니다. 이것까지가 중국에서 이렇게 쓰고, 한국에 일부도 그렇고, 한국 전체에서는 ‘칠성’으로 쓰고, 만주족은 ‘팔성’을 쓰고, 그 다음에 한국과 관련된 일부 및 만주 일부에서는 무어라고 쓰느냐? 이것이 ‘大雄’입니다. 이 ‘大雄殿’이 왜 나옵니까? 불교에 도대체 大雄이 왜 나옵니까? 나올 이유가 없지요. 大雄이란 걸 잊어버리고, ‘대웅’이란 말만 갖고 ‘석가모니’와 연결시키려고 하면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대웅전이라 붙여놓고 나서는 버젓이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거든요. 이게 묘하지 않습니까?
이게 실제로 ‘북화엄’이예요. 이 ‘북화엄’이 더 복잡하게 발전되어가고, 그때마다 교리가 달라져가는 것은 ‘한국’과 묶어서 다음 번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외에 이것이 나중에 가다, 한국에 오면 함경도, 평안도 일부에 있던 ‘대성’ 개념이 싹 쪼개져서, 이 ‘대성’개념은 중국에서 많이 쓰고요. 한국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대웅’은 크게 말하면 ‘일웅’ 아닙니까? ‘도고다이’, 일웅이잖아요. 요거는 딱 구분해 가지고, ‘삼신’ ‘삼성’ 이렇게 돼버립니다. 그래서 ‘일웅’은 왕초니까, ‘殿’이고, ‘삼신’, ‘삼성’은 왕초가 아니니까, ‘閣’입니다. 임금이 있으면 ‘전’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삼신각’, ‘삼성각’이거든요. 삼신각, 삼성각에 딱 들어가 봤더니, 뭐가 있느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그려져 있는 거예요. 아니면 웬 할머니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다 심지어 삼신각에 들어가 봤더니, 할머니뿐만 아니라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거나, 어떤 때는 쪽배를 타고 있는 할머니가 있거나, 약수를 뜨고 있는 할머니가 있거나……
이러는가 하면 심지어 그 뒤에 뭐라고 써놨느냐 하면, “ㅇㅇ山 神靈 地位” 이렇게 써 놨거든요. 또는 “ㅇㅇ山 神靈” 하고 좀 더 유식하게 붙여가지고 “下鑑地位”라고 써놨거든요. ‘鑑’자는 물론 ‘내려다본다’는 것이죠. 이것을 보다가 ‘증산도’를 보면 딱 기억이 나지요. “증산상제 하감지위”라는 게 있지요. 서로 다를 게 뭐 있습니까? 실제 원불교도 그런 게 있었습니다.
원불교에 ‘四恩’이 있잖습니까. 네 가지 은혜인데요.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이 있단 말이지요. 이것을 전부 다 은혜로 본다면, 천지는 하감이고, 부모도 하감, 동포는 옆에서 보는 것이고, 원래 교전에는 ‘천지은’과 ‘부모은’은 같은 계열로 보는 것으로, 이것은 ‘하감지은’이예요. 이런 표현 ‘내려다보신다’ ‘보살펴주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원래 불교에 석가모니께서 ‘일러주신다’ ‘가르쳐주신다’ ‘일깨워주신다’ 이지 ‘보살펴주신다’는 없어요. ‘보살펴주신다’는 개념이 나타나는 것이 천강에서 온 것이에요. 천강을 타고 중국으로 내려가거나 이곳으로 오거나 해서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본토 중국보다는 이게 중국에 전해주었던 원 북방계에 더 강하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면 뭐가 됩니까? 대웅전이 있는 절도 있고, 대웅전이 없으면 저가 조상을 모시고서 더 노골적으로 ‘天地大神’, ‘천지대신’ 해서 조금 이상해지니까 1940년에는 싹 바꿔가지고 ‘天照大神’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이 ‘天照’는 나중에 일본 서기를 조작하면서 ‘天智’하면서 천황 이름을 싹 바꿔버립니다. ‘천지텐노’라는 만들어낸 가상의 천황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했는데 사실은 이것이 대웅전과 똑 같은 거예요. 그러면 한국에는 애초에, 중국도 그렇고, 한국의 초기에 대웅전에 뭐가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은 석가모니 本殿이죠. 처음에 있던 것은 석가모니 본전이 아니에요. ‘天罡本殿’이에요. ‘천강본전’하고서 찜찜하잖아요. 그래서 ‘천강’보다 앞에 세울 수 있는, 북방에 오면서 보살로 만들어놓은 대보살 ‘문수보살’을, ‘문수보살’을 동쪽이기도 해서 ‘靑光菩薩’이라 하고, 그러다 이 보살님이 석가모니를 모셔가지고 양립을 해요. 두 개가 나란히 모셔져요. 관음보살까지 들어와 있었어요. 딱 밀려가지고 A에서 B로 밀렸죠. 밀렸는데 관음보살이 다시 독립해 나가기도 하고 아미타불이 독립해 나가기도 하고, 문수뿔은 독립 안하고 대웅전을 계속 지키고 있어요. 왜냐하면 원래 이 사람이 주인이거든요. 잠깐 여기는 어른이라고 모셔주고 있는 거지, 문수가 모시고 있는 분이지, 원래 대웅전의 주인은 문수입니다.
‘大雄’의 개념은 ‘석가모니’가 아니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대웅이 석가모니로 우리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실제로는 문수보살이 대웅전의 임금입니다. 임금이 선생으로 모시고 있는 거죠. 그렇게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북방계에 뭐가 만들어졌느냐? 華嚴이란게 교종이잖아요. 북화엄이 교종인데, 이 교종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다른 것이 없고, 원래는 교종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화엄이 오기 전까지는 부처님은 직접 인신불로써 만들어가지고 앞에 놓고 모시지 않았거든요. 부처님 진신사리를 놓고 모시거나 경전을 놓고 모시고 그랬지. 남쪽에선 진신사리를 놓고 모시고 북쪽에선 주로 경전을 놓고 모시거나, 아니면 교당에 그림을 그려놓고 잠시 예배를 본 다음에 그림을 접고 또 수련을 했단 말이죠.
그런데 대웅이란 분은 원래 조상신이고, 원래 신 모양의 우상이 딱 갖추어져 있잖아요. 석가모니께서는 마침내 금빛 찬란한 옷을 입으신 거예요. 옷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없었던 옷이 중국에서 옷을 입었어요. 옷을 입었는데 이 옷이 인도에서 보니 그럴 싸하거든요. 인도에서 왜 석가모니교가 성공하지 못하고 힌두교에 밀렸느냐? 브라만의 재무장인 힌두교에 밀렸느냐? 우상숭배가 없어 밀린 거예요. 우상숭배가 만일 중국에서 먼저 안 생기고 인도에서 생겼더라면 500년 후에 힌두교에 교리에서 밀릴 까닭이 없죠.
브라만의 우상을 되살린 힌두교의 우상보다는 석가모니라는 우상을 모셨더라면 엄청 빨리 성장했겠죠. 그런데 인도에서는 곧이곧대로 뭐든지, 만들어진 데서는 착하게 다하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지켜졌어요. 중국에 오니까 얼토당토 않게 돼버려요. 이 조상신 옆에 가면서 똑 같은 금불옷을 입은 화려한 우상이 되고, 그래서 여기에 있는 조상신이 어떤 얼굴인가에 따라 이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의 얼굴이 계속 바뀌어지는 거예요. 시대마다 나라마다 모시는 인종들마다 바뀌는 거예요. 약간 키 작은 분들이 모시면 키가 작게 되고, 키가 큰 사람한테 가면 얼굴이 길쭉하게 되고 다 바뀌시는 거죠. 고려시대 가면 고려시대 보살이 달라지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만약에 이것이 이런 대웅전에 모셔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철저한 ‘부처님 木像’ 해가지고 부처님의 진영이 있었다면 그림으로 그려가지고 그림으로 모시는 습성이 있었다면, 이 진영이 있었다면 시대마다 다르게 만들 수 없죠. 표준 부처님 얼굴이 있게 마련이죠. 근데 이것이 없어지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불가사의가 어디에서 왔느냐? 이게 북방계에서 온 것입니다. 이게 북방 불교의 역사예요. 중국 불교의 역사이고요.
둔황보살 보십시오. 그거는 뭐 석가모니 진영하고는, 진영은 못 봤지만 아무리 북방계에서 온 분이라도 인도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띵띵한 부처님이 파워 좋게 배 딱 튀어나게 버티고 계시잖아요. 돈황 석불은 그러 거든요. 한꾸의 남조신라 때 불상들을 보면 우악스럽기 짝이 없잖아요. 당장 손바닥 갖고 패버릴 것 갖잖아요. 이때 이런 분이니까 갑자기 여기에 오심과 동시에 부하를 하나 더 만나셨어요.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부하들은 다 잃어버리셨어요. 가섭존자, 아난존자 다 잃어버리셨어요. 한국의 불교, 중국의 불교에는 옆에 하나도 뫼시지 않고 있어요. 옆에 아난존자 뫼시고 있는 데는 없잖아요. 그리고 가섭존자 뫼시고 있는데 없잖아요. 문수보살이 모시고 계시고 있어요.
그런데 문수보살의 부하로 있는 4대 신왕들, 인왕신등 사천문에 있는 신장들이 전부 다 갑자기 문수를 제자 삼음으로써, 제자의 부하들이 전부 다 자기 부하들이 된 거예요. 제자가 된 게 아니라 부하가 된 거예요. 그래서 문수를 모셔주던 사천왕이 갑자기 석가모니를 모셔주는 거예요. 이런 역전현상이 벌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것까지 다 바꾸면 한국에 불교가 없어요. 중국에도 불교가 없고, 그러면 불교라는 것은 만들어 왔어요. 이걸 아예 부정해버리면은요.
그러기 때문에 아까 독립시켜서 뭐라고 그러느냐, 진짜 남은 불교는 중국에서는 선종이 아니라, 선사상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전통’으로부터 떼버리고 나면 남은 것은 사상밖에 없습니다. ‘선종’이나 ‘선종교’는 없어요. 불교사를 이야기할 적에 만약 이 부분을 떼버리고 이야기한다면, 선사상만 남는 거고, 그리고 그렇지 않을 적에는 실제로 불교가 들어온 흔적은 없습니다. 불교는 들어와 다 녹아버린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걸 녹였을 때는 이걸 녹일 만큼의 天罡사상 속에도 사상적으로 부처님을 받아드릴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는 이야기죠. 근데 이 ‘천강사상’의 정체가 간 곳 없이 없어져버렸어요. 천강사상이 갖고 있었던 그 토대가 되었던 사상, 그러니까 이걸 받아들여 가지고 선생님으로 모실 정도로 정치적인, 정신적인, 사상적인 여유가 있었던 거죠.
나. “관념고증학”과 “후기고증학”
이 여유를 가졌던 천강사상에 해당되는 또는 남중국으로 말한다면 명교에 해당되는, 어디에도 다없이 사라져버린 거예요. 이 상황, 천태가 남중국으로 가서 어떤 영향을 행사했는가 하는 것은 중국학자들이 유감스럽게도 연구도 제대로 안 해놨어요. 왜냐하면 너무 일찍 잘라버렸기 때문에, 청나라 왕조가 서면서 청나라 왕조는 고증학 왕조인데요, 고증학을 왜 세웠느냐 하면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등장하면서 청나라가 가장 융성할 때인 건륭제, 가경제 때 와서 고증학을 일부러 국가에서 지원을 했어요.
이런 것 다 떼버리고 불교적 색채도 다 떼버리고, 완전히 자기들의, 다시 말해서 불교적 사상을 떼버린다는 것은 정확하게는 한족이 세웠던 명교를 잘라버리려는 것이죠. 명교는 전부 신앙덩어리이니까. 이 속에 불교가 다 들어가 있지요. 자기들은 고증학을 통해서 사상으로 정립할 수가 있죠. 그래서 청나라가 이걸 전부 다 제거하려고 고증학을 한편으로는 관영고증학을 합니다. 여기에 반대해서 생겨난 고증학도 있지요. 그것은 청말고증학이예요.
그것은 한족들이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이걸 이런 식으로 짓밟고 들어오니까, 거꾸로 자기들도 고증적으로 자기들 것을 살리려고 들어간 고증학이 있지요. 고증학도 달라요. 그래서 앞에 있었던 고증학을 보통 ‘수사학(水泗學)이라 해요. ‘수(水)’와 사(泗)’ 둘 다 물 이름이죠. 이 지역에서 생겼던 수사학이라 해서, 기마종족계 북방고증학을 ‘수사학’이라 하고,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은 이 고증학의 후예입니다.
후기 고증학은 한나라인들을 중심으로 고증학이 생겨서, 이 후기고증학이 이루어낸 세력이 누구냐 하면, 변법자강세력이예요. 양계초, 캉유웨이 소위 중국의 독립운동 세력이예요. 그렇게 연결이 됩니다. 그들에 의해서 중국의 학문이 형성이 됐는데, 묘하게도 이놈들은 명교를 짓밟는 것에 반대하면서 뿌리가 됐는데 이를 짓밟는 것에 대한 반항으로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뿌리를 내버리고 청나라가 망함과 동시에 ‘수사학’이 만들어놨던 전통으로 회귀해버리는 묘한 경향을 가지게 되요.
처음에는 이 수사학파에 대응하기 위해서 양계초류의 고증학이 형성되거든요. 양계초, 캉유웨이 등이 학문으로서 등장할 무렵에는 이 수사학에 대립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청나라가 망해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관념고증학을 이어받아 가지고 통합하면서 중국학이란 게 형성되는 거예요. 그것이 동양학이에요. 그것이 오늘날 동양학의 실체예요. 이외에 명교의 뿌리, 선사상, 그 다음 천태와 화엄으로 내려오는 이러한 사상들은 싹 사라지고 이것이 모든 중국학인 것처럼 돼가지고 중국은 오만해지는 거예요. 끝.
- 박현 강의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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